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한 야구'를 망친 것은 '그들'이었다.
지난 6월 12일, 고양 원더스의 홈구장이기도 한 고양시 국가대표 야구훈련장에서 김성근 감독을 만났다. 그 날 오후 1시부터 원더스와 송원대의 연습경기가 예정되어 있었고, 인터뷰가 시작된 것은 오전 10시30분경 부터였다. 점심식사 시간까지 감안하면, 많은 것을 묻고 들을 수 있는 시간은 아니었다. 그래서 원더스에 관한 사안을 주로 묻기로 했다.
국내 최초의 독립야구단, 그리고 지난 해 엄청난 소동 끝에 SK와 결별한 '야신' 김성근이 자리 잡은 새 팀이라는 점 때문에 원더스에 집중되었던 엄청난 관심은 프로야구 정규리그가 개막되며 한풀 꺾였다. 하지만 원더스는 꾸준히 전진했고, 시즌 전 연습경기 때와 완전히 다른 개막전을, 개막전과 완전히 다른 6차전을, 그리고 6차전과 완전히 다른 13차전을 연출하고 있었다. 고양 원더스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팀이었고, 그 배경에는 역시 김성근이라는 인물이 자리 잡고 있었다.
시즌 전, 고양 원더스에 배정된 48번의 퓨처스리그 교류경기에서 김성근 감독은 20승을 넘겨보겠노라고 공언했다. 그리고 인터뷰를 하던 그 날 까지 치러진 18경기에서 원더스는 6승 3무 9패를 기록하고 있었다. 불가능이라고 생각됐던 목표치를, 조금 버겁긴 하지만 '가능'의 영역으로 옮겨놓고 있는 실적. 그것에 대해 '야신'은 어떤 희망과 절망을 느끼고 있을지 궁금했다.
하지만 인터뷰는 의도하지 못한 방향으로 접어든 뒤 폭주했다. 김성근 감독은 다소 격앙되어 있었고, 분노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분노는, 어느 만큼은 그 며칠 전 TV에서 방송된 프로그램을 향해 있었다. 무려 9시간이나 그를 앉혀놓고 대담 형식으로 촬영해 2회에 걸쳐 내보냈던 어느 공중파 방송의 특집 프로그램에서 그가 'SK와의 결별 과정'에 대해 토로했던 내용들이 깔끔하게 가위질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 방송을 본 김 감독은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고 했다. 그의 면전에서는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지면과 화면으로 '입장 곤란해질 이야기'를 올리기 주저하는 언론에 늘 느껴왔던 야속함이 그 방송을 계기로 폭발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필자가 그를 찾아간 날은 그 방송이 나온 이틀 뒤였고, 그가 홧술을 마신 다음 날이었다. 그래선지 그는 '너는 어디 들은 것들을 어떻게 쓰나 보자'라고 시험이라도 하듯 거침없는 발언을 쏟아냈다.
그는 필자에게 폭탄을 던졌고, 그것을 삼켜 소화할 자신이 없는 필자는 그대로 세상을 향해 뱉어내기로 했다. 그래서 필자가 그동안 인터뷰를 하면서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는 방식, 즉 김 감독과 나눈 대화의 내용을 시나리오처럼 그대로 써내려 보여주는 방식을 택하기로 했다. 이제부터 여러분이 읽게 될 글이다. 물론 몇 번의 '오프 더 레코드'(off the record)와 농담, 여담, 혹은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올 것이 분명한 지엽말단의 구어(口語)를 조금씩 덜어냈긴 했다. 물론 또 다른 맥락에서는 의미가 없지 않을, 그 '못다 한 이야기'들 역시 다른 기회와 지면을 통해 세상에 알리게 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다음은 김 감독과 필자가 나눈 대화의 대강이다. 진한 글씨체가 필자의 질문, 가는 글씨체가 김 감독의 답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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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근 고양 원더스 감독. ⓒ박준수 |
올 해 목표가 20승이라고 하셨는데 지금 6승 … 달성 가능 할까요?
'가능할까'가 아니라 해야지. 6승 9패 3무. (손가락을 꼽아 보며) 18개 했으니까…이제 30게임 남았지?
개막전이라든가, TV 중계가 있는 경기라든가, 이목이 많이 모이는 경기 때는 선수들이 조금 경직된 모습을 보이는 것 같더군요. 실책도 많아지고.
음…긴장이라기보다는, 그게 실력이야. 긴장을 했으면 긴장을 하지 않을 방법을 찾아야 하는 거고, 에러(실책)를 했다고 하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면 에러를 하지 않을 수 있을지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기본적인 것이 모자라니까 긴장을 하고 에러를 하는 거야.
지금도 코치들과 함께 식사를 안 하는 원칙은 계속 지키시는 건가요?
여기 와서는 코치하고 식사 한 두 번? (일본) 고치(高知) 캠프에서 한 번 하고…한국 들어와서 한 번도 없을 걸? 뭐 그러네, 지금은 한 적은 없네.
며칠 전에 두산의 정명원 코치를 만났는데, SK하고 붙어서 진 다음 날이었거든요. 붙은 느낌을 물으니까 농담 섞어서 'SK가 약해진 건 확실한데, 문제는 두산도 함께 약해진 것'이라고 하더군요.
허허허…그게 정답이야. 선구자라고 하는 게 왜 선구자냐고. 선구자라는 말이 앞에서 뛰어가는 사람이라는 뜻이잖아? 선구(先驅)라고 하는 말의 뜻이 말이야. 선구자가 있으면서 뒤에 후발주자가 가는 거지. 그런데 지금은 선구자가 없다고, 올해 야구는. 그렇지? 그러니까 전혀 악센트(accent, 높낮이)가 없고. 야구 자체가 앞서 가는 것을 잡으려고 덤벼드는 건데, 지금은 잡을 게 없잖아. 가만있어도 내려오는데 구태여 힘들여서 올라갈 필요도 없고. 지금 (1위부터) 7위까지가 4게임, 5게임차로 가까이 있는 페넌트레이스(정규시즌)는 최악이지. 팬들의 야구 열정은 세계적인지 몰라도, 야구 수준은 낮아졌어.
요즘 프로야구를 보시면 어떤 안타까움 같은 것이 계실 듯합니다. 한국야구를 이끌어가던 패러다임이 극복되는 게 아니라 그냥 무너지고 소멸되는 것에 대한….
물론 있지. 긴장감이 없어. 쉽게 주고, 쉽게 뺏기고, 너무 쉽게 포기하고. 그게 연속이야.
혹시 그런 걸 느끼신, 두드러지는 장면 같은 게 있었나요?
매순간 아니야? 매시간마다. 쉽게 가는 것 같아. 몰라, 내가 안에 안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어쩌면 나도 안에 있을 때 그런 시합을 했었는지도 모르지. 그런데, 바깥에서 볼 때는 게임이 너무 쉽게 가. 역대 30년 프로야구에서 이렇게 에러가 많은 해는 없었던 것 같아. 그런데 그거 가지고 스릴이 있어서 좋다고 할 거냐는 거지.
나는 프로라면 실수를 수치스러워해야 한다고 봐. 생각 없이 야구하려면 2군에 있어야지 왜 1군에 있냐고. 그게 8백만, 9백만 관중 시대라는 것에 도취되어 있구나. 그런 건 아니잖아. 관중이 한명이라도 프로는 프로다운 야구해야지. 프로라고 하는 것은 최고의 기술을 보이는 게 프로인데, 그래서 돈 받는데, 안 그래? 아마추어하고는 다른 거야. 아마추어는 에러를 하면 애교라고. 하지만 프로는 에러를 하면 실력이야. 운동장이 나쁘면 나쁜데서 그걸 처리하는 방법을 찾아야지. 운동장 나쁘니까 에러한다는 건, 그건 타협이야. 아마추어나 하는 생각이야.
그런데 그게 지금 야구라고. 그렇지? 에러났으니까 졌습니다. 운동장 땅이 나빠서 야구 못 하겠습니다. 이런 건 문제가 아니라고. 그라운드가 나쁘면 앞으로 뛰어나오면 될 거 아냐. 세 발, 두 발. 왜 발상을 안 바꾸느냐 이거야. 그러니까 야구가 긴장감이 없다고. 매력이 없어진다고, 야구 자체가. 내가 볼 때 그런 점이 떨어졌다는 얘기야. 베이스 하나를 호시탐탐 노리지 않는 놈들은 프로가 아니라고.
최근 프로야구에서 찬스 때 대타를 기용했는데 그 타자를 고의사구로 내보내자 당황한다거나, 그 타석 이후의 수비 포메이션이나 다음 타석에서의 타순 같은 것들을 고려하지 않았다가 당황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또 마무리투수가 등판하자마자 열댓 개씩 연속으로 볼을 던지는 데도 대응이 늦는 모습 같은 것도 말씀하신대로 긴장이 없는 일면이 아닐까 싶군요.
그런 게 팬들에게 보인다는 것 자체가 틀린 거야. 그거는 소위 말해서 뭐라고 할까. 지금은 당연한 걸 확실하게 못한단 말이야. 그렇지? 지금 당연한 걸 지적받는 거야. 팬들이나 옆에 주위 사람들한테. 그건 프로가 아니지. 그리고 사실 프로는 어려운 걸 당연하게 해야 하는 거야. 어려운 걸. 다이빙캐치를 하면 잘하는 줄 아는데, 다이빙캐치하기 전에 수비위치 잡으면 되는 거잖아. 그 위치를 잡고. 나는 다이빙 캐치하는 것을 잘한다고 하는 그 발상이 틀렸다고 봐. 프로라고 하면 저 볼은 여기 온다. 그래서 여기 서 있어야지, 하고 판단하는 것. 그게 프로지. 프로는 어려운 일을 쉽게 해야 하는 거야. 그런데 지금은 쉬운 걸 어렵게 한다니까. 쉬운 걸.
첫댓글 이건 예전에 읽었기 때문에 ㅍ ㅐ 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