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 - 팔공산 자락의 큰절 동화사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1. 4. 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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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산하 - 팔공산 자락의 큰절 동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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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28. 12:01조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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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산하
팔공산 자락의 큰절 동화사
신라 때 중 진홍이 지팡이를 공중에 날렸더니 지팡이가 여기에 떨어지므로 절 동화사를 짓고 거주하였다. 땅의 생김새가 좌우로 둘러 겹쳤고, 절 건물들이 굉장히 커서 예로부터 스님과 계행(戒行)을 닦은 자가 많았다.
『택리지』에 수록된 동화사(棟華寺)의 기록이다. 동화사는 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 팔공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사찰로 493년에 극달스님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처음 이름은 유가사였으나 흥덕왕 7년(832)에 진표율사의 제자였던 왕사(王師) 심지가 간자(미륵보살의 수계(受戒)를 의미하는 징표)를 받아 중창하였고, 그때 한겨울이었는데도 절 주위에 오동나무 꽃이 만발하였으므로 절 이름을 동화사라고 하였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신라 제41대 아들로 15세에 출가한 심지는 스승을 따라 수행에 전념하며 팔공산에 머물고 있었다. 마침 속리산에서 영심대사가 진표율사의 불골간자(佛骨簡子)를 전해받아 법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으나 이미 법회가 시작되어 참례를 허락받지 못하였다. 이에 마당에 앉아 여러 무리들과 함께 기도하고 참회하였다. 그렇게 7일이 지났을 때 큰눈이 내렸으나 심지의 둘레로는 눈이 쌓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이 신기한 광경을 본 뒤 법당에 오를 것을 허락했으나, 심지는 사양하고 병을 핑계로 방 안에 물러 앉아 법당을 향하여 조용히 기도하였다.
법회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옷자락을 살펴보니 불골간자 두 개가 붙어 있었다. 심지는 이것을 가지고 돌아가 영심에게 사실을 말하였다. 영심은 “간자는 함 속에 있는데 그럴 리가 있는가!” 하면서 함을 살펴보였다. 함은 원래대로 봉해져 있었지만 함을 열고 보니 간자는 없었다. 영심은 매우 이상히 여기면서 심지에게서 받은 간자를 겹겹이 싸서 깊이 갈무리를 해두었다. 심지가 다시 길을 나섰으나 옷자락에는 먼저와 똑같이 간자가 붙어 있었다. 재차 돌아가 영심에게 고하니 “부처의 뜻이 그대에게 있으니 받들어 행하도록 하라” 하면서 영심은 간자를 심지에게 전하였다.
심지는 이렇게 받은 불교 간자를 머리에 이고 팔공산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산마루에 올라 간자를 던져 떨어진 곳에 간자를 봉안할 절을 이룩하니 이것이 바로 동화사라는 것이다. 이후 동화사는 금산사, 법주사와 함께 법상종의 3대 사찰로 자리 잡게 되었다.
팔공산
대구광역시와 영천시, 군위군, 칠곡군에 걸쳐 있는 팔공산 기슭에는 동화사를 비롯해 파계사ㆍ부인사ㆍ은해사 등의 명찰이 많다.
한편 팔공산 동쪽 기슭의 영천시 청통면에 거조암이 있는데 거조암은 은해사의 산내 암자다. 원효가 693년(효소왕 2)에 창건하였다는 설과 경덕왕 때 왕명으로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다. 그 뒤 고려시대에 보조국사 지눌이 송광사에 수선사를 세워 정혜결사(定慧結社)에 들어가기 전에 각 종파의 법력 높은 스님들을 모시고 몇 해 동안 정혜를 익혔던 사찰로 유명하다.
1182년 지눌은 개성(開城) 보제사(普濟寺)의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여하여 선정을 익히고 지혜 닦기를 힘쓰는 동료들과 함께 맹문(盟文)을 맺을 것을 기약하며 그 취지를 밝혔다. 1188년 봄 거조사의 주지 득재는 지난날 결사를 기약하였던 수행자를 모으고 그 당시 경상북도 예천, 하가산 보문사에 머물고 있던 지눌을 초청한 뒤 처음으로 이 절에서 정혜결사를 시작하면서 「권수정혜결사문」을 통해 그 취지를 밝혔다. ‘마음을 바로 닦음으로써 미혹한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천명하고, 그 방법은 정(定)과 혜(慧)를 함께 닦는 데 있다고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결사란 이상적인 신앙을 추구하기 위한 일련의 신앙 공동체 운동이자 종교 운동으로서 개경 중심의 보수화되고 타락한 불교계에 대한 비판 운동이었으며 실천 운동이었다. 그 뒤 이 결사가 1200년경 송광사로 옮겨갔다. 1298년 정월 원참이 밤중에 낙서라는 동인을 만나 본심, 미묘, 진인과 극락왕생의 참법을 전수받아 기도 도량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 뒤의 역사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거조사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가 은해사가 사세를 크게 키우면서 은해사의 산내 암자로 남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요 근래에는 오백나한 기도 도량으로서 9일간만 정성껏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 하여 수많은 신도들이 찾아오고 있다. 남아 있는 절 건물은 국보 제14호로 지정된 영산전(靈山殿)과 요사채 2동이 있다. 영산전은 수덕사 대웅전의 맥을 잇는 백제 때의 고려 건축이다. 그동안 고려 말의 건축이라는 설과 조선 초의 것이라는 설이 있었지만 해체, 수리할 때 발견된 묵서 명에 고려 우왕 원년(1375)에 건축된 고려시대 건축으로 판가름이 났다. 부석사의 무량수전, 봉정사의 극락전, 수덕사의 대웅전과 더불어 몇 개 안 남은 고려 건축인 영산전은 정면 7칸에 측면 3칸의 장중하면서도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건물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팔공산 자락의 큰절 동화사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9 : 우리 산하, 2012. 10. 5., 신정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