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경에는 3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80권 본을 신화엄新華嚴이라 하고 60권 본을 구화엄舊華嚴이라 하며 40권 본은 '입법계품入法界品' 곧 '법계에 들어가는 대목'입니다 입법계품은 선재의 구법하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담긴 화엄의 꽃입니다 이처럼 입법계품이 화엄의 궁극이라고 하여 따로 뽑아 다루고는 있으나 나머지 38품과 우열을 논할 때 나노의 차별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광명각품은 신화엄 구화엄에 따라 2가지 이름으로 달리 붙여지는데 신화엄은 <제9 광명각품>이고 구화엄은 <제5 여래광명각품>입니다 품명 앞에 접두어 '여래'가 있으면 이는 60권 구화엄에 속하고 없으면 80권 신화엄에 속합니다 이와 같이 원본 화엄을 놓고도 옮기고 해설한 이가 누구냐에 따라 내용이 약간씩 달라지기는 하겠지만 그러나 모두가 다 바뀌지는 않습니다
<광명각품>, 또는 <여래광명각품>이 다른 품과 견주어 독특함이 있는데 광명을 발바닥으로 놓음입니다 여래 세존께서 빛을 발할 때 대개 정수리에서 또는 이마에서 두 눈에서 입에서 치아에서 가슴에서 배꼽에서 겨드랑이에서 손바닥에서 놓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발바닥입니다
광명은 빛 광光에 밝을 명明입니다 어진사람인儿 자와 불 화火 자가 결합한 것이 곧 빛 광光 자라면 밝을 명明 자는 짐작하듯이 해日와 달月의 역할 표현입니다 이는 과학적이기보다 현상적이지요 해는 늘 스스로 빛을 발합니다 태양에는 밤낮이 없습니다 태양계가 형성되고 50억 년을 한순간도 빛이 꺼진 적이 없지요 그러므로 태양은 빛의 상징이 됩니다
달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합니다 구성된 물질 자체가 태양과 다릅니다 다만 햇빛을 받아 반사할 뿐이며 이는 지구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양계 내의 여덟 개 행성과 함께 헤아릴 수 없는 숱한 위성의 물질이 단지 햇빛을 받아 반사할 따름입니다
한데 부처님 여래 세존은 어떻습니까 수소와 헬륨이 만나 만드는 햇빛은 직진성이라 돌아가지 못합니다 맑은 유리를 제외하고는 어떤 물질도 투과하지 못하여 지구에 낮과 밤이 생기고 초승과 반달 보름달이 생깁니다 그러나 여래가 내는 깨달음의 빛은 어떠한 물질도 그대로 투과합니다 어떤 장애물도 투과하는 광명입니다 마치 중성자가 수백 수천의 지구를 일렬로 늘어놓는다 하더라도 빛의 속도로 뚫고 나아가듯 말입니다
이처럼 여래의 광명은 빛을 냅니다 비록 여러 물질이 가로막더라도 여래의 광명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빛이 아니라 광명光明입니다 선험적으로 빛光이 존재하고 나서 이어 낮日과 밤月을 밝힙니다 밝을 명明자에는 이처럼 총체입니다 낮이든 밤이든 여래儿의 불꽃火은 결코 꺼지는 일이 없습니다 한역에서 깨달을 각覺을 가져다 여래의 마음 세계를 표했습니다만 깨달을 각覺은 깰 교覺와 동일합니다
무명無明은 밝음明이 없음無이지요 밝음이 없다는 것은 곧 어둠입니다 이 <제9 광명각품光明覺品>은 광명으로 깨달음을 가르치고 마침내 삼도三毒의 어둠으로부터 온전히 깨어覺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광명각품은 광명교품光明覺品입니다 여래께서 발바닥으로 광명을 놓으시니 빛에 닿는 모든 중생이 부처입니다 수천만 억에 수천만 억을 곱한 수많은 중생이 부처 아님이 없습니다
어떤 수좌가 예를 갖추고 물었습니다 "큰스님 큰스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긴장한 상태에서 물어 온 것이라 내가 차분하게 되물었습니다 "생각이 어떻느냐니 대상이 있는가?" 수좌가 긴장을 풀며 다시 물었습니다 "불교와 기독교의 상이점입니다" 내가 미소를 띠며 답했습니다 "기독교는 오직 주가 한 분이시며 모든 생명은 주에게 영광을 돌리지 그만큼 하나님의 역할이 크신 거라네 그런데 불교는 수천만 억 조경의 중생 낱낱이 깊은 잠에서 깨어覺나 마침내 큰 깨달음覺을 얻을 때 본디 부처였음을 가르치심이라네"
햇빛이 비추는 곳에 아무것도 없다면 텅 빈 허공에서는 반사됨이 없으나 아무리 작은 물체라도 있다면 반드시 반사되어 존재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나온 말이 곧 색色입니다 색은 물질이며 동시에 빛입니다 이처럼 깨달은覺 분 여래 세존께서 당신의 발바닥으로 놓은 광명光明이 으레 직진성이 당연한 법칙이지만 어떤 것도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빛이면서 회절回하지 않은 채 그대로 투과하는 성질을 지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