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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국 전통문화콘텐츠연구원 원장(전 노원문화재단 이사장)
[문화 자유기고가 김승국]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지원이나 전문 문화예술기관 운영에 있어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라는 ‘팔길이 원칙(arm's length principle)’은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불문율이 되어있다.
이 원칙은 1946년 경제학자 존 케인스가 초대 위원장을 맡았던 영국예술위원회가 ‘예술의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기초예술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해야 한다’라며 ‘팔 길이 원칙’을 기본방침으로 내 세우면서 일반화됐다.
이후 영국에서는 정권교체와 상관없이 문화예술 지원은 예술위원회가 맡고, 정부는 간섭하지 않는 것이 문화정책의 기본 토대가 됐다. 이 원칙은 1946년 영국에서 시작된 것이나 이제는 국제적으로도 이 원칙이 통용되고 있으며, UN에서도 전 세계 공직자가 지키도록 권고한 행동강령에 문화예술을 정치와 관료행정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하도록 ‘팔길이 원칙’을 공식적으로 채택한 바 있다.
이 원칙은 공적 지원을 빌미로 정부나 지자체가 자기들의 이해관계나 입맛에 맞게 예술을 통제하고 강요하는 관료적 간섭에서 벗어나서 예술의 독립성과 자율성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에서 출발한 것이다. 요즘에는 한발 더 나아가 정부 또는 고위공무원이 공공지원 정책 분야 등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지원은 하되 그, 운영에는 간섭하지 않음으로써 자율권을 보장하는 원칙으로 발전되어 있다.
물론 예술 행정은 예산과 공간, 인력 같은 공공 자원을 집행하기 때문에 공익 실현과 절차적 투명성 등의 공적 의무를 이행하기 위한 정부나 지자체의 개입과 통제는 불가피하다. 따라서 예술 현장의 독립성과 자율성이 존중되기 위해서는 집행의 효과성, 합리성, 투명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예술행정과 현장은 책임과 권한을 공평히 나누어 가져야 한다.
말뿐인 팔길이 원칙 과연 지켜질까
우리나라 정부에서도 표면적으로는 ‘팔길이 원칙’을 모든 문화예술의 정책에서 가장 기본적인 방향 중 하나로 제시하고 있지만 과연 그럴까? ‘지방자치단체 출자 출연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 제3조에 출자, 출연기관 즉 지역문화재단의 자율적 운영을 보장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지만 이러한 입법 정신을 지키고 있는 지방자치단체장이나 공무원들이 얼마나 있을까?
지방자치단체 출자 출연기관인 지역문화재단의 사업계획과 운영에 있어서 재단 대표에게 전권을 부여하는 지방자치단체가 과연 있을까? 재단의 자율적 운영을 보장한 ‘지방자치단체 출자 출연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 제3조에도 불구하고, 같은 법 25조에 ‘지방자치단체의 장은 법령인 조례에 따라 지방자치단체가 출자·출연 기관에 위탁한 사업 등에 대해 해당 출자·출연 기관을 지도하거나 감독할 수 있다’라는 규정을 빌미로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도 감독 부서의 공무원들이 재단의 사업계획과 운영에 일일이 간섭과 통제를 하는 사례는 오늘도 진행되고 있다.
실례를 들어보자. 먼저 잘 지켜지고 있는 예를 먼저 들어본다. 10여 년 전 내가 지역 문예회관 관장 재직 시의 예다. 지금은 국회의원 신분이 되었지만, 당시 지역 구청장은 내게 “내가 문화예술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문화예술 전문가인 관장님께서 구청장이라고 생각하시고 마음껏 문화 행정을 펼쳐주십시오.”라고 하고 재임 기간 지원은 하되 간섭을 일절 하지 않았다. 문예회관의 기획공연 선정은 물론 티켓 하나 요청하는 일도 없었다. 이러다 보니 감독부서 구청 공무원들도 당연히 문예회관 운영에 간섭하는 일이 없었다. 이런 지자체장만 있으면 오죽 좋으랴.
그런가 하면 ‘팔길이 원칙’이 철저히 무시되는 예도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어느 지역의 지자체장은 관할 지역 문화재단 일에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간섭과 통제를 하였다. 하다못해 공연이나 축제 프로그램 선정은 물론, 공연 출연자 선정에서부터 출연 가수의 노래 곡목까지 일일이 간섭하는가 하면, 인사 등 재단 운영에 일일이 간섭하였다. 재단의 전문성과 독립성을 존중하는 것은 안중에도 없고 자신의 취향대로 재단을 떡 주무르듯 하였다. 이러다 보니 구청 공무원들도 구청장 입맛에 맞도록 재단 운영에 일일이 간섭하는 등 재단 발목잡기로 일관하였다. 이러한 지자체가 그곳 하나뿐이겠는가?
현재 문화재단의 대표는 외관상으로는 공모로 공정하고 객관적인 공모 절차에 의해 선임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공모는 형식적이고, 지자체장이 문화재단 대표를 미리 정해놓고 하는 짜고 치는 고스톱 공모라는 말이 무성하니 마음이 허탈하다. 언제나 지역 문화재단 대표직 자리가 파리 목숨이 아닌 불공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날이 올지 그날이 기다려진다.
‘팔길이 원칙’은 우리나라의 지향점일 뿐 관료 위주의 간섭과 통제적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측면이 있다. K-pop, K-classic, K-movie, K-drama 등 세계적으로 성공한 우리나라의 문화예술은 정부의 관여와 지원으로 성공하였다기보다는 예술인들의 불타는 예술혼과 노력, 그리고 전문가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지난 6월 12일 윤석열 대통령도 칸국제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과 감독상을 각각 받은 배우 송강호 씨와 영화감독 박찬욱 씨 등 영화 관계자들을 불러 용산 대통령실 청사 앞 잔디밭에서 만찬을 함께 하면서 "우리 정부의 문화예술 정책의 기조는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겠다’라는 ‘팔길이 원칙’이며 이를 지키겠다. “라고 강조한 바가 있다. 믿어보고 싶지만, 그렇게 되었으면 오죽 좋으련만 예술 현장에서는 이러한 말에 크게 기대하지 않는 것 같다. 두고 지켜볼 일이다.
부산국제영화제 성공에서 증명된 팔길이 원칙
전국 지자체 주관으로 경쟁적으로 열리고 있는 지역 축제는 대부분 지자체에서 재원을 출연하여 개최되고 있다. 축제마다 민관 축제 추진협의회 같은 것이 있기는 해도 지역 민간 대표들이나 예술가들은 명색용 들러리로 참여하고 있으며, 지역민들은 축제의 주체자가 아닌 구경꾼으로 전락하고 있다. 일명 선수급 축제 기획자들이 지자체장의 입맛에 맞게 축제를 기획하고 실행하여, 지역의 특성과 환경이 고려되지 못한 붕어빵 축제가 만들어지고 있으며 팔길이 원칙’은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도 없다. 무늬만 민간 주도의 축제이지 실제로는 지자체장이나 공무원들이 기획부터 프로그램 선정은 물론, 심지어 초청 연예인 선정까지 관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팔길이 원칙’이 잘 지켜져 가장 성공한 대표적 사례로서는 부산국제영화제를 꼽을 수 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재정 지원을 하는 부산시장이 당연직 조직위원장을 맡는데 프로그램 선정 등 영화제 실제 운영에 일절 관여하지 않을 뿐 아니라, 민간 전문가 출신인 집행위원장 또한 작품 선정에 일절 관여하지 않고 모든 프로그램 및 작품 선정 등 운영은 영화 전문가들에게 맡기는 등 ‘팔길이 원칙’이 잘 지켜졌기 때문에 성공한 국제영화제로 자리 잡게 되었다.
정부나 지자체의 간섭과 통제가 시작되는 순간 예술은 손상되고 훼손되는 속성이 있다.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맡겨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문화예술 정책 수립과 운용은 전문가에 맡겨야 한다. 문화예술이 사회에 미치는 파급력이 큰 것을 이용하여 정치적 이해득실을 따져 “밤 놔라, 대추 놔라.”하며 통제와 간섭을 일삼는 정부나 지자체의 손바닥 원칙(palm's length principle)의 유혹은 이제는 떨쳐버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