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사동 대한극장터에 앉아 있는데 노랫소리가 크게 울려퍼진다. 노랫소리는 크고 우렁찼다. 남자 목소리인가 했는데 여자 목소리였다. 노래를 저렇게 시원하게 부르는 여자도 있구나 싶을 정도로 성량이 큰 여자였다. 남인사마당 쪽으로 걸어갔을 때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거구였지만 당당했다. 검은 드레스 차림으로 무대 위에서 부르는 그녀의 폭발적인 노래와 몸짓에 사람들의 환호성이 이어졌다. 정말 터질 것 같은 무대였다.
"기운이 넘치는 폭발적인 가창력의 가수 민재연씨의 무대였습니다."
허스키한 사회자의 목소리 또한 관중을 압도하는 힘이 넘쳤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여는 제4회 대한민국여성축제였다. 축제는 다양한 행사들로 가득했다. 못짓으로 여는 무대인 짓댄스, 그리고 퍼포먼스 <만져봐, 느껴봐!>, <보내고, 버리고, 날리고>에 이어 또 마당극도 펼쳐졌다. 어린이 요델 합창단 '알프스 친구들'의 순서와 국악퓨전 그룹 '황진이'의 연주회도 준비되어 있었다. 여성축제는 올해 이슈를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로 설정하고 여성의 몸을 주제로 몸에 대한 포커스를 맞췄다. 그래서인지 무대 앞에는 다양한 여성들의 사진이 인쇄돼 있었다. 일하는 여성들, 사회적으로 저명한 여성인사들, 나이든 할머니, 그리고 옛 여성들인 신사임당과 황진이까지... 다들 자신있게 살아가는 여성들이었다. 폭발적인 가창력의 가수 또한 자신의 외모에 연연해하지 않고 사람들의 시선에 주눅들지 않는 당당함과 자신감이 넘쳤다.
"싸이즈에 얽매이지 않는 여성, 성형에 얽매이지 않는 건강한 여성을 위해 마련된 여성 축젭니다."
2
이은경과 알프스 노래 친구들의 무대는 가벼운 요들송으로 한껏 흥을 돋구는 무대였지만 어린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알프스 복장과 고개를 좌우로 하면서 발걸음을 내딛으며 부르는 천상의 화음이 듣는 이의 마음을 깨끗하게 해주는 힘이 있었다. 절정의 미소를 머금은 이은경씨의 밝은 미소와 알프스 노래친구들이 들려주는 요들송, 가성과 육성을 섞어가면서 부르는 노래, 그 부드러운 듯 가볍고 싱그러운 음악이 전해주는 알프스의 청량한 기운이 인사동 마당에 내려앉았다. 음악의 힘은 세상을 한껏 새롭게 했다. 요란스럽지 않으면서도 가볍게 흔드는 몸짓과 산에서 들려오는 메아리소리처럼 울려오는 요들송의 흥겨운 가락이 아코디언 소리와 함께 신나게 살아났다. 웨스턴 요들송과 핸드벨 소리와 함께 울려퍼지는 요들송이라니, 그건 세상의 어떤 아름다움과 비교할 수 없는 순수한 아름다움이었다. 빗자루와 숟가락을 두들겨 내는 소리나 숟가락 끼리 맞부딪쳐 나는 소리 또한 우리의 다듬이 소리처럼 정겨운 생활 속의 리듬으로 다가왔다. 테네시 요들 폴카. 하나 둘 셋 넷, 요들레이디...우리 모두 즐거운 폴카.
3
"키가 크건 작건, 뚱뚱하건 말랐건, 바퀴 달린 차를 타고 다니든지 그렇지 않든지, 젊은 사람이든 나이든 사람이든, 장애건 비장애건 상관없이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건강한 문화를 만들려고 마련한 자리입니다. 그 동안 우리 여성들은 취업을 할 때 몇 킬로그램 이하, 몇 센티 이상, 용모 단정이란 답답한 문구에 갇혀 숨막히게 살아왔습니다. 바로 그런 숨통을 트는 의미에서 이 번 연극이 마련되었습니다."
극단 아리랑의 공연 제목은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하는 것이었다.
가면을 쓴 여자 셋이 춤을 춘다. 한 여자는 날씬한 몸매, 다른 한 여자는 뚱보에 키가 작고 다른 한 여자는 나이가 들고 주름이 진 여자였다. 세 사람이 거울을 향해 춤을 추면서 달려온다. 그들은 거울을 향해 묻는다. 먼저 키가 크고 날씬한 여자가 묻는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아직도 가슴이 모자라. 가슴을 더 크게 키워."
거울이 날씬한 여자를 향해 말한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을 키워내기 위해 열심히 펌프질을 한다. 더 크게 더 크게 가슴에 바람을 넣는다. 하지만 더 크게 더 크게를 외치는 거울의 요구에 금세 지쳐버리고 만다.
"너무 무거워, 숨을 못 쉬겠어. 너무 키웠나 보다."
이번엔 두 번째 키가 작고 뚱뚱한 여자가 나와 거울에게 묻는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팔뚝살 빼."
"팔뚝살?"
"팔뚝살, 옆구리, 배, 종아리, 복숭아 뼈, 목젖, 팔뚝살, 옆구리 배 종아리, 복숭아뼈, 목젖..."
"아이구 아이구, 내 심장이야... 아... 이건 아니야. 너무 뺐나보다."
세번째 나이든 여자가 거울을 향해 달려와 묻는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꺼져!"
"왜 그러는데?"
"고칠게 너무 많아. 우선 땡겨, 더 탱탱하게. 찢어질 듯이, 더 찢어질듯이 더 더...."
"아이구 내 젖꼭지, 너무 땡겼나봐."
어디서 상여소리 들려온다. 워이가 워이가. 워어워어...
여자들이 가면을 벗는다. 그들의 표정이 달라진다.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첫번째 여자가 다시 묻는다.
"코가 너무 낮어."
" 괜찮아 코가 낮으면 어때, 꽃향기나 맛있는 음식냄새를 맡을 수 있으면 됐지, 난 코가 낮지만 누구보다 높은 자신감이 있다구. "
"가슴이 가슴이 너무 작어."
"난 가슴이 작지만 누구보다 큰 정열이 있다고. 빵빵하게 숨은 자신감 말이야."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키가 너무 작어."
"키가 좀 작으면 어때, 귀엽지 않아. 하늘에서부터 키를 잰다면 내가 세상에서 제일 키가 클 걸."
"이만기 같은 얼굴."
"없는 것 보다는 있는 것이 낫지. 어떤 비람에도 견딜 수 있고 내를 건널 때도 떠내려가지 않는 튼튼한 몸이라구. 내가 있어야 우주도 있는 법, 건강이 최고라구."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지?"
늙고 주름진 여인이 묻는다.
"뱃살이..."
"시끄러, 이 배에서 아이 셋이 나왔어. 이 뱃살이 바로 배짱이라고. 이 주름이 인격이고 연륜이야. 나무도 계절에 따라 옷을 갈아 입는 것처럼 사람도 나이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하는 거라고."
셋은 말한다.
"자기 몸이 제일 소중한 거야."
그래서 그들은 소리친다.
"몸에 대해 경례!"
"뱃살에 대해 경례!"
"정열을 담은 가슴에 경례!"
"씩씩한 두 다리에 대해 경례!"
"웃으니까 이쁘네, 성형이 별 건가. 웃음이 제일 좋은 성형이지."
"버르장머리 없는 거울에게 다시 묻겠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가슴이, 주름이, 키가 너무..."
세 여자들은 마침내 거울을 깨버리고 앞으로 나아온다. 그리고 소리친다.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예쁘다."
그들은 다시 한 번 힘을 모아 소리친다.
"자기 몸을 인정하라. 자기 몸을 사랑하라. 아자아자 화이팅!"
4
실버댄스 동아리 <들국화>의 춤은 칠순의 나이에도 몸을 움직이면서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는 어머니, 할머니들의 흥겨운 춤이었다. 태극기를 머리에 묶고 하늘로 손가락을 찔러대면서 추는 춤은 하늘로 한 발을 들고 뛰는 그 가벼운 몸짓처럼이나 노년의 아름다운 황혼에 미소와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소녀처럼 환하게 웃는 할머니들의 댄스였다.
"우리 대한민국의 아들 딸들을 잘 지켜주신 이 땅의 어머니이자 언니들입니다."
짠짠짠 하게 울지 말아요 말없이 그냥 가세요 짠짠짠 하게 울지 않아요. 잘 가요 안녕 내 사랑. 신나는 반주에 맞추어 가볍게 하늘로 뛰어오르는 육학년 칠반, 칠학년 일반의 댄스... 나 가지고 장난 쳤나요. 사랑이 그런 건가요. 요리조리로 갔다 요리조리로 갔다 아직도 헷갈리나요. 그들이 보여주는 월드컵 응원가 앵콜 댄스 또한 방향을 잡고 좌우로 옮겨가면서 경쾌한 몸짓으로 노년의 열정을 한껏 선 보였다.
"자 다이아몬드 스텝이요."
사회자는 기막히게 박자를 맞추면서 추임새를 넣었다.
"왼쪽, 오르은... 쪽."
그 절정은 당연히 이런 추임새였다.
"좋다. 잘 한다."
5
여성의 몸을 주제로 한 여성축제의 여성선언문낭독이 있었다. 유승희 국회의원과 사단법인 문화세상 이프토피아 대표 등 여성계 대표가 돌아가면서 읽어나갔다. 마고할망, 바리대기 등 풍요한 생산성을 상징하던... 여성성이... 여성 스스로가 외모지상주의에 빠져, 자기 몸을 통제하고 몸만들기 전쟁에 빠져들었다... 여성이 성적 대상화가 되어 외모에 치중해, 성형외과와 다이어트 열풍... 개인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무지 무례한 잣대를 이제는 버릴 때.... 외모로 평가받지 않고 열정과 꿈 대신 실리콘을 넣는...자연스러운 몸이 아름다운 몸이다. 다양함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창조와 풍요의 신 바로 여성이다. 오늘 이 땅에서 우리도 우리 몸의 주인은 우리 자신임을 잊지 말자. 내 몸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여성이 되자. 여성선언문이었다.
여성선언문 낭독에 이어 여성의 몸의 차별과 그 몸을 사랑하자는 퍼포먼스가 이어졌다. 우주에 손을 뻗아 자신의 몸을 머리끝부터 만지면서 눈, 귀, 입으로 이어가며 만져보는 일이었다. 손끝에 우주의 기운으로 자신의 몸을 다시금 소중하게 확인해 나갔다. 사랑을 품는 넉넉한 가슴, 배, 팔, 다리... 몸이 말을 하지 않습니까.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여 달라고. 자유롭게 해 달라고. 있는 그대로 여러분의 몸을 존중해 주시길 바랍니다. 매일 아침 여러분 하늘의 기운을 받아 여러분의 두 눈과 코와 입 그리고 온 몸에 소중한 기운을 담아보시길 바랍니다.
이어 얽매인 것 날려보내기 순서였다. 코르셋의 사이즈, 성형의 실리콘처럼 매여 있던 것들을 이 세상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었다. 기능성 속옷, 오뚝한 코와 큰 눈을 위해 넣고 째고 했던, 억압과 차별을 받았던 것에서 벗어나자고, 거들과 실리콘을 빼고, 자유롭고 희망찬 여성을 만들어가자는 뜻에서 종이로 접은 거들과 실리콘 모형을 불에 태워버리는 퍼포먼스였다. 날려버려, 버려버려. 종이들이 불에 붙어 하늘로 올라갈 때 풍악이 울리고 태평소 소리가 났다. 그 순간에 여성들의 함성소리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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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국악퓨전 그룹 '황진이'의 순서가 이어졌다. 가야금과 해금 그리고 대금의 우리 악기와 전자 바이얼린의 만남이었다. 사회자는 웃어야지 웃을 일이 생긴다면서 밝게 웃을 수 있는 마음을 강조했다.
가야금의 흐르는 듯 은은하게 울리는 리듬터치, 대금소리의 그윽한 맛, 또 해금의 구슬프고 가슴 아픈 가락이 전자바이얼린의 그 빠른 음의 변화와 만나 이루어내는 독특한 분위기는 강렬하고 바람에 흩날리는 것 같은 가벼운 옷차림의 미모의 젊은 국악퓨전그룹 황진이에 의해 한껏 고조되었다. 가벼운 웃음처럼이나 음악은 가볍고도 경쾌하게 동서양의 음악적 선율을 섞어냈다. 가볍게 몸을 흔들게 만드는 리듬에 깊고 그윽한 우리네 음악들에서 전해져오는 전통의 온기가 남인사동 마당을 달구었다. 마치 사극의 배경을 보는 것처럼 세상을 아득하게 만들어내는 음악, 그 안에서도 빠르게 변화되어가는 선율의 흐름이라니. 전통이 어떻게 새로운 문물 속에서 그 힘을 발휘해가는가를 새삼 퓨전적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나무 기둥들에는 전통 혼례식이나 전시회를 알리는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고 삼일공원의 플라타너스는 가볍게 가을 바람에 그 무수한 잎들이 흔들렸다. 화창한 가을 날, 인사동 골목엔 순라꾼들의 행진과 주식회사 대성에서 마련한 클래식과 경기민요 공연으로 한껏 그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그리 넓고 거창하지는 않지만 사람들과 함께 어울어지는 한 마당 잔치를 보면서 새삼 도시가 생기 있게 다시 살아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문화가 있는 도시는 언제나 다시 깨어난다. 건강한 여성, 활짝 웃는 어머니들의 미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