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國誌] 462
■ 2부 장강의 영웅들 (118)
제7권 영웅의 후예들
제 15장 진(晉), 초(楚) 협정 (1)
도읍을 신전(新田)으로 옮기고 조씨(趙氏) 일족을 멸문시킨 이후 진경공(晉景公)은 어느 정도 자존심을 회복했다.
'공실의 위세와 힘을 되찾았다.'
이렇게 생각했다. 실제로 극씨, 난씨, 순씨 등 귀족, 대신들의 움직임은 상당히 위축되었다.
조씨 일문을 멸족시킨 지 2년쯤 지난 어느 날, 진경공(晉景公)은 새도읍인 신전 내궁에 큰 잔치를 베풀고 여러 대신을 불러 대접했다.
해가 지고 실내가 어둑어둑해졌다.
"촛불을 밝혀라!"
취흥이 한껏 고조된 진경공은 호기롭게 명했다. 시종들이 들어와 등촉에 불을 밝히려 할 때였다.
문득 일진 광풍이 내궁 안으로 몰아쳐왔다.
바람은 음산하고 차가워 실내에 있던 사람들은 추워서 몸을 떨 정도였다. 모두들 괴상하게 생각하는 중에 괴상한 바람은 사라졌다.
순간, 진경공(晉景公)은 이상한 것을 보았다. 내궁 문이 열리면서 8척이 넘는 장정 하나가 불쑥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장정은 쑥대밭처럼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있었고, 두 눈에서는 피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진경공(晉景公)이 생각하기에도 귀신이 분명했다. 쑥대머리의 귀신은 긴 팔을 휘저으며 진경공 앞으로 다가오더니 대뜸 꾸짖었다.
- 내 자손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너는 내 자손을 다 죽였느냐? 내가 옥황상제께 품하여 너를 잡으러 왔도다!
말을 마치자 귀신은 소매 속에서 구리 쇠망치를 꺼내어 진경공을 향해 휘둘렀다.
기겁한 진경공(晉景公)이 칼을 뽑아들고 귀신을 내리치며 좌우 신하들에게 외쳤다.
- 모든 신하들은 과인을 구하라!
그러나 신하들은 진경공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의 눈에는 귀신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귀신을 향해 마구 칼을 휘두르던 진경공(晉景公)은 실수하여 자신의 손가락을 잘랐다. 때를 놓치지 않고 귀신의 구리 쇠망치가 진경공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아악 -!"
진경공은 피를 토하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잔치는 엉망이 되었다.
시종들이 달려들어 진경공을 부축해 침실로 데리고 갔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진경공(晉景公)은 긴 숨을 토하며 깨어났다.
"주공께선 어인 일로 쓰러지셨습니까?"
난서, 극기 등이 물었다.
"경(卿)들은 봉두난발의 귀신을 보지 못했소?"
"신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어찌해서 그 귀신이 내 눈에만 보였을까?"
그 뒤로 진경공은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웃음을 잃어갔고, 병이 점점 깊어갔다.
진경공을 섬기는 자 중 한 시종이 아뢰었다.
"듣기로, 상전(桑田)에 용한 무당이 있다고 합니다. 그 무당은 대낮에도 귀신을 불러내어 얘기를 나눈다고 합니다. 한번 불러서 물어보십시오."
진경공(晉景公)은 귀가 솔깃하여 상전으로 사람을 보냈다.
상전(桑田)은 글자 뜻대로 풀이하면 뽕나무밭이다. 당시는 잠업(蠶業)이 성행했기 때문에 성읍마다 주변으로 뽕나무밭이 많았다.
그래서 각 나라마다 상전이라는 지명이 있다. 여기서 상전은 지금의 하남성 영보현 일대를 말한다.
상전(桑田)에 사는 무당은 진경공의 부름을 받고 신전으로 달려왔다. 내궁의 침실로 들어온 그는 진경공의 얼굴을 보자마자 자신있게 말했다.
"주공께서 병이 드신 것은 귀신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귀신의 생김새를 말해보아라."
"키는 8척이 넘으며 머리는 쑥대처럼 헝클어져 바닥까지 닿을 정도 입니다."
진경공(晉景公)은 놀랐다.
"네 말이 내가 본 귀신과 추호도 다르지 않구나. 그 귀신은 나를 보고 '죄 없는 내 자손을 죽였다' 라고 화를 내었다. 대체 어떤 귀신인가?"
무당은 눈을 감은 채 입술을 달싹이고 나서는 대답했다.
"그 귀신은 진(晉)나라 선대부터 공훈을 많이 세운 신하입니다. 그 자손들이 참혹한 화를 당했기에 그렇듯 노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씨 일문이 아닌가?"
진경공이 흠칫 놀라 몸을 떠는데, 곁에 있던 도안가(屠岸賈)가 얼른 끼어들었다.
"이 무당은 조씨의 문객이었던 자가 분명합니다. 조씨 일족을 신원(伸寃)하려고 일부러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주공께서는 이 무당을 믿지 마십시오."
진경공(晉景公)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그 귀신을 쫓아버릴 수가 있느냐?"
"귀신은 매우 노하고 있습니다. 저의 능력으로는 쫓을 수 없습니다."
"그럼 나는 어찌 되겠느냐?"
"사실대로 말씀 올리겠습니다. 주공께선 새로 나오는 햇보리를 맛보지 못하실 것입니다."
이때가 초여름인 5월. 보리는 6월에 나온다. 그러므로 무당 말대로라면 진경공(晉景公)은 한 달도 채 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도안가(屠岸賈)가 눈을 부릅뜨고 무당을 꾸짖었다.
"너는 다음달 안에 새 보리쌀이 나온다는 것을 모르느냐! 주공께서 이렇듯 정신이 말짱하신데, 네가 감히 요망한말로 주공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것이냐?
만일 주공께서 햇보리를 잡수시게 되는 날엔 네 목이 달아날 줄 알아라!"
그러고는 무당을 옥에 가두었다.
그 후로 진경공(晉景公)의 병은 점점 더 악화되었다.
명의라는 명의를 다 불러 진맥을 했으나 아무도 그 증세를 알지 못했다. 그런 중에 대부 위기(魏錡)의 아들 위상(魏相)이 여러 대신들에게 말했다.
"진(秦)나라 태의(太醫) 중에 고완(高緩)이라고 하는 유명한 의원이 있다고 합니다.
고완은 편작(扁鵲) 선생의 제자로서, 능히 음양의 이치에 달통하고 안팎의 병을 치료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한번 청하여 진맥케 함이 어떻겠습니까?"
"그런 의원이 있다는 걸 알았으면 진작 말했어야 하지 않는가?"
"진(秦)나라는 대대로 우리와 원수간 이었습니다. 과연 그들이 우리를 위해 태의(太醫)를 보내줄지 몰라 주저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도 그렇군. 하지만 어쩌겠소? 가서 진공(秦公)을 설득할 수밖에."
대신들은 위상을 사신으로 임명하여 진(秦)나라로 보냈다.
위상(魏相)은 옹성으로 들어가 진환공(秦桓公)을 찾아뵙고 청했다.
"불행히도 우리 주공께서 몹쓸 병에 걸렸습니다. 귀국에 고완(高緩)이라고 하는 신의(神醫)가 있다기에 달려왔습니다.
바라건대, 군후께서는 우리 주공을 위해 고완을 보내주십시오."
진환공(秦桓公)이 싸느랗게 대답했다.
"지금까지 진(晉)나라는 아무런 이유없이 우리 진(秦)나라를 수없이 괴롭혔다. 내가 어찌 진(晉)을 위해 우리나라의 명의를 보내줄 수 있겠는가?"
위상(魏相)은 당차고 화술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과감하게 진환공을 설득했다.
"그 말은 옳지 못합니다."
진(秦)과 진(晉)은 이웃한 나라다. 대대로 인척 관계도 맺어왔다. 비록 사소한 오해가 있어 두어 차례 군사 충돌이 있었긴 하지만, 곧 오해가 풀려 우호를 맺곤 하였다.
설사 그것이 아니더라도 이웃이 불행하면 따뜻한 마음을 베푸는 것이 군자의 도리다. 의원이란 누구를 막론하고 사람의 목숨을 살리려는 마음이 있다.
그런데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로서 의원의 그런 행동을 막는 것은 결코 밝은 군주라 할 수 없다.
위상(魏相)은 이런 내용으로 웅변을 토했다.
말에 힘이 있었고, 조리가 분명했다. 진환공(秦桓公)은 위상(魏相)의 웅변에 마음이 움직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리에서 일어나 공경의 뜻을 표했다.
"내가 이제야 밝은 군주의 길을 알았소."
그러고는 태의 고완(高緩)을 불러 진나라로 가 진경공의 병을 치료하라 지시했다.
🎓 다음에 계속........
< 출처 - 평설열국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