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것은 아닐 텐데, 인간의 얼굴이 바뀌었다는 것이.
어떻게? 다 그런 것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의 얼굴이
인간만이 나타낼 수 있는 연민과 인정이 소실된 이상한 각질의 표피층이 되었다는 것이다.
일종의 가면이다. 그 각질의 가면에는 인간의 정이 배어날 여지가 없다.
그리고 이것이 개선되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없고 더욱 악화될 것이라는 나쁜 예감이 든다.
사무엘 스마일즈의 저서 <의무론> 중 연민에 관한 기사 하나가 있다.
로버트 콜리어라는 목사님의 설교에 나오는 내용이다. 추운 겨울날의 에딘버러.
호텔 앞에 서 있는 두 명의 신사 앞으로 작고 메마른데다가 맨발에 누더기를 걸친 한 소년이 다가온다.
"성냥 하나만 사주세요!" "필요 없다!" "1 갑에 1페니 밖에 안 되는데요"
"글쎄 나는 성냥이 필요 없다는데도 그러는구나!" "그럼 1페니에 두 갑 드릴게요."
귀찮은 생각에 사주려고 주머니를 뒤져보니 잔돈이 없었다. "내일 사 주마."
"오늘 사주세요, 제가 거스름돈을 구해올게요." 그래서 소년은 1 실링을 받아가지고 달려갔다.
소년은 돌아오지 않았고 그 신사는 돈을 잃은 셈 치기로 했다.
하지만 소년의 얼굴엔 믿을만한 무엇이 있었기에 소년을 나쁘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던 이 신사.
저녁 늦게 그에게 아까 그 소년보다 더 여위고 초라한 소년이 찾아왔다.
"선생님이 샌디(형)에게서 성냥을 산 분 맞나요?" "그래!" 소년은 호주머니에서 무엇인가 찾더니 이렇게 말했다.
"여기 4펜스가 있습니다. 샌디는 몸이 안 좋아서 올 수 없었어요. 마차 사고를 당했거든요.
그래서 모자랑 성냥이랑 선생님께 드릴 11펜스도 잃었답니다.
샌디는 두 다리가 부러졌는데 의사 선생님이 죽을 거래요. 이게 선생님께 드릴 전부예요."
라고 말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신사는 소년에게 음식을 먹이고 그와 함께 샌디를 보러갔다.
두 아이의 생부모는 다 세상을 떠났고 두 아이는 술주정뱅이 의붓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톱밥 자루 위에 누워있던 샌디는 금방 신사를 알아봤다. 신사에게 사연을 설명하고 샌디는 동생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죽을 거야. 불쌍한 로비, 내가 죽으면 누가 널 돌봐주지?"
신사는 샌디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내가 돌봐주마."
잠깐 그 말에 생기를 띠며 반짝이던 소년의 푸른 눈에선 잠시 후 빛이 꺼져갔다.
어린 소년들의 가엾은 행색과 애처로운 표정, 이 아이들을 바라보는 신사의 표정 모두가 인간의 얼굴이다.
살아있는 동안 신앙, 경외, 희로애락, 연민, 긍휼, 온유함, 회한, 고통, 감사 등이 움직이는 장이 인간의 얼굴이다.
삶의 보람이나 애환 가운데서 인간의 얼굴은 반짝이기도 하고 흐려지기도 하는데
이로써 사람들은 그 얼굴들의 주인공의 내면세계를 엿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됨에서 가장 위대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연민의 정이다.
인간이 상대의 처지에 깊은 공감을 가진다는 것, 상대를 불쌍히 여긴다는 것,
이것은 지성 감정 의지를 지닌 인간의 활동 중에서 하나님을 닮은 가장 숭고한 마음의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AI를 닮아간다.
신앙, 경외, 희로애락, 연민, 긍휼, 온유함, 회한, 고통, 감사 등이 소멸되고 무관심 무표정 두려움의 형상이 되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무대가 불꺼진 무대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선 인간의 표정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의 얼굴을 통해서 나타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증명이 될 때 그렇게 될 것이다.
2024. 7. 16
이 호 혁
첫댓글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의 얼굴을 통해서 나타난다…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할 내용입니다.
아멘! 나의 삶을 통해 예수님의 생명이 증명되게 하소서.
아멘
주여..당신의 마음을 품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