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선을 베풉시다. 아주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빠다킹신부
규정, 판단, 자유와 사랑과 해방의 하느님
-이성우-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랍니다. 왜 놀랍니까? 그것이 꼭 놀랄 일인가요?
그 순간 그는 바로 예수님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정결법을 따르지 않는, 하느님 앞에 부정한 자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스스로가 정해놓은 규정들이 많기도 합니다. 누구누구는 꼭 이래야 한다는 규정을 많이 만들어놓고 나도 지키고 다른 사람도 지키기를 강요합니다.
그 규정을 누군가가 어기면 우리는 바로 그를 판단하고 죄인으로 치부합니다.
우리가 정해 놓은 규정들이 하느님께서 꼭 원하시는 사랑입니까? 정해 놓은 규정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규정을 정한 본래의 취지는 잊어버리고 형식만 남게 됩니다. 어느 순간 형식이 본래의 취지보다 중요하게 되어 그것이 바로 나와 타인을 재는 잣대가 되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자유와 사랑과 해방의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그 어느 누구보다 자유로운 분이셨습니다. 사랑이 크면 클수록 자유롭게 됩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사랑은 커지고 경계는 없어집니다.
나에게 지금 나와 타인을 저울질하는 잣대가 얼마나 많은가를 보면, 나는 하느님과 어느 정도의 거리에 있는지 가늠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내 안의 잣대는 느슨해집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나와 타인을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도록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분위기 반전
-김정대 신부-
전례 형식에 집착하다 보면 전례를 통한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놓칠 수 있다. 부제서품을 앞두고 호주에서 지내던 어느날 예수회 어느 성당에서 미사참례를 했다. 이탈리아 출신들이 많은 공동체라 그런지 평일미사인데도 제법 많은 사람이 왔다. 주로 연세가 지긋한 여성들이었지만 간혹 젊은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그 중 서너 살 정도의 아이를 데리고 온 사람도 있었다. 미사가 시작되고 신부님이 강론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한 아이가 아장아장 걸어 중앙으로 나오더니 제단 아래 꾸며진 장식 앞에서 신기한 듯 쳐다보며 그 앞에서 뒹굴며 놀았다. 아이의 엄마는 당황스러워했고 또 여러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아이를 데리고 들어가려고 부리나케 달려나왔다. 그런데 강론 중이던 신부님은 오히려 편안한 말로 그 엄마에게 말했다. “나는 괜찮습니다. 나는 아이에게 전혀 방해받지 않습니다. 그냥 두세요.” 그 신부님은 아이 엄마에게 면박을 주는 것이 아니라 어색한 분위기를 사랑으로 감싸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나는 그날 신부님의 넉넉한 마음을 통해서 하느님의 넉넉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전례에 엄숙함만 있고 이런 사랑이 없다면 전례 안에서 무엇을 상상하고 배울까? 바쁘게 미사참례를 하고 생업에 나가야 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절박함을 무시하고 단지 겉으로 드러난 옷차림만 보고 신앙심이 없다고 판단하지는 않는가? 엄숙함이라는 형식도 중요하겠지만 본질인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볼 수 있는 형식도 매우 중요하다.
손씻기 또는 사랑하기
-이회진신부-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에서는 사람들이 외출하였다가 집으로 돌아오게 되면,
자신의 손과 발을 씻어야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어머니들이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밖에 나갔다 돌아오면
손을 씻으라고 말하듯이 그것은 위생적인 이유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이것을 하나의 율법의 한 규정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제는 어머니가 아이들 건강을 위해 손을 씻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식사를 할 자격, 더 나아가 하느님 앞에 인간다운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정결례에 관한 율법을 비난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단지 바리사이들의 마음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지켜야 할 정결례에 관한 법만을 생각하지
가난한 이들의 삶의 고단함에 대해서는 고려하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에게 말합니다.
“그릇 속에 담긴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루가 11,41)
이것은 “올바르게 자선을 베푸는 방법”에 대해 분명하게 선을 긋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식탁(식사, 먹을 것, 생명)”의 의미에 대해 알고 실천해야지
하느님 앞에 인간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지,
손을 씻고 식탁에 앉았다고 해서
하느님 앞에 인간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것에 대해 오늘 제 1 독서에서 이렇게 단적으로 말합니다.
“오직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만이 중요합니다.”(갈라 5,6)
다시 말해 사랑으로 표현되고 사랑에 따라 행동하는 마음이 있을 때,
오히려 하느님 앞에서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루가 11,41)입니다.
손 씻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까이는 그 식탁에서 나누어지는 사랑의 표현들이며,
더 나아가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것과 하느님의 뜻을 기억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주님, 제 안에 담긴 마음이 당신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하겠죠? 그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 차게 하소서. 아멘.”
사랑의 샘
-이수철신부-
중요한 것은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입니다.
본말전도(本末顚倒)의 우를 범하지 않는 것이 지혜입니다.
본질적인 것을 살 때 삶은 단순해지고 진실해 집니다.
본질적인 것을 살지 못하는 한 복잡한 삶에 자유는 요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을 식사에 초대하는 바리사이,
부수적인 것에 사로잡혀있는 자유롭지 못한 이들의 전형입니다.
규칙준수에 충실한 많은 수행자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한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는 것을 놀랐다 합니다.
얼마나 철저한 율법 준수의 바리사이인지 알게 됩니다.
사태의 진상을 파악한 주님의 본질을 잡아내는 말씀입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을 만들지 않으셨느냐?”
과연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들은 몇이나 될 런지요?
정작 중요한 본질적인 것은 겉이 아니라 속입니다.
잔과 접시의 겉뿐만 아니라 속의 내용도 깨끗해야 하듯이
밖의 외모뿐만 아니라 속의 마음도 깨끗해야 합니다.
요즘 수도원에 선물로 들어온 것들의 포장을 보면
낭비와 사치의 극치에 저절로 탄식하게 됩니다.
속의 내용보다 겉의 포장으로 인한 낭비가 너무 큰
외화내빈(外華內貧)의 모습 때문입니다.
예전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의,
“겉옷보다는 속옷이 깨끗해야 하고,
속옷보다는 마음이 깨끗해야 한다.”는 말씀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이들을
그리스도와 인연이 끊긴 자들이요 은총에서 떨어져 나간 자들이라
크게 질타하고 있습니다.
좌우간 무엇엔가 매여 외적으로 치우치다보면 자유롭기는 참 힘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합니다.
하여 율법이 아닌 성령을 통하여
믿음으로 의로워지기를 간절히 희망해야 하겠습니다.
성령을 통한 믿음의 삶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무엇을 지키고 안 지켰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사랑을 끊임없이 나누는 삶이 우리 마음을 깨끗이 하고 자유롭게 합니다.
마치 샘물을 계속 퍼낼 때 늘 신선한 샘물이 되는 이치와 똑같습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끊임없이 사랑을 나눔으로 이루어지는 깨끗한 마음,
바로 끊임없이 샘솟는 ‘사랑의 샘’과도 같습니다.
좋으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마음속을 깨끗이 하시고
‘사랑의 샘’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아멘.
겉(表)과 속(裏)
-강영구신부-
+너희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닦아놓지만 속에는 착취와 사악이 가득 차있다. 이 어리석은 사람들아, 겉을 만드신 분이 속을 만드신 것을 모르느냐?
그대에게
저는 늘 저의 표리부동(表裏不同)을 고민합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지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너희에게 나타나지마는 속에는 사나운 이리가 들어있다. 너희는 행위를 보고 그들을 알게 될 것이다.”(마태7,15-16)
저는 양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리와 같이 착취와 사악이 가득한 엉터리 사제가 아닌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차라리 늑대의 모습이지만 착하고 순한 양처럼 말하고 행동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겉을 만드신 분이 속도 만드셨습니다.
겉은 속을 담는 그릇입니다.
겉모습은 사람이 봅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속을 모르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의 겉모습을 보고 환호하거나 박수갈채를 보냅니다.
혹은 겉모습만 보고 욕하거나 비난합니다.
속모습은 하느님께서 봅니다.
속모습이 아름답고 향기로운 사람은 아름답게 살고 향기롭게 말하고 행동합니다.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겉모습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지 않습니다.
속모습이 아름답고 향기로운 사람들이 세상을 아름답고 향기롭게 만듭니다.
겉모습보다 속모습이 아름다운 이지선양의 이야기 ‘지선아 사랑해!’(이레)를 한 번 읽어보시겠습니까?(一明)
"나의 것이 이웃을 향해 흐르는 깨끗한 삶을 유지합시다."
-홍성만 신부-
오늘 복음은, 초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식사에 앞서 손을 씻지 않으시는 주님을 보고 놀라워하는 바리사이에게 하시는 말씀이 전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너희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닦아 놓지만 속에는 착취와 사악이 가득 차 있다. 이 어리석은 사람들아, 겉을 만드신 분이 속도 만드신 것을 모르느냐? 그릇 속에 담긴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모든것이 다 깨끗해 질 것이다."(루가11,39-41)
예수님께서는 지금 깨끗하다는 의미를 겉에 두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상태가 어떠하냐에 두고 계십니다.
우리는 가끔 '저 사람은 참으로 곱게 늙었다. 저 사람은 추하게 늙었다'하고 말을 듣기도 하고 또 하기도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생전의 깨끗한 삶의 내용이, 혹은 깨끗하지 못한 삶의 내용이 지금 드러났다는 의미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깨끗함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쳐 주시고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배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그렇습니다.
물이 흐를때 비로서 물의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듯이, 나의 것이 이웃에게 나누어질 때, 내 마음은, 정화되고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나의 것이 이웃을 향해 흐르는 깨끗한 삶을 유지합시다.'
"그리스도의 몸"
"아멘"
-상지종신부-
정성을 다해 성합 안에 담겨 있는 성체를 듭니다. 성체를 영하는 교우의 눈과 성체를 나누어주는 사제의 눈이 성체로 모아지면서 거룩한 일치를 이룹니다.
성체 분배를 할 때마다 느껴지는 전율이 있습니다. 거룩함의 떨림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성합을 가득 채운 성체가 하나 하나 신자들에게 먹힘으로써 성합이 비워져 갈 때, 그 안에 거룩한 나눔이 있으면 이 나눔은 곧 온 몸과 마음에 진한 떨림으로 다가옵니다.
성합(聖盒)은 거룩한 그릇입니다. 단지 겉을 금으로 입히고 거룩한 문양으로 장식하였기에 거룩한 그릇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안에 성체를 담고 있기에 거룩한 것입니다. 다른 이들에게 먹힘으로써 거룩하게 변화시킬 그리스도의 몸을 모시고 있기에 거룩한 것입니다.
성합 속에 담긴 성체를 바라볼 수 있는 있기를,
성체는 나누어지는, 먹히는 밥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기를,
성체를 모실 때마다, 성체를 나누어 줄 때마다
거룩한 일치, 거룩한 나눔, 거룩한 떨림으로 자신을 온전히 채울 수 있기를,
짐짓 자신만의 이기적인 거룩함으로 치장하고 고상한척 하면서
세상 속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하거나
세상 사람의 밥으로 먹히기를 주저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나는 하느님의 밀알입니다.
나는 맹수의 이에 갈려서 그리스도의 깨끗한 빵이 될 것입니다."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의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란?
-오상선신부-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닦아 놓지만 속에는 착취와 사악이 가득 차 있다. 이 어리석은 사람들아, 겉을 만드신 분이 속도 만드신 것을 모르느냐?
그릇 속에 담긴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다 깨끗해질 것이다."]
보통 미인이라면
키가 늘씬하고 허리가 가늘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사람을 가리킨다.
오늘날의 각종 미인대회에서 보게 되는 미인상이다.
그러나 이 아름다움은 외형적인 아름다움에 불과하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젊은 여성들이 소위 성형수술이라는 것을
통해서 자신의 얼굴이나 가슴 등 여러 부위들을 뜯어고친다고 한다.
워낙 그런 사람이 많아서
진짜 원래 얼굴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알기도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혹자는 나중에 애를 낳아보면 안다고 한다.
왜냐하면 원판보존의 법칙(?)에 따라 그 원래의 모습을 따라 2세가 나올 수
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언젠가 모 수필가가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이런 외형 가운데서도
피부가 고운 여자가 아름다운 여자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피가 맑은 여자가 더 아름다운 여자이고,
여자가 가장 아름다울 때는 목욕하고 방금 나왔을 때라고 한다.
그것은 아무것으로도 치장하지 않은 순수한 모습 때문이란다.
그러나 정말 가장 아름다운 여자는 마음이 고운 여자라고 하였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진정한 아름다움, 진정한 깨끗함이 무엇인지 가르쳐주고 계신다.
진정한 아름다움, 진정한 깨끗함은 내면에서부터 솟아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사제의 손이 아름답다고 한다면
이는 물로 자주 씻어서가 아니라
그 고귀한 성체를 직접 만지고 모시기 때문이리라.
따라서 그 정도로 사제는 거룩하고 깨끗한 내면을 지녀야 한다는 뜻일게다.
그대는 어떤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계시는가?
가장 겉에 있는 아름다움 추구에만 골몰하고 계시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피부미인이 되는데만 열중하고 있는가!
순수하고 맑은 피와 영혼을 지니는 여인이 가장 아름답지 않겠는가?
성모상을 바라볼 때마다
성모님이 너무 이쁘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성모님을 이쁘게 만드는 이유는
그분이 외적으로 팔등신 미인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맑은 영혼의 소유자이셨기에 그것을 상징하기 위해
외형적으로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일게다.
그대도
성모님 같은 아름다움을 가꿀 의향은 없는가?
그렇다면
내 마음에 치중하자.
내 마음은 맑고 깨끗한가?
사심, 욕심, 시기심, 질투심 등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은가?
옹달샘이 맑음을 유지하는 것처럼
조용히 기도하며 마음을 가라앉히자.
모든 욕심들을 가라앉히자.
그때 그대는 참 미인이 되리라.
아멘. 알렐루야!
나의 밥상이 정당한 노력의 대가인가?
-박상대신부-
시간이 갈수록 예수님의 목소리가 격앙(激昻)되어 가고, 격앙된 목소리는 가르침의 비중과 비례한다. 이제 루가복음에서도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단도직입적인 책망과 불행선언이 서서히 준비되고 있다.(루가 11,37-54) 이 대목에서 예수께서는 백성들의 지도자로 위치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표리부동함을 경계하고 책망하시면서, 그것 때문에 그들이 불행과 화를 입게 될 것임을 예고하신다. 마태오도 복음의 23장에서 비슷한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
오늘 복음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 대한 불행선언의 서막(序幕) 역할을 담당한다. 장소는 어느 바리사이파 사람의 집이다. 예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의 저녁식사에 초대를 받아 그 집에 들어가 식탁에 앉으신다.(37절) 예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식사초대를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루가 7,36; 14,1) 그분은 세리와 죄인과도 함께 식사를 하셨다.(루가 5,29-30) 문제는 예수께서 손을 씻는 예식을 치르지 않고 음식을 드신 데서 발생한다. 호스트인 바리사이파 사람은 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38절) 다소 과장된 반응인 듯하지만 그가 놀란 만큼 예수님의 말씀도 놀랄 만큼 단호하다. “너희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닦아 놓지만 속에는 착취와 사악이 가득 차 있다.”(39절)는 것이다.
마태오복음은 ‘잔과 접시의 겉만은 깨끗이 닦아 놓지만 그 속에는 착취와 탐욕이 가득 차 있다.’는 단언을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 대한 다섯 번째 불행선언(마태 23,25-26)의 범주에 넣어 다루고 있는 반면, 루가는 이 대목을 불행선언을 위한 서막으로 다루고 있다. 마태오는 여기서 ‘이 눈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먼저 잔의 속을 깨끗이 닦아라. 그래야 겉도 깨끗하여 질 것이다.’는 말을 붙여 외적인 정결보다 내적인 정결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루가는 그릇 속에 들어 있는 내용물에 더 관심을 보인다. 물론 이 부분은 루가가 의도적으로 개작한 부분임이 틀림없다. 통상 맨손으로 음식을 먹어야 하는 유대인들의 풍속(風俗)을 감안하면, 식사 전에 손을 씻는 일은 위생상으로도 꼭 필요한 것인데, 유대교는 이를 정결예식에다 묶어 꼭 치러야 하는 규정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규정의 참뜻은 손, 접시, 잔, 항아리 등을 씻어 겉을 깨끗하게 함으로써 속까지 깨끗하게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속까지 보시는 예수님의 눈에 그들의 속은 착취와 사악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즉,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먹기 위해 잘 닦은 그릇 속에 담긴 음식은 그릇의 정결함과는 달리 부정함으로 만들어진 음식이라는 것이다. 담겨진 음식이 깨끗해야 잘 닦은 그릇도 빛나는 법이다. 이와 같이 사람의 마음속이 더럽다면 겉으로 보이는 행세가 아무리 옳고 멋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거짓이 되고 위선이 되고 마는 것이다. 착취와 사악으로 가득 차 마음은 오직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자선과 봉사로 정결함을 되찾을 수 있을 뿐이다.(41절) 하느님의 눈에 이것 말고 다른 정결함의 방법은 없다.
그릇을 잘 씻어 음식을 담고, 그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어야 함은 유다교의 율법이 규정이기 전에 위생상 필요한 과정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염려해야 하는 것은 그릇에 담겨 있는 음식이다. 바로 내가 먹을 음식 말이다. 그 음식이 착취와 사악으로 만들어졌는지, 아니면 정당한 노력의 대가로 만들어진 것인지를 살피는 일이다. 오늘 복음의 가르침과 같이 그릇은 사람의 마음을 담는 도구요, 그 그릇에 담긴 음식은 마음 씀씀이를 말한다. 그릇을 아무리 깨끗이 닦는다고 해도 제대로 된 음식이 담겨 있지 않다면 그릇의 깨끗함은 아무 소용이 없다. 매일 내가 먹든, 남이 먹든 음식은 깨끗해야 하고, 먹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하며, 생명을 주는 음식이어야 한다. 사람의 모든 경제적, 사회적, 생물학적 활동은 그 근본이 먹고 사는데 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남을 등쳐먹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 남이야 굶든, 먹고 죽든, 어찌되든 간에 자기만 잘 먹고 살면 끝난다는 자기중심적 이기주의자의 밥상은 결코 정당한 밥상이 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