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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0. 묵상글 들 ( 연중 제1주간 월요일. - 반인반수, 반인반신의 나?.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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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0. 연중 제1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반인반수, 반인반신의 나?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오늘부터 연중 시기가 시작되며 주님의 공생활도 시작되는데
주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그 첫마디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외치십니다.
이 말씀이 제게는 복음을 믿지 않으면 회개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으로 들리고,
복음을 믿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이미 가까이 온 하느님 나라도 나에게만은
아직 가까이 온 것이 아니라는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회개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이 복음,
곧 기쁜 소식이며 그 복음을 믿음으로써 행복한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회개한 사람은 우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
슬픈 소식이 아니라 기쁜 소식인 사람이고,
그러니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그 반대인 사람입니다.
왜냐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오면 이 세상 나라는 끝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단적인 예로 이 세상 삶이 끝나야 하느님 나라 곧 천국에 가잖아요?
그런 것이기에 가장 간단한 저의 회개 테스트는
'지금 죽게 되면, 예를 들어 암 선고를 지금 받게 되면 나는 기쁠까?'입니다.
저의 이성적 믿음은 그렇게 돼도 기쁘거나 적어도 담담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그 상황이 되었을 때 제가 어떨지 아직 저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떨까 또 생각해봅니다.
이 세상을 지금 바로 떠나는 것이 아직은 기쁠 정도가 되지 못했더라도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의 Life Style대로 사는 것은 어떨지 말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생활 양식이라면 수도자들이 살기로 서약하는
바로 그 복음 삼덕 곧 가난, 정결, 순명을
복음에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사는 것이지요.
제 생각에 이것은 지금 즉시 그렇게 살겠노라고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살기로 이미 서약까지 한 저이지요.
하지만 이 또한 주님께서 가르치신 그대로는 아직이라고 해야겠습니다.
그러니 저는 회개를 시작은 하였지만
아직 충분히 또는 완전하게 살지 못하는 수준이라고 솔직히 인정해야겠지요.
그렇습니다.
제가 기쁘게 살고는 있는 편이지만,
하루하루 사는 것이 너무 기쁘고
너무 행복하다고 할 정도는 아직 되지 못했음이 바로 이 때문일 것입니다.
반인반수라는 말이 있지요.
반은 인간이고 반은 짐승이라는 말 말입니다.
어제 주님 세례 축일을 지내면서
세례를 통해 우리는 인성과 신성을 살게 됨을 얘기했지만
어쩌면 저는 반인반수이기도 하고,
반인반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때는 짐승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하느님스럽기도 하는 저는
앞으로 한참 회개의 여정을 가야 할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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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0. 연중 제1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오늘부터 연중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부터 복음은 <마르코복음>을, 독서는 <사무엘 상권>을 듣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마르코 복음>에서의 예수님의 ‘첫 발설’로 시작됩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 르 1,15)
이는 세 개의 내용으로 된 문장입니다.
“때가 찼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신 일이 아무 때나 우연히 시작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이전의 모든 시간이 지금의 이 “때”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고, 지금이 바로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로 계획하신 준비해 온 결정적인 “때”(카이로스)임을 밝혀줍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는 “가까이”(원어의 뜻: 손 안에), 곁에 혹은 예수님과 함께 ‘온’ 나라로,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요 은총이라는 선포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 나라”는 결코 가는 나라, 곧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니라, 지금 ‘이미’ 온 나라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는 말씀은 “복음”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요, “회개”는 이를 믿는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동시에, 바로 지금이 “회개의 때요, 믿음의 때”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하느님 나라”를 가져 온 예수님 자신이 곧 “복음”이요, 그러기에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 안에 이미 현존하는 나라임을 말해줍니다(루가 11,20). 결국, ‘회개’의 구체적인 모습은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왔다’는 ‘복음을 믿는 것’이 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도록 우리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심입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마르 1,17)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려면,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버리는 일입니다. 곧 가지고 있는 것, 내가 의지하고 있는 것을 버리는 일입니다, 제자들은 아버지도, 삯꾼도, 배도, 그물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결국, 버린다는 것은 자신의 실현을 위한 자신의 삶의 태도를 버리는 것이요, 중요하다고 여기는 자신의 가치관과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것이요, 반면에, 새로운 삶의 태도와 가치관을 따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잘못된 것, 좋지 않는 것은 당연히 버려야 할 것이지만, 좋은 것으로 여기던 것마저도 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더 좋은 것, 더 값진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아버지보다도, 생계수단인 배와 그물보다도, 더 값진 예수님을 발견한 까닭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 “버림”은 예수님을 따라 나서는 하나의 조건이요 방법일 뿐, 결코 목적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진정 중요한 것은 무엇을 버렸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찾는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버리기 위해 따르는 것이 아니라, 따르기 위해 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복음’을 따르기 위해, ‘하느님 나라’를 위해 버리는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5)
주님!
언제나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제 자신을 빠져나가 당신께 나아가게 하소서.
어디에 어떤 처지에 있든지 당신과 함께 있게 하소서.
당신을 따라 당신의 나라에 들게 하소서.
제 안에 당신의 나라를 이루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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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0. 연중 제1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 나라 선포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간 지내시면서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준비하셨고 광야 생활을 마친 다음 세상으로 나가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그 시기는 요한이 잡힌 뒤입니다. 요한이 체포된 다음에 예수님의 활동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하느님을 전하는 힘찬 목소리가 위압으로 사라져 버린 암울한 시기에 그분이 등장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어둠을 비추는 등불이 희미해지자 그 자리에 활활 타오르는 횃불이 나타난 것입니다(손희송).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세례를 받으신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내용은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하느님의 통치, 하느님의 권위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하느님의 법에 따라 다스려지는 나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걸어 다니는‘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철저히 실천하는 사람으로 동행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한정된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 건설되는 나라입니다. 먼 미래에 올 나라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와 있는 나라요, 죽은 다음에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 현재 우리 안에 현존하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회개는 후회와는 다릅니다. “회개는 한 번 하는 것이요, 후회는 두고두고 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생각을 바꾸고,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말하자면 도둑이 회개하였다는 것은 도둑질을 그만 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을 계속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의 삶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죽을때까지 이어지는 삶입니다. 한마디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회개의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확실한 선택입니다. 그리고 “인간적인 자기 이해 능력과 사고방식의 세계가 아닌 그 이상의 세계로 넘어간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인생을 이성의 잣대나 사고방식, 또는 지적인 능력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영의 세계로, 즉 복음적인 관점으로 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유광수). 회개는 영적 여정의 첫 출발이며 복음을 알아듣기 위해 취해야 할 기본자세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복음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자신이며 그분이 선포하신 말씀, 보여주신 활동 모두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선포를 사는 것입니다. 내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이 바탕이 되지 않는 믿음은 모래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생활은 삶의 중심에 사랑을 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분명 사람을 끄는 강력한 힘, 애지중지하던 것마저 아낌없이 버리게 하는 신비로운 매력이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그분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낚였기 때문에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삶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바뀌었습니다. 그 삶은 ‘회개하라’는 주님의 선포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그분은 부르시고 나는 따라가는 여정입니다.
분명 그들은 가족과 재물을 버렸기 때문에 예수님께 낚인 것이 아니라 먼저 낚였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그분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나를 먼저 선택한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께 온전히 낚여있는지 돌아봐야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얻기 위해 일상 안에서 버려야 할 것은 버려야 하겠습니다. 복음을 읽고 묵상은 하지 못해도 드라마를 보고 운동을 하고, 쇼핑을 하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을 갖지 못해 아쉬워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13,44). 더 큰 것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를 버려야 됩니다. 버림으로써 얻게 됩니다. 아니, 얻었기 때문에 버립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무엇을 얻는 데에는 크게 두 방법이 있습니다.
구해서 얻는 것과 버림으로써 얻는 방법입니다.
구해서 얻는 것은 그 얻음이 아무리 커도
다음에 더 큰 목표가 생기기 때문에 만족이 없습니다.
그러나, 버려서 얻는 것은
아무리 작아도 덤으로 얻는 기분이기 때문에 만족과 기쁨이 큽니다.
마음의 평안과 행복을 원하는 사람은
버려서 얻는 방법을 택합니다”(고도원의 아침편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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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0. 연중 제1주간 월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새로 시작되는 연중시기의 첫 날인 오늘, 복음은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 장면을 전해줍니다. 그분이 선포하신 메시지의 대주제도 아울러 소개되는데, 그것은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4)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사가들도 소개한 같은 보도와 비교해 볼 때 눈에 띄는 표현은 ‘때’에 관한 것입니다. 유독 마르코만이 하느님의 때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통용되는 시간 관념은 보통 양적이고 흐름을 반영하지만, 성경에서 통용되는 시간 관념은 질적이고 내용에 방점을 둡니다. 양적으로 시간은 흘러가는 물결입니다. 반복되지 않습니다. 한 번 흘러가면 그뿐입니다. 하지만 질적으로 시간은 같은 본질이 재현되는 한 살아납니다. 유다교의 축제나 그리스도교의 전례도 성경의 질적인 시간 관념을 따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유다교의 파스카 축제날을 골라서 당신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최후의 만찬을 지내시며 제정하신 성체성사는 우리가 미사를 봉헌할 때마다 재현되고 기념되어 그분의 뜻과 성취가 거듭 되살아납니다. 심지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나 사도직 활동에서 그분의 뜻을 따라 섬김과 나눔의 삶으로 그분을 기억할 때마다 또 그분이 되살아납니다.
예수님께서 “때가 찼다”고 힘주어 말씀하실 수 있으셨던 계기는 바로 세례 때에 나타난 하늘의 징표였습니다. 하늘이 열렸고 성령께서 내려오시어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이라고 몸소 알려주셨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하느님께서 새로이 당신의 나라를 역사 안에 창조하시고자 움직이기 시작하시는 때라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깨달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일러주시는 대로 예수님께서는 선포하셨고, 가르치셨으며, 행동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리고 사랑의 문명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당신의 첫 제자들을 부르신 이래로 지금까지 교회는 새로운 인류로서 예수님의 문명 창조에 부르심을 받은 제자이며 그분께서 필요로 하시는 협조자로 살고 있습니다. 아무리 물질적 차원에서 발달하고 있어도 스스로 구원되지 못하는 현대의 물질문명을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사랑의 문명으로 전환시키라는 회개의 요청을 우리는 간절히 받고 있습니다. 이미 다가왔으며 우리를 통해 완성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믿도록 예수님께서 초대하고 계십니다.
교우 여러분!
지금도 여전히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창조의 때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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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0. 연중 제1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사형수에 관한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형 집행 날짜를 모르는 사형수는 너무 불안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반면 자신의 죽을 날짜를 알고 있는 사형수는 불안해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생을 반성하며 슬퍼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삶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분명한 진실은 우리 모두 예외 없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날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죽습니다. 그런데 정확한 날짜를 몰라서 지금 아무렇게나 사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며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고 하셨습니다. 회개는 곧 자기반성입니다. 자기반성으로 하느님께 되돌아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기 뜻만을 내세우는 삶이 아닌, 하느님 뜻이 드러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부르듯이,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면서 “나를 따라라.”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습니까?
이에 대한 제자들의 모습을 우리가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시몬과 안드레아는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리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부모를 떠나 예수님을 따릅니다. 세상의 일과 가족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을 따르는 일임을 오늘 복음의 제자들은 보여줍니다.
불의의 사고로 하늘 나라에 간 언니의 유품을 정리한 동생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유품을 정리하면서 깜짝 놀랐다는 것입니다. 평소에 짐이 없어서 유품 정리할 것이 있을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정리할 짐들이 너무나도 많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은 언니보다 훨씬 많은 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나하나 사들였던 물건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정작 하늘 나라에 들어갈 준비는 하지 않고 이 세상이 영원한 것처럼 죽음 뒤에는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들을 애지중지했다는 반성을 하게 되었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세상의 일이 제일 중요한 것 같지만 죽음 뒤에는 필요가 없습니다. 가족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가족들과도 이 세상에서 영원히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분명해집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가장 힘센 분이시고, 그분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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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능력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끝까지 굳세게 밀고 나가라(로잘린 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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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합시다.
오클랜드 대학교 교수 피터 다우릭은 신체장애가 있는 청년들과 워크숍을 진행했습니다. 2주 안에 조립을 완수하는 조건으로 청년들은 두 집단으로 나누었습니다.
한 집단은 자신의 작업 모습을 녹화한 영상을 보았습니다. 실수하는 장면이나 작업 속도가 더딘 장면을 지운 영상이었습니다. 다른 집단은 작업량이 10% 늘 때마다 성과보수를 받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작업 영상을 본 집단의 생산성은 15%, 성과보수를 받은 집단의 생산성은 3% 증가했습니다. 어떤 방법을 통해서 최고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지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고의 자기 모습’을 발견했을 때, 의욕을 얻어서 생산성 높은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자신의 단점보다 최고의 자기 모습을 발견했을 때 의욕을 얻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에게 하는 칭찬이 큰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공동체가 잘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칭찬을 많이 해야 합니다. 칭찬이 전혀 없고 다른 이에 대한 부정적인 말과 행동이 많은 공동체는 절대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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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0. 연중 제1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국과 중국의 패권전쟁과 한반도’라는 강의를 들었습니다. 2018년 트럼프 대통령이 행정명령에 서명하면서 미국과 중국의 패권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미국이 엄청난 관세를 부과하면서 중국을 압박했지만 중국은 잘 견디면서 극복하였습니다. 미국이 생각보다 강한 나라가 아니었고, 중국은 생각처럼 약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미국의 강점은 군사력, 경제력, 외교력이 세계 최강입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오면서 미국은 ‘Pax Americana를 벗어나 America First'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는 세계를 선도하는 국가에서 미국의 국익을 먼저 생각하는 나라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중국의 강점은 넓은 땅, 많은 인구입니다. ‘대약진 운동,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혼돈과 어려움을 겪었지만 1978년 개혁과 개방을 통해서 경제 성장을 이루었고, 지금은 미국 다음으로 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 한반도가 있습니다. 2020년 미국 시민 20,000명에게 미국에게 가장 중요한 나라의 순위를 물어보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나라는 국경을 마주하는 캐나다였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은 미국 시민들의 생각에는 32번째로 중요한 나라였다고 합니다. 미국은 북한을 경제적으로 압박하고, 적성국가로 대하지만 어떤 면에서 북한은 미국에게 효자손이라고 합니다. 북한이 있기에, 북한의 도발이 있기에 주한미군의 주둔이 정당성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북한이 국제사회에 문호를 개방하고, 핵개발을 포기하면 미군의 대한민국 주둔에 대한 정당성은 약해질 수 있습니다. 중국에게 북한은 혈맹이라고 하지만 중국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나라는 북한이라고 합니다. 미국에게 대항하기 위해서 개발하는 탄도미사일과 핵무기이지만 북한의 태도변화에 따라서 중국에게 가장 큰 군사적인 위협이 되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대한민국에게 우호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고 합니다. 북한의 돌발 상황에 대해서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동반자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의 가장 큰 무역 상대도 중국입니다. 나를 알고, 상대방을 안다면, 입장을 바꾸어 생각할 수 있다면 기가 죽어서 고개를 숙일 필요도 없고, 허세를 부리며 잘난 척 할 필요도 없습니다.
중견 강국이 된 대한민국은 이러한 국제질서를 냉철하게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새가 좌우의 날개를 가지고 하늘을 날듯이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균형 잡힌 외교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홍익인간의 이념처럼 대한민국의 문화와 경제력으로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는 외교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한국은 120개 국가 중에서 119번째로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 8위의 경제 국가가 되었습니다. 한국의 문화와 한국의 기술은 결코 뒤지지 않는 중견 강국이 되었습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지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미국과 중국에게 할 말은 하는 태도를 가져도 좋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처한 상황을 잘 알아야 하고, 주변 국가들의 강점과 약점도 알아야 합니다. ‘지피지기(知彼知己)하고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나라는 국제사회에서 자기의 목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기도는 이렇습니다. “주님 백성의 간절한 기도를 자애로이 들으시어 저희가 해야 할 일을 깨닫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게 하소서.” 저는 여기에 하나 더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게 하소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늘 우리 곁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께서 늘 우리 곁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맛보는 길은 나의 거짓된 마음을 비우는 것입니다. 낡은 것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채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물과 공기가 늘 우리 곁에 있듯이, 우리 곁에 가까이 있는 하느님 나라를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장소의 개념으로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결단의 개념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인식은 3차원에 머물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는 단순한 3차원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의 본질은 버리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모든 권한과 능력을 버리시고, 인간이 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첫 번째 제자들도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죽으면 살리라’는 말처럼 모든 것을 버릴 때, 새로운 길이 열리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를 몸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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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0. 연중 제1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개의 여정
- 늘 새로운 시작, 하느님 나라의 삶 -
어제 점심식사중 나눴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가장 좋은 복福이 뭐냐?’는 질문에 나는 식복食福이라, 인복人福이라, 천복天福이라 했고, 질문했던 수사는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 했고, ‘아 그렇구나!’ 공감했습니다. 삶은 변화입니다. 더불어 '인간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사자성어와 관련된 예화도 생각납니다.
현재의 지금이 전부가 아니니 상황에 일희일비할 것이 아니라 넓고 길게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나름대로 우리의 앞날을 예비하고 계시니 말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한나를 봐도 이해가 됩니다. 프닌나의 무시가 얼마나 마음 아프게 하는지, 남편 엘카나의 위로도 한계가 있는 듯 합니다. 그러나 기도의 사람, 한나는 슬픔을 하느님께 맡기며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한나에게는 한몫밖에 줄 수 없었다. 엘카나는 한나를 사랑하였지만 주님께서 그의 태를 닫아 놓으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런 와중에서 한나에게 사무엘 아들을 예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끝까지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슬픔중에도 해마다 주님의 집에 올라가는 한나의 한결같은 인내의 믿음을 하느님은 마음 깊이 담아 두셨음이 분명합니다. 전화위복, 새옹지마라는 말마디 안에 하느님의 개입을 감지합니다.
끝은 시작입니다. 어제로 성탄시기가 끝나고 오늘부터 연중시기의 첫날의 시작입니다. 제의 색깔도 백색에서 초록색으로 바뀌고 성무일도 찾기도 아주 단순하고 쉽습니다. 그렇습니다. 끝은 시작이요, 하루하루가 늘 새로운 시작입니다. 오늘 복음도 연중시기 첫날 답게 참 신선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는 복음입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언제나 현실성을 지닌 오늘 지금 여기서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는 언제나 지금의 때가 카이로스의 결정적인 유일한 때입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에 임박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언젠가 그날의 때가 아닌 오늘 지금이 카이로스의 결정적 하느님의 때, 하느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일상적이고 평범해 보이는 시간 낭비가 큰 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바야흐로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가 펼쳐지는 장입니다. 그러니 지금 여기서 주님을 만나야 하고 또 행복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결정적인 응답이 바로 우리의 회개요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한 두 번의 회개가 아니라 늘 끊임없는 회개요, 그리하여 우리 삶은 회개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끊임없는 회개와 더불어 늘 새로운 시작에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회개의 자리에서 하느님은 당신의 계획을 우리와 함께 펼쳐가십니다. 막연한 회개가 아닌 구체적 실천을 의미합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네가 너희를 사람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주님의 은총의 부르심이 바로 구체적 회개를 촉발 시켰고,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서니 그대로 회개의 응답인 것입니다. 말 그대로 ‘구원의 출구出口’인 주님과의 결정적 만남입니다. 우리의 경우 외적 환경은 그대로이지만 내적 삶의 자세가 바뀜으로 이제부터는 하느님을 향한 부단한 자아초월自我超越의 내적 여정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니 바로 이것이 정주영성의 핵심입니다. 환경環境이 아닌 관점觀點이, 보는 눈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이 없었다면 평생을 갈릴래아 호수에서 출구없는 무의미한 반복의 어부의 삶을 살다가 허무하게 인생 마쳤을 것인데 주님을 만남으로 운명이 바뀐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의 주님을 선택함으로 늘 새롭게 시작하는 삶의 여정에 오른 시몬과 안드레아 형제요, 야고보와 요한 형제들입니다.
우리의 경우도 이와 흡사합니다. 부질없는 질문이지만, 우리가 주님을 만나 회개와 더불어 세례를 받고 주님을 따라 나선 삶이 아니였다면 현재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지 상상이 안됩니다. 우연이 아닌 필연의 하느님 섭리이자 성소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은 알게 모르게 우리를 당신 최선, 최상의 방법으로 오늘 지금 여기까지 이끄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철석같이 믿습니다.
날마다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서는 버림의 여정, 따름의 여정은 그대로 회개의 여정이자 부단한 엑소더스exodus, 탈출의 여정입니다. 한 두 번의 버림이, 따름이, 회개가, 탈출이 아니라 늘 새로운 시작의 버림이자 따름이자 회개요 탈출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는 그날까지, 살아있는 그날까지 늘 새로운 시작의 버림의 여정, 따름의 여정, 회개의 여정, 탈출의 여정에 한결같이 항구할 때 비로소 하느님 나라의 실현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런 삶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제 좌우명 기도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하느님 나라의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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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0. 연중 제1주간 월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1,15)
'하느님의 나라와 회개!'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시고 난 후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마르코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말씀입니다. 그 첫 말씀은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1,15)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어부 네 사람, 곧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와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제자로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르1,17)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이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그리고 이 선물을 위한 나의 회개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회개'는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예수님이 되는 것'입니다.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이나 내 안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보면,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회개는 돌아가는 것, 예수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돌아오라는 예수님의 간절한 호소에 대한 나의 구체적인 응답입니다.
어제로 성탄시기를 마치고, 오늘부터 연중시기가 시작됩니다. 연중시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 전체를 묵상하는 시기인데, 특히 모두의 구원을 위해 애쓰신 예수님의 땀을 묵상하는 시기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나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십니다.
이 부르심에 곧바로 응답합시다!
그래서 지금 여기가 정의와 평화와 기쁨이 넘쳐나는 하느님의 나라가 되게 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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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0. 연중 제1주간 월요일. 주교회의 홍보국.
오늘의 묵상
어제 우리는 주님 세례 축일을 지내며
성탄 시기를 마무리하고 연중 시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연중 시기의 전례 말씀은 공생활을 시작하시는
예수님의 걸음을 따르게 합니다. 그 시작에서 선포되는
예수님의 첫 말씀이 그분 공생활의 모든 것을 함축합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께서 직접 다스리시는 나라로,
하느님께서 몸소 우리에게 오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사실이 바로 ‘기쁜 소식’(복음)입니다.
이는 천지 창조 때부터 계획되고, 많은 예언자를 통하여
예언되었으며, 이스라엘 백성의 간절한
기다림을 거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 나라에 응답하는 우리의 태도는 ‘회개’와 ‘믿음’입니다.
‘회개’는 잘못된 길을 걷다가도, 다시 하느님께 돌아오는 행위입니다.
‘믿음’은 가까이 온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행위입니다.
회개와 믿음은 “나를 따라오너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명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에 대한 본보기로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들을 소개합니다.
시몬과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은 갑작스러운 예수님의
부르심에 갈등이나 망설임 없이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주저함이나 미련 없이 옛 삶을 포기하고(회개),
그 부르심에 곧바로 응답해야(믿음)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언젠가 우리도 베드로처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마르 10,28)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하신 말씀을 명심하며,
우리 앞에 놓인 연중 시기를 주님을 따르는 은총의 길로 만들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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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0. 연중 제1주간 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첫 제자들을 부르심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15절) 이 하느님의 나라라는 표현은 오로지 복음서에만 있다. 하느님 나라는 주님께서 오신 다음에 활짝 열렸다.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고 쓰여 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15절) 신앙의 기쁨은 회개에 따르는 어떠한 쓰라림도 보상해 준다. 거룩한 양심의 기쁨을 바라는 사람은 회개의 쓴 맛을 삼켜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시다가,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시고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17절)고 하신다. 예수님은 비천한 어부들 같은 가난한 사람들과도 어울리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일을 이루시려 그들을 부르신다. 즉 모든 민족에게 당신의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해서 가장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들을 일꾼으로 쓰시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셨다.
그들을 제자로 부르신 다음, 그분은 그들 안에 하느님의 능력을 불어넣으셨고, 힘과 용기를 채워주셨다. 그분은 하느님의 말씀을 당신이 가르치셨고,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태 4,19)고 하시며 그들을 이성적이고 분별력 있는 영혼을 쫓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다. 주님께서는 이들에게 능력을 주시어 거룩한 일꾼이며 교사로 모든 민족에게 파견하셨고, 그들을 당신 가르침의 선포자라 선언하셨다.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18절)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는 그분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은 즉 방해가 되는 것은 “곧바로”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이 말씀이 보여준다. 주님께 부름을 받은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와 배를 버렸고(19-20절) 마태오는 세관에서 벌떡 일어났으며(마태 9,9), 어떤 이는 믿음 때문에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는 일조차 남에게 맡겼다(루카 9,59-60). 주님께서 부르신 이들 가운데 어떤 핑계를 대는 사람은 없었다.
주님의 얼굴에는 거역하기 어려운 거룩한 그 무엇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을 따라 나서는 비상식적인 결정을 사도들이 했을까? 사도들은 영의 아버지를 따르고자 육의 아버지를 떠났다. 그것은 아버지를 버린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아버지를 참으로 되찾은 것이다. 그분의 얼굴에는 그분을 뵙고 따라나서지 않을 수 없는 거룩한 그 무엇이 있었다는 것이다.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재산과 허영심, 사회적 지위와 쓸데없는 욕심과 같은 온갖 껍데기를 벗어버리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 제배대오도 버리고 그들의 생계가 달려 있는 배마저 버렸다(20절) 마태오와 바오로 사도를 보더라도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그 무엇에도 집착이나 애착을 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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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0. 연중 제1주간 월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마르 1, 18)
복음은
따라야 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가르쳐줍니다.
회개의 만남이
가장 큰
만남입니다.
버려야 따를 수
있는 믿음과
봉헌의 시간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첫걸음은 언제나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삶이 다르게
다가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의 삶입니다.
따르면서
치유되고
따르면서
사람의 길을
제대로 보게됩니다.
주님을 따라야
되찾게되는
주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회개의 여정은
버리고 따르는
관계의 여정입니다.
집착의 그물과
이기심의 배를
버리는 새로운
복음의 관계입니다.
회개의 관계는
복음의 관계입니다.
복음을 향해
나아가는 기쁜
첫걸음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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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0. 연중 제1주간 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를 따라오너라.>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4-20)”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라는 말씀은,
종말의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루카 17,21).
‘때가 차서’ 라는 말은, 드디어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종말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시작되었고,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완성된다는 것이 우리 교회의 믿음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종말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회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기 위해서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는 것은, 회개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회개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믿는다고 생각만 하는 것도 아니고,
믿는다고 말만 하는 것도 아니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입니다(마태 7,21).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이렇게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소식도 ‘기쁜 소식’(복음)이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소식도 ‘기쁜 소식’(복음)입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일상의 회복’만 말하고 있지만,
신앙인은 ‘회개’를 말해야 합니다.
‘일상의 회복’만 말하는 것은 뒤를 돌아보면서 지나간 삶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느님 나라만 향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냉철하게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코로나 전의 삶’이 반드시 되찾아야 할 정도로 가치가 있었는가?
그게 정말로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선’이었는가?
우리 교회의 모습과 신앙인들의 모습도 냉정하게 반성해야 합니다.
‘코로나 전의 교회의 삶과 신앙인들의 삶’이,
그것을 되찾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 간청할만한 것이었는가?
정말로 그렇게 ‘좋은 것’(선한 것)이었는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마르 1,16-20).”
예수님께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신 이야기는
요한복음 1장 35절-42절에 있는 이야기와 함께 읽어야 합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원래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그랬는데 요한의 인도로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요한 1,35-40).
하룻밤을 예수님과 함께 묵은 다음에 그는 자기 형 시몬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리고 갔습니다(요한 1,41-42).
그 일이 있었던 때와 예수님께서 그들을 제자로 부르신 때 사이에는
적어도 몇 달의 간격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그 몇 달 동안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들었고,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정식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했을 것이고,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도 거의 같은 과정을 거쳤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신 일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라,
그들을 계속 눈여겨보시다가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시고
부르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부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자마자 곧바로 응답한 것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나를 따라오너라.” 라는 말씀은, “내 뒤를 따라라.”,
또는 “내 뒤를 따라 걸어라.”인데, “나의 제자가 되어라.”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께서 가시는 대로 예수님의 뒤를 따라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지금까지는
물고기나 잡아서 먹고 사는 어부로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사람들을 구원하는 사도’로 만들겠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는 ‘그물을 버리고’, 또 ‘아버지를 버려두고’로 표현되어 있는데,
루카복음에는 어부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루카 5,11).
그런데 실제로 그들이 ‘모든 것’을
마치 쓰레기를 버리는 것처럼 버린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을 버렸다는 말은 인생을 완전히 바꿨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어부라는 ‘직업’은 버렸지만,
집과 가족은 버리지 않았고,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먹고사는 일만 신경 쓰던 인생에서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는 인생으로
자기 인생을 바꾼 것은, 모든 것을 버린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사도들처럼 인생을 완전히 바꿔야 합니다.
(물론 사도들처럼 직업을 버려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인생의 목표와 방향을 완전히 새롭게 바꿔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콜로 3,1-2).”
만일에 신앙생활을 현세에서 복을 누리기 위한 생활로만 생각한다면,
그래서 그런 복이나 빌고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딱하고 어리석은 일입니다(1코린 15,19).
지상의 인생은 잠시 거쳐 가는 ‘임시 천막집’일 뿐입니다(2코린 5,1).
신앙인은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집에서 살기를 희망하면서
지상의 천막집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버리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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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0. 연중 제1주간 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나의 변형과 사랑의 응답 ♣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갈릴래아 활동에 관해 전하면서 그분이 선포하고자 하시는 기본주제가 “하느님의 복음”(1,14)임을 밝힌다. “하느님의 복음”(로마 1,1; 2코린 11,7)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기쁜 소식만이 아니라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로마 1,16)을 말한다. 이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구원업적을 뜻한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1,15) 하고 말씀하셨다.
마르코 복음에만 나오는 “때가 차서”라는 표현은 완료 수동형으로 되어 있다. 이는 시간이 밖에서부터 차게 되었다는 뜻으로 우리가 당신의 메시지를 받아들일 것을 절박하게 촉구하고 계심을 말해준다. 곧 하느님께서 인간의 시간 속에 당신의 구원 계획을 실현하시어 그 시간을 완성시켜 주심을 뜻한다. 따라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은 ‘구원과 심판을 가름하는 시간’이요 ‘은총의 시간’이다. 지금 이 순간 우리 앞에는 영원한 생명과 죽음, 수난과 부활, 구원과 심판으로 가는 갈림길, 곧 ‘구원의 시간’이 놓여있다.
우리는 구원의 길로 가려면 전존재를 하느님께로 되돌리고,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는 기쁜 소식을 수락해야 한다. ‘회개’와 ‘믿음’은 우리 가운데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그 근본적인 새로움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새로운 영적 태도이다. 우리는 일상의 삶에서 보이는 것들에 맛들이고 좇다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잊고 살아가곤 한다. 그분이 주인이심을 잊고 마치 주인인양 그렇게 살아가는 때가 많다. 하느님으로부터 와서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면서도 제멋대로 생각하고 자기 편할 대로 판단하며,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며 살아가는 순간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곧바로' 애착하고 묶여 있는 것들을 과감히 ‘버리고’ ‘떠남으로써’ 삶의 방향을 그분께로 되돌려야 하리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나를 따라오너라”(1,17)하고 부르시는 그분의 부르심에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1,18), 관계를 맺고 있던 이들을 버려두고(1,20) 따랐다. 그들은 몸과 마음과 생각이 익숙하게 젖어 있는 과거의 삶에서 떠났다. 이제 그들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은 예수님과 운명을 같이 하는 것이었고, 그분께서 선포하시는 ‘하느님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인생의 호숫가에서 나를 부르고 계시고 당신께 나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우리들 각자는 그저 공간을 차지하는 무의미한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 계획의 일부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자신의 삶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시어 함께하시고 이끌어주심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변함없이 사랑의 선물을 주고 계신다. 이제 예수님께서 참 기쁨을 주러 오신 우리의 해방자요 구원자임을 믿고 기쁘게 살아가자. 그 무엇과도 비교하지 말고, 긍정이시고 의미이신 '하느님의 힘을 믿고' '그분 때문에' 그 어떤 처지에서도 기쁨의 나라가 실현되리라는 믿음과 긍정적 시각을 가지고 살아가자! 이것이 주님의 사랑의 부르심에 대한 우리다운 응답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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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0. 연중 제1주간 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 단순화시킬 때 명품이 탄생합니다!
이제 우리는 또 다른 출발선상에 서 있습니다. 교회 전례력 안의 여러 전례 시기들 가운데 가장 평범하지만, 그래서 더욱 소중한 연중시기를 시작합니다. 연중시기가 있기에 사순․부활 시기가 더욱 빛을 발합니다. 연중시기가 있기에 대림․성탄시기가 더욱 풍요롭습니다. 이처럼 연중시기는 다른 전례시기의 배경이자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한 시절을 매듭지을 때 마다, 그리고 새로운 절기를 맞아들일 때 마다 드는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그 누군가가 이 세상에 와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면 그것은 엄청난 고통일 것입니다. 한번 만개한 꽃이 시들지 않고 계속해서 피어있는 것도 무척 어색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네 사랑에 이별이 있고, 인생에 기승전결이 있다는 것, 시절의 끝자락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다행한 일입니다. 인생에도 저무는 황혼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좋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황혼 속에서 사람들은 비로소 착해지기 때문입니다.
연중 제1주일 월요일 아침, 어제와 별 다를 바 없는 하루로 여기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보낼 이 하루는 우리네 인생 여정에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금쪽같은 하루이기에 허투루보내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전례력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며 반복해서 축제를 되풀이하는 이유를 알았습니다. 우리들의 시간 속에 항상 현존하시는 주님을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찰나의 순간 속에서도 불멸을 추구해야겠습니다. 영원 속에서도 순간의 기쁨을 만끽해야겠습니다.
이 연중시기의 첫날,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처럼 기쁜 마음으로, 감개무량한 심정으로 다시 한 번 주님과 함께 힘찬 항해를 시작해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첫사도단을 부르시며 이렇게 외치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생업인 고기잡이에 전념하고 있던 첫 사도단의 반응이 놀랍습니다.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던 생계의 소중한 도구인 배도, 그물도 버립니다. 아버지도 삯꾼들도 뒤로하고 즉시 스승님을 따라나섭니다. 참으로 큰 버림이요, 큰 도전이요, 큰 투신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버림’, ‘비움’이란 말이 재해석되고,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들이 여기저기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결론은 이것입니다. “비우면 채워지고 버리면 얻게 된다!”
기업 컨설팅 전문가들도 외칩니다. “장래성이 없거나 본질에 맞지 않는 사업은 과감히 포기해야 합니다.”
의류 디자인 전문가들도 강조합니다. “옷을 디자인할 때는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려는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욕심을 버릴 때 좋은 디자인이 나옵니다. 단순화시킬 때 명품이 탄생합니다. 버린다는 것은 다른 말로 기본에 충실하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사도들께서 크게 버림으로 인해 크게 얻었음을 기억합니다. 오늘 우리들 삶의 목록에서 과감하게 버려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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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0. 연중 제1주간 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믿으면 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고 사람 낚는 어부는 세상에서도 존경받는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시작하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4)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은 지금까지 그런 나라는 세상에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우선 ‘회개’란 우리가 추구하는 ‘재물에 대한 욕망, 육체의 즐거움에 대한 욕망, 힘과 명예에 대한 욕망’이 의미가 없을뿐더러 오히려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임을 깨닫고 방향을 새로운 욕망으로 트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들이 ‘나의 생존을 위한 욕망들’이기에 새로운 방향은 ‘이웃의 생존을 위한 욕망’, 곧 ‘사랑’밖에 남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기에 나를 위한 삶이 ‘땅’을 향하는 삶이었다면 하늘로 오르는 삶은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길밖에 없습니다.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책에 노랑 애벌레는 고치를 거쳐 노랑나비가 됩니다.
노랑나비가 되니 모든 애벌레가 나비가 될 가능성이 있음을 봅니다.
모든 애벌레 속에서 자신과 같은 나비를 발견합니다.
하지만 애벌레들은 각기 ‘세속-육신-마귀’를 쫓는 데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그렇더라도 그들을 모른 체할 수 없습니다.
양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비가 되었다면 나를 위한 삶이 가치 없음을 알기 때문에 더는 개인적인 욕심을 추구할 수는 없는 일이고
그러면 남는 일이 다른 애벌레들도 나비가 될 수 있음을 알리는 일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회개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일은 ‘선교’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세례받으면 누구나 가정을 버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선교사가 되어야 하느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말이 아닙니다.
내가 결혼하고 자녀를 낳아도 그 영혼을 살리려는 마음으로 모든 일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의 목적이 우선 그 사람의 구원을 위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절대 세상에서도 실패하지 않습니다.
‘어쩌다 어른’ 프리미엄 특강쇼에서 김경일의 인지심리학자는 전국 석차 0.1%의 공부 잘하는 아이들의 특징은 ‘착한 것’이라고 합니다. 2010년에 EBS ‘학교란 무엇인가 – 0.1%의 비밀’이란 프로그램 제작자들이 다급하게 김경일 교수를 찾아왔다고 합니다.
분명히 이 프로그램은 공부를 잘하는 수재들의 비밀을 말해주어야 하는데, 전혀 그 비밀을 찾을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아이큐, 부모님 학력과 소득, 사는 지역, 특목고 여부까지 다 조사했는데 특징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김경일 교수는 이들이 분명히 착할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그들의 일상을 찍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들은 다른 학생들보다 자신이 공부한 것을 더 많은 친구에게 가르쳐주고 있었습니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은 물론이요, 공부를 아주 많이 못 하는 아이들에게까지 가르쳐주고 있었습니다.
저의 교수님도 “구체적으로 모든 이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알려주지 못하면 그건 네가 모르는 거다”
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들은 남에게 가르쳐주면서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명확히 깨닫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메타인지’라고 합니다.
하지만 공부를 못 하는 아이들은 본인들이 잘 알고 있다고 믿거나 혹은 알고 있는 것도 모른다고 여겼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외롭다, 외롭다’를 반복할 때 한 친구가 “예수님이 너와 함께 있는데, 뭐가 외로워!”라고 했습니다.
그 친구는 철저한 개신교 신자였습니다.
아이큐가 98이고 쉬는 시간마다 공부 못하는 친구들이 그 친구에게 가서 공부했습니다.
저는 그 친구가 공부 못하는지 알았습니다.
그런데 등수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친구는 서울대에 들어갔습니다.
먼저 착해지면 잘 안 될 수가 없습니다.
‘디팩 쵸프라’도 자녀들을 그렇게 교육했습니다.
“너희는 남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만 생각해라. 나머지는 아버지가 다 책임질게.”
남을 많이 도와주었던 큰아들은 인도에서 큰 사업가가 되었고, 다른 이들의 공부를 도와주던 둘째는
아버지처럼 하버드대 교수가 되었습니다.
세상을 사랑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사랑으로 살면 오히려 잘 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려고 한 것인데, 심지어 이 세상에서도 잘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먼저 하느님 나라를 구하면 나머지도 덤으로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진 자는 더 가지고 가진 것이 없다고 하는 자는 자기가 가졌다고 믿는 것마저 빼앗기게 된다는 말도 이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이 자신보다 이웃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으로 키워야 합니다.
제가 주일학교 교사를 할 때, 교안은 초등학교 대상이었습니다.
이때 수녀님은 하나하나 어린이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쓰지 못하게 고쳐주셨습니다.
이것이 제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더 소외된 이들을 도우려 하면 더 발전하게 됩니다.
세계 최초의 디지털카메라를 만든 사람이 ‘스티브 사쏜’이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코닥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필름 카메라를 설명하다가 그 필름을 어린아이도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으로 설명하는 순간에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필름을 보통 “빛에 노출되면 이미지를 형상화하기 위해 화학 반응하는 물질” 정도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쏜은 “필름은 그릇이다”라고 말을 바꿔봅니다. 그렇다면 그릇이 굳이 필름일 필요는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는 카세트테이프에 이미지를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만듭니다.
그렇게 조금씩 디지털카메라개발이 시작되었습니다. 0.1%의 비밀은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어쩔 수 없이 우리를 ‘서로 사랑하라’로 가게 합니다.
이웃 사랑을 위해 세속-육신-마귀의 욕망을 버리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웃을 사랑해도 세상에서 저런 것들을 추구하는 이들보다 더 성공할 수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래야 성공합니다.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성공하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니까 성공하게 됩니다.
도와주다 보면 내가 공부해야 합니다.
나의 부족함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더 도와주려고 더 노력합니다.
그러면서 성장합니다.
진정한 사람 낚는 어부는 그래서 행복합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누리는 방법입니다.
김연아 선수는 은퇴했음에도 전 세계 운동선수 선행왕 4위에 자리매김한 적이 있습니다.
2017년까지 기부액이 56억이었습니다.
가톨릭 신자이며 김수환 추기경의 바보 장학회 홍보위원이기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믿으면 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됩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다 이태석 신부와 같은 삶을 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웃을 위해 살기 때문에 하는 모든 일이 잘 되고 세상 사람들에게도 존경받습니다.
세상은 반드시 내가 주는 대로 되돌려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그렇게 되도록 가르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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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0. 연중 제1주간 월요일.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연중 제 1 주간 월요일-묵상과 기도
교회는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신 구원 업적을 한 해 동안 기념하고 경축합니다. 이를 전례 주년, 또는 전례력이라고 합니다. 주간 첫날 주일에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일 년에 한 번 주님의 수난과 부활 축제를 장엄하게 지냅니다.
한 해를 주기로 하여, 예수님의 탄생에서 승천, 성령강림날까지, 또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까지 그리스도 신비 전체를 전례로 축제를 지냅니다.
전례주년 중심은 예수님의 '부활과 탄생'입니다. 부활 대축일과 성탄 대축일을 기준으로 대림, 성탄, 사순, 부활 시기가 배치됩니다. 이 네 시기를 제외한 33주간 또는 34주간이 연중시기 입니다. 연중 시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특정한 탄생, 수난, 부활 등 신비보다는 공생활 복음 선포 등 그리스도의 신비 전체를 기억하고 경축합니다.
회상과 성찰
지난시간을 되돌아봅니다. 지난 시간 걸어온 길. 자리, 만남을 회상합니다. 나의 모습을 깊이 바라봅니다.
-. 3분 동안. 지난 시간과 현장을 되돌아봅니다. 나와 이웃, 그들과 만남, 대화, 일, 사건 등 그 경과를. 두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 자비하신 그분의 현존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 선과 진리, 사랑과 자비, 그리고 허약함과 허물, 그릇됨과 악습 등을 봅니다. 회개와 개선, 결심 등 복음적 실행을 묵상합니다.
-. 감사의 마음으로 다짐과 실천을 기도로 바칩니다.
말씀 묵상
에프라임 산악 지방에 춥족의 라마타임 사람이 하나 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엘카나였는데, 에프라임족 여로함의 아들이고 엘리후의 손자이며, 토후의 증손이고 춥의 현손이었다.
그에게는 아내가 둘 있었다. 한 아내의 이름은 한나이고, 다른 아내의 이름은 프닌나였다. 프닌나에게는 아이들이 있었지만 한나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엘카나는 해마다 자기 성읍을 떠나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주님께 예배와 제사를 드렸다. 그곳에는 엘리의 두 아들 호프니와 피느하스가 주님의 사제로 있었다.
제사를 드리는 날, 엘카나는 아내 프닌나와 그의 아들딸들에게 제물의 몫을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한나에게는 한몫밖에 줄 수 없었다. 엘카나는 한나를 사랑하였지만 주님께서 그의 태를 닫아 놓으셨기 때문이다. 더구나 적수 프닌나는, 주님께서 한나의 태를 닫아 놓으셨으므로, 그를 괴롭히려고 그의 화를 몹시 돋우었다.
이런 일이 해마다 되풀이되었다. 주님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프닌나가 이렇게 한나의 화를 돋우면, 한나는 울기만 하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남편 엘카나가 한나에게 말하였다. “한나, 왜 울기만 하오? 왜 먹지도 않고 그렇게 슬퍼만 하오? 당신에게는 내가 아들 열보다 더 낫지 않소?” 1사무1,1-8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 마르1,14-20
실천
공생활을 시작한 예수님, 나자렛으로 부터 갈릴래아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았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공생활의 하느님 나라 기쁜 소식을 전함에서 첫 번째의 일은 하느님 나라 구원 사업을 할 협력자들을 뽑기 위한 제자 선발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어부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 아들들 야고보와 요한을 각각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예수님이 어부들을 불렀을 때 그들은 그물을 버리고, 또한 아버지, 삯꾼들, 배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 나섰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세 가지 내용이 있습니다. 첫째, 따름입니다. 둘째, 구원을 위한 어부. 하느님 나라 일꾼임을 자각입니다. 셋째, 그물이나 배, 곧 직업, 소유, 가족의 인간적 연결됨을 극복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의 복음 선포의 첫째는 제자들의 따름, 하느님 나라의 일꾼, 자기 소유의 포기 등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마침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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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0. 연중 제1주간 월요일.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버림의 미학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고 하는 말을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소유욕이 있습니다. 소유욕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무엇을 가지려고 하는 욕구와 욕망입니다. 그런 마음의 밑바닥에는 소유욕이 행복을 만족시켜줄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행복을 느끼는 것은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소유로 인해 느끼는 행복입니다. 또 하나는 정반대의 개념입니다. 버림으로써 소유할 수 있는 행복입니다. 전자는 이해할 수 있을 텐데 후자는 쉽게 납득이 잘 가지 않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과 배치되는 딜레마입니다. 또한 사람이 가지는 보통의 욕구와 욕망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이는 버림의 미학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버림의 미학은 무엇일까요?
왜 우리 모두는 언젠가 세상을 떠날 때 모든 것을 버리고 가는 인생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버리기 힘들어하는 것일까요? 인도의 저명한 명상 학자가 이런 이유에 대해 언급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 사람의 종교는 정확하게 뭔지는 모르지만 그 학자에 따르면 제가 봤을 땐 종교적인 관점으로 설명을 하는 것 같습니다만 아무튼 그 학자는 영혼의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은 즉, 다시 말해 여기서는 사후 세계를 말하며 진정으로 그 세계를 갈망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미련이 없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은 최소한의 생활만으로 현세의 삶에 만족하려고 한다고 합니다. 일면 이해가 될 것 같은 면도 있으면서도 이해가 잘 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의 세계를 갈망하면서 현세의 삶도 풍족하면 금상첨화이지 않을까 하기 때문입니다. 얼핏보면 그럴 듯하지만 실제로 정신세계에서는 모순이 됩니다. 그 이유는 둘을 동시에 다 충족시키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하겠습니다.
요즘 현대에 새로운 생활방식 중 하나인 '미니멀 라이프'가 있습니다. 최소한의 물품으로 만족을 하며 사는 생활 스타일입니다. 이런 삶의 밑바탕에는 '버림의 미학'이 숨어 있습니다. 이걸 철학적으로 설명하는 한 학자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눌릴 수 있는 범위 밖의 소유를 원하게 되면 그 소유욕은 그때부터는 불필요한 소유욕으로 변질된다는 것입니다. 이 시점이 한계점입니다. 우리는 이 한계점을 벗어나면서부터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 사람만이 이 세상을 살면서 행복을 느낄 수가 있다고 합니다. 이 한계를 제한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자신이 만족한 수 있는 한계가 없기 때문에 늘상 그 사람은 만족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달리 말하면 얼마든지 만족한 삶을 살 수가 있는데도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바로 그 한계를 설정하는 설정값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 범위를 낮추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 한계를 낮춘다는 것은 바로 다른 표현으로 하면 '버림'입니다. 결국 버림으로써 만족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역설이 됩니다. 저는 이 이론을 신앙에 접목해봤습니다. 이해가 쉽지 않지만 논리적으로 보면 정확한 이론과도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제자들의 모습을 잘 보면 그 속에 해답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 그 시점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실 때였습니다. 또한 전제조건이 회개였습니다. 저는 이 회개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고 싶습니다. 회개는 누구나 무엇인지는 다 잘 알겠지만 오늘 복음 안에서는 다른 관점으로 이해를 하고 싶습니다. 바로 버림입니다. 제자들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따를 때 그들의 행동과 모습을 잘 보시면 어떤가요? 바로 그들은 재산 목록 1호와 같은 것인 그물을 버렸습니다. 그물을 버린 것도 우유부단한 행동으로 한 것이 아니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그들은 '곧바로' 실행에 옮긴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이 또 다른 회개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런 행동이 언제 일어난 것인지를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언하신 시점입니다.
이 말씀과 연결지어서 묵상을 해보면 하늘나라에서는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것을 다 버려야만이 예수님을 따를 수 있고 그렇게 해서 따를 때만이 우리는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시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여기서 그물은 단지 재산만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광의적으로 해석하면 가지고 있으면 오히려 하늘나라의 삶을 사는 데 거추장스런 모든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무수한 것이 있을 겁니다. 시기, 질투, 아집, 욕심, 번뇌, 쓸데없는 명예 등등 많이 있을 겁니다. 결국은 이런 것에서 자유로운 영혼이 될 때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누릴 행복을 만끽할 수 있는 것이지 그게 진정한 참 행복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것인데 우리 사람은 버리면 행복해질 수 있는데도 그걸 애써 손에 쥐려고 아옹다옹하며 사는 어리석은 중생의 삶을 살면서 그 속에서 행복을 누리려고 하기 때문에 하늘이 주는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없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버림의 미학이 요즘 신앙에도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게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다시금 그 중요성을 생각해보는 새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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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0. 연중 제1주간 월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1주간 월요일 제1독서(히브1,1~6)
하느님께서 천사들 가운데 그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또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라."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5)
히브리서 1장 5절부터 13절까지는 7개의 구약 인용 성구가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사보다 우월하다는 것이 구약 성경의 일관된 사상임을 보여준다.
그중에서 히브리서 1장 5절은 시편 2장 7절의 인용으로 하느님께서 '내 아들'이라고 칭하신 유일한 존재는 그리스도 뿐이심을 보여준다.
물론 한 부류의 천사들이 넓은 의미에서 '엘로힘'(elohim)의 아들들로 불리워진 경우는 있지만(시편29,1), 어떤 특정 천사가 좁은 의미에서 메시야를 나타내는 하느님의 아들로 칭해진 적은 결코 없다.
그래서 시편 2장 7절은 천사들 중에 누구에게가 아니라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대상으로 삼는다.
'너는 내 아들(이다)'라는 이 선언은 영원 세계에서는 이미 이루어진 선언이지만, 역사적으로는 예수님의 생애에 나타난 선언이기도 하다.
즉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마르1,11), 그리고 타볼산의 현성용 때(마태17,5) 예수님께 들려온 선언인 것이다.
한편 '오늘'에 해당하는 '세메론'(semeron; today)은 '오늘'(this day)이라는 뜻이지만, 하느님의 시간적 관점에서 '오늘'은 시간을 초월하는 영역이다.
즉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라는 선언은 예수님께서 베틀레헴에서 육신의 몸을 입고 탄생하신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영원으로부터 발출하셨음을
말하는 구절이다.
세상이 창조되기 전 영원으로부터 살아계신 하느님의 말씀이시요 지혜이신 성자께서 성부 하느님으로부터 영원으로부터 발출하셨다는 말이다.
인간의 이해 개념으로는 성자 예수님과 성부 하느님간의 관계를 설명할 수 없어서 그것을 단지 '낳았다'로 표현하는 것뿐이지, 이것을 신학적으로 '영원 발출(발생)'이라고 부른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라'
이 구절은 하느님께서 다윗이 낳은 아들 솔로몬을 지칭하여 예언하신 사무엘 2권 7장 14절의 상반절을 인용한 구절이다.
사무엘 2권에 나오는 이 말씀의 주인공이 일차적으로는 솔로몬을 가리키지만, 여기서 솔로몬은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즉 신정(神政) 왕국인 이스라엘의 임금으로서 기름부음 받은 솔로몬은, 하느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임금으로서 하느님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실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다.
기름부음 받은 메시야는 유일하신 분이시므로, 여기에 천사가 개입될 자리는 없는 것이다.
특히 원문에 '나는'에 해당하는 '에고'(Ego; I) 혹은 '그는'에 해당하는 '아우토스'(autos; he)과 같이 생략되어도 좋은 주격 인칭 대명사가 사용된 강조적 문장이며, 동시에 완벽한 평행 대구 구조로서 하느님과 그리스도 사이의 부자(父子) 관계가 이중으로 매우 강조되어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러한 강조 구문을 사용해서 유대인들이 이미 알고 있는 성경 지식을 근거로 그리스도께서 천사보다 우월하심을 부각시킨다.
하느님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천사들이 하느님과 가지는 관계와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로 우월한 것이며, 이러한 '하느님과 중재자 그리스도 사이의 부자(父子) 관계'는 구원하시는 하느님과 타락한 인간 사이의 모든 은총의 관계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2021년 1월 11일 [연중 제1주간 월요일]
하늘의 존재로 부활할 것인가, 땅의 존재로 흙으로 돌아갈 것인가
사람은 어디서 살든 영원히 산다는 것이다.
(마르1,14-20)
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15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 구약이 끝나고 신약의 시작이 되는, 곧 율법의 실체, 그리고 요한이 예고했던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는 때가 왔다는 것이다.(마태3,2) 또한 회개(메타노이아)는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라는 차원이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왔던 구원이 없는 생활방식에서 돌아서서 구원의 진리의 삶으로 오라는 말씀이다.
(1베드1,18-19) 18 여러분도 알다시피, 여러분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헛된 생활 방식에서 해방되었는데, 은이나 금처럼 없어질 물건으로 그리된 것이 아니라, 19 흠 없고 티 없는 어린양 같으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그리된 것입니다.
= 율법 안에 하느님의 구원의 진의(진리)는 깨닫지 못하고 자신들의 뜻을 위한 법으로 지켜왔던, 그래서 그 하느님의 구원의 뜻을 속이는 헛된 신앙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돌아오라는 것이다.
(에페4,21-24) 21 여러분은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그분에 관하여 듣고 또 가르침을 받았을 줄 압니다. 22 곧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23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24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돌아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 첫 창조의 하느님의 모습으로 회복이며(창세1,27) 그 하느님의 뜻인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 그 길이 구원의 진리임을 믿는(입는) 것이 거룩과 의로움의 하늘의 새 인간인 것이다.(로마3,24 히브10,10참조)
(2코린3,14) 14 그런데도 이스라엘 자손들은 *생각이 완고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까지도 그들이 옛 계약(율법)을 읽을 때에 그 *너울이 벗겨지지 않고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 율법의 제사와 윤리, 그 모든 것의 실체가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그 진실을 못 보는 이들이 많은데, 뱀의 유혹을 먹은 아담의 죄, 선악의 논리가 역사를 따라 흘러 하느님의 뜻을 가로막는 너울(수건)이 되어 인간의 뜻 지혜로 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가던 길에서 방향을 바꾸어 돌아서는 것, ‘메타노이아, 회개’다.
내 뜻, 내 생각의 삶에서 돌아서서 하느님의 뜻으로 오는 것, 회개다. 죽음으로 끝나는 땅의 삶에서 돌아서서 영원한 하늘의 생명의 삶으로 오는 것, 회개다.
16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18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19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20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
=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는, 그 모습이 사람을 낚는 어부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 사람의 일이 곧 하느님 나라의 모형이기 때문이다. 일을 해서 양식을 얻어먹어야 살 수 있는 것이 땅(육)의 사람이다. 그렇듯, 성경에서 ‘참 양식을 찾는일’을 해서 먹는 것이 영의 사람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풍랑이 이는 호수의 삶, 그 고달픈 삶의 사람들에게 그물을 던지는, 곧 하느님나라의 양식인 하늘의 복음,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배(교회)- 옛 방식에 젖어있는 사람들에게 그 하느님의 바른 가르침을 주어 고쳐주는 것, 그 예수님의 뜻으로 보시고 곧바로 제자들을 부르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그 하느님 나라의 일을 했던가 하는 것이다. 그들이 그 하늘의 일을 하지 못했음을 우리는 안다. 그래서 너무 서둘러서 오늘의 제자들처럼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면 안된다.
오늘 복음묵상의 가르침-‘우리도 제자들처럼 모든 두려움, 걱정, 인간적인 나약함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기준으로 하는 복음의 삶을 살아 제자들처럼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이 언제 예수님 기준으로 살았던가?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말씀하시던 그 자리에서까지 자신들의 욕망, 뜻을 드러냈던 제자들이다.(마태20,21-24참조) 그리고 예수님을 배반했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다들 도망갔던 제자들이다. 그런데 누구를, 무엇을 본받자고 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제자들이 아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하신 일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의 뜻을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들이 아닌 예수님께서 옛 방식에 젖어 고달프고 무거운 짐 같은 신앙을 사는 이들에게 하느님나라 생명의 복음을 전해서 사람들에게 쉼(안식)과 평화를 주는, 그 고쳐주시는 일은 예수님 혼자 하셨다.
일은 예수님 혼자 다 하시고 그 일에 제자들을 그냥 동참시켜 주신 것이다. 그것은 엄청난 일인 것이다. 하느님의 재창조 일에 피조물인 인간들이 함께 하는 것이니 어떻게 은혜롭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본문에서 제자들이 ‘벌고 따랐다’한 것도 완전히 버린 것이 아닌 ‘버린 척’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자(죽음) 그 배를 다시 찾아서 고기 잡으러 갔지 않은가(요한21,3)
우리는 그 철없는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곧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예수님을 봐야한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만으로 ‘제자들을 본받자’하는 생각이 바로 인간의 뜻, 그 너울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 인간의 뜻 너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사라진다고 하셨으니 그 인간의 지혜를 벗고, 성경의 모든 인물들, 사람의 불가능을 보고 그 모습이 ‘나 자신의 모습임’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과 나,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하느님의 뜻에 죽기까지 순명으로 실행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 하늘의 사랑을 적어놓은 것이 성경이다. 그래서 그 사랑을 내가 받아 전하는 것, 큰 계명의 실천이다. 그러나 성령이 함께 하셔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도 옛사람으로 돌아갔던 제자들이다. 그랬던 그들이 성령을 받은 후, 예수님을 기준 하는 삶으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목숨 바쳐 전했듯이, 성령을 청하고 그분의 이끄심을 받아야 하느님의 뜻을 깨닫는 올바른 진리의 신앙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나의 불가능을 깨닫고 하느님의 뜻(지혜)을 깨닫고자 하는 그 갈망하는 마음이 시작일 것이다.
(지혜6,11-13) 11 너희가 나의 말을 갈망하고 갈구하면 가르침을 얻을 것이다. 12 지혜는 바래지 않고 늘 빛이 나서 그를 사랑하는 이들은 쉽게 알아보고 그를 찾는 이들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13 지혜는 자기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미리 다가가 자기를 알아보게 해 준다.
☨하느님의 지혜이신 성령님! 우리 모두가 당신을 갈망하게 하소서~아멘!!!
연중 제1주간 월요일 복음(마르1,14~20)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17)
한글 새 성경에 '오너라'라고 번역된 '듀테'(deute; follow)는 둘 또는 그 이상을 부를 때 사용되는 부사로서 동사적 의미도 갖는다.
즉 이 단어가 동사로 쓰일 때에는 '이쪽으로 오다', '자 오라' 등의 뜻으로 상대를 재촉하고 명령하는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따라'로 번역된 '오피소'(opiso; after)는 장소적 의미로서는 '~뒤에', 시간적 의미로서는 '~후에'라는 의미를 가진 전치사이므로, '내 뒤에 오라'(follow me)는 뜻이다.
그런데 이 명령은 매우 간단하면서도 단호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제자로 부르시면서 내린 단 한마디 '나를 따라오너라'는 명령안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순전히 당신 자신만을 뒤따를 것을 원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 그들이 자신의 계획에 따라 자신들이 스스로 인생 행로를 결정하고 그것에 책임지는 삶을 살아 왔지만, 이제 예수님의 제자가 된 후에는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기고, 오로지 그분의 뜻만을 쫓아 살아야 함을 뜻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아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시면서 외형적인 직업이나, 재산, 그리고 가족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버려야 하는 자아 부정의 삶과 그러한 결단을 요구하고 계신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리고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and I will make you fishers of men)는 말씀이 나온다.
여기서 '사람낚는 어부'로 번역된 '할리에이스 안트로폰'(halieis anthropon; fishers of men)에서 '안트로폰'(anthropon)은 보편적인 '사람'을 뜻하는 명사 '안트로포스'(anthropos)의 소유격 복수이다.
명사의 소유격에는 다양한 의미가 있는데, 여기서는 목적의 의미로 쓰였다.
말하자면 고기를 그물로 잡아들이는 어부와 같이, 사람들을 복음으로써 포획한다는 은유적 표현으로서, '사람들을 그물로 잡는 어부'의 의미로 '힐리에이스 안트로폰'(halieis anthropon)이 쓰였다.
특히 여기서 관사없는 복수형으로 사용해서 어느 특정한 사람이 아닌, 모든 인류를 복음 전파의 대상으로 해야 함을 암시한다.
사실 복음 선포자는 죄악과 어둠과 오류의 바다에서 표류하고 있는 인간들을 구원의 배안으로 모아들이는 사람 낚는 어부인 것이다.
여기서 특징적인 단어인 '포이에소'(poieso; I will make)는 '만들다','되게 하다'는 뜻을 지닌 동사 '포이에오'(poieo)의 미래 능동태 1인칭 단수이다.
따라서 그 '만드는' 행동의 주체가 부름받은 베드로와 안드레아가 아닌 부르신 예수님 당신 자신임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들 스스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예수님 당신께서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가 되도록 만들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따라서 제자로 부름받은 자들은 자신들의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걱정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다.
한편 당시 고대 그리스나 근동의 문화적 관습은 제자될 사람들이 스승을 찾아가 스스로 제자가 되겠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인데,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스승이신 예수님 당신 자신이 먼저 찾아가 능동적으로 제자들을 선택하여 부르신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 1장 17절에서 '나를 따라오너라'(Come, follow me)는 말씀은 현재인데,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and I will make you fishers of men)는 말씀은 미래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부르시는' 현재와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미래 사이의 시간적 간격은 적어도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며 함께 한 3년간의 시간들, 즉 성령 강림 이후 초대 교회에서 본격적으로 그들이 주님의 사도로서 활동을 했다면, 그 기간들은 수련 및 양성 기간, 오늘날의 사제 서품 전의 신학교 과정과 종신 서약 전의 수도 생활이 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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