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어집주(論語集注) - 3 - 팔일(八佾) - 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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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子曰 管仲之器 小哉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관중의 그릇은 작은 편이다.”라고 하셨다.
管仲, 齊大夫, 名夷吾, 相桓公霸諸侯. 器小, 言其不知聖賢大學之道, 故局量褊淺, 規模卑狹, 不能正身修德以致主於王道. 관중은 제나라 대부이고, 이름은 이오이며, 제환공을 도와 제후들의 패자가 되게 하였다. 그릇이 작다는 것은 그가 성현의 대학지도(큰 학문의 도)를 알지 못하였기에, 국량이 좁고 얕으며 규모가 낮고 협소하여, 몸을 바르게 하고 덕을 닦음으로써 군주가 왕도정치에 이르게 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朱子曰 局量褊淺 是他容受不去了 容受不去 則富貴能淫之 貧賤能移之 威武能屈之矣 規模是就他設施處說 주자가 말하길, “국량이 편협하고 얕은 것은, 그가 포용하여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포용하여 받아들일 수 없으면, 부귀가 능히 그를 방탕하게 할 수 있고, 빈천이 능히 뜻을 움직이게 할 수 있으며, 위무가 능히 그를 굴복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규모는 곧 그가 세워서 베푼 부분에 나아가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器小是以分量言 若以學問充之 小須可大 그릇이 작다는 것은 분량으로써 말한 것이다. 만약 학문으로 채운다면, 작은 것도 반드시 크게 할 수 있다.
問孔子見他一生全無本領 只用私意小智僅能以功利自彊其國 若是王佐之才 必不如此 故謂之器小 曰是 누군가 묻기를, “공자께서 그는 일생 동안 本領이 전혀 없었으며, 그저 사사로운 뜻과 작은 지혜를 활용하여, 겨우 功利로써 자기 나라를 스스로 강하게 만들 수 있었으니, 만약 그가 천자를 보좌할 재목이었다면, 반드시 이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일컬어 그릇이 작다고 말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말하길, “옳다.”고 하였다.
問須是如孟子言 居天下之廣居 立天下之正位 行天下之大道 方是大器 曰是 누군가 묻기를, “반드시 맹자가 말한 바와 같이, 천하의 넓은 거처에 거하고, 천하의 바른 자리에 서고, 천하의 큰 도를 행해야만, 비로소 大器인 것인가요?”라고 하였다. 말하길, “그렇다.”고 하였다.
勉齋黃氏曰 局量指心之蘊蓄 規模指事之發見 心者器之體 事者器之用 不能正身修德 則心之所向可知 不能致主於王道 則事之所就可知 局量褊淺 則規模必卑狹 未有不能正身修德而能致主於王道者 면재황씨가 말하길, “국량은 마음이 품어 쌓아놓은 것을 가리키고, 규모는 일이 발현된 것을 가리킨다. 마음이란 것은 器의 體이고, 일이라는 것은 器의 用이다. 제 몸을 바르게 하거나 덕을 닦을 수 없었으니, 그 마음이 향한 곳을 알 수 있고, 임금에게 왕도에 이르도록 하지 못하였으니, 그 일이 나아간 곳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국량이 편협하고 얕으면, 규모도 반드시 비천하고 협소할 것이다. 제 몸을 바르게 하거나 덕을 닦지 못하면서도, 능히 임금으로 하여금 왕도에 이르도록 할 수 있는 자는 일찍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胡氏曰 局量規模以器言 褊淺卑狹以小言 不知聖賢大學之道 所以器小也 本之不立也 不能正身修德以致主於王道 器小之驗也 效之不至也 無是本 則無是效也 호씨가 말하길, “국량과 규모는 그릇을 가지고 말한 것이고, 褊淺과 卑狹은 작다는 것으로 말한 것이다. 성현의 大學之道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릇이 작은 것이고, 근본이 서 있지 않은 것이다. 제 몸을 바르게 하고 덕을 닦음으로써 제 임금을 왕도에 이르게 하지 못한 것은 器가 작다는 징험이고, 공효가 지극하지 않은 것이다. 이 근본이 없으면, 이 공효도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東陽許氏曰 大學之道八事先以修身爲本而後及家國天下 蓋見理旣明 行事自然件件中節 不敢踰禮犯分 今管仲如此 只是格物致知工夫未到 見理不明 故爲所不當爲踰禮犯分 凡事都要向上 不知反成小器 동양허씨가 말하길, “大學之道의 8事에서 먼저 修身을 근본으로 삼은 후에 家國과 天下에 미치는 것이니, 대개 이치를 알아봄이 이미 밝다면, 일을 행하면서 자연스럽게 건건마다 절도에 들어맞을 것이고, 감히 예를 넘어서거나 분수를 범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관중이 이와 같이 한 것은 그저 格物致知의 공부가 아직 (수준에) 이르지 않아서, 이치를 봄이 밝지 않기 때문에,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고, 예를 넘어서며 분수를 범한 것이다. 모든 일을 전부다 향상시키고자 할지라도, 도리어 작은 그릇이 된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
2 | 或曰 管仲儉乎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관중은 검소했습니까?” 하니,
或人蓋疑器小之爲儉. 혹자는 아마도 그릇이 작다는 것이 검소함이라고 의심한 것 같다. |
3 | 曰 管氏有三歸 官事不攝 焉得儉 공자께서말씀하시기를, “관중은 제후가 가졌던 삼귀대를 가지고 있었으며, 관청의 직무를 겸임시키지 않았으니 어찌 검소했겠는가.”라고 하셨다.
○ 三歸, 臺名. 事見『說苑』. 攝, 兼也. 家臣不能具官, 一人常兼數事. 管仲不然, 皆言其侈. 삼귀는 누대의 이름이다. 이 일은 설원에 보인다. 攝이란 겸한다는 말이다. 가신의 경우, 모든 일에 각자 관리를 갖추어둘 수 없으므로, 한사람이 항상 여러 일을 겸하였다. 관중은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모두 그의 사치함을 말한 것이다. 劉向說苑善說篇 齊桓公 立仲父致大夫曰 善吾者入門而右 不善吾者入門而左 有中門而立者 桓公問焉 對曰 管子之知 可與謀天下 其强可與取天下 君恃其信乎 內政委焉 外事斷焉 民而歸之 是亦可奪也 桓公曰 善 乃謂管仲 政則卒歸於子矣 政之所不及 唯子是匡 管仲故築三歸之臺 以自傷於民 유향의 설원 선설 편에, 제환공이 (관중을) 仲父로 세워 주고는 대부들을 불러다 놓고 말하길, “나를 좋다고 여기는 자는 문을 들어와 오른편에 서고, 나를 좋다고 여기지 않는 자는 문을 들어와 좌측에 서라!”고 하였다. 그런데 문 가운데에 선 자가 있었다. 제환공이 그에게 물어보자, 대답하여 말하길, “관중의 지혜는 더불어 천하를 도모할만하고, 그 강함은 더불어 천하를 취할만합니다. 임금께서는 그의 신의를 믿으십니까? 내정을 그에게 맡기고 외사를 그에게 판단하도록 하면, 백성들이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니, 이 역시 (권력을) 빼앗을만합니다.”라고 하였다. 환공이 좋다고 말하고, 마침내 관중에게 말하길, “정사는 끝내 그대에게 돌아가게 하였으니, 정사가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것이면, 오직 그대를 匡(바로 잡다)할 것이로다!”라고 하였다. 관중은 일부러 삼귀의 누대를 지어서 이로써 백성들에게 자기의 (이미지를) 손상시켰다.
朱子曰 管氏有三歸 不是一娶三姓女 若此却是僭 此一段意 只擧管仲奢處以形容他不儉 下段所說 乃形容他不知禮處 便是僭竊 恐不可做三娶說 주자가 말하길, “관씨가 三歸를 갖고 있었다는 것은 한 사람이 세 명의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는 것이 아니다. 만약 이렇게 하였다면, 도리어 이것이 참월이다. 이 한 단락의 뜻은 그저 관중이 사치한 부분을 들어서, 그가 검소하지 않았음을 형용한 것일 뿐이다. 하단에서 말한 것이 마침내 그가 예를 알지 못한 부분을 형용한 것이니, 이것이 곧 僭竊인 것이다. 아마도 세 명을 아내로 맞았다는 설은 취해서는 안 될 것 같다.”라고 하였다.
厚齋馮氏曰 以歸民之左右與中 故臺謂之三歸 후재풍씨가 말하길, “백성들이 좌, 우, 그리고 가운데로 돌아갔기 때문에, 樓臺를 일컬어 三歸라고 부른 것이다.”라고 하였다. |
4 | 然則 管仲知禮乎 어떤 사람이 또 말하기를, “그러면 관중은 예를 알았습니까?”하니
或人又疑不儉爲知禮. 혹자는 또 다시 검소하지 아니함은 예를 아는 것이 된다고 의심한 것이다. |
5 | 曰 邦君樹塞門 管氏亦樹塞門 邦君爲兩君之好 有反坫 管氏亦有反坫 管氏而知禮 孰不知禮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한 나라의 임금이라야 병풍을 세울 수 있는 것인데, 관중도 병풍을 세웠으며, 한 국가의 임금이라야 두 임금이 만날 때에 반점을 둘 수가 있는 것인데 관중도 반점을 두었으니, 이런 관중을 예를 안다고 하면 누구인들 예를 알지 못하리오.”라고 하셨다.
○ 屛謂之樹. 塞, 猶蔽也. 設屛於門, 以蔽內外也. 好, 謂好會. 坫, 在兩楹之間, 獻酬飮畢, 則反爵於其上. 此皆諸侯之禮, 而管仲僭之, 不知禮也. 병풍 치는 것을 가리켜 樹라고 말한다. 塞는 가리는 것과 같다. 문에 병풍을 설치하여 내외를 가리는 것이다. 好란 우호의 회동을 말한다. 坫(점)은 양 기둥 사이에 있는 것인데, 술을 따라 바치고 마시기를 마치면, 그 위에 술잔을 되돌려 놓는다. 이것은 모두 제후의 예인데, 관중이 僭用한 것이니, 예를 알지 못한 것이다.
趙氏曰 古者人君別內外於門樹屛以蔽塞之 蓋小牆當門中也 禮天子外屛 諸侯內屛 大夫以簾 士以帷 조씨가 말하길, “옛날에 임금은 내외를 구별하기 위하여 문에 병풍을 세워 그것을 가렸다. 대개 작은 담장을 문 가운데에 당하여 쌓았다. 예에 따르면, 천자는 밖에 병풍을 세웠고, 제후는 안에 병풍을 세웠으며, 대부는 발(簾)로 하였고, 선비는 장막으로 하였다.”라고 하였다.
古註圖說 坫以木爲之 高八寸 足高二寸 漆赤中 고주도설에, 점(坫)은 나무로 만드는데, 높이는 8촌이고 다리 높이는 2촌이며, 가운데를 붉은색으로 칠하였다고 한다.
趙氏曰 古者諸侯與隣國爲好會 主君獻賓 賓筵前受爵 飮畢反此虛爵於坫上 於西階上拜主人 於阼階上答拜 賓於坫取爵 洗爵以酢主人 主人受爵飮畢 反此虛爵於坫上 主人阼階上拜 賓答拜 是賓主飮畢反爵於坫也 大夫則無之 조씨가 말하길, “옛날에 제후가 이웃 나라와 더불어 우호의 회맹을 할 적에, 주인 쪽 임금이 손님에게 잔을 바치면, 손님은 자리 앞에서 잔을 받고서 다 마신 다음 이 빈잔을 坫 위에다 돌려놓는다. 서쪽 계단 위쪽에서 주인에게 절하면, 동쪽 계단 위쪽에서 답례를 한다. 손님이 坫에서 잔을 취하여 잔을 씻어서 주인에게 술을 권한다. 주인은 술잔을 받아 다 마신 다음 이 빈잔을 坫 위에 돌려 놓는다. 주인이 동쪽 계단 위쪽에서 절하면, 손님은 답으로 절한다. 이것이 바로 손님과 주인이 술을 다 마시고 坫에 술잔을 돌려놓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에게는 이러한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
6 | ○ 愚謂孔子譏管仲之器小, 其旨深矣. 或人不知而疑其儉, 故斥其奢以明其非儉. 或又疑其知禮, 故又斥其僭, 以明其不知禮. 蓋雖不復明言小器之所以然, 而其所以小者, 於此亦可見矣. 故程子曰: “奢而犯禮, 其器之小可知. 蓋器大, 則自知禮而無此失矣.” 此言當深味也.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공자가 관중의 그릇이 작다고 나무란 것은 그 뜻이 깊은 것이다. 혹자가 알지 못하고 그가 검소한 것으로 의심하였기에, 그 사치함을 지적(斥)함으로써, 그가 검소하지 않았음을 밝혔다. 혹자가 다시 그가 예를 안 것이라고 의심하였기에, 다시 그 참월을 지적(드러내어)하여, 그가 예를 알지 못하였음을 밝혔다. 아마도 비록 그릇이 작은 이유를 다시 밝혀 말하진 않았지만, 그것이 작다는 것은 여기에서 또한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자가 말하길, ‘사치하면서 예를 범하면, 그 그릇이 작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개 그릇이 크다면, 스스로 예를 알아서 이러한 잘못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마땅히 깊이 음미해야 할 것이다.
慶源輔氏曰 器大則天下之物不足以動其心而惟義理之是行 경원보씨가 말하길, “그릇이 크면 천하의 어떤 사물도 그 마음을 움직이기에 부족하니, 오로지 의리상 올바른 것만을 행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胡氏曰 奢者 器之小而盈也 犯禮者 器之盈而溢也 호씨가 말하길, “사치한 것은 그릇이 작으면서도 가득 찬 것이다. 禮를 범하는 것은 그릇이 가득 차서 넘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
7 | 蘇氏曰 : “自修身正家以及於國, 則其本深, 其及者遠, 是謂大器. 揚雄所謂‘大器猶規矩準繩’, 先自治而後治人者是也. 管仲三歸ㆍ反坫, 桓公內嬖六人, 而霸天下, 其本固已淺矣. 管仲死, 桓公薨, 天下不復宗齊.” 소씨가 말했다. “몸을 닦고 집안을 바르게 하는 것에서부터 나라에까지 미치면, 곧 그 근본이 깊고 그 미치는 것이 머니, 이를 일컬어 큰 그릇이라고 말한다. 양웅이 이른바 ‘큰 그릇은 규구준승(規矩準繩)과 같아서, 먼저 스스로를 다스린 후 남을 다스린다.’고 말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관중은 삼귀와 반점을 가지고, 환공은 내폐 6인을 갖고도, 천하에서 패자노릇을 하였는데, 그 근본이 원래 이미 천박한 것이다. 관중이 죽고 환공도 죽자, 천하는 더이상 제나라를 종주로 삼지 않았다.”
楊子先知篇 或曰 齊得夷吾而覇 仲尼曰小器 請問大器 曰 大器 其猶規矩準繩乎 先自治而後治人之謂大器 양자의 法言 先知편에, 혹자가 말하길, 제나라는 이오(관중)을 얻어서 패자가 되었다고 하였고, 중니는 그를 작은 그릇이라고 말하였으니, 청컨대 큰 그릇에 대하여 묻고자 한다고 하자, 말하길, “큰 그릇이란 아마도 規矩準繩과 같지 않을까? 먼저 자신을 다스린 뒤에, 남을 다스리는 것을 일컬어, 큰 그릇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左傳僖公十七年 齊侯之夫人三 王姬徐嬴蔡姬 皆無子 齊侯好內多內 寵內嬖如夫人者六人 長衛姬生武孟 少衛姬生惠公 鄭姬生孝公 葛嬴生昭公 密姬生懿公 宋華子生公子雍 춘추 좌씨전 노희공 17년에, 제나라 제후의 부인이 셋이었는데, 왕희, 서영, 채희 모두 자식이 없었다고 하였다. 제나라 제후는 內子(여자)를 좋아하여 내자를 많이 두었는데, 內嬖(寵妾) 중에 부인처럼 총애한 사람이 6명이었다. 큰 위희는 무맹을 낳았고, 작은 위희는 혜공을 낳았으며, 정희는 효공을 낳았고, 갈영은 소공을 낳았으며, 밀희는 의공을 낳았고, 송화자는 공자 옹을 낳았다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功業無本 宜仲僅可沒身 公且薨於亂也 신안진씨가 말하길, “이룬 功業에 근본이 없었기 때문에, 관중이 겨우 죽을 수 있었고 제환공도 난리통에 죽었던 것은 아주 마땅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
8 | 楊氏曰: “夫子大管仲之功而小其器. 蓋非王佐之才, 雖能合諸侯, 正天下, 其器不足稱也. 道學不明, 而王ㆍ霸之略, 混爲一途. 故聞管仲之器小, 則疑其爲儉, 以不儉告之, 則又疑其知禮. 蓋世方以詭遇爲功, 而不知爲之範, 則不悟其小宜矣.” 양씨가 말했다. “부자께서 관중의 공을 크게 보시되, 그 그릇은 작게 보셨다. 아마도 왕(천자)을 보좌할 재목이 아니었기에, 비록 그가 제후를 규합하여 천하를 바르게 할 수 있었지만, 그 그릇은 칭찬하기에 부족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道學에 밝지 못하고 왕도와 패도의 경계(略)를 섞어서 한 길로 삼았기 때문에, 관중의 그릇이 작다는 말을 듣고서, 곧 그가 검소한 것으로 의심하자, 검소하지 아니함으로 알려주었고, 그러한즉 다시 그가 예를 알았던 것으로 의심하였던 것이다. 대개 세상 사람들이 바야흐로 속임수로 만나게 하는 것을 공으로 여기면서, 원칙대로 마차를 모는 것을 알지 못하였으니, 그 그릇이 작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은 당연한(마땅한) 일이다.”
孟子滕文公下篇 王良曰 吾爲之範我馳驅 終日不獲一 爲之詭遇一朝而獲十 맹자 등문공 하편에서, 왕량이 말하길, “나는 그를 위하여 내 방식을 따라 마차를 몰았더니, 하루종일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지만, 그를 위하여 속임수로 몰아 짐승을 만나게 하였더니, 하루아침에 열 마리를 잡았다.”고 하였다.
問使仲器局宏闊 須知我所爲功烈如彼其卑 豈肯侈然自肆至於奢僭如此 朱子曰 也不說道功烈卑時不當如此 便是功大亦不可如此 누군가 묻기를, “만약 관중의 기국이 넓었더라면, 반드시 자기가 세운 공렬이 저렇게 비루함을 알았을 것이니, 어찌 무절제하게 방자함으로부터 사치하고 참월함에 이르기를 이처럼 하고자 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주자가 말하길, “공렬이 비루할 때, 마땅히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설령 공이 크다고 할지라도, 역시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奢而犯禮 是他裏面著不得 見此些小功業便以爲驚天動地 所以肆然犯禮 無所忌也 亦緣他只在功利上走 所以施設不過如此 才做到此 便不覺自足矣 古人論王覇 以爲王者兼有天下 伯者能率諸侯 此以位論 固是如此 然使其正天下正諸侯 皆出於至公而無一毫之私心 則雖在下位 何害其爲王道 惟其摟諸侯以伐諸侯 假仁義以爲之 欲其功盡歸於己 故四方貢賦 皆歸於其國 天下但知有伯而不復知有天子 此其所以爲功利之心而非出於至公也 在學者身上論之 凡日用常行應事接物之際 纔有一毫利心 便非王道 便是伯者之習 此不可不省察也 사치하면서 禮를 범하는 것은, 그의 내면에는 붙일 수 없는 것인데, 이런 사소한 功業을 보고서 곧바로 驚天動地하는 대단한 것으로 여기므로, 이 때문에 방자하게 禮를 범하는 것이다. 거리끼는 바가 전혀 없는 것도 또한 그가 단지 功利 위로만 걸어가므로, 이 때문에 베푸는 바가 이와 같음에 불과한 것이다. 겨우(才) 여기에 이르도록 행하였음에도, 곧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만족해버리는 것이다. 옛사람은 왕도와 패도를 논하면서, 王者(천하에 왕 노릇 하는 사람)는 천하를 겸하여 소유하고, 伯者(패자)는 능히 제후들을 통솔할 수 있다고 여겼는데, 이는 지위를 갖고서 논한 것이니, 본래부터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로 하여금 천하를 바르게 하고 제후들을 바르게 하는 것은 모두 지극한 공정함과 터럭 하나의 私心도 없음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한즉 비록 아래 지위에 있더라도, 그것이 왕도가 되는 것에 무슨 방해가 되겠는가? 오직 그는 제후들을 끌어모아 제후를 쳤고, 仁義를 빌려다가 그것을 행했으며, 그 공을 모조리 자신에게 돌리고자 하였기 때문에, 사방에서 바친 공물과 부세는 모두 자기 나라로 돌렸던 것이다. 천하 사람들은 그저 패자가 있다는 것만 알았고, 천자가 있다는 것은 더이상 알지 못하였다. 이것이 바로 功利之心인 까닭인데, 지극한 공정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배우는 자의 몸 위에서 논한다면, 무릇 날마다 쓰고 늘 행하면서 일에 대응하고 외물을 접하는 즈음에, 조금이라도 터럭 하나의 利心이 있다면, 곧바로 왕도가 아니라 도리어 패자의 습성이니, 이것은 잘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桓公伐楚 只去問他包茅與昭王不返二事 便見他只得如此休 據當時憑陵中夏僭號稱王 其罪大矣 如何不理會 蓋纔說著此事 楚決不肯服 便事勢住不得 故只尋此年代久遠已冷底罪過 及些小不供貢事去問 想他見無大利害決不深較 只要他稍退聽 便收殺了 此亦是器小之故 纔是器小 自然無大功業 제환공이 초나라를 칠 적에, 가서 그들에게 包茅(제사때 쓰는 띠풀)를 천자에게 바치지 않은 일과 昭王(주나라 4대 천자)이 초나라를 정벌하다 漢水에 빠져 죽어 돌아가지 못한 일 등 겨우 2가지 일만을 물었는데, 그들이 단지 이렇게 하다가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초나라가 당시 중원의 제후국을 업신여기며 천자를 참월하여 王의 칭호를 사용한 것을 근거로 하면, 그 죄가 아주 큰 것인데, 어찌 이를 몰랐겠는가? 아마도 조금이라도 이런 일을 말했다가는, 초나라가 결단코 승복하려 하지 않을 것이니, 곧 일의 형세는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지 연대가 오래되고 멀어서 이미 식어버린 罪過와 사소하게 공물을 바치지 않은 일을 찾아서 가서 물었던 것이다. 생각하건대, 그들이 큰 이해관계가 없음을 알고서 결단코 깊이 따지지 않을 것이니, 그저 그들이 조금이라도 물러나서 말을 듣기만 한다면, 곧바로 군사를 거두어 그만두었을 터였다. 이것 역시 그릇이 작았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그릇이 작기만 하면, 자연히 큰 功業은 없을 것이다.
如蘇氏說 見得不知大學本領所以局量褊淺處 如楊氏說 見得不能致主王道 所以卑狹處 兼二說看 其義方備 소씨의 말 같은 경우는, 대학의 본령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국량이 褊淺한 부분을 알아볼 수 있고, 양씨의 말 같은 경우에는, 임금을 왕도로 이끌지 못하였기 때문에 卑狹한 부분을 알아볼 수 있으니, 두 학설을 겸해서 살펴본다면, 그 의미가 비로소 다 갖추어지는 것이다.
慶源輔氏曰 大其功所以從衆而揚其善也 小其器所以卽事而名其實也 경원보씨가 말하길, “그 공을 크다고 여겼기에 뭇사람들의 생각을 따라 그 잘한 것을 宣揚하였고, 그 그릇을 작다고 여겼기에 일에 나아가 그 실체를 命名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才與器皆生於氣質 其所能爲者 謂之才 其所能受者 謂之器 仲之才 雖足以合諸侯正天下 而其器之小 不能大其受 局於氣奪於私 是以奢而犯禮 苟免幸濟而其所成就者亦如此之卑也 使仲而嘗學於聖人之門 知大學之道而從事焉 則其器之小者可以大 而其才之能爲者亦將光明盛大矣 재주와 그릇은 모두 기질에서 생겨나는데, 그가 능히 할 수 있는 것을 일컬어 재주라 말하고, 그가 능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일컬어 그릇이라고 말한다. 관중의 재주는 비록 제후를 규합하여 천하를 바르게 하기에 충분하였지만, 그 그릇이 작아서 그 받아들이는 것을 크게 할 수 없었다. 기질에 국한되고 사사로움에 빼앗겼으니, 이런 이유로 사치하면서 禮를 범하는 것이다. 구차하게 죽임을 면하고 요행히 일을 이루었지만, 그가 성취한 것은 또한 이와 같이 비루할 뿐이었다. 만약 관중 같은 사람이 일찍이 성인의 문하에서 배움으로써 大學之道를 알아서 이에 종사하였다면, 그 그릇이 작은 것은 이로써 키울 수 있었을 것이고, 그 재주가 능히 할 수 있는 것도 또한 장차 빛나고 성대하였을 것이다.
齊氏曰 器小惜其度量不可以大受 雖勳勞如周公 猶且赤舃几几 自視欿然 況僅以其君伯乎 然則孔子何爲大其功 曰 功較之召忽 則有餘 量較之周公 則不足 大其功爲天下幸 小其器爲仲惜爾 제씨가 말하길, “그릇이 작다고 한 것은 관중의 도량이 크게 받아들일 수 없음을 안타까워한 것이다. 비록 그 공로가 주공과 같을지라도, 오히려 주공의 赤舄几几(적석궤궤, 천자와 제후가 신던 붉은 색 신발을 신고 의젓하게 걷는 모습으로 덕성을 찬미하는 표현)에는 스스로 보아도 부족하여 서운하니, 하물며 겨우 자기 임금을 패자(伯)로 만들었을 뿐임에랴! 그렇다면, 공자께서는 무엇 때문에 그 공을 크다고 여기신 것인가? 말하길, 功을 소홀에 비교하면 남음이 있지만, 度量을 주공에 비교하면 부족한 것이다. 그 공을 크다 여기신 것은 천하에 다행이었기 때문이고, 그 그릇을 작게 여기신 것은 관중을 안타까워하였기 때문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劉氏彭壽曰 以覇者之功效計之 則仲亦得爲春秋之仁人 以王道之軌轍範之 則仲不免爲三王之罪人 此所以大其功而小其器 유씨 팽수가 말하길, “패자의 공효로써 따진다면, 관중도 역시 춘추의 어진 사람이 될 수 있으나, 왕도의 軌轍(원칙)로써 규율한다면, 관중은 三王(우왕, 탕왕, 문왕)의 죄인이 됨을 면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그 공은 크게 여기지만 그 그릇을 작게 여긴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歐陽氏玄曰 器如物之所受 淺深限量 自有不可誣者 仲唯器小易盈 不能使己無三歸之事 君無多嬖之溺 齊政不旋踵而衰 器之所受不過如此而止 使能擴而充之 則可以拓聖賢之業 載宇宙之量矣 구양씨 현이 말하길, “그릇이란 마치 사물이 받아들이는 바와 같으니, 그 깊고 얕음의 제한량에는 저절로 속일 수 없는 것이 있다. 관중은 오직 그릇이 작아서 가득 차기가 쉬웠기 때문에, 자신에게 삼귀의 일이 없도록 할 수 없었고, 임금에게는 內嬖(寵妾)가 많아 그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제나라 정사는 발꿈치 돌릴 틈도 없이 쇠퇴하고 말았으니, 그릇이 받아들이는 바가 이와 같음에 불과하고 그친 것이다. 만약 이를 능히 넓히고 채울 수 있었다면, 이로써 성현의 대업을 개척하고 우주 같은 도량을 탑재하였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厚齋馮氏曰 齊桓入國 在魯莊九年 仲始獲用 三桓之僭魯 乃在昭襄之世 距仲且百餘年 仲之僭奢 蓋先諸國之大夫也 夫子此章不與仲深矣 後百年而孟氏又斥之 以曾西之所不爲 天下後世始知有王佐事業 而仲始卑覇圖始陋 向微孔孟之論 天地之正誼 或幾乎熄矣 후재풍씨가 말하길, “제환공이 입국한 일은 노나라 장공 9년에 있었으니, 관중은 이때 비로소 기용되었다. 삼환이 노공을 참월한 것은 노소공과 노양공의 치세에 있었으니, 관중으로부터 백여 년이 떨어진 뒤였다. 관중이 참월하고 사치를 부린 것은 대개 여러 나라의 대부들보다 먼저였을 것이다. 공자께서 이 장에서 관중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 심하였고, 백년 후에 맹자가 다시 ‘증서도 하지 않는 바’라는 것으로써 관중을 배척하였으니, 천하의 후세사람들은 비로소 천자를 보좌하는 사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한 관중도 비로소 비루해지고 패업을 도모한 일도 비로소 누추해졌다. 일찍이 공자와 맹자의 논의가 없었(微)더라면, 천지의 올바른 의논(誼)이 혹시라도 거의 사라질 뻔하였다.”라고 하였다.
雲峯胡氏曰 三代而後中國未有覇而仲輔其君先之 未有以大夫僭諸侯者而仲塞門反坫先之 春秋正其綱 故責齊桓而不責管仲 論語紀其實 故責管仲而不責齊桓 蓋皆不知有大學之道者也 嗚呼是時大學之書未出也 夫子而後亦旣有大學之書矣 然未聞有行大學之道者 何哉 운봉호씨가 말하길, “삼대 이후로 중국에는 아직 패자가 없었는데, 관중이 그 임금을 보좌하여 먼저 그것을 하였고, 대부의 신분으로 제후를 참월하는 경우가 없었는데, 관중이 塞門을 세우고 反坫을 설치하여 먼저 그것을 하였다. 춘추에서는 그 벼리(綱)를 바르게 하였기 때문에, 제환공을 나무랐을 뿐 관중을 질책하지 않았다. 논어에서는 그 실체의 실마리를 잡았으므로, 관중을 나무랐을 뿐 제환공을 질책하지는 않았다. 대체로 모두 大學之道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자들이다. 오호라! 이때는 대학이라는 책이 아직 나오지 않았었지만, 공자님 이후로는 또한 이미 대학이라는 책이 있었으나, 大學之道를 행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아직 들어보지 못하였으니, 무엇 때문인가?”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