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남상순 소설가의 청소년소설 걸걸한 보이스(실천문학사)가 출간되었다. 장편소설 흰뱀을 찾아서(민음사)로 제17회 오늘의작가상을 수상하며 문학성을 인정받은 남상순 소설가는 “소박하고 건강한 문학성이 있다. 그래서 재미가 있다.”(유종호 문학평론가)는 평에 걸맞는 작품세계를 그동안 꾸준히 선보여 왔다.
2000년 이후 아동청소년문학에 흥미를 느낀 작가는 장편동화 이웃집 영환이, 특별한 이웃= ㅁ, 코끼리는 내일 온다를 썼고, 청소년소설 나는 아버지의 친척, 사투리 귀신, 키스감옥, 라디오에서 토끼가 뛰어나오다, 인간합격 데드라인, 스웨어 노트 등을 출간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왕복 8km씩 걸어서 학교에 다녔던 작가는 길 위의 모든 것들과 사귀며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때의 경험이 곳곳에 녹아 있는 남상순의 작품들은 긍정적인 에너지로 충만하다.
무엇보다 첫사랑이라는 걸 해보고 싶다.
남상순 소설 걸걸한 보이스는 재기발랄하다. 첫사랑을 갈망하는 중2 여학생 김태순이 첫사랑 연구소 <걸걸한 보이스>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이 저마다 다른 음계로 통통 튀면서 한 곡의 청량한 음악을 만들어낸다.
주인공 김태순은 영어 성경 번역을 위해 모인 교회 내 중등부 동아리인 <수요일에 오시는 하느님>의 일원이 되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힘 있는 사람을 이용하는 등 뒤가 좀 켕기는 짓도 서슴지 않는다. 물론 영어 성경 번역 같은 것에는 관심도 없다. 관심 있는 것은 오로지 첫사랑뿐. <수요일에 오시는 하느님>이 실은 girl과 boy를 연결해주고 그들을 완벽한 커플로 만들어주는 모임인 <걸걸한 보이스>의 포장임을 알게 된 김태순은 거기에 끼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품는다. 그리고 간난신고 끝에 결국 <걸걸한 보이스>의 일원이 된다.
나만 알고 아무도 모르는 첫사랑 연구소 <걸걸한 보이스>
그러나 첫사랑 연구소 <걸걸한 보이스>의 존재는 그야말로 알쏭달쏭하기만 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있는 듯 없는 듯 있는’ 것 같다. <걸걸한 보이스>의 존재를 알려준 수연이 말고는 아무도 그것에 대해 말해주는 사람이 없다. 오히려 모두가 짠 듯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라며 시치미를 뗀다. 영어 성경 번역은 뒷전이고 언제쯤 첫사랑을 만나게 될까 설레며 기다리는 주인공은 주구장창 자신의 기대에 배반당한 채 어려운 성경 공부만 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사랑 연구소 <걸걸한 보이스>는 반드시 있다고 굳게 믿으며 온 감각을 곤두세워 첫사랑의 신호를 감지하려 애쓴다.
감각을 예리하게 벼리면서 노력에 노력을 거듭한 끝에 드디어 하느님의 계시처럼 첫사랑의 신호가 주인공의 레이더망에 걸려들지만 그 신호라는 것도 <걸걸한 보이스>의 존재만큼이나 아리송하기만하다. 자꾸만 누군가 잘 짜놓은 각본에 놀아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것도 해피엔딩이 아니라 충격적인 결말이 예비된 아주 기분 나쁜 각본.
줏대? 나도 그런 거 있어!
사랑은 없다. 아니, 누군가 인위적으로 만든 각본에 따라 움직이는 사랑은 없다. 누군가 짜놓은 각본에 따라 움직이는 사랑은 그저 음모일 뿐이다. 이것을 깨달은 주인공 김태순의 선택은?
세상은 다양한 형태로 사람의 뒤통수를 치며 인생의 굴곡을 만든다. ‘좋음’ 속에는 ‘나쁨’이 있고, 반대로 ‘나쁨’ 속에는 반드시 ‘좋음’이 있다. 그러나 좋음도 나쁨도 자기 자신을 거쳐야만 비로소 제 얼굴을 드러내며 진정한 깨달음에 이르게 한다. 남상순의 소설 걸걸한 보이스가 단순히 철부지 중2 소녀의 ‘첫사랑 탐험기’로 끝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차례
수요일에 오시는 하느님
들어가기
그림 속에서
나가기(ESC)
에필로그, 다시 시작하기
작가의 말
▸밑줄 긋기
<걸걸한 보이스>에서 하는 일은 여자애와 남자애를 인위적인 커플로 만들어 데이트를 성공시킨 후 첫사랑으로 키워내는 것이었다. 우리 교회에서 제일 잘생긴 오빠인 곽철민과 윤정희 언니는 실제로 그렇게 해서 사귀기 시작했고 현재 이상적인 커플로 발돋움 중이라나 뭐라나. 한 마디로 <걸걸한 보이스>는 첫사랑을 생산하는 공장이면서 연구소이고 실험용 배양관이다. - 14쪽
하느님께서는 인간과 인간, 그리고 그 사이에다가 사랑이라는 바이러스를 듬뿍 뿌려주셨다. 사랑 믿음 소망 중에 사랑이 으뜸이라 했으니 이 세상은 사랑 바이러스로 충만한 상태인 것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보내는 신호는 이 바이러스를 타고 전송된다. 그런데 바이러스가 마음들을 과녁으로 싣고 가지 못하고, 그리하여 마음이 목표물에 명중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바이러스는 계속 증식하다가 변종을 일으키고 마침내 엉뚱한 곳에 가서 척 들러붙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게 온 신호를 내가 소중히 받아내는 것은 중요하다. 나의 마음, 나의 감각으로 말이다. 나는 신호를 놓치지 않았고 기쁨에 들떠 있다. 그러니 마스크가 필요하다. 들키지 않으려면 말이다.
- 60~61쪽
“아, 그렇구나. 그런데 너 박정화 언니랑 친해?”
“당근. 동아리 회장 누나잖아.”
“아니, 개인적으로 친하냐고.”
“개인적으로? 글쎄 그렇다고 해야 하나 아니라고 해야 하나.”
“따로 연락을 하기도 해?”
“응. 동아리 활동에 대한 공적인 상의를 개인적으로 진행할 때가 많지.”
“아, 그렇구나.”
“그런데 그건 왜 물어?”
“그냥. 그 언니 너무 멋있지 않냐?”
“진정한 여신이지.”
“내 눈에는 여왕으로 보여. 네 명의 호위 무사 같은 시녀들을 데리고 다니는.”
- 73~74쪽
“걸걸한 보이스는 어떻게 되고 있어? 첫사랑을 찍어내는 기계에 너하고 같이 들어갈 남자애는 누구니?”
마음이 켕긴 나는 잠시 헛기침을 했다. 윤호와는 절대로 사귀지 말라는 게 수연이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몰라. 걸걸한 보이스라고는 구경도 못해봤으니까. 그거 헛소문 같아.”
“아니야. 있어. 그건 분명해.”
“무슨 증거로?”
“수요일에 오시는 하느님에 들어가면 무조건 남친이나 여친이 생기잖아. 그게 증거지.”
- 87쪽
왜냐하면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자기만의 느낌과 판단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 느낌과 판단을 그대로 다른 사람 관계에 적용하려고 장난을 치다 보니 박정화 언니가 그런 오해도 받는 게 아닐까. 첫사랑을 제조하니 어쩌니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거였다. 사랑을 만드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엇갈리고 시행착오를 겪고 심지어는 상처를 낳더라도 말이다. - 132쪽
“윤호야.”
“응.”
“넌 왜 데이트니 뭐니 그런 말까지 하면서 날 놀리냐. 그럼 재미있어?”
“놀리는 거 아닌데.”
윤호가 놀란 듯 걸음을 멈추었다.
“놀리는 게 아니면 이게 뭐냐고?”
“뭐긴 데이트지. 너 나하고 사귀는 거 아니었어?”
“뭐?”
“어, 아니야? 난 그런 줄 알았는데.”
- 157쪽
“설마 아직도 걸걸한 보이스를 찾아다니는 것은 아니지? 세상에 그런 건 없어. 꿈 깨.”
“있어.”
“없어.”
“있다니까.”
“어디 있다는 거야? 적어도 여긴 없어. 그럼 없는 거야.”
윤호는 여기를 강조하면서 양 팔을 넓게 벌렸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있어, 바로 여기에.”
나는 줏대를 가진 사람답게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지금, 여기를 손가락으로 정확히 짚었다.
- 219~220쪽
▸작가의 말
이 년 전쯤 ‘에피소드 제조법’이라는 구절을 떠올린 것이 이 소설에 대한 직접적인 씨앗이었던 것 같다. 그 로 이런저런 사정에 의해 도무지 쓸 기회를 잡지 못하다가 올 초에 큰맘 먹고 보따리를 싸서 지방으로 내려가 집필에 착수했다.
당시의 집필 환경이 아주 좋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로서는 집을 떠나 써보는 것이 처음 있는 일이기도 했다. 게다가 ‘에피소드 제조법’이라는 구절 하나만 달랑 생각해둔 상태였을 뿐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 첫 문장을 시작하고 나자 세상 모든 사람들이 힘을 합쳐 나를 돕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필요한 정보들이 툭툭 날아와 내 컴퓨터 안에 저장되었다. 이를테면 나도 작가의 말 모르게 컴퓨터 커서가 “교회에서 베프가 된 인애였다.”라는 문 장을 쳤고, 교회에 관해 아무것도 몰랐던 탓에 기독교 신자인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너는 지금 하느님과 관련해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데?” 물었더니 그 친구가 “하느님 말씀은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다는 것.”이라고 거창하게 대답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성경 말씀의 번역과 변형이 자신의 사유에 미친 영향에 관해 몇 마디를 덧붙였다. 문제는 원래 좀 뒤퉁스럽던 내가 친구의 말을 “일점일도 오류가 없다고?”라는 식으로 받아쳤다는 것이다. 우리는 한참 웃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이 에피소드는 그대로 소설 속으로 도입되었다.
일점일이라는 유머코드를 에너지로 삼아 열심히 쓰다가 글의 흐름이 막혔을 때였다. 내가 묵고 있던 숙소의 스텝 중 한 분이 능구렁이를 먹여 키운, 한 알에 백만 원 하는 달걀에 관해 이야기해주었다. 그런데 이 달걀에 대한 태도와 생각이 사람마다 다 다르다는 것이 무척 흥미로웠다. 이 에피소드에 대한 논쟁 역시 자연스럽게 소설 속으로 초대되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단편소설 작업을 병행하느라 <걸girl한 boys>를 다 완성하지 못하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 교회에 처음 간 시골 할머니가 목사님 앞에서 ‘관심보살’이라고 기도하는 유머 동영상이 카톡으로 도착했다. 마치 내가 그런 게 필요하다며 주문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마지막으로 퇴고를 진행하면서 서울시립미술관에 갔다가 ‘그린 망치’라는 영감을 얻어왔다.
이 소설을 쓰면서 내가 한 역할은 ‘일점일’과 ‘관심보살’이 내가 쓰려고 하는 주제에 꼭 필요한 포인트라는 것을 알아본 것 정도랄까. 부품은 모두 남들이 주고 나는 그냥 조립만 한 것 같을 때가 있었다. 이 소설에 관한 한 나는 매우 운이 좋았다.
나는 동일한 장소에서 같은 것을 바라보면서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한다. 내 프레임 안에 들어온 장면은 한순간도 같은 적이 없었다. 내가 쓰는 소설도, 내가 사는 인생도 그런 식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패턴으로 향하는 원본들을 변형하고 비틀고 쪼개고 갈아엎는 것. 세상에 이보다 재미있는 일이 있을까.
지금 이 순간 내가 설치한 프레임 안에는 뭐가 들어와 있을까.
그것이 궁금해서 예술가들은 소설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영화를 만든다. 나도 그렇다.
우리 모두 오늘 하루만이라도 상투적인 것들에 무릎 꿇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작가 소개
경북 문경의 속리산 자락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왕복 8km씩 걸어서 다녔다. 등교할 때는 4km의 산길을 20분 만에 주파했지만 집으로 가는 길은 두세 시간 걸릴 때가 허다했다. 자연을 재료로 온갖 놀이도 하고 이야기판도 벌이면서 길 위에서 재미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멀리 산 너머에서 기적소리가 들릴 때 다른 세계를 상상해 보았는데, 문명은 그렇게 상상을 통해서만 왔다. 어른이 되어 첫 번째로 쓴 단편소설 「산 너머에는 기적소리가」를 통해 작가가 되었다. 흰뱀을 찾아서, 동백나무에게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들, 나비는 어떻게 앉는가, 희망노선 등의 장편소설을 발표했으며, 소설집 우체부가 없는 사진을 출간했다. 2000년 이후 아동청소년문학에 흥미를 느껴 장편동화 이웃집 영환이, 특별한 이웃= ㅁ, 코끼리는 내일 온다를 썼고, 청소년소설 나는 아버지의 친척, 사투리 귀신, 키스감옥, 라디오에서 토끼가 뛰어나오다, 인간합격 데드라인, 스웨어 노트 등을 펴냈다. 현재는 아차산 밑에서 글을 쓰고 있으며, 시간이 나면 산과 공원을 헤매고 다니면서 이야기를 구상한다. 제17회 오늘의 작가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