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지 가을호 반경환 {사상의 꽃들}에서
성호를 긋다
허 이 서
어긋난 방향으로 흘러왔을 땐
늘 그러하듯 十字였다
다시 구름을 허공에 풀어놓으며
못 박힌 것들의 통증을 배회하였다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십자가가 인류의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끔찍한 고문도구였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그 십자가를 예수와 동일시하며, 무한한 찬양과 존경을 바치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자는 너무나도 크나큰 범죄를 저지른 중죄인이며, 피해자의 원한 맺힌 저주감정에 의해서 그 가해자에 대한 고문도구로써 십자가를 창출해냈던 것이다. 그가 신성모독자로서 종교의 권위에 도전했든지, 내란이나 혁명으로 전제군주의 절대권력에 도전했든지, 또는 사회적 천민으로서의 무차별적인 대량살상의 범죄를 저질렀든지 간에, 그 중죄에 반하여, 단번에 목을 잘라버린다는 것은 가해자에 대한 피해자의 보복심리(분노)가 해소될 수 없는 것이었다. 십자가는 고문도구이자 사형장치이며, 그토록 잔인하고 끔찍한 고문을 가함으로써 두 번 다시 그와도 같은 범죄를 예방하고 근절하겠다는 고대사회의 형벌제도의 의지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오늘날의 십자가는 왜, 그 형벌제도의 의지에 반하여 그토록 신성한 상징이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고 끊임없이 존경과 찬양을 바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부유한 자, 힘 있는 자, 지배하는 자’의 가치관을 전복시키고, ‘가난한 자, 힘 없는 자, 지배당하는 자’의 편에 서서 부의 공정한 분배와 만인평등을 외치던 예수가 너무나도 부당하고 억울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갔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은 민주주의 사회이며, 민주주의 사회는 사회적 천민들이 모든 귀족들을 몰아낸 사회라고 할 수가 있다.
허이서 시인의 「성호를 긋다」는 그의 꿈과 희망과는 다르게, 언제, 어느 때나 최악의 나쁜 패만을 잡는 자의 절규라고 할 수가 있다. 이자와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삶도 있을 수가 있고,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 바치고도 수많은 배신과 음모에 빠져 허우적대는 삶도 있을 수가 있다. 손에 잡힐 듯, 손에 잡힐 듯하다가 이내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꿈과 희망도 있을 수가 있고, 언제, 어느 때나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도 못한 삶’도 있을 수가 있다.
현대사회는 피로의 사회이며, 소수의 부자를 제외하고는 만성적인 우울증과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인간 사회로부터 더욱더 인간을 고립시키고, 인공지능과 드론과 로봇이 모든 좋은 일자리를 다 빼앗아 간다. 고통이 고통을 부르고, 고통이 고통을 가중시키며, 그 모든 꿈과 희망을 다 잡아먹고, ‘죽는 것보다 더 못한 삶’을 위하여 아무런 의미도 없는 ‘십자가’를 지게 한다.
허이서 시인의 「성호를 긋다」는 예수 찬양의 종교와는 다르게, 정의와 진리의 신인 예수의 목을 비틀고, ‘무신론자’의 최후의 절규를 노래 부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긋남과 어긋남의 방향으로만 교차하는 십자가, 동서남북의 모든 출구를 다 붙들어 매버린 십자가, 이익과 이익을 둘러싸고 부모형제와 친구와 모든 이웃들과 동포들과 피투성이 이전투구를 벌이게 하는 십자가 ―. 일찍이 예수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존재한 적도 없었으며, 따라서 예수라는 가공의 존재가 뜬구름과 뜬구름 속의 허공을 헤매는 우리 인간들을 구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십자가, 고통과 고통 속의 “못 박힌 것들의 통증”을 대변하는 십자가 ―. “오, 주여,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지 마시고, 하루바삐 이 고통에서 헤어날 수 있게 해주서!”
소위 고문의 도구이자 사형장치였던 십자가가 예수와 목사와 소수의 위선자와 사기꾼들만을 위한 십자가가 되었다는 것, 바로 이것이 모든 기독교의 진정한 모습이자 그 도덕적 위선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허이서 시인의 「성호를 긋다」는 ‘목숨을 긋다’와도 같고, 이기주의의 최종적인 형태인 자본주의의 조종弔鐘 소리와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