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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찾아서 – 지혜] 지혜
지혜란 세상에 관해 깊이 깨닫고 이에 걸맞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백과사전처럼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며, 장기나 바둑을 잘 두는 것처럼 꾀가 많다고 지혜로운 것도 아니다. 지혜란 과연 무엇일까?
지혜를 찾아서
서울대학교의 모토는 ‘베리타스 룩스 메아’(VERITAS LUX MEA)다. 우리나라 대학교인데 라틴어로 모토를 삼은 것이 좀 이상한가? 사실 1946년 서울대학교가 개교할 당시에 총장은 미군정청 고문관 해리 엔스테스였다. 그는 ‘진리는 나의 빛’이라는 유명한 표어를 따서 교훈을 만들었다. 대충 외국 것을 따서 만들었다는 풍문도 있는데, 정말일까?
예수회에서 설립한 서강대학교의 모토는 ‘오베디레 베리타티’(Obedire Veritati)다. ‘진리에 순종하라.’는 뜻이다. 연세대학교의 교훈은 ‘베리타스 보스 리베라비트’(Veritas vos Liberabit), 곧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다.
서울대학교와 같은 해에 개교한 호주 국립대학교의 모토는 ‘나투람 프리뭄 코뇨쉐레 레룸’(Naturam Primum Cognoscere Rerum)이다. ‘먼저 자연의 본질을 깨달으라.’는 뜻이다. 외국 것을 대충 가져다 썼다는 소문은 ‘진리’가 아니다. 인류 보편의 가치에 국내외가 따로 있을 리 없다.
공부하고 연구하는 학교니까 지혜를 모토로 내세우는 것이라고? 그러나 진리나 지혜라는 단어는 성경에 자주 등장한다. 사랑보다는 빈도가 약간 적지만 소망이나 믿음, 심지어 구원보다도 자주 등장한다. 동양 문화에서도 마찬가지다. 모름지기 군자는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네 가지 덕목을 가져야 하는데, 네 번째 덕목이 비로 지혜다.
공부하는 행복
모든 것을 금전으로 환원하는 세상이라, 공부도 원하는 직업을 얻거나 이익을 얻기 위한 수단처럼 되어 버렸다. 취업이 잘되는 전공이 인기다. 이른바 ‘문사철’은 대학에서도 찬밥 신세다. 심지어 대학교수도 태연하게 자신이 하는 연구의 경제적 가치가 얼마라고 말하는 시대다. 돈으로 노벨상을 사겠다는 듯이 막대한 돈을 들여 이런저런 프로젝트도 만들고 사업도 벌인다. 진리는 과연 세상의 경제적 복리를 얻기 위한 도구에 불과한 것일까.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재치 있는 꾀 정도로 지혜를 폄하하기도 한다. 자칫하면 속기 쉬운 세상이니, 머리를 요리조리 잘 굴려서 손해를 피하고 이익을 불리는 재주로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혜는 그런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정말 지혜롭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평생 출세도 못하고 배를 곯다가 모함받아 죽었으니 말이다.
진리, 곧 지혜를 추구하는 삶은 어떤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일이다. 자연과 사회의 질서를 찾아내고 일반 법칙을 추론하며 새로운 지식을 쌓아 가는 고귀한 행위다. 돈이 되지 않아도, 경제적인 이득이 없어도 상관없다. 그런 것이 정말 중요하다면 명문 대학교의 교훈은 ‘경제적 이득과 세상에서의 성공’이었을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의 지혜
진리를 찾는 지혜 따위는 그냥 학자에게 맡겨 놓으면 어떨까? 솔직히 말해서 머리도 나쁘고 공부도 체질이 아니다. 책은 읽기만 해도 졸음이 온다. 그러니 진리는 머리 좋은 사람에게 맡기고 응원만 하겠다는 심산이다. 좀 미안하지만 말이다. 게다가 이성보다는 감성이 중요한 것 아닌가? 뜨거운 가슴이 있으니 부족한 지혜를 벌충할 수 있을 것이다. 가슴도 없이 펜대만 굴려서 뭘 하겠냐는 항변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평생 영원한 진리를 추구하던 학자였다. 그의 별명은 천사적 박사(Doctor Angelicus)였다. 물론 천사만 연구한 것도 아니고, 천사 자신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는 그리스 학문부터 다양한 연구를 통해 스콜라 철학의 문을 열었고, 세상 만물의 질서를 세운 대학자였다. 그래서 학자, 교수, 학생의 수호성인으로 꼽힌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공부만을 잘해서 유명한 성인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진리를 추구하는 일이 신에게 다가서는 거룩한 행위임을 분명히 밝혔다. 그에게 이성은 곧 하느님이었다. 신앙을 위해서 이성을 포기하는 것은 그에게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느님 자체가 살아 있는 진리였기 때문이다. 진리에 눈감는 일 자체가 신에게 등을 돌리는 일이었다.
레오 13세 교황은 그를 가리켜 ‘고대의 위대한 박사에 대한 지극한 존경심을 품고 모든 이의 지혜를 얻을 수 있었던 성인. 이성과 신앙을 분명하게 구분하며, 동시에 둘을 조화시켜 각각의 권위와 품위를 지킬 수 있도록 한 인물’이라고 평하기도 하였다.
사실 수천 년 전부터 자연의 질서를 찾는 일은 창조주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성스러운 일이었다. 옛 지식은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으로 옷을 갈아입었지만, 지혜를 추구하는 태도에 담긴 가치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토마스에게 가장 중요한 진리는 오랜 지혜를 담은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것, 자연의 세계에서 직접 관찰하여 취할 수 있는 것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의 삶 자체가 바로 대학이었다.
진리를 향한 행복한 본능
공부가 타고난 천성이라고 자부하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사실 모든 인간은 공부하고 연구하는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복잡하게 얽힌 현상 속에서 규칙성을 찾고, 겉으로 드러난 모습 뒤의 숨은 원리를 추정하며, 처음 보는 세상의 일에 깊은 호기심을 가지는 것은 인류의 본성에 해당한다. 재미없이 암기만 반복하는 학교 공부를 연상한다면 따분한 일이겠지만, 진리를 탐구하는 행위를 시험공부와 비교할 수는 없다. 흥미로운 세상의 현상을 보고, 오랜 지혜를 담은 책을 보며 연구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아주 행복한 일이다.
어려운 신학적 진리만 공부하라는 것이 아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신학부를 졸업한 찰스 다윈은 따개비 연구를 무척 좋아했다. 신학자 아이작 뉴턴은 미적분과 만유인력을 발견했다. 자연의 질서에 대한 그들의 연구는 도덕적 진리나 신학적 발견만큼이나 위대하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신에 대한 경외심은 그 근원이 다르지 않다.
물론 진리를 추구하는 일은 돈이 되지 않는다. 명예를 얻기도 어렵다. 어쩌다 명예와 돈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결과일 뿐 목적이 될 수 없다. 낚시의 즐거움이 큰 물고기에 있는 것이 아니듯이, 진리 추구의 기쁨도 그 과정 중에 찾을 수 있다. 지혜를 얻는 행복이야말로 영원한 ‘진리’다.
갈등, 해결하는 게 아니라 관리하는 것
저의 상담실에는 갈등으로 싸우다 지쳐 이제 더 이상 싸울 힘도 없다거나 아예 헤어질 지경에 이르러 마지막에 상담 한번 받아보자며 찾아오는 부부들이 많습니다. 부부뿐 아니라 부모와 자녀의 갈등으로 마음의 문을 닫은 아이, 친구들과의 갈등으로 학교를 그만둔 청소년도 옵니다. 갈등은 집이나 학교만이 아니라 정당, 종교, 인종, 국가간 어디서나 존재합니다. 하지만 50년 가까이 인간관계를 연구한 존 가트맨 박사는 부부들의 갈등은 69%가 “영속적”이라고 합니다. 즉 대다수의 문제는 오래도록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기질, 성격, 사고방식, 신념, 가치관, 꿈 등이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갈등은 해결이 아니라 관리해야 합니다. 그럼 먼저 갈등이 왜 생기는지 알아볼까요?
가트맨 박사는 인간관계에서 갈등의 원인은 표면상으로는 관점의 차이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그 저변에 보이지 않는 ‘감정적 기억’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예를 들어 결혼 15년차인 박찬휘(45세, 가명) 씨와 김세례(44세, 가명) 부부는 명절이나 가족 모임이 있을 때면 늘 언성이 높아지고, 상대로부터 이해 못 받고 공격당하는 기분이 들고, 떠나고 싶을 만큼 압도감에 짓눌리며 절망감에 휩싸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제(본가) 식구 감싸기만 할 뿐 자신의 입장과 심정을 몰라준다고 섭섭해합니다. 남편은 온 가족을 화목하게 하려는 본인의 뜻이 번번이 거부당하고, 오해받고, 질타당하는 것 같아 너무나 화가 나고 절망감이 든다고 합니다.
이들은 상담사인 제게 묻습니다. “박사님, 저 사람 성격 좀 바꿔주실 수 없을까요? 전문가로서 누구의 관점이 옳은지, 누가 더 객관적이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지 말씀해주세요!” 하지만 이것은 성격 차이의 문제가 아니고 옳고 그름의 판단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이 있을 때는 두 개의 주관적 현실이 있고 둘 다 각자의 입장에서는 정당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화해와 치유가 일어날 수 있을까요?
여기에 답은 라포포트식 “평화를 위한 대화법”입니다. 라포포트 박사에 대해 약간의 배경을 소개합니다. 그는 원래 오스트리아의 피아니스트였지만 나치의 박해를 피해 뉴욕으로 이주한 뒤에 학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시카고 대학에서 당시로는 아주 특별한 “생물학의 수학”이라는 접학문을 하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방면에 관심과 조예가 깊어 폭넓은 학식과 깊이로 존경을 받았습니다. 1960년대 월남전이 일어나자 교수로서는 최초로 반전 운동을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캐나다 토론토 대학으로 적을 옮겨 동서고금의 방대한 전쟁사를 검토하다가 평화와 파멸의 공식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에 따르면 갈등은 두 갈래로 나뉘는데 하나는 파멸이고, 다른 하나는 상생 평화이며, 이는 우연이나 운이 아니라 정확히 예측 가능한 공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공식은 놀랍게도 매우 단순하지만 민족, 종교, 정파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 심지어 부부 사이 갈등에도 적용됩니다. 파괴와 파멸로 가는 공식은 간단합니다. 각자가 자기주장만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상대에 대한 비난, 경멸, 방어, 담쌓기가 무기로 등장하며, 상대의 입장과 감정을 무시하고 간과하면 더 비극적이고 파괴적으로 상승일로에 접어듭니다. 불신, 적대감, 공격심, 복수심이 서로 증폭되면서 죽기 살기로 싸우다가 결국 둘 다 돌이킬 수 없는 파멸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평화로 가는 공식은 어떤가요? 일단 양쪽 다 자기주장을 잠시 보류하고, 상대의 입장과 관점을 상대의 눈과 마음으로 바라보려는 마음자세를 취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상대의 말 속에 담긴 감정까지 경청해야 하며, 이것이 공감의 시작입니다. 즉 공감적 경청을 하는 것인데, 이때 중요한 것은 평화는 한쪽의 노력만으로는 안 되고 둘 다 진정 화해와 평화에 도달하고자 하는 진실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속임수, 약점 잡기, 우위 선점하기, 뒤통수 치기 등의 이기려는 속셈을 내려놓고 진심으로 상대를 이해하려는 뜻을 갖고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대화를 할 때 듣는 사람의 자세만큼이나 말하는 사람의 책임도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즉 상대에게 비방, 비난, 조롱 투로 말한다면 듣는 쪽이 경청할 도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화자(말하는 사람)는 청자(듣는 사람)가 공격이나 경멸당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철저히 ‘나-전달법’으로 자신의 주관적 경험, 감정, 기억을 부드럽고 예의 있게 말해야 합니다.그러면 들은 사람이 온전히 잘 경청했다는 사실을 ‘거울식 반영법’으로 확인해주면서 수긍이나 납득이 되는 부분을 말해준 뒤 화자와 청자의 역할을 바꿔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순서도 중요하지만 “과정” 또한 매우 중요하기에 말투, 눈빛, 자세, 억양, 몸짓 등 비구어적으로도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해야 합니다.
박찬휘 씨와 김세례 씨는 이 방법으로 15년간 쌓인 적대감을 녹여내고 평화를 찾게 되었습니다. 박찬휘 씨는 홀어머니의 장남으로 여동생 둘의 가장 역할에 충실하던 자신의 입장을 잠시 내려놓고 아내의 말을 처음으로 “아내의 입장”에서 듣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결혼 준비 때부터 신혼, 임신, 출산, 육아 기간 동안 자신이 남편의 우선순위가 아니었던 외로움, 섭섭함, 황당함, 소외감, 슬픔, 분노 등의 감정적 기억들을 하나씩 말했습니다. 남편은 그동안 매번 깨진 레코드판처럼 되풀이하던 원망이라 여기고 귓등으로 듣고 반격하던 방식이 아니라, 아내의 입장에서 참으로 고달프고 외로웠겠다고 수긍해주었습니다. 이어서 남편 또한 그동안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서 양쪽으로부터 오해받고 공격당해왔던 감정적 기억들을 천천히, 하나씩 말했습니다. 물론 아내를 비난하는 말투는 전혀 아니고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이 보고 느낀 대로만 담담히 말했던 것이지요. 아내는 자신만 힘들었던 게 아니라 남편 또한 참으로 민망하고, 죄스럽고, 불편하고, 힘들었겠다는 것을 비로소 남편의 입장에서 공감하고 연민이 느껴졌습니다.
둘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그동안 꽁꽁 얼었던 마음이 녹아 하나로 깊이 연결됨을 확인했습니다. 이후 그들은 같은 상황을 전혀 새롭고 다르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둘이 같은 눈과 마음으로 바라보니, 어머니, 아내, 남편, 자녀가 모두 큰 가족의 일원이며 서로의 노고와 가치를 깊이 고마워하게 된 것입니다.
이야기를 사회로 확장해봅니다. 우리는 지난 몇 해 동안 보수와 진보, 남과 북, 한국과 일본 등 다차원적으로 갈등 속에 지쳐가고 있습니다. 서로 싸우고 헐뜯고, 자기주장만 되풀이하는 것은 모두가 파멸로 가는 지름길임을 라포포트는 모든 전쟁사를 통틀어 공통된 결론으로 강조합니다. 평화로 가려면 내 입장과 주장을 잠시 보류하고 상대의 입장을 듣고, 공감하며 수긍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모두가 성장하고 번영하는 평화의 길입니다. 부모가 다툴 때 아이들은, “누가 잘났건 옳건 우린 둘 다 싫고 괴로워요. 제발 사이좋게 지내세요.”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두 파로 치열하게 다투는 정치 지도자에게도 국민이 바라는 것은, “서로 잘났다고 싸우지 말고 국민이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도록 해주세요!”가 아닐까요?
[심리학이 만난 영화] 빈곤의 심리학 기생충
”절대 실패하지 않는 계획이 뭔 줄 아니? 무계획이야. 무계획. 노 플랜. 왜냐? 계획을 하면 반드시 계획대로 안 되거든. 인생이. 여기도 봐봐. 이 많은 사람들이 ‘오늘 떼거지로 체육관에서 잡시다!’ 계획을 했었겠냐? 근데 지금 봐. 다 같이 마룻바닥에서 처자고 있자나. 우리도 그렇고. 그러니까 계획이 없어야 돼 사람은. 계획이 없으니까 뭐가 잘못될 일도 없고, 또 애초부터 아무 계획이 없으니까 뭐가 터져도 다 상관없는 거야. 사람을 죽이건, 나라를 팔아먹건.”
온 가족이 피자 상자를 조립해서 연명할 정도로 가난한 가족. 그들에게 드디어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다. 이들은 절묘한 계획으로 부잣집에 식구 네 명이 모두 취업한다.
아들은 영어 과외 선생으로, 딸은 미술 치료 선생으로, 아버지는 운전기사로, 그리고 어머니는 가사 도우미로. 모든 것이 계획한 대로 된다고 생각한 순간, 하늘에서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고, 계획에 없던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제72회 칸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 종려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의 2019년 작 ‘기생충’은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분투하는 4인 가족의 모습과 이들의 참담한 실패를 보여 준다.
계획에 없던 일들
사람들은 미래를 계획한다. 하지만 계획했다고 해서 모든 일이 계획한 대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계획에 없던 일들이 발생하는 것이 인생이다. 문제는 계획에 없던 일들이 발생했을 때 받는 충격의 크기가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특히, 그 사람이 가진 재산의 규모에 따라 예상치 못했던 사건이 삶에 주는 충격의 정도는 크게 달라진다.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는 것도 우리가 흔하게 경험하는 계획에 없던 일 가운데 하나다. 비가 올 줄도 모르고 캠핑장으로 떠났던 박 사장(이선균) 가족은 캠핑을 취소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캠핑을 가자고 졸랐던 막내는 운동장만큼이나 큰 잔디밭에 설치한 인디언 텐트에 들어가서 캠핑장에 가지 못했던 아쉬움을 달랜다. 계획에 없던 폭우 때문에 박 사장 가족이 겪게 되는 스트레스는 계획했던 캠핑을 취소하는 것에 불과하다.그렇지만 같은 날, 같은 폭우 때문에 저지대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의 집은 속수무책으로 침수 피해를 당한다. 기택(송강호)의 반지하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집은 물에 완전히 잠기고, 변기에서는 오물이 끊임없이 역류한다. 긴급 대피소로 지정된 인근 학교 체육관에는 침수 피해를 입은 사람들로 넘쳐 난다. 계획에 없던 일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훨씬 더 가혹하고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
가난의 심리적 의미
가난하다는 것은, 경제적인 차원에서 보면,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킬만한 충분한 ‘돈’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경제적인 빈곤으로 말미암아 심리적 자원이 고갈된다는 것이다. 부자들에게 일상의 많은 일은 쉽게 통제할 수 있는 것들이다. 핵전쟁 대비용 지하 벙커까지 있는 집에서 사는 부자에게 물 폭탄은 미세 먼지 없는 맑은 하늘을 선물받는 감사한 사건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빈곤에 놓인 사람에게 일상은 통제 불가능한 일들로 가득하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집중 호우는 자신들의 거처를 삼켜 버릴 수도 있는 재앙이 된다. 통제 불가능한 일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일상은 수많은 스트레스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스트레스는 심리적인 자원을 갉아먹는다.
따라서 가난해진다는 것은 심리적인 차원에서 보면 합리적인 판단과 의사결정을 하고 미래를 계획하는 데 필요한 충분한 심리적인 자원이 부족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경제적 빈곤은 심리적 자원의 빈곤을 유발한다.
우리가 지닌 심리적 자원의 양은 제한적이다. 따라서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심리적 자원을 소모하면, 다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쓸 수 있는 심리적 자원이 부족해진다. 집에 물난리가 나서 이를 수습하느라 혼이 쏙 빠진 사람에게 미래를 계획하는 데 필요한 심리적인 자원이 남아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 결과, 경제적 빈곤은 사람을 피곤하고, 무기력하게 만든다.
빈곤 스트레스
집이 물에 잠길 정도의 큰 스트레스가 아니더라도, 부자들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의사 결정도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큰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 한 연구에서는 자동차에 결함이 생겨서 수리를 해야 하는데, 수리비가 약 180만 원 나왔을 때 이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해결할지 물었다.
자동차 보험은 수리비의 10%만 보장해 준다고 해서 수리비를 현금 일시불로 지급할지, 돈을 빌려서 다달이 원금과 이자를 물고 갚을지, 아니면 수리를 하지 않고 운에 맡긴 채 당분간 차를 운행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사실 이 연구의 관심사는 참여자가 어떤 수리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선택을 하든, 의사 결정을 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심리적 자원이 얼마나 많이 고갈되는지, 그 결과로 이후의 과제 수행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고자 하였다. 참여자들은 자동차 수리비 지출과 관련된 의사 결정을 한 다음에 유동성 지능 검사를 받았다. 유동성 지능 검사는 새로운 환경에서의 적응력과 판단력, 그리고 논리력을 측정하는 검사다. 결과에 따르면 수리비 문제에 부자들의 지능 검사 점수에는 변화가 발생하지 않았다. 그에 반해 가난한 사람들은 수리비 걱정 뒤에 지능 검사 점수가 낮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인도의 사탕수수 농부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도, 사탕수수 추수 대금이 입금되지 않아서 경제적인 걱정이 심했던 빈궁기에는 농부들의 유동성 지능 검사 점수가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사탕수수 추수 대금이 입금되어서 경제적인 걱정이 덜어진 뒤에는 지능 검사 점수가 다시 회복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놀라운 것은 수면 연구와 비교했을 때, 경제적 걱정 때문에 발생하는 지능 검사 점수의 감소 정도는 하룻밤 수면을 박탈했을 때와 맞먹는 크기인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 문제를 걱정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밤에 잠을 한숨도 자지 못하고 생활하는 것과 유사한 정도의 크기로 우리의 마음을 피곤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무계획은 절대 실패하지 않는 계획이지만, 절대 성공할 수 없는 계획이기도 하다. 성공은 미래를 준비하고 계획하는 사람에게 주어질 확률이 높은 선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빈곤은 심리적 자원을 고갈시켜서 미래를 계획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경제적 빈곤이 가장 먼저 무너뜨리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다.
[행복을 찾아서 – 소망] 바라고 바라면
불만족스러운 삶. 고단한 하루. 권태로운 관계. 삶은 완벽하게 만족스럽지 않다. 불만족스러움에서 잠시 벗어나는 순간, 행복 비슷한 감정이 느껴지지만 이내 이전의 상태로 돌아간다. 다시 무엇인가 부족한 상태. 삶은 그렇게 영원히 불만족이라는 사슬로 우리를 꽁꽁 얽어매고 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소망하는 것일까?
소망이 없는 사람
뇌신경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모든 생물이 두 가지 기본 정서를 가진다고 했다. 부정적인 정서와 긍정적인 정서다. 완벽하게 영점으로 조정된 정서가는 없다. 부정적인 정서를 느끼면 현재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긍정적인 정서를 느끼면 현재 상태에 머무르려고 한다. 모든 복잡다단한 감정은 바로 이 기본적인 정서에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꺼리고 무엇을 원할까? 그 기준은 바로 생존이다. 배고픔과 고통, 위협은 죽음과 관련된 자극이다.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려고 한다. 포만감과 안전, 행복은 생존과 관련된 자극이다. 될 수 있는 한 오래, 할 수 있는 한 많이 누리려고 한다. 생물학의 아주 단순한 원리다. 어떤 생물도 이 기본 원리를 위배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예외가 있다. 바로 인간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인간은 유일하게 자살하는 동물이다. 나그네쥐가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살한다고 알려졌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자살한다는 코끼리나 고양이에 관한 이야기도 있지만, 모두 전설일 뿐이었다. 소망이 사라진 상태, 어려운 말로 ‘무욕증’이라고 부르는 상태는 우울증 환자에게 자주 보이는데, 인간 외에는 잘 발견되지 않는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하면 마치 안분지족의 경지에 오른 도사라도 된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좋은 일은 아니다. 중증 우울증을 앓는 환자가 가끔 이러한 상태에 빠지는데, 식사도 하지 않고 잠도 자지 않는다. 무엇을 해도 기쁘지 않고, 또 슬프지도 않다. 어떤 동기나 의욕, 소망이 없는 상태다. 사실 이런 상태에서는 자살도 하지 않는다. 죽음을 실행에 옮길 의지조차 없다.
1944년 겨울 아우슈비츠 수용소에는 수만 명의 유다인이 갇혀 있었다. 이들은 막연하게 성탄절이 되면 자유를 얻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근거 없는 희망이었지만, 그들을 살게 만드는 힘이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일주일 사이에 많은 사람이 갑자기 죽었다. 희망이 사라지자 제풀에 죽은 것이다. 아우슈비츠는 한 달 뒤인 1945년 1월 26일 해방되었다.
사실 무엇을 소망하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무엇인가 소망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삶은 활기를 찾는다. 그러나 소망이 없이 힘만 얻으면 죽음으로 이어진다. 우울증 환자는 종종 회복 초기에 자살한다. 마음가짐은 여전한데, 자살을 실행에 옮길 힘만 생긴 것이다.
탐욕, 음욕 등 칠죄종의 약 절반이 과한 욕심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바라는 것이 전혀 없는 상태도 만만치 않게 위험하다. 소망이 사라진 상태를 칠죄종에서는 나태라고 한다. 그냥 배부르게 먹고 편히 누워 노는 나태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삶의 의욕과 미래에 대한 소망이 사라진 상태가 곧 우울이다.
던져진 존재
우리는 어느 순간 삶에 던져진 존재다. 운명은 우리의 삶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이다. 어느 날 정신을 차려 보니 지금의 나로 사는 것이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러한 인간 존재의 특징을 바로 ‘던져짐’이라고 하였다. 분명 있기는 하지만 어떻게 있을 수 있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알 수 없는 불안한 상태다.
이러한 근원적 불안은 제멋대로의 욕망으로 이어진다. 수용소에서 희망을 잃은 수감자 가운데 몇몇은 체념에 빠져 강제 노동을 거부했다. 수용소에서 작업 거부는 곧 죽음이다. 그럼에도 고집이 대단했다. 주변의 만류에도 천천히 막사에 누워 몰래 숨겨 둔 담배를 피웠다. 마지막 소극적 저항일까? 불안을 견디다 못한 나머지 자포자기하고 쾌락에 빠지는 것이다.
탐욕과 음욕, 탐식 등의 쾌락은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못한다. 삶을 위험으로 이끌다가 결국에는 깊은 권태에 이르게 한다. 불안은 종종 우울로 이어진다. 어쩔 줄 몰라 근심하다가 깊은 우울증에 빠지는 것이다. 던져진 존재로서의 불안이 일으키는 삶의 무기력이다.
의미로서의 소망
소망은 단지 로또 당첨이나 대학 합격, 승진이나 건강 같은 것이 아니다. 그저 불안한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쾌락 추구의 수단일 뿐이다. 세계 여행이나 번지 점프처럼 색다른 경험에 관한 위시 리스트도 아니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를 ‘오인된 자유라는 편안함으로의 도피’라고 하였다. 이런 가벼운 해결책은 점점 깊은 권태를 일으킬 뿐이다.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삶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가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삶에서 뭔가를 얻어 내려는 무익한 시도를 포기해야 한다. 근원적 삶이라고 해도 좋고, 신이라고 해도 좋고, 전체 정신이라고 해도 좋다. 뭐라고 부르든 과연 그것이 우리 자신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그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나에게 무엇인가를 소망하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 삶은 불행할 수도 있고, 비극적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실패한 인생은 아니다. 삶의 목적은 행복이나 성공이 아니다.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찾아내는 것이다. 바로 삶의 의미로서의 소망이다.
[심리학이 만난 영화] 체험의 심리학 버킷 리스트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
에드워드는 억만장자다. 그의 관심사는 돈이다. 그는 병원을 소유하고 있지만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려고 병원을 운영하는 게 아니다. 그에게 병원은 수익을 내는 도구이고 환자들은 돈이다.
사람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래서 에드워드는 사람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 기억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주변 사람들의 이름을 자기 마음대로 부른다.
오랫동안 에드워드의 곁을 충실하게 지키면서 그의 손발이 되어 준 비서의 이름도 번번이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부른다. 방금 전에 ‘토미’라고 불러 놓고, 1분도 지나지 않아서 ‘토마스’라고 부른다. 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카터가 어리둥절해서 묻는다. 도대체 토미와 토마스 가운데 당신의 진짜 이름은 뭐냐고. 그러자 비서가 말한다. “제 진짜 이름은 매튜입니다.”
버킷 리스트의 자격
로브 라이너 감독의 2007년 작품 ‘버킷 리스트’(The bucket list)는 암에 걸려서 시한부 판정을 받은 두 남자의 이야기다. 에드워드 콜과 카터 챔버스는 60대 후반으로 그들에게 남은 시간은 6개월, 운이 좋으면 1년 정도다. 같은 병실에서 만난 두 사람은 버킷 리스트를 작성한다.
“양동이를 차기 전에”(before we kick the bucket)라는 표현에서 나왔다는 버킷 리스트. 목에 줄을 매고 양동이 위에 올라선 사람이 양동이를 걷어차기 전에, 그러니까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들의 목록을 작성한 것을 말한다. 두 사람은 죽기 전에 하고 싶었던 것들, 그리고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들의 목록을 만들고, 이를 하나씩 실행에 옮긴다.
이들의 버킷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진짜로 장엄한 광경 목격하기(히말라야에 가기),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모르는 사람 도와주기, 눈물이 날 때까지 웃어 보기, 쉘비가 튜닝한 한정판 고성능 자동차 쉘비 머스탱 운전해 보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과 키스하기, 문신하기, 스카이다이빙 하기, 영국의 스톤헨지에 가보기,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에서 일주일 보내기, 이탈리아의 로마 여행하기, 이집트의 피라미드 보러 가기, 아프리카의 세렝게티에서 큰 고양이(사자) 사냥하기, 연락이 끊겼던 사람과 다시 연락하기 등이다.
어떤 것은 나중에 추가되기도 하고(다시 연락하기), 어떤 것은 수정되기도 하고(사자 사냥하지 않고 세렝게티 가기), 또 어떤 것은 혼자만 하기도 했지만(문신하기), 에드워드와 카터는 자신들에게 남은 마지막 시간에 버킷 리스트의 항목을 하나씩 지워 나간다.
체험하기의 심리학
에드워드와 카터의 버킷 리스트에는 물건을 사고 싶다거나, 소유하고 싶다는 항목은 하나도 없다. 굳이 물건과 관련된 것을 찾자면, ‘머스탱 운전해 보기’ 정도다. 그런데 이것도 머스탱을 갖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운전해 보겠다는 것이다. 이들의 버킷 리스트에 올라온 것들은 모두 ‘체험해 보기’와 관련된 것들이다. 이는 어쩌면 너무 당연해 보인다. 죽음과 직면하게 된다면 아무리 좋은 아파트와 자동차, 그리고 보석을 사놓은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들의 버킷 리스트에 오를 자격이 있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체험이었다. 직접 경험하고 몸과 마음으로 느껴 보고 싶었던 것들이다.
행복에 대한 최근 연구들은 물질보다는 체험이 우리에게 더 큰 기쁨을 준다는 것을 보여 준다. 같은 돈을 사용하더라도 물건을 소유하려는 소비보다 체험을 위한 소비가 더 큰 기쁨을 준다는 것이다. 비싼 옷과 구두를 사는 것보다 그 돈으로 여행이나 콘서트를 즐기는 것이 더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한 연구에서 연구에 참여한 이들에게 지난 5년 동안 했던 가장 중요한 물질적 소비와 체험적 소비를 회상하게 하였다. 참가자들은 체험을 위해 돈을 쓴 것이 물건을 사려고 돈을 썼을 때보다 더 큰 기쁨을 주었고, 만족감도 더 오래 지속되었다고 보고했다. 체험을 위해 쓴 돈은 나중에 “그때 돈 참 잘 썼지.”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체험이 우리에게 더 크고 오래 지속되는 기쁨을 주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사람이 기억의 동물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소유하려고 산 물건에 매우 빠르게 적응하고,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식상해 하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물질을 소유하는 기쁨은 시간이 지날수록 작아진다. 하지만 체험의 기억은 우리 마음속에 살아남아서 그 당시의 기쁨을 되새겨 준다.
사람은 추억의 동물이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체험으로 얻게 된 기쁨의 추억은 순간순간 다시 살아나 우리를 그 당시 기쁨의 현장으로 시간 여행을 하게 한다. 체험의 기쁨은 우리의 기억이 살아 있는 한 평생 지속된다. 그리고 이런 체험의 추억이 많을수록 우리 마음속 행복의 창고에는 기쁨이 차곡차곡 쌓이게 된다.
에드워드와 카터의 첫 번째 버킷 리스트는 ‘장엄한 광경 보기’였다. 연구에 따르면 다양한 종류의 체험 중에서도 경외감을 느낄 수 있는 체험이 사람들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데 효과적이라고 한다. 영화에서처럼 직접 히말라야와 피라미드를 보면서 경외감을 느낄 수 있다.
그렇지만 누군가의 감동적인 삶의 이야기에서부터 눈앞에 펼쳐진 자연의 아름다움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현실에서 경외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생각보다 많다. 심지어는 경외감을 느끼게 만드는 장면이나 이야기가 있는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기쁨은 커진다.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인과 키스하기
에드워드는 사람에 관심이 없지만, 보고 싶은 사람이 하나 있다. 딸 에밀리이다. 하지만 연락이 끊긴 지 오래되었다. 사위가 딸을 때렸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에드워드는 사위를 죽일 기세로 찾아갔지만, 그 대신 다시는 딸 앞에 나타나지 못하게 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남편을 사랑하는 에밀리가 이 사실을 알고는 아버지와의 연을 끊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카터는 에드워드의 격렬한 반대에도 둘의 버킷 리스트에 마지막으로 하나를 추가한다. ‘연락이 끊겼던 사람과 다시 연락하기.’ 카터의 장례식을 마치고 에밀리를 찾아간 에드워드. 그곳에는 이 세상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소녀가 따뜻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다. 에드워드의 손녀다. 그는 드디어 버킷 리스트에서 ‘연락이 끊겼던 사람과 다시 연락하기’와 함께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인과 키스하기’를 지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에드워드에게는 손녀와의 만남이 바로 경외심을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우리에게 가장 큰 기쁨을 주는 체험은 사실 여행도 콘서트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웃고 떠들며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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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웃고 떠들며 살아가는 것이다.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