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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빛을 발하라(이사야 60:1-5)
오늘은 2025년도 신년감사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한 해를 주셨습니다. 한번도 걷지 않는 새로운 길이 열렸습니다. 이제 새로운 마음으로 하나님이 행하실 큰 일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담대하게 나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암울한 현실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삶을 살아가야 할지 희망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70년간의 바벨론 포로생활을 마치고 그렇게 그리워하던 고국 이스라엘로 희망을 안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막상 돌아와 보니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과 너무나 피폐한 경제적 현실앞에 절망과 두려움이 앞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뿐 만 아니라 그들을 대적하는 적들은 여전히 그들을 둘러싸고 있으며, 삶의 여건 역시 너무너무 힘들었습니다.
예루살렘 거민들은 낙담과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과연 이럴 수 있을까?", "예루살렘은 다시 거룩한 도성이 될 수 있을까?" "바벨론 포로생활보다 나은 삶이 과연 가능한가?" 답답한 현실 앞에 주저앉아 있을 때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소망의 메세지를 들려주신 것입니다. 그들에게 회복에 대한 꿈을 주시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주 분명한 말씀이 들어 있었습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어두운 밤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이미 해가 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빛이 그 백성 위에 비치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영광의 아침이 동터 오는데 이 빛을 보지 못하고 여전히 어둠속에서 불평과 불만에 사로잡혀 원망하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 대한 책망과 격려이기도 합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는 말씀은 죄로 말미암아 어두워진 세상에서 죽음과 절망의 고뇌 속에 시달리고 있는 인생들에게 산 소망을 주시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특별히 새해 우리 교회 표어로 "일어나 빛을 발하는 교회"로 정하였다는 것입니다. 2,700여 년 전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새해 우리 양문교회 성도들에게 이 말씀이 약속이요 명령이심을 명심하고 듣고 순종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이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일어나라는 말을 '이제 깨어서 행동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적인 무감각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땅히 해야 할 사명을 깨닫지 못하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현실이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주저앉아 있으면 해결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히려 원망이나 하고 절망하고 불신앙의 늪에 빠져서 마귀의 종노릇이나 할 뿐입니다. 먼저 자기가 처한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지금 나는 영적인 상태는 어떠한가? 이렇게 마냥 앉아 있는다고 시간이 가면 저절로 해결되겠습니까? 아닙니다. 일어나야 합니다. 저는 기도하면서 종종 우리의 영적인 실상을 볼 때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양문교회가 건강한 교회가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려고 하면 지금 이 상태로 마냥 앉아 있으면 안되겠다는 긴장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첫번 째 말씀이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영적 현실을 바로 보고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패배 가운데서 일어나라, 좌절 가운데서 일어나라, 너희들의 그 위기 가운데서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일어나면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 일어나라는 명령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지금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한 번 일어나려고 하다가 주저앉지 말고 계속해서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현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언제나 현재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금 일어나야 합니다. 다음이라고 다짐만 하고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일어나십시오.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나쁜 습관에서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일어나는 것은 행동의 첫 단계입니다. 일어나지 않고는 행동하지 못합니다. 주저앉아서는 아무 일도 못합니다. 드러누워서는 아무 일도 못합니다. 일어나야만 다음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면에서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앉아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영적인 활동을 중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저 성전미문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처럼 교회당은 오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찬송도 없습니다. 기도도 없습니다. 전도도 없습니다. 성경을 읽는 일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도 없습니다. 있다면 그것은 종교적 행위입니다. 노래를 부릅니다. 예배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신령과 진정한 예배는 없습니다.
축복에는 관심이 있지만 순종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자기자신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습니다. 이제 일어나야 합니다. 죄악의 자리에서 뿐 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굴레에서 벗어나 주님께로 나아와야 합니다. 섬김을 받는 자리에서 섬김의 자리로 일어서야 합니다. 육체의 소욕에서 벗어나 성령의 소욕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지 아니하고 잠자는 제자들에게 "일어나라"(마26:46),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눅22:46)고 깨우셨습니다. 감옥에서 잠자고 있는 베드로에게 천사가 와서 "일어나라"(행12:7)고 깨우셨습니다. 사명을 외면하고 다른 길로 도망가는 요나는 배밑창에 내려가 잠자고 있을 때 하나님은 선장을 통해서 요나를 깨우셨습니다.(욘1:6). 비상시에 잠자는 사람은 낭패를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보초를 서는 사람이 잠을 자면 큰일납니다.
잠들어 버리면 분별을 못합니다. 주위 상황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합니다. 도둑이 들어와도 모릅니다. 불이 나도 모릅니다. 이처럼 영적으로 잠자는 성도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적으로 병든 자, 잠자는 자 이제 일어나야 합니다. 일어날 때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일어날 때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일어날 때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어느 성도가 주일에도 영업을 하다가 어느날 깨달음이 있어서 주일에 가게 문을 닫고 신앙생활을 바로 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이제 주일날 장사를 하는 것에 미련을 떨쳐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깨달음을 주신 것입니다. 영적인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전에 교회에서 봉사하지 못하던 몫까지 할 일을 찾아서 열심히 봉사했습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평일남 소님들이 많이 와서 사업도 아주 잘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주일날 문을 닫고 영적인 기쁨도 되찾고 돈도 버는 중에 주일날 예배드리고 마치면 시간이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가게문을 열 수도 없고 이 남는 시간에 무엇을 할 것인가? 노는 것도 한 두 번이고 이 분이 주일예배를 마치고 남는 시간에 가게를 열지않는 대신 내가 이것을 해야겠구나 했던 것이 전도입니다. 교회에서 전도운동을 할 때마다 이 분은 한번도 전도를 해보지 않았는데 '그렇다! 이 남는 시간에 전도를 해야겠다'고 교회전도지를 가지고 매 주마다 주일 오후에 아파트단지나 야외공원을 돌아다니면서 "예수 믿읍시다. 예수 믿읍시다" 전도지를 주면서 전도를 했습니다.
전도자로 변신하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복음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를 통해 믿는 자들이 생겨나는 간증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볼 때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았는데 하나님이 전도지를 받은 사람들 속에 역사하시면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는 것입니다. 일어납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어나야 합니다. 게으름에서. 안일함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빛을 발하라는 말씀입니다.
1절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일어나라는 명령에 이어 빛을 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말하면 일어나라고 하신 이유는 빛을 발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일어나 빛을 발할 수 있습니까?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빛이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위에 임하였다는 것입니다. 빛이 임하기 전에 이스라엘은 일어나고자 아무리 힘써도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빛을 발하고 싶어도 발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 스스로는 결코 일어날 수도 빛을 발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강렬한 빛이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오늘 저와 여러분을 세상의 빛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앉아 있거나 드러누워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2절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라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태양이 없어서 어두운 것이 아닙니다. 전기불이 꺼져서 어두운 것도 아닙니다, 생명의 빛이 없어서 어둡습니다. 복음의 빛이 꺼져가고 있기 때문에 어둠이 온 땅을 덮을 것이고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울 것이라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깜깜하다고 말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있는 그곳에서 빛의 사자로서 빛을 발하여 어둠을 몰아내라는 것입니다. 지금 복음의 빛이 꺼져가고 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기갈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 기갈입니다. 그래서 양심이 마비되고 도덕성이 상실되어감으로 어둠이 만민을 가리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세계를 말세지말이라고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송구영신예배때에도 말씀을 드린 것처럼 정말 희망의 빛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세상이 점점 어두워져가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보다 더 심각한 것은 도덕적, 영적인 세계가 어둡다는 것입니다.
흑암의 권세가 온 땅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죄악의 권세가 온 정신세계를 흔들고 있습니다. 캄캄해져갈 때 오늘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예레미야선지자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라고 권면하였습니다. (렘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우리가 부르짖는 것은 빛을 발하는 가장 강력한 행동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은 세상에 빛을 비추고 있습니까? 혹시 빛이 꺼져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빛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빛을 가리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빛을 내는 광채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태양과 같은 발광체가 있고 또 하나는 달과 같은 반사체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가리켜 요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빛이십니다. 생명의 빛이십니다. 그분은 빛의 발광체이십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믿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요 8:12)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를 믿는 우리가 생명의 빛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명의 빛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달과 같은 반사체라고 했습니다.
빛의 원형이신 하나님과 가까이하면 보름달처럼 온전히 어둠을 비칠수 있습니다. 빛은 세상을 밝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또 빛은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빛을 생명을 살리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빛은 이 땅에 희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일어나면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나를 부인하면 내안예 계신 예수님이 드러납니다.
옥합에 들어 있는 향유가 나오려면 옥합을 깨트려야 합니다. 내 겉사람이 깨어지고 부서져야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빛을 밝히는 전구에 불과합니다.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발전소에서 전기를 보냅니다. 전기는 선을 통해서 전구에 전달되어지면 필라멘트를 통하여 빛을 발하는 역할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들 안에 빛의 발광체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들은 그 빛을 비추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주님과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장에서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요 15:5)“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주님안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과 기도생활입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생명을 공급받을 때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적 삶을 통해 빛을 비출수 있는 것입니다.
(마 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여기서 빛은 바로 착한 행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제는 행동으로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전도가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착한 행실을 보여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것은 바로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성경적 착한 삶이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착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인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착한 삶이고 말씀에 불순종하면 죄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중심이 되어 말씀이 서라 하면 서고, 말씀이 가라 하면 갈 수 있는 말씀중심, 하나님 중심, 교회중심의 가진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말씀 중심의 삶인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누가 드러납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헬라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가 전승되고 있습니다. 어떤 맹인이 밤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밤인 것을 알기에 길을 가다가 누구하고 부딪칠 것만 같아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는 필요도 없는 등불이지만 눈뜬 사람들이 그의 등불을 보고 비켜갈 수 있도록 등불을 켜서 들고 밤거리를 나섰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어떤 사람과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눈도 없소?" 맹인이 소리치자 상대방은 어리둥절합니다. "어두워서 보지를 못했습니다." "내 등불이 안 보인다는 말이요?" 그제야 그 사람이 자세히 살펴보니 맹인이 불꺼진 등을 들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꺼진 등불을 들고 있지 않습니까? 어디, 직접 한번 만져보시오." 맹인이 등을 만져보니 정말 싸늘했습니다. 그러니까 바람에 불이 꺼진 것도 모른 채 그대로 등불을 들고 밤거리를 돌아다닌 것입니다.
혹 우리가 불꺼진 등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 빛은 무엇입니까? 성령의 빛입니다. 성령을 받아야 진짜 예수의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렇게 많은 것을 보고 배웠어도 실제로 성령을 받지 않으니까 무력했습니다. 빛이 없었습니다. 어두움에 침몰된 것처럼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강림이후에 저들은 달라졌습니다. 빛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두움과 싸워서 물리치고 생명의 빛을 발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을 사모하십시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임하시는 성령님을 인정하시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빛을 발할 때 어두움이 도망가고 생명의 빛이 비쳐지고 우리를 통해서 죽은 영혼이 살아나고 병든 영혼이 치료받고 예수를 모르던 영혼이 예수앞으로 나오는 구원의 역사가 나타날 줄을 믿습니다.
3. 보라는 말씀입니다.
2-3절,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보라, 바라보라는 명령입니다. 빛을 발하는 성도는 바라볼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실 일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하셨습니까?
어둠이 온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3)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캄캄하다는 것은 죄악이 가득하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 때 하나님께서 이땅에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준비된 의인에게는 구원의 완성이고 영광이지만 어둠에 속한 악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루실 약속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기대하면서 믿음으로 그날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행하심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4,5절에서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먼 곳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어 올 것이라 (5) 그 때에 네가 보고 기쁜 빛을 내며 네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리니 이는 바다의 부가 네게로 돌아오며 이방 나라들의 재물이 네게로 옴이라”
네 눈을 들어 무엇을 보라는 것입니까? 사방에서 구원받을 자가 하나님앞에 나온다는 것입니다. 또 놀랄 정도로 믿지않는 이방나라들이 재물을 가지고 하나님앞에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되면 이방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아브라함에게 (창 13:14,15)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15)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이 주실 축복의 땅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 눈에 보이는 것 없고 환경적으로 위기가 닥쳐왔지만 눈을 들어 하나님이 하실 축복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을 통해서 하실 하나님의 위대한 축복을 바라보십시오. 앞으로 10년 후에 변화될 내 모습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이루실 위대한 역사를 바라볼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그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신 비젼이 무엇입니까?
1)사면에서 수많은 영혼이 구원받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일어나 빛을 발한 성도에게 주어진 결과입니다.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받았습니다. 빛을 발했습니까? 이제는 그 결과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본문 3,4절에 나오는 중요한 동사적 표현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온다'는 표현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3-4절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먼 곳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어 올 것이라" 또 여기서 무엇을 보라는 것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부어주신 축복을 보라는 것입니다. 일어나 빛을 발한 결과를 보라는 것입니다. 모여 오는 것을 내게 오는 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이 이방사람들이 구원받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나 때문에 믿지않는 자가 주앞에 나아와서 회개하고 변화되었습니다. 그때 5절, "그 때에 네가 보고 기쁜 빛을 내며 네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리니 이는 바다의 부가 네게로 돌아오며 이방 나라들의 재물이 네게로 옴이라”
2)하나님의 역사와 축복을 보고 놀라며 기뻐하는 은혜가 주어집니다. 뿐 만 아닙니다.
3)하나님의 약속은 물질적으로도 넘치도록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환경을 바라보고 실망하지 말고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했음을 회개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지금 세상의 자리, 불신의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두운 세상에 생명의 빛, 예수의 빛을 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세상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어둠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것입니다. 이것은 새해에 주신 하나님의 명령이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제 일어서서 빛을 바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실 일을 바라보는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 가지 약속을 이루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1)수많은 영혼이 구원받습니다. 2)하나님의 역사와 축복을 보고 놀라며 기뻐하는 은혜가 주어집니다. 3)물질의 복도 넘치도록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러한 축복과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