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31일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31-35 31 그때에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32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33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35 보라, 너희 집은 버려질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하고 말할 날이 올 때까지, 정녕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아름다운 죽음을 준비할 때입니다.
사람이 죽음에 대한 진실이 있다고 합니다. 죽음에 대한 세상이 모르는 진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과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것과 어디에서 죽을지 모르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은 반드시 죽을 것을 아는 것과 죽을 때 혼자 죽을 것이라는 것과 죽기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죽을 때에는 껄.껄.껄 하다가 죽는다고 합니다. 좀 더 재미있게 살다 죽을껄, 좀 더 나누며 베푸는 삶을 살다 죽을껄, 좀 더 사랑하며 살다 죽을껄 하며 후회하다 죽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후회 없이 죽기 위해서 평소에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주님의 품에서 후회 없는 죽음을 우리는 아름다운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 아름다운 죽음을 잊어버리고 살다가 죽음에 코앞에 닥쳐오면 그제야 후회하고 정신을 차리는 것이 인간인가 봅니다. 그래도 죽음은 공평하게도 누구든지 죽을 것이며 반드시 죽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죽음에 대해서 준비해야 한답니다.
나는 죽을 고비를 무수히 넘기면서 살고 죽기를 반복하면서 죽음에 대한 준비를 많이 해 봤습니다. 그러나 아파서 죽기 직전에 죽을 준비를 하고 병자성사를 받으면서도 그 병이 나으면 다시 흐지부지 되는 것이 죽음의 준비입니다. 내가 이병을 낫게 되면 죽음에 대해서 철저하게 준비를 해서 정말 죽을 때에는 후회 없도록 해야 하겠다고 하면서도 다시 후회할 일을 하고 후회할 짓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암으로 수술을 하고 병자성사를 받던 날 나는 정말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목에서 가래가 솟구쳐 올라와 아내가 10분에 한 번씩 썩션을 해야만 했습니다. 원목 신부님께서 병자성사를 주러 오셨다가 당황하셔서 한참을 기다리고 계시다가 병자성사를 받기를 원하는지 의향을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무릎을 꿇고 병자성사 받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칠판에 썼습니다. 그때는 말을 할 수 없을 때였기 때문입니다.
신부님께서 병자성사를 주시는 동안 그리고 기도해 주시는 동안 근 40분 동안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내 목에서 가래가 솟구쳐 올라오지 않고 병자성사를 아주 평안하게 받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손으로 성호를 긋고 말이 나오지 않는 입으로 기도문을 달싹 거리는 것뿐이었지만 나는 모든 통증을 잊어버리고 오직 주님께 매달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몰두해서 내 죽음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병을 치유 받았습니다. 물론 최신 시설과 명의의 집도로 수술도 받고, 좋은 약물 치료로 치료를 받았기 때문이었겠지만 주님의 은총으로 기적과 같은 일이 내게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말기 암에서 소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초에 벙어리가 될 수 있다는 염려에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전에 하던 말의 90%는 찾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하던 그 순간의 기도와 약속은 지금 모두 사그라져 없어져 버린 것처럼 나는 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을 예언하시고 또 당신이 후회 없이 당신의 어린 양들을 모으시며 구원을 위하여 헌신하심을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죽이고자 달려드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얼마나 헌신하셨는지 개탄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암탉이 날개 밑으로 병아리들을 모으듯 그렇게 애를 쓰셨음에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려는 그 사람들을 나무라시며 타이르십니다. 그 가르치심은 바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지금 우리들을 향해서도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품을 벗어나서 제멋대로 살면서 죽음을 준비하지 못하는 우리들을 나무라시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반항아처럼 예수님의 품을 벗어나려고 안달복달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품을 벗어나 냉담하고 있는 신자가 70%에 이르고 있습니다. 갑자기 죽음이 닥쳐오면 후회할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방향을 잃어버린 난파선과 같이 길을 잃은 그 형제들을 그냥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주님의 품으로 데리고 들어와야 합니다. 그 일이 바로 우리들의 일입니다. 다시 주님을 뵙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정말 아름다운 죽음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죽음은 다른 사람이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주님께서도 만들어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들려고 노력할 때 주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주시어 은총으로 아름다운 죽음을 준비해 주실 것입니다. 이제 아름다운 죽음을 준비해야 할 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