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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4월16일(금)맑음
*관측하기 전에는 모든 물체는 그것이 입자인지 파동인지 결정되지 않는 중첩 상태에 있다. 이것을 결맞음 상태라고 한다.
→일념미생전 일체는 미결정 무분별 본래 청정(空) 지금 현재다.
일단 관측이 일어나면 그 물체는 특정 상태로 결정된다. 이것을 결어긋남 상태라 한다.
→한 생각이 일어나면 분별이 생겨나 천차만별 개개 분명 一多相容 主伴重重!
개별 물체란 상호작용이 관측되고 있는 하나의 상태이다. 우주(인간을 포함한)는 물질의 집합이 아니고 사건의 집합이다. 일체는 개별자의 집합이 아니고 관계 연결망이면서 과정이다. 모든 존재는 관계 연결망에서만 그 존재를 기능할 뿐이다.
*(-)만 걸러내면 되지 (+)를 추구하지 말라. 무엇을 버릴까를 생각하지 무엇을 더할까 생각하지 말라. 불필요한 것은 다 버려라. 이것이 述而不作의 정신, 미니멀리즘minimalism이다.
*모든 이야기는 관측에서 시작된다. 관측을 관측하라. 관측이란 다름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비교대상으로 같음을 본다. 즉 다름과 같음을 본다. 相과 非相, 공과 색, 유와 무...을 본다.
관측대상(所見, 境)과 관측(能見, 根)이 서로 연결되어야만 의미를 발생시킨다. 이게 구조론이다. 그러면 축(axis근과 경이 만나는 觸)과 대칭(symetry촉의 찰나, 경과 근의 동시성)이 생긴다. 우주는 이진법binary로 작동한다.
우리는 어떻게 관측하지? 본다는 게 뭐지? 안다는 게 뭐지?
오전11:00 옥종 억조에서 명섭, 명안, 본해스님과 점심 공양, 다섯 보살님도 함께 하다. 날씨 점점 흐려진다.
2021년4월17일(토)맑음
안과 밖, 주관과 객관이 나뉠 수 없는 통째 한 덩어리이다. 매 순간이 전체의 현전한다. 이것은 각자에게 생생히 살아 있는 체험이다. 생생한 체험이기에 매 순간 새롭다. 순간은 정지해 있지 아니하니 이것이라 하면 벌써 이것이 아니다. 순간은 머물지 않아 순간이라 할 것이 없다. 그래서 오히려 순간은 차이이다. 차이의 차이가 생생한 신선함이다. 이것은 현-존재에게 느껴지는 전체적인 체험이기에 버릴 수도 없고 취할 수 없다. 늘 작용하고 있건만, 눈에 띄지 않으니까 이 현-사실에 어둡다. 눈이 어두워지면 전체에서 분리된 나, 個我와 동일시(有身見)하게 되면서 고립계에 갇힌다. 전체가 부분으로 응집된다. 고립계는 전체와 분리되었기에 정체되어 소멸하고 만다. 이것이 엔트로피 법칙이다. 무형상의 自性(우주적인 나, 무경계의 나)이 허공을 꽉 채우며 온 누리를 감싸고 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을 오히려 모른다는 게 신기할 정도이다. 고기가 물을 모를 수 있을까? 새가 허공을 모를 수 있을까? 숨 쉬고 사는 놈이 공기를 모를 수 있을까?
<언어와 문자의 중도>
언어와 문자를 통하여 전달하는 세계 경험은 가상현실이다. 따라서 모든 대화는 각자가 일으킨 환상의 공통점을 찾아 이해시키고 설득하여 합의하는 과정이다. 최선의 대화는 언어와 문자를 매개하지 않은 마음의 직접적인 접속이다. 이것이 以心傳心, mind-to-mind transmission이다. 마음의 소통에는 직접 대면 방식과 간접대면 방식이 있다. 언어와 문자를 매개로 하지 않는 직접 대면은 두 사람(가령 스승과 제자)의 현존과 그 현존을 둘러싼 아우라를 공감한다. 이러한 현존의 공감은 신체적 현존과 신체를 둘러싼 무형의 아우라를 통한 교감이다. 이것은 존재의 계시(하이데거의 용어)이다. 존재가 계시가 감이 잡히면 하나의 표정과 하나의 동작으로도 현존이 공감된다. 양미순목(揚眉瞬目, 눈썹을 찡긋하며, 눈을 깜박이는 것) 행주좌와 어묵동정 낱낱이 마하무드라이다. 간접대면 방식은 언어와 문자(기표)의 수단을 통해 이뤄진다. 르네상스 이후 책이나 문서로 정보의 전달이 이루어져 문명이 급속하게 진보하였다. 이제는 전자부호로 변환되어 인터넷을 통하여 전 지구적으로 실시간 정보가 유통된다. 인터넷을 통해 동시 전체적 소통이 가능해지자 간접대면이 직접대면을 대체 가능할 정도가 되었다. 한편 영적인 각성에 관한 대화는 직접대면과 간접대면이 상보적일 수 있다. 그래서 실상은 언어와 문자를 떠나있지만, 언어와 문자를 빌려 소통하면서 문명을 이끌어 갈 수 있다. 언어와 문자는 언어도단의 실제를 전달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고, 본심의 각성을 격발시키는 촉매 역할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언어와 문자를 방편도구라 하며 문자반야라 한다. 그러므로 언어와 문자는 空이면서 妙用이다. 이러한 관점을 언어와 문자의 중도라 한다. 선사가 세상과 실시간 소통하기 위해서 그가 사용하는 언어와 문자는 항상 최신의 정보를 업데이트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선사는 세간의 최신 정보에 늘 깨어있어야 한다. 선사가 세계 문명에 어떤 기여를 하기 원한다면 언어문자의 연금술사가 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선이 세상에 줄 수 있는 법보시이다.
2021년4월19일(월)맑음
대견스님과 보살 두 분 오셔서 함께 차 마시고 환담을 나누다. 저녁 강의하다. 대견스님 일박하다.
2021년4월20일(화)맑음
경상대 진료 다녀오다.
오후에 부산 반송 길상사 일진선사의 무문관 강의에 참석하다.
참석자: 민재거사와 홍보살
시간:오후 4:20~5:40
<일진선사 법문>
①<고통은 허구이다>
붓다는 삶의 고통이란 문제를 해결하고자 길을 찾아 나섰다. 그 문제의 해결은 바로 해탈이다. 해탈이란 말 그대로 ‘풀려남’인데, 어디에서 풀려남인가? ‘생각의 흐름’으로부터 풀려남이다. 生滅, 일어났다 사라지는 생각의 흐름이 딱 끊어짐으로 말미암아 생각이란 옥죄임(스트레스)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른바 고통의 소멸, 문제의 해결이다. 생각은 언제나 ‘내’가 생각하는 것이기에, 생각의 생산자인 ‘나(에고 중심)’란 고정관념을 수반하고 있다. 생각에 빠져있다는 것은 이미 벌써 ‘나’라는 관념에 사로잡힌 상태이다. 그래서 생각이 끊어질 때 ‘나’도 사라진다. 생각의 흐름이 절단될 때 ‘나’의 돌발스런 부재현상이 일어나면서 법열이 일어난다. 생각에 꽁꽁 묶인 것이 흡사 실타래가 엉긴 것 같았는데 이제 그게 확 풀려버리니 핵심(core)이 문득 사라진 것이다. 마음이란 그릇(마음은 무형상이지만 여기서는 방편적으로 무엇을 담을 수 있는 그릇에 비유한다)에 담긴 내용물이 텅 비워져 버린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붓다가 가르치신 無我(나-없음, 에고-없음)란 가르침이다. 사는 게 괴롭다고 느끼는 주체인 ‘내’가 없어졌는데, 누가 괴로워할 것인가? 이제까지 항상 있다고 믿었던 ‘나’란 관념이 깨지니 얼마나 시원하고 통쾌한가? 이야말로 나-없음이란 사실의 깨침이다. 또 다른 맥락에서 열반경 4구게의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 제행무상, 시생멸법; 생멸멸위, 적멸위락과 상통한다. 다시 말해서 ‘생멸(생각의 일어남과 사라짐, 생각의 흐름)이 사라지니(滅而, 끊어지니), 지극히 고요해서(寂滅) 맑은 기쁨(爲樂)이더라.
무아를 달리 말하면 이기적 자아에서 벗어남인데, 이것이 자비로 발현된다. 기독교의 아가페적 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②<불행하다는 그 생각을 보라! 행복 찾기를 쉬라>
현대인은 왜 줄기차게 행복을 추구할까요? 현재의 자신이 행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지금 당신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행복을 추구할수록 행복에서 멀어집니다. 참 아이러니하지요. 자신에게 이미 있는 행복을 느끼지 못하니까 밖으로 행복을 찾아다닙니다. 안에서 찾지 못한 행복을 밖으로 찾아다니니, 집안의 샘물을 놔두고 바깥에서 물을 찾아 사방으로 헤매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행복을 찾는다는 말은 행복이란 어떤 것일 거라는 생각(희망이나 기대, 환상과 같은 관념)에 휘말린 것입니다.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 나는 불행하다, 나는 외롭다, 나는 무료하다, 욕구불만이다, 부족하다, 걱정된다...라는 현재의 생각이 자신을 사로잡아 끌어갑니다. 내가 만들어낸 생각이 나를 끌고 갑니다. 자기 생각에 자기가 걸려 넘어진 것이죠. 자기가 만든 생각에 자기가 갇혀서 울고불고해요. 이걸 깨달으면 우리의 삶이 참 우스꽝스럽죠. 나는 불행하다, 나는~~어떠, 어떠하다는 생각이 모두 망상인 줄 알면, 저절로 그 함정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최근 어떤 TV드라마 <나의 아저씨> 가운데 하나의 대사가 떠오릅니다. ‘너부터 행복해라, 제발, 뻔뻔하게 너만 행복해도 돼, 돼, 돼’
③女人出定話에 대해: 공안이 제시될 때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첫째, 깨닫지 못한 사람을 위해서는 생각을 잘라버림으로 당장 면전에 이것!을 드러내어 깨닫게 해준다. 둘째, 깨달은 사람을 위해서는 殺活의 방편을 열어주는 차별지를 지시하기 위함이다. 자, 선정에 들어있는 여인을 문수보살(지혜의 화신이므로 최고수준의 보살)은 깨울 수 없었는데 망명보살(초급단계의 보살)이 깨울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런 종류의 화두는 사람에게 그물을 확 던져서 꼼짝달싹 못 하게 만든다. 여기서 왜 그렇지, 뭐지, 어떻게, 어쩔까, 이렇게 생각을 굴리다간 바로 목숨을 잃는다. 화두라는 이야기 줄거리에 말려들면 바로 죽는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그 연극에 빠져들지 말고 화두를 묻는 당사자에게 바로 대들어야 한다. 던져진 화두를 딱 잡아 되돌려 던져라. 마치 투수가 던진 공을 타자가 되받아쳐서 투수에게 되돌려주는 것처럼. ‘지금 그 여인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되물어야한다.
④조사어록은 미래불교를 위한 데이터베이스가 될 수 있다. 그것은 인류의 영적 자신이다. 조사들은 한마디 말로써 인간의 마음을 순간적으로 쉬게 만든다. 조사의 지혜에서 번개처럼 번쩍이는 한마디는 (가닥이 잡히지 않아 의론 분분한, 결론이 나지 않는)희론을 적멸시켜 안심과 휴식을 가져온다.
조사의 한마디는 촌철살인이며 단도직입이다.
대치상태나 소강상태에 들어있는 국면을 전면적으로 전환시키는 일전어一轉語!
혼란이나 무각성 상태, 고정관념에 빠진 심리에 충격을 주어 일거에 관점을 바꾸게 만드는 일전어!
우리는 조사어록에서 이러한 일전어의 지혜를 발굴해낼 수 있다. 이것이 현대의 선사들이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는 법보시이다.
⑤지금에 무슨 뜻이 있는가?
절대현재는 미래도 아니고 과거도 아니고 지금도 아니다. 절대 현존. 당장 안심이다.
이것은 인간이 누리는 원래의 휴식이며 행복이다.
텅 빈 마음!
그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무한한 자유!
인간은 본래 자유이다. 이것이 미래불교의 영적 비전이다.
⑥독일의 신비주의 신학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가 이렇게 고백했어요.
‘신으로부터 자유롭고자 신에게 기도한다.’
‘생각이 그만두는 곳에서 사랑은 시작된다.
Die Liebe beginnt da, wo das Denken aufhört.’
유발 하라리(Yuval Harari, 1976~)는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불만스러워하며 무책임한 神들! 이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있을까?’ 창조주 야웨가 주인인 나라 이스라엘의 지식인 유발 하라리가 말하길 창조주 하느님이 자기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천지를 창조하고 아담과 이브를 만들어냈는데, 그 아담과 이브가 자기 말을 듣지 않았다고 불만스러워 벌을 주고 에덴동산에 쫓아버렸으니, 이 얼마나 무책임한 신인가! 그런 신이 아직도 세상에 개입하여 온갖 간섭을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라고 비꼬며 비판한 것이다.
⑦1987년 깨닫고 나서 반야심경을 보는 안목이 환히 열리다.
照見五蘊皆空 조견오온개공 度一切苦厄도일체고액에 대해: 고의 무더기, 苦蘊고온은 생각의 굴레, 생각에 묶임, 생각에 얽힘이다. 조견오온은 생각의 묶임(苦聖蹄고성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생각의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滅聖諦멸성제). 생각 밖으로 나가는 즉시 모든 고통은 사라진다. 사실 죽음이란 것도 생각이기에 생각을 벗어나면 죽음이란 것도 없다. 죽었다 살았다는 것은 하나의 관념이다.
죽음을 앞둔 비구 바칼리 존자가 죽기 전에 부처님을 한번 뵈었으면 하는 소원을 전해 들은 부처님이 병문안을 왔다.
“바칼리여, 늙은 여래를 본들 무엇 하겠는가? 나를 보려거든 법을 보아라.
법을 보는 이는 나를 항상 보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언젠가 허물어져 버릴 이 몸을 보려 애쓰기보다 내가 가르친 법을 이해하고 법을 깨닫는 것이
내 몸을 보는 것보다 진정으로 수승하다.”
죽음, 고통, 윤회....이런 관념은 모두 자기가 만든 것이다. 에고의식이 투사해낸 그림자이죠. 생각이란 그림자! 거기에 놀아나지 마세요. 생각의 틀을 벗어나세요. 父母未生前 本來面目부모미생전 본래면목(부모가 낳아주기 전 본래 존재)이 그것입니다. 이 본래면목, 본래의 빛을 통해서 진정한 사랑과 평화가 펼쳐집니다. 본래면목은 우주의 생명입니다. 본래의 빛(本地風光 본지풍광)이 인류 공생공영의 길을 밝힙니다.
⑧무문관 제38칙 소가 창문을 통과하다(牛過窗櫺우과창유).
五祖曰,
譬如水牯牛過窗櫺,
頭角四蹄都過了,
因甚麼尾巴過不得.
오조(五祖)가 말했다.
“비유하면 물소가 격자 창문을 통과할 때
머리와 뿔, 네 발굽은 모두 지나갔는데
어째서 꼬리는 지나가지 못했는가?”
일진선사 강의: 선사의 말은 생각에서 벗어나게 해주기 위해 생각에 걸리게 만든다. 머리와 뿔과 네 발굽이 지나갔네, 아니네, 꼬리는 왜 지나가지 못했지, 이렇게 망상을 굴리고 있으면 바로 그 생각에 걸린 것이라. 꼬리가 영원히 창문을 지나갈 수 없다.
【無門曰】
若向者裏, 顛倒著得一隻眼, 下得一轉語,
可以上報四恩, 下資三有.
其或未然, 更須照顧尾巴始得.
무문은 말한다.
만약 이 말 속의 망상을 바른 안목으로 바라보고 한마디 알맞은 말을 할 수 있다면,
위로는 네 가지 은혜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삼계에 보탬이 될 것이다.
만약 그러하지 못하다면 마땅히 다시 꼬리를 잘 살펴봐야만 할 것이다.
일진선사 강의: 照顧尾巴조고미파에서 照顧조고란 看(볼 간 字)과 같다. 본다는 뜻이다. 看話간화는 화두를 본다는 말이다. 화두를 살펴본다는 단순한 말이다. 화두에 대한 의심을 지어서 일념으로 만든다는 뜻은 애초에 없었다. 그러던 것이 화두에 대한 의심을 일으켜 한 덩어리로 만들고 오매불망하게 애쓰다가 어느 날 시절인연이 오면 툭 깨닫는다고 말한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믿음이냐? 시절인연을 기다릴 것이 뭐 있느냐? 선지식의 가르침을 듣고 바로 그 자리에서 깨달으면 될 것인데, 생각으로 지어낸 의심이 타파되기를 기다린다니 똥을 자꾸 묻히면서 똥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짓이 아닌가?
【頌曰】
過去墮坑塹, 回來卻被壞.
者些尾巴子, 直是甚奇怪.
[무문의 송]
창문을 통과하면 구덩이에 떨어지고
되돌아가면 도리어 부서질 것이다.
이 하찮은 꼬리란 놈이
참으로 매우 기괴하구나!
일진선사 강의: 구덩이란 함정이다. 창문을 통과했다 하더라도 함정에 빠진 것이요, 되돌아간다 해도 네 몸이 부서질 것이다. 꼬리란 놈이 기괴하구나. 무엇이 꼬리인가?
이것은 선사가 양변을 막아(雙遮 쌍차, 앞으로도 뒤로도 못 가게 양쪽을 막아) 생각을 끊어버리는 수단이다. 학자를 죽이는 방편(殺人劍살인검)이다.
[김태완 선생의 군소리]
지나간 것을 의심치 말고
못 지나간 걸 고민치 마라.
소가 지나가든 못 지나가든
너와 무슨 상관이 있으랴?
일진선사 강의: 이것은 선사가 양변을 열어주어(雙照쌍조) 학자를 살리는 방편(活人刀)이다. 김태완 선생의 군소리는 시원하고 담박하다.
<식당에서 담화>
민재거사: 일진스님이 말씀하신 오뚜기가 되라는 말이 마음에 확 들어왔어요. 마음은 오뚜기와 같아 번뇌에 흔들려도 금방 제자리로 돌아와 똑바로 서게 되지요. 그러면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져요.
일진선사: 오히려 번뇌를 가지고 논다고 할 수 있어요. 번뇌가 번뇌가 아니라 그 이름이 번뇌일 따름인 거죠. 그래서 ‘煩惱卽 菩提 번뇌즉 보리’라고 한 겁니다.
원담: 선사의 일전어는 판을 바꾸고 물을 바꾼다. 물이 흐려졌을 때 새로운 물을 위에서 들이붓거나 물밑에서 샘물이 솟아나야 한다. 지금 기성불교는 물밑에서 샘물이 솟아나든지, 바깥에서 새 물이 흘러들어 오든지 해야 맑아질 것이다. 예로부터 주변부에서 중심으로, 저류에서 주류로 새로운 에너지가 흘러들어 세상이 변해 왔다. 외부와 에너지를 주고받을 수 없는 고립계는 소멸하기 마련이다. 어떤 단체나 사회도 고립되면 지속가능 하지 않다. 한국 선불교의 장점은 현장성, 즉흥성이다. 실타래처럼 얽힌 현실 상황을 일거에 확 바꾸는 즉흥적인 한마디, 그 현장에 딱 맞게 대중의 마음을 확 깨어나게 하는 한마디는 한국 선의 맵싸한 맛이다. Korean Seon is spicy. 한국 선은 똑 쏘는 맛이다. 숭산선사가 보스톤에서 대학생들의 인기를 끈 이유도 바로 한국 선의 그런 맛 때문이었다. 현재 구미에서는 일본 선과 티베트 족첸은 어느 정도 보급되어 정형화된 선문답은 행해지고 있다. 그러나 즉흥적이고 즉발적인 번쩍이는 禪機선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일진선사처럼 틀에 매이지 않는 촌철살인, 刺瞳開眼자동개안(눈동자를 찔러 안목을 바꿈)의 일전어를 뱉어낼 수 있는 선사가 귀하게 여겨지는 시절이 올 것이다. 시대를 이끄는 선사가 되려면 세상에 유통되는 최신 정보를 늘 업데이트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시기와 상황에 맞는 禪智선지, 선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 선사는 새로운 언어를 창조해야 한다. 새로운 말을 만들어내 세상을 일깨워야 한다. 誌公지공화상의 대승찬에 言語卽是大道언어즉시대도라 했다. 언어가 곧 큰길이라는 말이다. 큰길, 넓은 길, 세계인이 다 함께 소통하는 길, 그것은 정보사회의 인터넷이 아닌가? 세계가 일시에 한마음으로 접속되는 시대가 왔다. 언어라는 도구로 복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선의 미래이다. 미래의 선사는 언어의 연금술사이며 언어 유희의 달인이 될 것이다.
현재 한국사회는 보수와 진보, 여성과 남성, 청년과 노년, 빈자와 부자, 서울과 지방, 둘로 쪼개진 이분법의 관념에 찌들어 있다. 한국의 보수와 진보는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 복지사회와 4차 산업혁명 뒤에 올 미래에 대한 담론이 없다. 이분법에 갇힌 판 안에서 양쪽이 서로 자리를 바꾸어본들 똑같은 판이 되풀이되는 재판이 될 것이다. 판을 바꾸어야 활로가 열린다. 이분법을 넘어 조망하는 관점이 요구된다. 1:1 일대일이 아니라 1:1(일대일은 1과 또 다른 1이 갈라졌기에 이것을 2라고 표기한다)을 굽어보는 3의 관점을 가져야 한다. 어떤 것이 3의 관점인가? 不二의 中觀이다. 不二中道의 정치란 어떤 것인가? 불이중도로 보는 한국의 미래는 어떤가? 이런 것을 밝히는 것이 살아있는 지혜, 활발발 지혜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