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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평론집 [☆지상의 천사☆]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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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천사]
이혜원 평론집 / 시작비평선 013 / 천년의 시작(2015.08.17) / 값 2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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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현실의 원근법
이혜원
1. 상상의 축조술
‘유토피아’는 토머스 모어가 처음 만들어 냈지만, 지금은 보통명사처럼 흔히 사용되는 말이다. ‘아무 데도 존재하지 않는 곳’ 또는 ‘이상향’이라는 개념은 현실과 다른 차원의 세계를 상상할 때 누구든 떠올릴 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정치․ 법률․ 관습 등 사회의 제반 조건이 분명하게 규정되어 있는 체계적인 국가로 묘사되지만, 보통명사로서 유토피아는 현실에서 떨어진 상상의 공간 또는 이상국을 뜻한다.
서구의 문학에서 유토피아에 대한 상상은 하나의 장르를 형성할 정도로 왕성하게 출현해 왔다. 유토피아 문학은 근대적인 이성에 근거한 합리적인 제도의 실현을 꿈꾸는 적극적인 상상의 산물이다. 유토피아는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 낸 세계라는 점에서 신이 내려준 낙원과 다르다. 유토피아는 인간의 자율성과 능력에 대한 신념이 바탕을 이루는 휴머니즘의 산물이다. 문학은 유토피아의 기획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광활한 지적․ 상상적 영토이다. 유토피아의 상상 속에서 많은 현실적 제약을 넘어서는 이상적인 사회제도와 기술 문명을 극한까지 추구해 볼 수 있다. 현실의 결핍이 꿈을 낳고, 꿈꾸던 것이 현실로 실현되며 역동적으로 작용한다. 공상과학소설에서 묘사되었던 고도의 기술 문명이 속속 현실화되는 것이 한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사회제도의 문제는 한층 복잡하다. 모든 구성원을 만족시키는 이상적인 사회는 아직 이루어진 적이 없다. 심지어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도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이상국이라 단언하기 어렵다. 유토피아 문학은 바로 그 결핍의 자리에서 발생한다.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역상으로 맺혀 유토피아적 비전을 낳는다. 유토피아의 축조술은 현실에 대한 비판적 분석과 보강 계획을 설계의 축으로 삼는다. 유토피아는 현실에 ‘없는’ ‘이상적’인 세계이다. 그것은 현실의 결핍이 증폭된 꿈의 공간이다.
우리 현대시에서 유토피아는 서구의 문학에서와는 조금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서구의 문학 특히 소설에서 유토피아는 상상의 기획이긴 하지만 상당히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질서를 지닌 하나의 세계로 그려진다. 이에 비해 우리 현대시에서 유토피아는 현실에 대한 반작용의 표현으로, ‘지금, 여기’와는 거리가 먼 이상을 투사하는 공간으로서의 의미가 크다. 이성적이고 구체적인 기획이라기보다 직관과 감성에 좌우되며 낭만성이 강하다. 우리 현대시에서 유토피아는 현실의 결여에 대한 문제의식과 이상의 상상적 실현이라는 문학의 보편적 속성을 함축하고 있다. 이상 세계에 대한 면밀한 구상과 실천의 의지를 보이기보다 현재와 다른 과거나 미래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표명한다는 점에서 낭만주의적인 성격이 짙다. 그러므로 우리 현대시에 나타나는 유토피아는 토마스 모어 식의 구체적인 이상국이 아니라 광의의, 보통명사로서의 이상향에 가깝다. 중요한 것은 유토피아적 상상의 양태보다 그러한 상상이 발생하게 되는 동기와 과정에 있다. 현실의 결여에 대한 비판적 의식이 전면적으로 드러나는 상상이라는 점에서 디스토피아는 유토피아와 결코 분리할 수 없는 문제적 공간이다. 디스토피아는 유토피아의 그림자이며 더욱 엄혹한 현실의 거울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시에서는 유토피아에 대한 적극적 상상보다 디스토피아적인 현실의 재현이 더 활발하게 나타난다.
여기서는 현실의 결여에 대한 문제의식이 유토피아 또는 디스토피아라는 공간 개념으로 드러나는 시들을 포괄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먼저 유토피아적 세계를 드러내는 시들이 현실에 대해 어떤 태도와 거리를 지니는지, 그들이 지향한 세계의 특징은 무엇인지를 들여다보고, 다음으로 디스토피아적인 세계를 그린 시들에서 현실은 어떻게 해석되고 재구성되는지를 따져 볼 것이다.
2. 그리운 유토피아
우리 현대시에서 유토피아에 대한 선명한 의식과 활달한 상상을 드러내는 시들을 찾기는 쉽지 않다. 이상 세계에 대한 상상이 독자적인 개성을 이루며 하나의 세계를 확보하는 경우가 드물다. 대부분 현실에 대한 부정이 배태한 막연하고 초월적인 이상 공간에 가깝다.
낭만적 열정으로 가득한 이상화의 시 「나의 침실로」에서도 이상향은 현실도피적인 초월의 공간이다. “마돈나! 날이 새련다 빨리 오려무나, 사원寺院의 쇠북이 우리를 비웃기 전에/네 손이 내 목을 안아라, 우리도 이 밤과 같이 오랜 나라로 가고 말자”의 “오랜 나라”는 다름 아닌 “나의 침실”이고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꿈의 공간이다. “오랜 나라로 가고 말자”라고 할 때의 자기 방기적인 태도와 어조는 화자가 추구하는 이상향이 결코 현실을 넘어서는 근본적인 대안이 될 수 없음을 암시한다. “내 침실이 부활의 동굴임을 네야 알련만”에서도 이 시의 이상향이 두 사람만의 폐쇄적이고 한정된 공간이라는 사실을 간파할 수 있다. 이 시의 화자는 진정한 부활과 이상을 도모하기에는 너무나 엄혹한 현실의 중압으로 인해 도피에 불과한 소극적인 이상향을 꿈꾸는 데 그친다.
아득한 명상의 작은 배는 가없이 출렁거리는 달빛의 물결에 표류되어 멀고 먼 별나라를 넘고 또 넘어서 이름도 모르는 나라에 이르렀습니다
이 나라에는 어린 아기의 미소와 봄 아침과 바닷소리가 합하여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나라 사람은 옥새의 귀한 줄도 모르고 황금을 밟고 다니고 미인의 청춘을 사랑할 줄도 모릅니다
이 나라 사람은 웃음을 좋아하고 푸른 하늘을 좋아합니다
명상의 배를 이 나라의 궁전에 매었더니 이 나라 사람들은 나의 손을 잡고 같이 살자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님이 오시면 그의 가슴에 천국을 꾸미려고 돌아왔습니다
달빛의 물결은 흰 구슬을 머리에 이고 춤추는 어린 풀의 장단에 맞추어 우줄거립니다
- 한용운,「명상」전문
한용운의 이 시는 이상향에 대한 형상화가 비교적 구체적인 편이다. 화자가 이상향에 이르는 방식은 ‘명상’이라는 정신적 작용에 의거한다. “멀고 먼 별나라를 넘고 또 넘어서” 도달한 “이름도 모르는 나라”는 현실과 가장 먼 거리에 있는 이상국이라고 할 수 있다. 명상의 자유로운 정신 활동을 통해 도달한 이 나라는 상상이 허용하는 가장 이상적인 세계이다. 이 나라는 ‘사람’의 본질부터 다르다. 이곳 사람들은 순수하고 무구하며 청명한 본성을 부여받은 것으로 그려진다.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이 나라 사람들이 “옥새의 귀한 줄도 모르고 황금을 밟고 다니고 미인의 청춘을 사랑할 줄도 모릅니다”라는 구절이다. 세속의 권세와 부귀와 욕망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이다. 토마스 모어의『유토피아』에도 황금을 하찮게 여기고 권세와 무관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나오지만 그것이 제도에 의해 행해지는 것에 비해 이 시에서는 구성원들의 천부적인 성품과 무욕이 강조된다. 이 나라 사람들은 한마디로 천상의 사람들인 것이다. 화자가 명상을 통해 도달한 이 세계는 속계에서 해탈한 자들의 천국에 가깝다. 이 완벽한 탈속의 세계에서 화자는 애써 귀환한다. 그에게 있어 진정한 이상국은 ‘님의 가슴’에 꾸며진 천국이기 때문이다. 한용운에게 진정한 이상향은 님과 함께 할 때 가능하며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하는 것으로 분명하게 인식된다. 따라서 이 시에서 그려진 이상향은 님의 존재와 가치를 확인하는 계기로서 의미가 있다. 님은 현실 속에 존재하며 현실의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는 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한용운에게는 님이야말로 진정한 이상향인 것이다.
신석정은 유토피아에 대한 지속적인 염원을 드러낸다. “어머니/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아십니까?//깊은 삼림지대를 끼고 돌면/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좁은 들길에 야장미野薔薇열매 붉어//멀리 노루 새끼 마음 놓고 뛰어다니는/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아십니까?”(「그 먼 나라를 아십니까?」)라는 목가풍의 시들이 평화로운 이상 세계에 대한 낭만적 동경을 내포하고 있다. 그에게도 역시 이상향은 “그 먼 나라”라는 절대적인 거리감으로 표출된다. 그의 시에서 주목해 볼 것은 이러한 이상향이 “아무도 살지 않는”곳이라는 점이다. 동서양의 온갖 아름다운 전원 풍경이 혼합되어 있지만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 이 고적산 유토피아는 복잡다단한 현실에 대한 역상逆像으로서의 의미가 크다.
우리 현대시에서 유토피아는 미래의 대안이라기보다 현실에 대한 부정의 의미가 강하다. 현실과 멀리 떨어진 ‘먼 나라’나 ‘꿈나라’ 같은 막연한 공간이며 현실과 절연되어 있다. 구체적인 상상과 이성으로 기획된 세계라기보다 현실에서 결여된 이상과 낭만적 동경을 투사하는 정서적 공간이다. 현재의 상실과 결핍의 양상에 몰입하다보니, 현재의 문제를 개선하여 미래의 설계에 반영하려는 진취적인 성향보다는 과거 또는 본질적 가치로 회귀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이는 외세에 의해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타율적인 통치의 억압을 견뎌야 했던 민족적 경험과 무관하다고 보기 힘들다. 잃어버린 땅과 가치를 되찾는 것이 급선무였던 시대였기 때문에 유토피아적 전망 또한 과거와 본질을 추구하려는 방향성을 띤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집 잃은 내 몸이여/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다면!”(김소월「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다며」)이라는 소박한 굼이 간절한 희망이었더누 시절에 유토피아는 다름 아닌 잃어버린 집과 땅을 회복한 세상인 것이다.
어진 사람이 많은 나라에 와서
어진 사람의 짓을 어진 사람의 마음을 배워서
수박씨 닦은 것을 호박씨 닦은 것을 입으로 앞 이빨로 밝는다
수박씨 호박씨 입에 넣는 마음은
참으로 철없고 어리석고 게으른 마음이나
이것은 또 참으로 밝고 그윽하고 깊고 무거운 마음이라
이 마음 안에 아득하니, 오랜 세월이 아득하니 오랜 지혜가 또 아득하니
오랜 人情이 깃들인 것이다
泰山의 구름도 黃河의 물도 옛 인금의 땅과 나무의 덕도 이 마음 안에 아득하니 보이는 것이다
-백석,「수박씨, 호박씨」부분
백석의 시에서는 이상향에 대한 선화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편이다. 그는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고향의 모습, 원시적인 공동체의 삶을 복원하고 싶어 한다. 이상향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소박한 삶의 모습이지만 그러한 본래의 삶조차 붕괴되어 묘원해진 현실의 처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고향을 잃고 떠도는 삶을 지속하면서도 그는 자주 자신이 꿈꾸는 세계를 상상 속에 펼친다. 위의 시에서는 수박씨와 호박씨를 입안에서 굴리는 잠깐의 한가로운 시간을 틈타 이상국의 평화로운 삶을 그리고 있다. “수박씨 호박씨 입에 넣는 마음”이 어진 사람들이 많은 이상국의 상상을 이끈다 모두가 소박하고 한가한 마음을 지니고 사는 이 나라는 덕으로 다스리는 요순시절을 연상시킨다. 욕심이 없어 모두가 평화롭고 인정 넘치게 사는 이 나라는 시인이 꿈꾸던 공동체적 삶의 원형에 가깝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계는 백석뿐 아니라 많은 시인들에게도 이상향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빨랫줄에 빨래가 날고/사슴도 줄을 타고 함께 뛰었지/그때만 해도/사슴이 장대에 올라 해금을 켜는 걸/들었지/듣다가 듣다가/항아리 속으로 저녁이 뛰어들어/술을 익혔지/처마가 기울고 들판이 기울어/함께 들었지/그때만 해도/유월은 목단하고/매화는 파랑새하고/연애했지”(최정례,「사슴이 장대에 올라」)에서는 발랄한 상상력으로 사물과 사물, 사물과 자연, 자연과 인간이 혼융하는 대화합의 장을 그려 낸다. 이렇게 차별 없는 화합과 공존이 가능했던 시기는 “그때”라는 머나먼 과거의 시간이다. “우리의 대가족제도란 필시 그걸 두고 하는 말이었을 것이니/마당귀에 두엄자리를 만들고/지린 오줌 한 방울도 아무 데나 흘리지 않던/쇠똥구리들, 똥장군 지고/밭일 가시던 우리 할아버지 때는”(손택수,「쇠똥구리는 다 어디로 갔을까」)에서도 사람과 자연 사이에 차별이 없고, 서로가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생존하는 화합의 세계를 그린다. 이 시에서도 역시 이러한 세계는 “우리 할아버지 때”라는 먼 과거에나 가능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대가족제도”란 인간 세상뿐 아니라 인간과 자연까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상태를 뜻한다.
과거 회귀적이라는 것과 함께 자연 지향적인 것도 우리 시에 나타나는 이상향의 특성이라 할 만하다. 자연 또한 과거처럼 본원적인 삶을 구성하는 조건으로 여겨진다. 자연은 ‘무릉도원’이나 ‘청산’ 등의 동양적 이상향의 관념에서 바탕을 이룰 뿐 아니라 외세와 함께 시작된 근대의 풍경과 상반되는 공간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나라가 없어 산속에 들었다가
나라가 있어도 그저 산속에 사네
성안엔 새 깃발 보이나 제 것만이 아니요
거리엔 에레미아의 슬픈 노래 아직 걷히질 안 했다
내 갈 길은 수풀 속, 山有花 피는 곳
게서 달로 벗하자, 바람으로 벗하자
山中엔 自由가 있네
靈氣 도-네
-김동환,「山家抄」부분
묻히리란다, 靑山에 묻히리란다
靑山이야 변할 리 없어라
내 몸 언제나 꺾이지 않을 無垢한
꽃이언만
깊은 절 속에, 덧없이 시들어 지느니
생각하면, 갈가리 찢어지는 내 맘
서러 어찌하리라
-신석초,「序詞」부분
논에는 논에 넘치는
넘실거리는 햇빛
그 구수하고 향기로운
마른 흙냄새는
마음이 단순한 자만이 아는
향기의 세계(아아 영혼의 향기)
-박목월,「밭에는 밭 냄새」부분
이상향으로 등장하는 산 또는 자연은 구체적인 삶의 공간이라기보다 현실과의 대척점으로 존재하는 상징적인 관념의 공간이다. 김동환의 시에서 “산속”은 주권을 빼앗긴 ‘나라’의 현실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기 위해 찾은 곳이다. 그곳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발견한 이상적 장소라기보다 최소한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 찾아간 도피처에 가깝다. 이는 기본적인 삶의 조건조차 허락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부정과 저항으로서 의미가 있다. 신석초 시의 “청산”역시 적극적으로 추구한 이상향이라기보다 “변할리 없”다는 가치로 선택한 소극적 이상향이다. 박목월 시의 목가적 자연 역시 “마음이 단순한 자”로서 선택하는 평화로운 공간이다. 이들에게 자연은 복잡다단한 현실과 달리 영혼의 안식을 취할 수 있는 “마음”의 거처인 것이다.
이처럼 우리 시인들은 현실에 대한 부정의 방법으로 과거의 시간 또는 본향으로서의 자연으로 회귀하려고 하는 낭만적 경향이 강하다. 현재는 불행하고 결핍된 시간이라는 의식이 종종 과거와 자연에 대한 동경을 일으킨다. 아놀드 하우저에 의하면 실향성과 고립의 감정은 19세기 초 낭만주의자들의 특성이라고 하는데, 우리 시에서는 이런 경향은 국권 상실기와 근대화가 맞물리는 시기에 시작되어 산업화가 급격하게 이루어지는 이후의 시기까지 지속적으로 매우 흔하게 나타난다. 우리 시의 유토피아적 상상은 낭만적이고 회귀적인 속성이 강하다. 자연은 근대화된 현실에서 잃어버린 마음의 본향으로서 언젠가 돌아가야 할 궁극의 거처로 인식된다. “이제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지만/아직도 숲 속 골짜기에는/산 절로 물 절로 하는 호수들이 있긴 있는 것이다”(고재종,「여름 다저녁때의 초록 호수」)라고 할 때 ‘숲’ 즉 자연은 이제는 멀어져 버린, 그러나 되돌아가야 할 마음의 거처로 자리 잡고 있다. “아무런 욕심이 없어야만 열릴 것 같은/깊고 그윽하고 투명한 숲 속의 호수”는 자연이라는 이상향에 대한 동경과 마음의 자세를 보여준다. 우리 시인들에게 유토피아는 현실에서 초연한 무욕의 마음으로 열어야 하는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장소, 자연을 함축하고 있는 근원적 공간에 가깝다.
3. 견고한 디스토피아
우리 현대시에서 유토피아가 낭만적이고 관념적인 양상을 띠는 것에 비해 디스토피아는 구체적이고 분명한 형상을 드러낸다. 유토피아의 상상에서 정서적인 상태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에 비해 디스토피아의 상상에서는 객관적이고 정밀한 묘사가 주를 이룬다. 유토피아가 현실과 멀리 떨어진 원경으로서 전체적인 구도로 파악되는 것에 비해 디스토피아는 현실에 근접해 있으면서 현실의 한 단면을 부각시키거나 왜곡시킨 그로테스크한 형상을 보인다. 유토피아가 오목거울의 중심에 잡힌 이미지처럼 전체의 구도를 축소시켜 보여 준다면 디스토피아는 볼롤렌즈의 중심에 비친 과장된 이미지처럼 전체의 한 부분이 확장되어 나타난다.
서구문학에서는 과학기술과 문명이 유토피아 구축의 기반으로 작동하는 것에 비해 우리 문학에서 그것은 오히려 디스토피아의 상상과 더 밀접하게 관련된다. 각 시대를 선도해 가는 첨단의 과학기술과 문명은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기보다 불길한 징후로 인식된다. “민들레와 제비꽃의 물가는 허물어져/연탄재와 고철들과 비닐 조각들로 어지럽다/능수버들 허리 꺾어진 곳 몇 짐의 술집들 철거되고/술집들 더욱 변두리로 작부들 데리고 떠나가고/저 물에 빌딩과 거대한 타이프라이터와 시장이 비쳐 온다”(이하석.「깊은 침묵」)에서 묘사되는 디스토피아의 경우 이제는 이미 과거의 풍경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 시가 쓰인 당시 상황으로 볼 때 “저 물에 빌딩과 거대한 타이프라이터와 시장이 비쳐 온다”는 구절이 던지는 묵시록적 전망은 상당히 묵직하다. 현실에 대한 객관적 소묘가 곧 디스토피아의 형상이 될 정도로 문제의식이 날카롭다. 이 시에서는 도시 주변부의 부패상에 대한 면밀한 관찰을 통해 문명의 폐허를 간파한다. 각종 문명의 폐기물이 자연을 몰아내고 변두리 인생은 점점 더 주변부로 밀려난다. 이러한 세계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거대 자본이다. 주변부에서는 접근도 할 수 없는, 물에 비친 그림자만으로 짐작해야 하기 때문에 더욱 압도적인 것으로 보이는 이 디스토피아의 심장은 여전히 막강한 힘을 행사하고 있다.
내 몸의 사방에 플러그가
빠져나와 있다
탯줄 같은 그 플러그들을 매단 채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비린 공기가
플러그 끝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곳곳에서 사람들이
몸 밖에 플러그를 덜렁거리며 걸어간다
세계와의 불화가 에너지인 사람들
사이로 공기를 덧입은 돌들이
둥둥 떠다닌다
-이원,「거리에서」전문
이원의 디스토피아적 전망의 핵심은 ‘전자사막’에서의 유목으로 비유되는 첨단과학 문명 시대의 삶이다. 이 시에서는 공상과학영화의 이미지와 흡사하게 온몸에 플러그를 매단 사람들이 오간다. 그들에게 플러그는 “탯줄”만큼 절대적인 탄생의 조건을 이룬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전자장치가 체화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세계와의 불화가 에너지인 사람들”과 “공기를 덧입은 돌들”이 부유하는 이 불안하고 삭막한 세상은 명백한 디스토피아이다. 상당히 그로테스크하게 묘사된 이 세상은 한편으로 이미 각종 전자 기기 없이는 생활이 불가능해진 오늘날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 시에서 구상화된 전자 신체의 이미지는 기술 문명의 절대적인 지배 하에 있는 현대인의 삶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우리 현대시에는 유토피아적 상상보다 디스토피아적 상상이 점점 더 왕성하게 행해지고 있다. 개인의 존재를 압도하는 거대 문명과 자본의 위력을 체험하면서 그것을 현실로 감지하기 때문에 더욱 실감 나는 묘사가 가능한 것이다. 디스토피아의 묘사에는 현실에 대한 냉소와 반어가 깃들어 있다. 비틀려 기괴하게 드러나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의 단면들이 무수한 디스토피아를 그려진다.
움푹해라 내 욕망은
밥숟갈을 닮았다
천만 개의 숟갈이 한 냄비에 덤비듯
꿀꿀거리고 덜거덕대는 서울에서
나도 움푹한 욕망 들고 뛰어가고
보름달 뜨면 먹고 싶어라
-최승호, 「밥숟갈을 닮았다」부분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는 욕망의 평등 사회이다 패션의 사회주의 낙원이다
가는 곳마다 모델 탤런트 아닌 사람 없고 가는 곳마다 술과 고기가 넘쳐나니 무릉도원이 따로 없구나 미국서 똥구루마 끌다 온 놈들도 여기선 재미 많이 보는 재미 동포라 지화자, 봄날은 간다
-유하,「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2-욕망의 통조림 또는 묘지」부분
광고의 나라에 살고 싶다
사랑하는 여자와 더불어
아름답고 좋은 것만 가득 찬
저기, 자본의 에덴동산, 자본의 무릉도원
자본의 서방정토, 자본의 개벽세상
-함민복,「광고의 나라」부분
우리 시인들에게 디스토피아로 인식되는 현실의 문제는 그것이 끔찍한 형상을 지녀서라기보다 제어할 수 없이 강력하고 매력적인 ‘욕망’의 발원지라는 사실이다. 위의 시들에서 디스토피아는 유토피아보다 더 강한 인력을 발휘한다. 이 세계로의 이끌림은 강제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이다. 최승호의 시에서 욕망의 집결지인 서울은 “천만 개의” 숟가락들이 달려드는 거대한 냄비의 형상으로 상징화된다. 가장 기본적인 생존 욕구인 식욕만큼이나 대도시의 욕망은 강렬하고 직접적이다. 유하의 시에서 ‘압구정동’은 욕망의 도가니와도 같은 문제적 장소이다. 자본주의의 물질적 욕망이라는 아이러니를 유발한다. “술과 고기가 넘쳐나니 무릉도원”이라며 화자의 능청과 반어는 계속된다. 허영과 위선과 환락이 넘치는 이곳은 욕망의 과부하 상태인 도취적 디스토피아이다. 함민복의 시에도 날카로운 반어가 자리 잡고 있다. “아름답고 좋은 것만 가득 찬” “광고의 나라”는 허위와 환상이 지배하는 또 다른 디스토피아이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를 전도시키는 이 시들의 반어법은 욕망이 지배하는 현실의 거대한 힘을 의식하면서 비판적으로 저항하는 방식이다. 여기에는 욕망의 세계에 포섭되어 있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그 허위를 궤뚫어 보려는 날카로운 통찰력이 작용하고 있다.
우리 시인들에게 디스토피아는 압도적으로 개인을 통제하는 거대한 힘이나 제도로 인식된다. 근래의 시들에서 이런 경향은 더욱 뚜렷하게 감지된다. 기척도 없이 그러나 전면적으로 개인의 삶을 장악하고 지배하는 거대한 권력과 제도야말로 디스토피아의 기반을 이룬다.
그건 오래된 이야기
옛날에 살인자는 아홉 개의 산, 들, 강을 지나
달아났다
흰 밥알처럼 흩어지며 달아났다
그건 정말 오래된 이야기
달빛 아래 가슴처럼 부풀어 오르며 이어지는 환한 언덕 위로
나라도
법도, 무너진 집들도 씌어진 적 없었던 옛적에
-진은영,「오래된 이야기」부분
지금 검은 사슴 건너간 물에 엎드린 사내처럼 너무도 조용한 당신, 황혼의 욕조 속에서 팅팅 불은 당신의 몸을 건져 내며 그들은 간단하게 멸종 이후의 삶을 요약할 것이다. 딱딱한 귓가에 매달린 웃음의 흔적, 손가락마다 찍혀 있는 검은 바코드, 영원히 아름다운 K여, 제국은 당신을 사랑한다
-이기성,「산책」부분
이 두 편의 시에서 묘사되고 있는 세상을 비교해 보자. 위의 시에서는 살인자가 달아나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오래된 이야기”속에서 살인자는 피해자 가족들의 손길을 피해 온 천지로 달아나며 원한이든 사연이든 감정적인 앙금을 털고 운이 좋으면 화해를 이루고 목숨을 구할 수도 있었다. 아직 나라도 법도 없던 시절에 처벌은 개인적 차원에서 이루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라와 법이 생겨나고 용감한 병정들로 살인의 장소를 지키게 하면서 살인자에 대한 처벌은 가차 없이 신속하게 이루어진다. 살인자는 더 이상 “달빛 아래 가슴처럼 부풀어 오르며 이어지는 환한 언덕 위로” 숨을 방도가 없다. 개인의 원한이나 사연은 국법의 엄중함 앞에 한없이 무력해진다. “오래된 이야기” 속 세상과 달리 나라와 법이 지배하는 세계는 디스토피아에 가깝다. 뒤의 시에서는 “제국”의 처단에 목숨을 잃은 자를 묘사하고 있다. 제국의 처벌 대상이 된다면 결코 그 감시의 눈길을 피할 수 없다. “허공에 매달린 창마다 불쑥 튀어나온 총구처럼 제국은 천 개의 눈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제국은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는 눈을 가지고 있다. 제국의 처벌은 단호하고 가혹하다. 제국이 제거하는 개인은 단순히 ‘죽음’에 그치지 않고 ‘멸종’이란느 극한의 종말을 맞는다. 제국의 일원으로 하나의 기호에 해당하던 개인은 바코드의 삭제로 영원히 사라진다. 살인자의 도주가 이루어졌던「오래된 이야기」속의 허술한 세상과는 극과 극을 이루는 장면이다. 두 시 모두 개인을 지배하는 강력한 제도를 디스토피아적인 상황으로 파악하고 있다.
위의 시들은 모두 알레고리적인 설정으로 제도와 규율이 지배하는 세계의 문제점을 뚜렷하게 부각시킨다. 제도와 법이 지배하는 이러한 삭막한 세상은 그러나 현실의 일상과 그리 먼 것은 아니다. 이장욱의「동사무소에 가자」는 지극히 사소한 일상적 경험에서 제도로서의 삶의 문제를 간파하고 있다. 이 시는 “동사무소에서 우리는 전생이 궁금해지고/동사무소에서 우리는 공중부양에 관심이 생기고/그러다 죽은 생선처럼 침울해져서/짧은 질문을 던지지/동사무소란/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된다. 이는 아무도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은 질문이다. 동사무소란 무엇인가? 주민들의 생사와 거주에 관련되는 각종 서류를 떼어 주는 곳이다. 동사무소란 개인의 존재를 증명해 주는 곳이다. 그렇지만 동사무소의 업무 처리는 지극히 단순하고 사무적이다. “동사무소는 간결해/시작과 끝이 명료해/동사무소를 나오면서 우리는/외로운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왼손을 들고/왼발을 들고”라며 허탈해하는 이유는 개인의 존재가 이토록 간명하게 다루어지는 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 때문이다. 제도의 모세혈관에 해당하는 동사무소에서부터 철저하게 기계적으로 처리되는 개인의 삶을 직시하고 이러한 세계의 운용 방식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것이다.
말을 못 알아들으니 죽여도 좋다고 말하던
어느 백인 장교의 명령 같지 않나요
이름 없는 세월을 나는 이렇게 정의해요
아님, 말 못하는 것들이라 영혼이 없다고 말하던
근대 입구의 세월 속에
당신, 아직도 울고 있나요?
오늘도 콜레라가 창궐하는 도읍을 지나
신시新市를 짓는 장군들을 보았어요
나는 그 장군들이 이 지상에 올 때
신시의 해안에 살던
도롱뇽 새끼가 저문 눈을 껌벅거리며
달의 운석처럼 낯선 시간처럼
날 바라보는 것을 보았어요
-허수경,「빌어먹을, 차가운 심장」부분
허수경의 시는 제도의 구성원을 통치의 대상으로만 삼을 때 발생하는 폭력의 메커니즘을 보여 준다. 제국주의는 강압적인 제도 운용의 극단적 형태이다. 단지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무력을 행사하는 폭력적인 지배의 원리가 “근대 입구의 세월”부터 내내 자행되어 왔다. “이름 없는 것들”이라는 이유로, “말을 못 알아들으니”라는 이유로 일방적인 지배를 행사하는데는, 주체와 타자를 가르고 차별하는 근대적 사유가 철저하게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차별로 인해 인간이 자연에 대해, 점령자가 피점령자에게, 자신만의 논리로 명령하고 학살하는 폭력이 가능했다. 무력을 행사하는 장군들은 끝없이 “신시(新市)”를 지으며 자신의 영토를 확장해 왔다. 이러한 전형적인 제국주의의 통치 방식은 아직도 지구상의 한쪽에서 실제 행해지고 있으며 여전히 지배적인 통치술로 변형을 거듭하고 있다. 또 하나의 신시가 건설되는 현장에서 마주친 도룡농의 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달의 운석처럼 낯선 시간처럼” 거리가 먼, 저 무구한 눈은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의 얼굴’처럼 우리의 양심을 찌른다. 저 무방비의 생명과 약자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한 윤리의 무중력 상태, 폭력이 지배하는 디스토피아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된다.
4. 새로운 유토피아를 꿈꾸며
우리 현대시에서 유토피아는 멀고 디스토피아는 가까운 것으로 나타난다. 현실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유토피아에 대한 상상은 막연하고 낭만적이다. 우리 시에서 유토피아는 마음껏 상상해 본 미래의 기획이라기보나 ‘지금, 여기’와는 다른 마음의 안식처이다. 유토피아의 상상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꿈꾸기보다 잃어버린 가치를 되찾으려 한다. 그러다 보니 과거 회귀적이고 자연 지향적인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유토피아를 통해 얻은 것은 미래를 향한 꿈이라기보다 현실의 거부와 마음의 위안이다. 디스토피아의 상상은 더욱 냉철한 현실 인식에 기반을 둔다. 현실의 환부를 살피는 정밀한 시선과 병폐의 뿌리를 간파하는 예리한 판단력이 작용한다. 디스토피아는 환부의 확대로 인해 다소 과장되게 그려지지만 현실의 근본적인 구조, 곧 제도가 그 중핵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포착하고 있다. 유토피아적 상상에서 도피의 대상으로 삼는 것도, 디스토피아적 상상에서 문제의 핵심으로 삼는 것도 모두 개인을 억압하고 지배하는 현실의 제도이다. 현대시의 출발 지점에서 외세와 함께 시작된 근대, 강력한 통치와 함께 진행된 산업화, 급속도로 발전해 온 과학기술은 개인의 자유와 능동적 의지를 압박하며 제도에 대한 거부감을 증폭시켜 왔다. 자발적인 미래 설계와 희망찬 기획을 도모하기에 우리 현대사의 진행은 너무 지난하고 급박했던 것이다. 이런 어려운 시기를 통과하면서도 지속되었던 유토피아를 향한 낭만적 열정과 동경이 갖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최소한의 자유와 안식을 희망하는 소박한 유토피아의 꿈은 그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불만과 부정을 내포한다. 현실의 디스토피아적 재현이 갖는 비판적 기능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제 또 다른 시대가 열리고 있다. 지금까지보다 더 급변하는 현실이 예측된다. 앞으로는 현실 비판에서 멈추지 않고 이상적인 미래를 설계하는 새로운 유토피아 문학을 만나보고 싶다. 앞선 시인들이 그토록 갈구했던 자유를 상상의 영역에서 마음껏 누려 보는 것은 어떨까? 상상은 현실의 산물이지만 또 현실을 이끌어 가는 견인력이기도 하다. 미래는 꿈의 설계에 근간을 둔다. 제도가 그토록 위력적이라면 지금보다 나은 제도를 만들기 위해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지 않을까? 디스토피아에 대한 상상의 비판력과 유토피아에 대한 상상의 기획력이 견인하며 새롭게 열리는 활기찬 시의 신세계를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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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엮으며
창작의 열기나 양적인 면에서 이 땅은 여전히 시의 나라라 할 만 하다. 난숙한 w본주의 하에서도 그와 무관한 시의 생산이 전혀 위축되지 않는 기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덕분에 시 평론가로서 활동을 지속해 왔다. 시대에 역행하면서도 자신의 세계를 펼쳐가는 시인들을 지켜보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자발적 고난을 감수하면서 시의 길에서 멈추지 않는 그들은 이 시대가 결여한 자유와 자존의 지표라 할 만 하다.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며 자신의 길을 고집하는 시인들의 모습은 여러 가지 면에서, 벤야민의 독특한 해석으로 더 유명해진 파울 클레의 그림 속 ‘새로운 천사’와 흡사하다. 파울 클레의 천사는 성화 속의 일반적인 천사들과 전혀 다르게 사자(使者)로서 신이나 인간과 함께 있지 않고 혼자 화면 전체를 차지하고 있다. 화면의 정중앙에서 눈길을 잡아끄는 이 천사는 사람의 머리에 새의 몸을 한 기이한 형상이다.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에 날개까지 달고 있는 보통의 천사들과 달리 파울 클레의 천사는 머리가 몸 전체보다 더 클 정도로 균형이 맞지 않고 어색하다. 새로운 것은 분명하나 불안하기 그지없는 이 천사는 벤야민에게 깊은 인상을 준다. 큰 얼굴에서도 단연코 돋보이는 휘둥그런 눈은 어딘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벤야민은 이 천사의 눈이 역사의 파국을 응시한다고 보았고 화면의 사방을 채운 얼룩을 역사의 잔해라 한다. 그는 더 나아가 이 천사가 지상에 머물며 산산이 부서진 잔해를 끌어 모으려 하나 미래로부터 불어오는 폭풍 때문에 꼼짝하지 못한다고 상상한다.
미래의 폭풍을 등지고 지상에 굳건히 발을 디디려 하는 이 천사처럼 시인들은 시대의 흐름을 좇아가기보다 현재의 고통을 직시하려 한다. 지배자들이 선취하는 진보적 시간에 끌려가지 않고 역사의 흩어진 잔해를 끌어 모아 진실을 파악하려한다. 벤야민이 그런 것처럼 시인들은 시간의 연속성을 의심하고 불연속적인 시간에서 역사의 새로운 진실을 발견한다. 기억은 현재로 호출되어 새로운 시간으로 섬광처럼 발현한다. 박제된 기억에 생명을 불어넣으며 시인들은 기억의 연금술을 행한다. 그들의 눈은 현상과 그 너머까지 꿰뚫어 보려는 의지로 열려 있다. 큰 눈을 뜨고 이 땅의 파국을 견디는 시인들을 ‘지상의 천사’라 불러 보고 싶다.
이 책의 제 1부에서는 시와 현실에 대한 시인들의 본질적인 질문을 살펴본다. 자유와 사랑과 창조를 향한 열망과 고통스러운 삶에 대한 처절한 대결의 양상을 통해 그들의 남다른 정신과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제2부에서는 시간과 관련된 시인들의 다양한 감각과 상상을 만나본다. 객관적 시간의 좁은 테두리를 넘어서는 시적 시간의 광활한 지대를 접할 수 있다. 제3부에서는 필생의 시업을 통해 시인들이 도달한 독자적인 경지를 추적해본다. 오랜 시 세계의 궤적을 따라가 보면 시가 곧 시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제4부에서는 시집의 해설이나 비평을 모은 것이다. 한 권의 시집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나는 개성의 차이를 엿살필 수 있다.
출판을 거듭 추천해 준 (주) 천년의 시작의 편집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책의 제목을 정하는 데 결정적으로 도움을 주고 정성껏 책을 만들어 준 채상우 선생님께도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보잘것없는 책으로 어지라운 세상에 티끌 하나를 더하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2015년 초하
이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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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원 評論集 [※지상의 천사※]
[ 목차 ] -
책을 엮으며
제1부 자유의 이행
• 자유의 이행으로서의 시―김수영의 시
• 새로운 천사와 시민들의 합창―허수경. 심보선. 이영광의 시
• 유토피아, 현실의 원근법
• 고통에 대한 질문으로서의 시
• 사막을 건너는 사랑
• 환상의 시적 가능성―김혜순, 서대경의 시
• 시적 창조의 혈맥
제2부 시간의 이미지들
• 존재의 잔상에 대한 애착
• 죽음을 사는 언어
• 시간의 이미지들
• 상상력은 힘이 세다
• 관계의 탐구
• 사라지는 것들의 흔적
• 시의 꿈과 삶
• 낯선, 시적 순간
제3부 감각의 깊이
• 순은純銀의 감성과 자유의 정신―오탁번의 시 세계
• 경계를 탐사하는 뜨거운 눈―이하석의 시 세계
• 낭만적 비애와 희망의 윤리―정호승의 시 세계
• 감각의 깊이, 상상의 자유―송재학의 시 세계
• 떨림의 시학―장석남의 시 세계
• 미지의 세계를 향한 진지한 놀이―이수명의 시 세계
• 경계의 시학―송준영의 시 세계
제4부 삶과 꿈
• 메멘토 모리―이영광 시집 [그늘과 사귀다]
• 보석, 빛이 된 어둠―문정희 시집 [나는 문이다]
• 따뜻한 기억의 저편―심재휘 시집 [그늘]
• 한 낭만주의자의 겨울 노래―우대식 시집 [단검]
• 말[言]이 절[寺]에 들 때―이선영 시집 [하우부리 쇠똥구리]
• 시간의 흔적을 그리는 활자들―김화순 시집 [시간의 푸른 독]
• 환각과 상상―이인철 시집 [회색병동]
• 무거운 생의 은밀한 꿈―이화은 시집 [미간]
• 삶과 서정의 뿌리―최서림 시집 [버들치]
수록 글 출전
일러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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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며 자신의 길을 고집하는 시인들의 모습은 여러 가지 면에서, 벤야민의 독특한 해석으로 더 유명해진 파울 클레의 그림 속 ‘새로운 천사’와 흡사하다. 파울 클레의 천사는 성화 속의 일반적인 천사들과 전혀 다르게 사자(使者)로서 신이나 인간과 함께 있지 않고 혼자 화면 전체를 차지하고 있다. 화면의 정중앙에서 눈길을 잡아끄는 이 천사는 사람의 머리에 새의 몸을 한 기이한 형상이다.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에 날개까지 달고 있는 보통의 천사들과 달리 파울 클레의 천사는 머리가 몸 전체보다 더 클 정도로 균형이 맞지 않고 어색하다. 새로운 것은 분명하나 불안하기 그지없는 이 천사는 벤야민에게 깊은 인상을 준다. 큰 얼굴에서도 단연코 돋보이는 휘둥그런 눈은 어딘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벤야민은 이 천사의 눈이 역사의 파국을 응시한다고 보았고 화면의 사방을 채운 얼룩을 역사의 잔해라 한다. 그는 더 나아가 이 천사가 지상에 머물며 산산이 부서진 잔해를 끌어 모으려 하나 미래로부터 불어오는 폭풍 때문에 꼼짝하지 못한다고 상상한다.
미래의 폭풍을 등지고 지상에 굳건히 발을 디디려 하는 이 천사처럼 시인들은 시대의 흐름을 좇아가기보다 현재의 고통을 직시하려 한다. 지배자들이 선취하는 진보적 시간에 끌려가지 않고 역사의 흩어진 잔해를 끌어 모아 진실을 파악하려한다. 벤야민이 그런 것처럼 시인들은 시간의 연속성을 의심하고 불연속적인 시간에서 역사의 새로운 진실을 발견한다. 기억은 현재로 호출되어 새로운 시간으로 섬광처럼 발현한다. 박제된 기억에 생명을 불어넣으며 시인들은 기억의 연금술을 행한다. 그들의 눈은 현상과 그 너머까지 꿰뚫어 보려는 의지로 열려 있다. 큰 눈을 뜨고 이 땅의 파국을 견디는 시인들을 ‘지상의 천사’라 불러 보고 싶다.
― 「책을 엮으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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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혜원 평론가∥
∙ 1966년 강원 양양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했다.
∙ 고려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 199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부문에 당선하여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 2003년 김달진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 저서로 [현대시의 욕망과 이미지], [세기말의 꿈과 문학], [현대시 깊이 읽기], [현대시와 비평의 풍경], [적막의 모험], [생명의 거미줄-현대시와 에코페미니즘], [자유를 향한 자유의 시학-김승희론],[ 현대시 운율과 형식의 미학], [지상의 천사] 등이 있다
∙ 현재 고려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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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 마스터 추천글
시인들의 강렬한 개성과 주제 의식을 규명하는 날카로운 이혜원 평론집
이 책의 1부에서는 시와 현실에 대한 시인들의 본질적인 질문을 이혜원 평론가의 특유의 첨예한 시선으로 살펴본다. 자유와 사랑과 창조를 향한 열망과 고통스러운 삶에 대한 처절한 대결의 양상을 통해 그들의 남다른 정신과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2부에서는 시간과 관련된 시인들의 다양한 감각과 상상을 만나 본다. 객관적 시간의 좁은 테두리를 넘어서는 시적 시간의 광활한 지대를 접할 수 있다. 3부에서는 필생의 시업을 통해 시인들이 도달한 독자적인 경지를 추적해 본다. 오랜 시 세계의 궤적을 따라가 보면 시가 곧 시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제4부는 이혜원 평론가가 쓴 시집의 해설과 서평을 모았다.
★ 출판사서평
199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해 김달진문학상을 수상한 이혜원이 2003년부터 2014년까지 썼던 글들을 추린 평론집 [지상의 천사]가 13번 째 시작비평선으로 출간되었다. 등단 후 20여 년이라는 시간 동안 꾸준히 시가 갖는 고유한 색채와 체취를 살피며 한국 현대시에 대한 비평과 연구를 지속해온 이혜원 평론가의 이번 평론집을 통해 시인들의 강렬한 개성과 주제 의식을 규명하고 집중하는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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