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고 다시 쓰는 사랑>정정예>월간 수필과비평 2024년12월호
팔십 대 노부부, 세 살 연상의 부인이 살아온 시간을 하나씩 말갛게 지워가고 있다. 요양병원 보내지 않으려고 남편은 애를 썼으나 자녀들이 아버지 혼자서 어머니를 보살피기에는 연로하시니 내린 결정이라며 울면서 어머니 보내드린 가족들이다.
면회 가는 날 남편은 말쑥한 옷차림에 쑥부쟁이꽃 한 다발 꺾어 들고 한껏 들뜬 기분으로 살며시 병실 문을 연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다. 평소처럼 아내가 환하게 웃으며 반겨줄 것만 같아서다.
쑥부쟁이 꽃다발을 아내의 코끝에 가까이 가져다 대보지만 그녀의 풀린 동공은 초점도 맞지 않은 채 아득히 먼 곳, 어느 별을 헤매고 있는지 방향 감각도 잊고 사랑하는 사람들 기억과 낯익은 데를 모두 지웠는지. 낯선 도시를 방황하며 새로운 출구를 찾고 있는 아내에게
“여보 나예요. 당신이 보고 싶어서 왔어요.”
다정하고 상냥했던 아내가 혼이 빠진 듯 흐느적대는 누추한 모습이 생소해 황망히 창문 너머로 흐릿해진 눈동자로 멀리 시선을 바꾼다. 빡빡 깎은 머리에 삐죽삐죽 흰 머리카락이 바늘 끝같이 치솟았다. 웃음기 사라진 얼굴이 마주하기 싫은 이방인처럼 그저 얼빠진 사람이다. 남편의 마음에 한바탕 냉기가 훅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아, 여보 나예요. 나, 당신이 보고 싶어서 왔어요.” 여보 사랑해요” “자기야!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이뻐요.” 살갗이 밀리는 얼굴을 양손으로 쓰다듬으며 검버섯 피고 버짐 핀 아내 볼에다 남편 얼굴을 연신 비비고 입맞춤을 하는데 주체 못할 흐르는 눈물이 목줄까지 타고 흐른다. “우리 아기 예쁘지. 우리 아기 정말 예쁘지.” 노래 부르듯이 읊조리며.
늙은 남편은 무표정한 아내의 얼굴을 가슴에다 꼭 끌어안고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한다. 그러다가 앙상한 아내의 가슴에 자신 얼굴을 파묻는다. 아무런 감정도 감각도 없이 지나온 시간을 비워가고 있는 아내에게, 눈물로 입맞춤을 한 후에 쓸쓸히 발길을 옮긴다. 속으로 숱한 말을 되뇌며 ‘제발 날 기억해 줘요. 우리가 가장 행복했던 날을 생각해 줘요, 우리의 빛나던 날이 있었잖아요. 여보 사랑해요.’
연둣빛 새순 돋는 봄의 뜨락에서 다시 소생하지 못하는 아내의 기억은 깊은 블랙홀로 미끄러져 갔다. 산천초목 성장하는 여름과 풍성해지는 가을 들녘에서 또 겨울 눈 내리는 풍경을 하염없이 눈사람이 되어 바라보고 있는 남편이다. 사계의 풍경이 여러 번 바뀌어도 아내는 눈만 깜박거리는 미라같이 물기 마른 몸이 아직 지우지 못한 부분을 하얗게 지워가고 있었다. 시월의 흰 국화 향기 울먹이며 흩뿌리고 가신 날. 여보, 안녕! 우리 천국에서 다시 만나요.
지고지순한 사랑 (純愛) 순애의 무르익은 사랑을 감당치 못하여. 새롭게 써 내려가야 하는 영근 사랑이 눈물겹도록 숭고하여 부부의 연을 완숙한 사랑 인격적인 사랑으로 이어간 팔십 대 노부부의 아름다운 사랑을 지켜보는 내내 울컥울컥 눈물이 쏟는다.
서로에게 짐이 되는 게 아니라 곁에서 기척만 해줘도 고마운 사람, 같은 하늘 아래 호흡만 해줘도 기특한 사람 그 완전한 사랑을 위해 하얗게 지우고 다시 쓰는 사랑이 눈부셔라. 지는 꽃에도 짙은 향기 동하니 목이 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