(왕하 17:24~33)
'이주한 각 민족들은 여호와를 경외했지만
그와 동시에 자기들이 원래 고향에서 가져온 관습에 따라
자기들의 신들도 섬겼습니다.' (33절)
앗수르 왕이 이스라엘을 복속시키고
이스라엘 백성을 다른 나라에 강제 이송시키고
또 다른 나라 백성을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오게 한다.
민족적 단합을 흐트리려는 전략이다.
그렇게 되니 이스라엘로 이주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종교를 들고 들어왔다.
하나님은 노여우셨고 몇 명을 사자를 통해 죽인다.
앗수르 왕은 그 일을 수습하기 위해
이스라엘 선지자 몇 명을 영입해서
이스라엘로 이주한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을 믿도록 유도한다.
그러나 그들을 완전하게 돌이키지 못함은 당연하다.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도 믿고, 각자의 신들이 범람하는
종교 혼합주의가 횡행하는 곳으로 변하였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지는 않지만
앗수르 왕은 하나님의 역사에 민감한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을 따르지 않으면서 조금은 순응하는 듯한 행동은 무엇일까?
일단은 우주에 존재하는 어떤 '신'을 감지해서가 아닐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종교성, 하나님을 찾을 만한 감각을
심어주셨다. 투명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접근하면
하나님을 찾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온갖 신을 받아들이게 된다.
앗수르 왕이 후자의 경우가 아닌가 싶다.
많은 신 중의 하나인 하나님. 그가 유일한 신은 아니지만
능력이 있으시니 잘못 보이면 골치 아프다는 생각.
이 신도 심기고, 저 신도 섬기도.
지금 우리 국가 지도자를 보는 듯하다.
이런 상황이 이스라엘에 오게 된 것은
급작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미 이스라엘 왕이면서도
앗수르에 굴복하기까지 대다수의 왕들이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이방신을 동시에 인정하거나
아예 하나님께 불손종하며 통치해왔다.
이스라엘은 이미 타락한 것이다.
앗수르가 점령한 것이 전혀 새로운 상황이 아니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아마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심판도 그러할 것이다.
갑자기 하나님이 맥락 없이 가, 부를 결정하는 과정이 아니라
그동안 각자의 인생에서 스스로 결정한 상황을
그저 드러내는 일이리라.
분명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안에 있던 이스라엘이었는데,
망해서 이방인의 국가의 통치 아래 있게 되었다.
충분한 개연성이 있는 상황이다.
한 때,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있다고 해서
이방인으로부터 어떤 영향도 받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오산이다.
필요한 과정이라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
조금이라도 궁극적으로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있다면
그 결과를 위해 금지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설마 우리나라가 기독교와 기독교인의 타락과 오도로 인해
그런 반절대적인 고통의 과정을 겪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한숨이 '푸우'
그러나 내 인간적인 감정의 요동, 한숨.
뭐 이런 것에 빠질 필요가 없다.
내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겪어야 할 과정은 겪어야 한다.
그저 이떤 시간 안에 놓여 있든지
그 시간 안에 주어진 영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전부이다.
그 한 영혼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바치다시피 감싼
귀한 영혼이기 때문이다.
우주에 그보다 가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오, 주여!
당신의 자녀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길 원한다면,
당신이 그것을 몸소 보여 줄 수밖에 없다. -게리 스몰리-
"하나님, 감사합니다. 은혜 따로 행실 따로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마음엔 욕망과 존재를 드러냄과 규모 있게 세우지 못하는 삶으로
가득 차 있는 부족한 영혼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면, 벌써 포기해도 몇 번을 포기했을 인간입니다.
저를 용서하시고, 돌이키게 해 주시옵소서.
악순환과 악화일로에만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을 행해,
선한 싸움을 싸우되 실망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어떤 것이 궁극적으로 좋은 것인지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승리의 결말로 이끄실 사실만 믿고 나아가게 해 주십시오.
양정환, 4번의 항암수술을 받기로 결정했습니다.
힘든 과정인데, 주님께서 뜻이 있으심을 믿습니다.
양소영, 간이 안 좋습니다. 갑상선이 안 좋습니다.
건강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좋은 컨디션으로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