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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민당 지역간부들이 통일교단 간부들
<아사히신문> 교단 보고서로 단독 보도
아베의 외조부 기시, 사사카와, 박정희
전후 일본 한국 현대사 만든 만주인맥
오래고 깊은 한일 우익 관계사의 단면
일본 검찰이 지난해 7월 아베 신조 전 총리를 총격 살해한 야마가미 데쓰야를 살인 및 총기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고 일본 공영방송 NHK가 13일 보도했다. 야마가미는 그간 조사에서 어머니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옛 통일교)에 고액을 헌금해 가정이 파산하자 원한을 품었고 통일교와 관련 있다고 생각한 아베 전 총리를 살해했다고 진술했다. 사진은 야마가미가 지난 10일 일본 서부 나라현의 한 경찰서로 들어가는 모습. [자료사진] 2023.01.13. AP교도 연합뉴스
지난해 7월 참의원선거를 앞두고 자파(세이와정책연구회=세이와카이淸和會, 아베파) 후보 지원유세에 나섰다가 변을 당한 아베 신조 전 일본총리 피살사건을 계기로 주목을 받았던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통칭 통일교) 관련 단체인 국제승공연합(이하 승공연합)이 일본 전국의 도도부현(都道府県)에 본부를 두고 있었고, 본부장을 자민당 지역의회 의원들이 맡거나 의원 자택을 본부로 사용하기도 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런 사실은 승공연합의 47개 도도부현 본부 수지보고서 가운데 지금 공개돼 있는 지난 3년간(2019, 2020, 2021년)의 보고서를 조사한 <아사히신문>의 4일 보도를 통해 확인됐다. 이에 따라 2차대전 이후 사실상 일당 장기집권을 계속해 온 일본 자민당과 통일교 및 승공연합의 깊고 오랜 관계가 다시 한 번 관심을 끌고 있다. 통일교 및 승공연합과 자민당의 관계는 통일교가 한국에서 창립돼 한일 그리고 미국에서 상당한 교세를 확보하고 한일 양국 정치에도 깊숙이 관여해 왔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자민당과 통일교에 얽힌 사연을 알면 한일관계가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다가올 수도 있다.
아베 신조 전 일본총리 살해 혐의로 기소된 야마가미 데쓰야가 지난 1월 10일 나라현의 한 경찰서로 들어가고 있다. 2022.1.10. AFP 연합뉴스
자민당 지역간부들이 통일교 승공연합 간부
이 신문에 따르면, 통일교의 역대 일본교회장 가운데 4명이 승공연합의 회장을 겸임했으며, 돗토리 현 요나고 시의 모리타니 쓰카사(71) 시의원이 승공연합 돗토리현 본부 대표를 맡고 있었다. 또 시가 현 야스 시의 도고 가쓰미(58) 시의원의 자택이 시가 현 승공연합 본부 사무소로 신고돼 있었고, 승공연합 야마나시 현 본부 대표가 약 100개에 이르는 자민당 야마나시 현 지부 가운데 한 곳의 회계책임을 맡고 있었다.
돗토리 현 공보를 통해 확인한 바에 따르면 모리타니 의원은 승공연합의 현 본부 대표를 2009년부터 10년 넘게 맡아 왔다.
아베 전 총리 피격 사망 뒤 자민당 소속 승공연합 관계자들은 당을 떠나거나 SNS를 폐쇄했지만, 2021년 4월 보궐선거에서 처음 당선된 모리타니 시의원은 그 뒤에도 대표직을 계속 맡고 있었다. 모리타니 의원은 통일교단이 추진해 온 ‘한일 터널 사업’과 ‘가정교육지원조례 제정’을 돗토리 현 차원에서 추진하는 유지회 사무국 일도 맡아 자민당 동료의원들을 관련 모임들에 초청했다. 통일교와의 관계나 탈당 경위에 대해 묻는 질문에 모리타니 의원은 “사상신조의 자유이므로 대답할 수 없다. (탈당과 파벌 이탈은) 일신상의 사정으로 결단했다”고 문서로 회답했다.
시가 현 야스 시의 도고 시의원 자택은 근처에 밭들이 펼쳐져 있는 한적한 곳에 있는데, 그 자택이 2010년부터 2021년 3월 말까지 승공연합 시가 현 본부 사무소로 쓰였다. 도고 의원은 승공연합 회원이 된 것은 “수십 년 전”이라고 했고, 시의원에는 2017년 10월에 처음 당선됐다고 말했다. 1993년부터 21년 봄까지 28년간 승공연합 현 본부의 회계를 담당했으며, 2010년부터는 사무소를 자택에 두고 있었다.
아베 전 총리 피살 뒤 도고 의원이 현 본부 간부였던 사실이 시의회에서 문제가 되자 지난해 8월 하순에 시의회 전원협의회가 열렸고, 도고 의원은 “신앙과 사상신조의 자유가 있다. 반사회세력이라고 단정한 비판은 인권침해가 될 수 있다”며 질의에 응하지 않았다.
2013년 2월 워싱턴의 전략국제문제연구소에서 연설하는 아베 신조 전 총리. 2013.2.22. AP 연합뉴스
자민당-통일교, 그 오래고 깊은 역사
통일교단은 6.25전쟁 휴전 다음해인 1954년 서울에서 문선명씨에 의해 설립됐다. 4년 뒤 일본에서 포교가 시작됐고, 1964년 7월에 종교법인으로 인증을 받았다. 일본 초대 회장은 불교계통의 단체 릿쇼고세이카이(立正佼成会)의 구보키 오사미라는 사람이 맡았다.
<아사히신문>이 지난해 사건 발생 뒤 추적 보도한 내용(2022년 8월 6일 기사 등)을 토대로 통일교와 자민당, 그리고 한국과의 깊고 오랜 관계를 다시 정리한다.
1964년 11월, 통일교단은 본부교회를 도쿄도 시부야 구로 옮겼다. 교단 관계자가 정리한 ‘일본 통일운동사’에 따르면, 본부교회는 아베 신조 전 통리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의 자택 바로 이웃에 있었고, 기시 정권 시절에 총리 관저였던 건물을 쓰고 있었다.
통일교의 교의는 전통적인 가정관이나 남녀 순결을 중시하고, 공산주의를 부정하는 강한 반공색을 지녔다. ‘공산주의를 이긴다’는 의미의 ‘승공(勝共)’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1968년에 교단의 우호단체인 정치조직 ‘국제승공연합’이 한국과 일본에 잇따라 창설됐다. 일본에서 명예회장을 맡은 이는 2차대전 전에 우익 정치가로 활동한 일본선박진흥회 회장 사사카와 료이치였다. 기시 노부스케는 사사카와와 함께 전후에 A급 전범으로 스가모 형무소에 수감된 적도 있어서 가깝게 지내면서 승공운동을 밀어 주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1일 오후 경북 구미시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를 찾아 참배하고 있다. 2023.2.1 연합뉴스
기시 노부스케-사사카와 료이치, 그리고 박정희
기시는 “만주국은 나의 작품”이라고 자랑했을 만큼 일제의 만주국 경영에 깊숙이 관여했다. 그가 만주국의 실력자인 총무청 차장으로 있을 때 관동군 헌병대 사령관이 나중에 전시내각을 꾸리는 도조 히데키였다. 기시는 그 뒤 도조 내각의 상공차관, 상공장관, 군수차관으로 전쟁을 지휘했고, 패전 뒤 A급 전범으로 스가모 형무소에 갇혔으나, 1948년 12월 23일 도조 등 7명의 A급 전범이 교수형을 당할 때 살아남아 바로 그 다음날 석방돼 총리(1957~60)까지 된다. 사사카와 역시 만주국 시절 마약과 무기거래 등으로 돈을 벌어 일본의 전쟁수행에 적극 협력한 A급 전범이었다. 이탈리아 파시스트 베니토 무솔리니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사사카와는 전후에 이른바 사사카와 재단(일본재단)을 만들어 미국, 한국의 싱크탱크들에 막대한 돈을 뿌리며 일본의 침략역사를 정당화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이들이 모두 일제가 세운 괴뢰국 만주국에서 기반을 다진 이른바 우익 ‘만주 인맥’의 원류라고 할 수 있다. 이 만주 인맥의 한 갈래가 대구사범을 나와 문경에서 소학교 훈장을 하다가 1939년에 만주 군관학교에 들어가 일제 관동군 산하 만주군 장교가 된 박정희다. 1961년에 박정희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10여 년째 돌파구가 보이지 않던 한일 국교를 1965년에 ‘정상화’시킨 데에는 이들 만주 인맥, 특히 기시 노부스케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강제동원 희생자들 배상 소송과 관련해 새롭게 주목받은 1965년의 ‘한일협정’ 배후에 그 만주 인맥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전후 일본의 자민당 장기집권 토대를 마련한 보수합동의 ‘55년 체제’를 만든 주역인 기시는 총리 재직 때 미일 안보조약을 개정했고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일본 정계의 막후 실력자로 한일 관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렇게 보면 일본뿐만 아니라 전후 한국 현대사의 흐름에도 만주 인맥은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그 기시와 사사카와, 그리고 박정희의 정치 및 한일 관계 이력에 통일교가 깊숙이 관련돼 있었다.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공동대표가 17일 도쿄 도라노몬홀에서 열린 '야스쿠니 신사 한국인 합사 취소 소송' 보고집회에서 이 소송이 자신의 인생을 건 싸움이라고 발언하고 있다. 2023.1.17. 연합뉴스
세이와카이(아베파)와 통일교
기시는 1970년대에 교단과 관련 단체 모임에 종종 참석했다. ‘운동사’에는 1973년에 기시가 교단을 방문했을 때 이런 인사말을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웃에 살고 있었습니다. 사사카와 군이 통일교회에 공감해서 운동 강화를 염원하면서 ‘자네 이웃에 와 있는 것은 내가 그늘에서나마 발전을 기대하고 있는 청년들이다’라고 하는 얘기를 듣고, 구보키 군의 얘기가 대단히 믿음직스럽다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구보키는 저서에서 “기시 선생이 친밀하게 대해 주신 것이 승공운동을 비약시키는 큰 계기가 됐다”고 회고했다.
승공연합 기관지에 따르면, 문선명은 1974년에 일본에 갔을 때 기시를 명예 실행위원장으로 삼아 연 ‘희망의 날 만찬회’에서 강연했다. 2년 뒤에 총리가 되는 후쿠다 다케오 대장상(재무상)이 “아시아에 위대한 지도자가 계시다. 그 분은 문선명. 오늘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문 선생과 자리를 함께해 고매한 교시를 받게 됐다. 오늘은 참으로 좋은 날이다”라고 인사하며 문선명과 악수했다.
교단 관계자는 자민당과의 역사에 대해 “우리는 반공 활동을 하는 단체다. 기시 전 총리 시절부터 특히 세이와카이(淸和會)와 사귈 수 있게 해 주셨다”고 설명했다. 교단은 기시 전 총리의 계보를 이어받아 후쿠다 전 총리가 창설한 파벌 세이와카이(지금의 아베파)와의 관계를 특히 중시해 왔다고 한다.
31일(현지시각) 필리핀 수도 마닐라 주재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나르시사 클라베리아(왼쪽)와 에스텔리타 디(오른쪽)가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시위는 일본이 유엔인권이사회(UNHRC)에 인권보고서를 제출하는 날에 맞춰 진행됐다. 2023.01.31 EPA 연합뉴스
아베 신타로 “선거에 통일교 쓰면 유리하다”
1987년 8월에 기시는 90세로 타계했다. 그 2개월 뒤에 자민당의 간사장에 당시 세이와카이의 영수 아베 신타로가 취임했다. 기시의 사위이자 아베 신조의 아버지다.
당시를 아는 복수의 전 자민당 의원들은 기시 이래의 교단 인맥은 신타로에게 계승됐다고 말한다. 신타로는 1988년 승공연합의 ‘신춘 모임’에 내빈으로 참석했고, 당시 <아사히신문>은 그가 “선거와 당 활동에 대한 승공연합의 물심 양면 협력에 감사했다”고 전했다.
승공연합은 1980년대에 자민당에서 기시 등이 추진했던 ‘국가비밀법(스파이 방지법)’ 제정을 앞세우고 지방조직을 확대했다. 1986년의 중·참 양원 동시선거에서 자민당과 민사당 등의 후보 150명을 지원해 대부분 당선시켰다고 선전했다.
세이와카이에 소속돼 있던 전 중의원 의원에 따르면, 간사장이 된 신타로는 파벌 소장층에게 “선거에 쓰면 유리하다” “도움을 받아 보는 게 어때”라는 등 통일교단 쪽의 지원을 받아 보도록 열심히 권했다고 한다.
신타로는 자민당에서 다케시타 노보루, 미야자와 기이치와 함께 ‘뉴 리더’로 불렸다. 장기간 정권을 맡았던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의 후계 다툼에서 다케시타에게 선수를 빼앗겼지만 ‘다음’을 노리고 착착 준비를 했다. 앞서 얘기한 그 전 중의원 의원은 “신타로는 파벌을 키우려고 했다. 거기에 통일교회가 잘 파고 들었다”고 회고했다. 건설 등의 업계 단체는 주류파인 다케시타 파 등과 연결된 파이프가 굵어서, 비주류파인 세이와카이가 세력을 확대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삼은 것이 종교단체와의 제휴 강화였다고 또 다른 베테랑 의원은 말했다.
한편 그 무렵 불안심리를 부추겨 고액 상품을 사게 만드는 통일교단의 ‘영감상법’(靈感商法)이 사회문제화해, 국회에서도 몇 번 다뤄졌다. 1987년 7월의 임시국회에서는 공산당 의원이 나카소네 총리에게 “영감상법의 배후에 통일교회, 승공연합이 있는 게 분명하다"며 질문을 했고, 이에 대해 나카소네는 “일부 단체와의 관계에 대해 자민당은 연을 끊어라고 하시지만, 그건 사상과 행동의 자유에 대한 중대한 침범 발언이다”며 반론을 폈다.
“교단의 조직표는 세이와카이가 관장했다”
유력 총리 후보였던 신타로는 1991년에 병으로 쓰러졌으나 자민당과 통일교단의 관계는 계속 이어졌다. 자민당은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전반(前半)기에 걸쳐 소비세 도입과 리크루트 사건 영향으로 일본신당 붐이 더욱 크게 일어나는 등 국정선거에서 계속 고전했다. 세이와카이 소속의 전 중의원 의원은 1990년과 1993년 중의원 선거 때 통일교단 쪽으로부터 응원 제의를 받았다고 말했다. 1990년부터 계속 당선된 다른 파벌의 전 중의원 의원도 그 무렵부터 선거에서 계속 지원을 받았다고 한다.
조부는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 아버지는 아베 신타로 전 외상. 일본정계를 대표하는 가문 출신. 2021년 9월, 교단의 우호단체 ‘천주(天宙)평화연합’(UPF)이 개최한 이벤트에 동영상 메시지를 보낸 아베 신조를 단체쪽은 그렇게 소개했다.
아베 신조는 “UPF 주최 아래 더 좋은 세계 실현을 위한 대화와 여러 문제들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연설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라고 인사했다. 이어 “한학자 총재를 비롯해서 여러분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UPF의 평화적 비전에서 가정의 가치를 강조하는 점을 높이 평가합니다.” “편향된 가치관을 사회혁명운동으로 전개하는 움직임을 경계합시다”라고 호소했다.
아베 신조는 고이즈미 내각의 관방장관을 하고 있던 2006년 5월에도 UPF 모임에 축전을 보냈다. 영감상법 등의 피해가 발생하고 있던 와중에 그런 축전은 비판을 받았고, 피해대책을 세우던 변호사 그룹은 “통일교회의 활동에 찬동해서 권장하고 있다는 식으로 선전할지 모른다”며 설명을 요구했다. 아베의 사무소는 당시 “오해를 부를지도 모를 대응이기 때문에 담당자에게는 주의하도록 했다”는 코멘트를 냈다.
통일교단쪽은 20년 정도 집권 여당의 중심에 있던 아베와의 관계를 중시해 왔다. 교단 관계자는 <아사히신문>의 취재에 우호단체인 ‘세계평화연합’의 간부가 창구가 돼 아베와 제휴해 왔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7월 참의원선거에서 당선된 아베의 전 총리비서 이노우에 요시유키 등 최근 3차례의 참의원 선거에서 아베파 후보를 밀어 당선에 기여했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지금 교단 및 그 우호단체와 자민당 의원들의 접점이 점차 밝혀지고 있다. 우호단체와 관련이 있는 의원간담회는 지난해 6월에 국회 내에서 총회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자문을 받은 임원 안에는 세이와카이(아베파)만이 아니라 아소파와 기시다파 등을 포함한 30명 가까운 의원들이 이름을 올렸다.
다만 많은 자민당 의원들은 교단과 깊이 연결된 것은 세이와카이이고, 그 영수인 아베였다고 증언한다.
우익끼리 궁합맞는 세이와카이와 통일교
자민당 관계자는 “우파사상이 짙은 세이와카이와 교단은 역사적으로도 궁합이 잘 맞았다”고 했다. 선거에 정통한 다른 당 관계자는 “교단이 지니고 있는 조직표는 당이 아니라 세이와카이가 관장했다”고 한다. 세이와카이 출신의 전 의원은 “교단은 정치적 보호를 위해 아베 신조에게 접근했다”고 말한다.
국제승공연합 기관지 <세계사상>의 2018년 6월호는 아베의 사진을 표지에 담아 “역대 내각에 등급을 매긴다”는 제목의 특집기사를 실었다. “아베 정권을 전후 정치사에 자리매김하는 시도”로서 역대 내각 중 5단계의 최고위에 해당하는 A평가를 한 것은 요시다 시게루, 기시 노부스케, 나카소네 야스히로, 아베 신조 내각이었다.
아베를 총격으로 살해한 용의자 야마가미 데츠야가 교단에 ‘원한’을 갖고 있다고 말한 뒤, 통일교단과 일본정치, 특히 집권 자민당과의 관계가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용의자는 자신의 어머니가 통일교단에 많은 돈을 내는 바람에 가족이 어려움을 겪었고, 그 때문에 통일교에 원한을 갖게 됐으며, 아베 전 총리가 통일교 행사에 메시지를 보내는 등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고 생각해 그를 쏘았다고 진술했다.
사건 뒤 집권당 정치인들과 종교단체의 유착에 대한 비판여론이 거세지면서 통일교와의 연관성이 드러난 자민당 유력자들 다수가 맡고 있던 직책을 내 놓는 등 통일교 및 자민당과의 관계를 재설정하고 있는 가운데, 통일교 및 통일교와 자민당의 관계 청산이 일본 정치사회의 주요 현안이자 화두의 하나로 떠올랐다. 그러나 자민당과 기시다 후미오 정권은 아직도 분명한 매듭을 짓지 못하고 있다.
2019년 10월 통일교 행사에서 한학자 총재는 “정치와 종교는 하나가 돼야 한다”며 정교일치를 주장했다. 이는 일본 헌법상의 정교분리 원칙과 어긋난다. 이날 한학자의 연설에 박수를 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인 호소다 히로유키 자민당 아베파 의원은 지금 중의원 의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