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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 해방 후 샹젤리제를 행진하고 있는 미 육군 28사단 장병들
[ 영화,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
<금지된 장난>,<목로주점>,<태양은 가득히>의 거장 르네 클레망 감독의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는 프랑스,독일,미국 등 각국의 배우들이 총 출동하여 만든 호화 캐스트의 전쟁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타워링>,<서부개척사>,<사상최대의 작전>,<머나먼 다리> 등과 함께 초호화 캐스팅의 대명사격인 영화다. 배우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영화 제작국인 프랑스에서는 당시 최고 인기스타인 알랑 들롱과 장 폴 벨몽도가 함께 출연하였습니다.
* 레지스탕스 알랑 들롱
이밖에 시몬느 시뇨레,미셀 피콜리,이브 몽땅,장 피에르 카셀,피에르 바넥,장 루이 트랑티낭,샤를르 보와이에 등이 등장하고,미국배우들은 커크 더글러스,글렌 포드,안소니 퍼킨스,레슬리 캐론,로버트 스탁,조지 차키리스,오손 웰즈 등 기라성같은 배우들이 등장합니다.
이른바 독점적인 주인공이 없는 영화인데,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은 히틀러의 황당한 명령을 받고 파리 주둔 독일군 사령관 콜티스역의 게르트 프로베라는 독일배우입니다. 그는 군인의 냉철함과 인간적인 감성을 함께 보여주는 독일 장교역을 무난히 수행하여 보는 관객들에게 연민까지 느끼게 합니다.
* 경찰청사에서 바라보는 노트르담 사원
독일군으로서 한낱 악랄한 나치가 아니라 명령을 수행하는 군인으로서의 내면적 고민을 잘 표현했다는 평입니다.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는 악독한 독일군을 연합군이 마냥 쳐부수는 영화가 아닙니다. 전쟁이라는 상황 하에, 독일군과 연합군이 벌이는 전투 속에서 파리의 독립을 갈망하는 레지스탕스,명령을 수행하는 독일군,독일군을 향하여 일전을 벌이는 연합군측을 각각 조명하면서 한 도시를 둘러싼 치열한 시가전과 게릴라전, 방어전 등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수작(秀作)입니다.
개개인의 이야기보다는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는가를 신속하게 진행시켜주는 방식으로 마치 '프랑스판 사상 최대의 작전'이라고 할 만한 영화입니다. 유명한 배우들은 아주 초단역으로 등장하는 경우도 있고, 제법 비중이 높은 경우도 있습니다. 커크 더글러스의 경우 단 한 씬만 등장하지만 패튼이라는 거물로 출연하고 프랑스의 대배우인 시몬느 시뇨레도 바텐으로 단역 출연합니다.
* 미군으로 나오는 안소니 파킨스(왼편)
연합군 장교로 등장하는 글렌 포드는 무게는 꽤 잡지만 출연비중은 적었고, 알랑 들롱, 장 폴 벨몽도 등은 비교적 비중있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의외로 비중이 높은 배우는 <나의 청춘 마리안느>의 주인공이었던 피에르 바넥인데 목숨을 걸고 연합군을 찾아가 파리진격을 호소하는 레지스탕스로 등장합니다.
레지스탕스를 이끄는 리더격으로 브루노 크레머라는 배우도 역시 비중있게 등장하며, 명배우 안소니 퍼킨스, 이브 몽땅 등도 연합군으로 등장하여 눈부신 활약을 벌인 뒤 장렬히 전사하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 콜티츠로 나오는 독일 배우 게르트 프로베(007 골드핑거에서 나옵니다)
뮤지컬 배우인 레슬리 캐론이 프랑스 레지스탕스 일원으로 등장하는 것이 이채로운데, 남편이 독일군에게 사살되는 것을 지켜보는 비운의 여인상을 맡았습니다. 잡혀가는 남편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다가 울음을 참는 표정연기가 인상 깊었습니다.
뮤지컬 배우도 일반 연기를 매우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법 비중이 높은 역으로는 대배우 오손 웰즈도 있는데 독일과 프랑스의 협상을 중재하는 스웨덴 대사역으로 등장합니다. 좀 민망한 배역이랄 수 있는 배우로는 <남과여>의 스타 장 루이 트랑티낭입니다 그는 독일군 앞잡이 노릇을 하며 레지스탕스를 팔아 넘기는 파렴치한 프랑스인으로 단역 출연합니다.
이렇게 한명 한명 유명배우들의 등장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가 있는 영화이지만, 배우들의 얼굴 보여주기에 급급한 영화가 아닙니다. 충분히 짜임새 있는 시나리오와 전개로 레지스탕스들의 활약과 파리해방에 대한 열망을 충분히 담아낸 작품입니다. 역시 본토(프랑스) 감독이 연출한 덕을 본 것이 아닐까요?
특히 출연 배우들도 유명도나 인기도와 관계없이 자신들의 역할을 하고 있어서 배우 서열에 신경 안쓰고 비중에 따라 출연빈도가 높은 연출을 하고 있습니다.
역사와 유적의 도시 파리가 하마터면 히틀러의 광기에 의해서 산산히 폭파될 수 있었다는 긴박감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라고 빈 전화통에 재촉하는 히틀러의 허망한 음성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파리를 불태워서 독일이 승리할 수 있다면 열번이고 그랬을 것이요"라고 말하는 콜티스 사령관의 대사가 인상 깊은 장면이었습니다.
패망을 뻔히 알면서 총통의 황당한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당시 독일군 장교들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집을 나온 지 4년이나 되었는데 살아서 돌아가고 싶습니다”라고 독일군 장교가 말하는 장면에서는 연민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어쨌든 인류의 유산 파리는 무사히 보존되었고, 그래서 이 영화도 나올 수 있었습니다.
* 레지스탕스 장 폴 벨몽도(오른쪽)
[ 간략한 줄거리 ]
1944년 8월 2차 대적 막바지, 파리를 수성하라는 지시를 내린 히틀러는 수성이 안될 경우파리 전체를 파괴해 버리라는 황당한 명령을 내립니다. 이 명령을 받고 파리의 사령관으로부임해 온 독일군 콜티스 소장,
* 콜티츠 사령관
그는 어쩔 수 없이 폭파 전문가들을 불러서 파리 곳곳을 파괴할 수 있는 폭파시절을 설치하지만 내심 루부르 박물관, 노트르담 사원 같은 오랜 역사의 파리가 폭파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부하 장교들 앞에서는 거침없이 이 작전을 밀어붙이지만 '내가 명령할 때 까지는 폭파하지 마라'라는 다짐을 하기도 합니다. 한 편 각지에 흩어져있던 프랑스 레지스탕스들은 연합군의 진격을 앞두고 파리 경찰서를 비롯한 관공서를 장악하고 유리한 고지를 점령합니다.
레지스탕스의 일원인 로제는 무험을 무릅쓰고 연합군을 찾아가 패튼장군을 극적으로 만나고 파리진격을 호소합니다. 연합군 장교회의에서 파리의 위기상황을 역설한 로제의 호소에 힘입어 연합군을 드디어 파리로 진격하고 광기에 찬 히틀러는 파리를 당장 불태워 버리라는 명령을 재촉합니다.
파리가 파괴될지 모르는 일촉 즉발의 순간, 콜티츠 소장은 끝내 파리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습니다. 시내 레지스탕스들과 치열한 시가전을 벌이고 있는 순간 연합군은 프랑스군을 앞세우고 파리로 밀려들어 옵니다.
[ 파리해방 관련 비하인드 스토리 ]
1944년 8월 14일, 연합군의 대 상륙부대가 프랑스 남해안에 접근하고 있을 무렵, 프랑스 북부에서도 사태는 극적인 전환을 맞이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는 연합군 지상부대에 의해 아르장탕-팔레즈 지대의 독일군에 대한 포위가 강화되고 있는 전황 하에서 패튼 장군이 미 제15군단 사령관 하이슬립 소장을 찾았습니다.
아르장탕 남방의 사령부에 있던 하이슬립은 패튼이 가지고 올 명령이 유럽 전쟁의 동향을 좌우하고 파리와 그 400만 시민의 운명을 결정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 패튼
군단 사령관 하이슬립은 그 나름대로의 이유로 해서 패튼 명령의 내용이 신속하게 파리를 해방시키고자 하는 자기 소신과 맞아 떨어지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유창한 불어를 구사하는 하이슬립은 청년장교 시절에 파리의 에콜 드 제르에서 배운 바도 있었습니다.
그 휘하에는 유럽에서 유일한 프랑스군 사단인 프랑스 제2기갑사단이 배속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프랑스인이 자력으로 자기들의 수도를 수복함으로써 상징적인 최후의 일격을 적에게 먹여야 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 영화에서...
그러나 패튼이나 연합군 작전계획 수뇌진은 더 중요한 목표를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연합군은 당분간 파리를 해방시킬 의향이 없다고 패튼은 하이슬립에게 고했습니다. 하이슬립의 제15군단 가운데 2개 사단은 파리 전방 70km의 드루까지 전진하되 나머지 사단은 아르장탕에 남겨 두라는 것이 패튼의 명령이었습니다.
하이슬립은 몹시 실망하고 프랑스 제2기갑사단을 파리까지 진격시키도록 패튼에게 간청했습니다. “프랑스인에 있어서 유럽에서 단 하나 뿐인 프랑스 사단이 최초로 파리에 입성한다면 참으로 기뻐할 것입니다. 온 프랑스가 미친 듯 춤을 출 것입니다.” 그러나 패튼은 냉정히 대답했습니다. “무슨 소리요. 우리들은 지금 전쟁을 하고 있는 거요.”
* 영화에서...안소니 파킨스
하이슬립에게 명령을 전달하는 패튼은 실제로는 자기 상관인 아이젠하워의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고 있었던 겁니다. 아이크도 파리 수복이 프랑스와 기타 모든 연합군에게 큰 정신적 고양(高揚)을 가져다주리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군사적 주요 목표는 다른 방향에 있었습니다.
패주하는 독일군에게 재건의 시간적 여유를 주지 말고 불과 400km 저편의 라인강까지 연합군이 돌진한다면 전쟁을 빨리 종결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가 파리 수복을 바라지 않는 이유는 또 따로 있었습니다.
* 영화에서...
그는 그 댓가가 비싸게 먹히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연합군 총사령부에 의해 작성된 24페이지 짜리 작전계획서는 견고히 방어된 파리에서 시가전을 하게 되면 프랑스 수도의 파괴를 초래할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었습니다.
또 일단 파리를 탈환한다 할지라도 그 후에 파리가 필요로 한 “민정 참여에 의해 작전 중인 8개 사단을 그곳에 유지해야 할 것이며.....파리가 필요로 하는 식량 및 의료품만 해도 첫 2개월 사이에 7만5000톤, 게다가 1일 1,500톤의 석탄이 공공시설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해질 것이다”라고 지적하고 있었습니다.
* 영화에서...
보급물자는 여전히 셀부르 항구와 연합군이 상륙한 해안을 통해 들여오고 있었으므로 아이젠하워가 지휘하는 작전을 빈약한 보급능력에 아직 매달린 상태였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새 사단이 도착하면 그들이 싸움터에서 써야 할 지프며 트럭을 몰수하여 보급물자 수송용으로 전용했습니다.
셀부르와 파리 간의 왕복거리는 650km 이상이며 각 보급물자 수송대는 수십 톤의 가솔린을 소비하게 될 것입니다. 아이젠하워가 후에 회상했듯이 “가솔린을 1 리터만 써도 가슴이 아팠다”는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습니다. 브래들리는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했습니다.
* 시가전을 벌이는 시민들
“만약 파리가 조금만 더 굶주린 배를 졸라매고 독일인과 함께 사는 것을 조금만 더 참아 준다면 매일 절약된 가솔린 4,000톤을 가지고 차량을 독일 국경 쪽으로 3일 동안 전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연합군의 작전은 독일 본토를 향해 일로 매진하는 것이었고, 그 진격 과정에서 북쪽의 몽고메리 휘하 제21군집단과 남쪽의 브래들리 휘하 제12군집단이 파리 주변에 투입되어 파리를 포위하되 강습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 브래들리 장군
작전계획에 따르면 파리 수복은 9월 중순 이후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갖가지 사건이 겹쳐 파리 수복계획은 크게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표를 뒤엎은 요소는 다시 자기들의 수도를 탈환하고자 하는 프랑스인의 강한 의지, 파리의 지배를 에워싼 드골 지지파와 공산파 간의 권력투쟁, 프랑스의 수도를 잿더미로 만들려고 한 히틀러의 결의, 그리고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은 파리를 파괴한 자로서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기를 꺼린 한 독일군 장성이었습니다.
연합군 지도자들이 파리 문제에 관해 논의하고 있을 때 이 대도시의 시민들은 각종 물자의 부족과 생활의 불편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식량, 전기, 그리고 시내의 교통기관이 극도로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파리시민이 무엇보다도 필요로 했던 것은 긍지를 되찾는 것이었습니다.
* 영화에서...
파리 시민들은 독일 점령군의 만행을 비롯하여 참기 어려운 숱한 굴욕을 참아야만 했습니다. 250명의 독일 정예부대가 매일 브래스밴드로 “프로이센의 영광”을 크게 연주하면서 개선문에서 콩코르드 광장까지 샹젤리제를 행진했습니다.
파리에서 제일 잘 눈에 띄는 에펠탑 꼭대기에는 나치의 갈고리 십자가가 휘날리고 있었습니다. 그 한편으로는 게양을 금지당한 프랑스 국기인 삼색기를 공공연히 볼 수 있는 장소는 앵발리드 궁의 군사 박물관 뿐이었습니다. 이곳 유리 진열 케이스 안에 삼색기가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파리의 조기 수복을 가장 끈질기게 그리고 강력하게 주장한 사람은 샤를 드골이었습니다. 그는 알제리아 사령부에서 프랑스 국민 해방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이 위원회는 자유 프랑스의 전투 상황을 지휘하고 또 레지스탕스라고 불리우는 프랑스 국내의 공산당, 드골파, 그리고 기타 반 독일 게릴라 조직 등 간의 협력관계를 조정하는 중앙 조직이었습니다.
그러나 드골은 프랑스의 지도자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확립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레지스탕스 내부에는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라이벌 파벌이 있었고 이들은 국내에서 교묘한 방법으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고 갖가지로 공작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연합군의 고관 가운데조차도 드골을 성가신 존재로 보는 사람이 있었고, 적 치하의 프랑스 국민들에게 있어서도 드골의 존재는 영국의 BBC 방송을 타고 들려오는 머나먼 땅으로부터의 목소리에 불과했습니다.
* 영화에서...
드골은 프랑스가 해방될 때 가장 타당한 지도자로서 승인받기 위해서는 파리 해방자라는 칭호를 자기 것으로 해야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있었습니다. 또 레지스탕스 내부의 저 시끄러운 공산분자들에게 선동된 파리 시민이 일제 봉기를 결행하여 자기의 파리 도착 이전에 독일군을 내쫓는 사태라도 벌어지게 되면 “내가 도착했을 때 그들은 내 머리 위에 월계관을 얹어주고 그들에게 편리한 자리에 나를 앉혀 나를 마음대로 주무르려고 할 것임”도 알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어두운 전망에 마치 도전이라도 하듯 드골은 놀라운 솜씨를 발휘하여 꼼꼼하게 권력 장악을 위한 포석을 놓았습니다. 1943년 12월 30일, 아이젠하워가 알제리아를 방문하여 처음으로 드골과 만났을 때 형세가 단숨에 호전되었습니다.
* 영화에서...
회담이 끝날 무렵에 아이크가 말했습니다. “나는 처음에는 귀하에 관한 비호의적인 보고만 받아 왔으나 오늘 그 보고들이 그릇된 판단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라고 드골이 대답했습니다. “귀하는 실로 사나이다운 사나이입니다. 자기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할 수 있으니까요.” 드골은 말을 이었습니다.
“수도를 점령하는 것은 프랑스 부대라야 합니다.” 드골이 말하는 프랑스 부대란 그가 거느린 프랑스 국민 해방위원회의 지휘 하에 있는 군대를 뜻했습니다. 아이젠하워는 이에 동의했습니다.
* 아이젠하워 연합군 총사령관
1944년 7월 드골은 프랑스 지도자로서의 부동의 지위를 얻기 위해 또 하나의 조처를 강구했습니다. 그는 워싱턴까지 가서 루스벨트 대통령과도 회담했습니다. 루스벨트는 해방지구를 통치하는 사실상의 프랑스 정부를 연합군이 지지할 것이며 드골이 그 수반으로 되는 것을 승인했습니다.
1944년 8월, 연합군은 프랑스 본토에서 동쪽을 향해 쾌진격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연합군 바로 뒤로 드골파의 행정관, 경찰, 보급장교, 심지어 이동 군법회의 등 여러 조직이 따라가면서 프랑스 국민 해방위원회와 샤를 드골의 이름으로 지방행정을 속속 접수했습니다. 이 보조기관이 받은 엄격하고도 명백한 명령은 해방된 프랑스의 도시와 농촌의 지배권이 공산계 레지스탕스 위원회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드골에게 있어 프랑스 공산당은 독일군 못지않게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그 세력은 특히 파리 레지스탕스 조직 속에 강해 이들은 약 2만 5천명의 무장 전투원을 갖고 있었습니다. 공산분자에 의한 파리 해방을 막기 위해 드골은 잇달아 자기 사람을 파리의 레지스탕스 내부로 침투시켰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당시 29세였던 자크 샤방-델마스 장군으로서 드골파의 최고위 군인이었습니다.
샤방-델마스는 좌익세력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후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어떠한 희생을 치르는 한이 있어도, 비록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도를 파괴하는 한이 있어도 공산주의자들은 봉기를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그 말 그대로였습니다.
* 샤방 델마스
파리의 지배권을 놓고 드골파와 끝까지 싸울 결의를 굳히고 있던 공산주의자들은 파리에서 민중봉기를 유발시키면 자기들의 정치적 입장이 강화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봉기가 성공을 거두면 - 그리고 그들은 응당 성공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대중적 환호의 물결을 탈 것이고 권력에 대한 드골의 야망을 끊어 버릴 수가 있으리라 라고....
파리 레지스탕스의 공산당 참모장 로제 비용은 드골이 “점령군의 선두에 서서 파리에 입성함으로써 온 국민이 감사하여 그 발목에 엎드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비용을 부채질하는 인물이 파리 공산당군을 지휘하는 롤 대령이었습니다.
롤 대령의 본명은 앙리 탕귀, 스페인 내란에 참전했고 그 내란에서 전사한 전우의 이름을 빌어 롤리라고 칭하고 있었습니다. 롤은 열성적인 공산당원으로서 그 용기와 당에 대한 충성심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였습니다. 지위로 보면 드골파의 롤에 해당하는 샤방-델마스와 마찬가지로 롤도 파리 해방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20만 명이 죽어도 파리 해방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 파리 해방 후 에펠탑 주위에 새카맣게 운집한 시민들
한편 동프로이센의 사령부에 있는 히틀러는 드골파든 공산당이든 누가 파리를 해방시켜도 아무런 가치가 없도록 파리를 철저히 파괴해 버릴 작정이었습니다. 히틀러는 이 파괴계획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 8월 초에 서부전선으로부터 한 사람의 장군을 사령부로 불렀습니다.
독일 국방군 총사령부의 한 장성이 평한 바로는 그는 “그 어떠한 가혹한 명령이라 할지라도 이의를 제기한 적이 없는” 장군이었습니다. 디트리히 폰 콜티츠 소장은 프로이센 군인 특유의 전체적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풍모를 가진 장군이었습니다. 그는 땅딸막한 키가 작은 사나이로 그 얼굴은 동료들의 표현을 빌면 “뚱뚱한 부처처럼 무표정”했지만 농촌의 촌장같이 쾌활한 데도 있었습니다.
* 콜티츠
그러나 콜티츠는 도시 파괴자라는 무시무시한 용명을 떨치고 있었습니다. 1940년 5월 중령이었던 콜티츠는 로테르담 중심부에 대한 궤멸적 포격을 명령했고 그 결과로 네델란드인 718명 사망, 7만 8000명이 부상했으며 많은 가옥이 파괴되었습니다. 그가 장군으로 승진하게 된 크리미아 반도의 세바스토폴 공방전이 끝난 후 세바스토폴을 철저히 파괴하기도 했습니다.
또 소련으로부터 퇴각하는 도상에서 콜티츠는 독일군의 최후미를 맡아 퇴각하는 지역을 초토화했습니다. 콜티츠는 자기에 대한 악평을 강하게 의식한 나머지 이렇게 투덜대었습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나는 언제나 독일군의 최후미를 맡게 되고 그때마다 퇴거하는 도시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는단 말이야.”
히틀러의 사령부에 당도한 그는 난생 처음으로 그곳에서 기괴한 경험을 했습니다. 7월 20일에 발생한 암살사건의 충격으로부터 아직 벗어나지 못한 히틀러는 콜티츠에게 암살사건과 관련하여 입에 거품을 물고 장광설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총통은 고열로 헛소리를 하는 사람 같은 흥분사태였다”라고 그는 나중에 회상했습니다.
* 영화에서...
이윽고 히틀러는 본론으로 들어갔습니다. “귀관은 파리로 가시오. 파리는 깡그리 파괴되어야 하오. 교회 하나, 기념비 하나라도 남겨두어선 안되오. 파괴된 도시에 전염병을 퍼뜨리기 위해 수도까지도 끊으시오.” 콜티츠는 후에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나는 그 때 내 앞에 앉은 이 사나이는 미친놈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이렇게 해서 히틀러에 대한 믿음을 버렸습니다. 그는 군인이 된 이래 처음으로 명령을 수행하려는 결의가 흔들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 영화에서...
파리에 도착한 콜티츠는 사령부가 설치된 호텔 창을 통하여 튀일르리 공원을 바라보며 자기가 빠져버린 딜레마에 빠져 공상 속에 빠져들곤 했습니다. 자기가 맹목적인 충성을 맹세한 사나이는 광인이요, 조국 독일의 대의는 파탄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그를 계속 괴롭혔습니다.
또한 ‘세계에서 손꼽히는 이 아름다운 도시를 파괴한다면 영원히 역사의 규탄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히틀러의 명령을 거역하면 고국에 있는 처자식의 생명이 위험해지고...’미칠 것 같았습니다.
* 영화에서...
딜레마에 빠져 있는 콜티츠에게 또 하나의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파리 경찰이 동요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8월 19일 잔뜩 흐린 토요일 아침, 시테 섬의 노트르담 대성당 맞은 편 파리 경찰본부에서 파리 경찰 해방위원회 내의 드골파 지도자 이브 바이에가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공화국과 샤를 드골의 이름으로 경찰국을 점거한다.” 사실 그 전날 공산당 지도부가 경찰국 점거를 비롯한 일련의 봉기 지령을 내렸으나 이를 탐지한 드골파가 선수를 친 것입니다. 드골파에 선수를 빼앗긴 공산당은 곧 파리 시내의 독일군 차량에 대한 매복 기습하는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하면서 파리 내전은 대규모로 번질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밤 늦게 호텔 발코니에 서 있던 콜티츠는 튀일르리 공원을 자전거를 타고 가로 질러가는 소녀를 바라 보고 있었습니다. 그 옆에는 18년 간이나 파리 주재 스웨덴 총영사를 지내고 있는 노르드링크가 서 있었습니다. 콜티츠와 사업 관계상 자주 만나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콜티츠는 파리 폭동에 화를 내고 있었습니다. “나도 저런 귀여운 파리 아가씨들을 죽게 하고 이 도시를 파괴해야 한다면 그것은 비극이다” 라고 덧붙였습니다.
성인이 된 이후 오랫동안 파리에서 살아온 노르드링크에게 있어서는 파리의 파괴란 생각도 못할 노릇이었습니다. 그는 온갖 힘을 다하여 콜티츠를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콜티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군인입니다. 명령을 받고 수행하면 그만이지요. 저것 보세요. 저 레지스탕스 놈들을 박살을 내버리겠어요.”면서 식식거렸습니다.
* 영화에서...
노르드링크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폭동에 의한 사상자 수습을 위하여 휴전을 제의하도록 요청했습니다. 히틀러의 파리 파괴 명령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반대의사가 있던 콜티츠는 이에 동의하고 전투정지를 승낙할 결의를 굳혔습니다.
노르드링크의 중재에 의하여 드골파와 공산당간에 의견충돌이 있었으나 독일군과의 휴전에 합의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휴전은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공산당의 군사지도자 롤 대령이 자기 동의 없이 휴전협정을 체결한 데 대하여 화를 내면서 군사행동을 재개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파리에 대한 지배권이었습니다. 드골파가 말렸으나 이미 전투는 재개되기 시작했습니다.
사령부에서 휴전협정이 파기되고 전투가 재개되었다는 사실을 접하고 화가 치밀대로 치밀어 오른 콜티츠에게 히틀러의 통수부장인 요들장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그는 파리를 파괴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을 콜티츠가 얼마나 수행하였는지 알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콜티츠는 파리시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이에 대한 뒤치다꺼리 때문에 파리 파괴를 위한 아무런 행동을 할 수 없었다고 둘러대었습니다. 하여튼 히틀러도 요들도 파리에서 폭동이 일어난 사실은 화인된 셈이었습니다. 통화를 끝내면서 요들은 파리의 파괴는 분명히 이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 파리에 입성한 전차부대
파리로부터의 폭동 뉴스는 아이젠하워에게도 당혹감을 안겨주었습니다. 레지스탕스가 파리에서 싸우고 있다는 뉴스에 접한 아이크는 후에 “나는 울화통이 터졌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들이 피하려고 했던 사태, 즉 우리 손이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고 잘못하면 전체 게획이 망가지는 사태가 초래될 것이기 때문이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아이크는 알지에에 있는 드골을 황급히 불렀습니다. 급히 비행기로 날아온 드골과 아이크의 회담이 열렸습니다. 이 회담에서 아이크는 드골에게 연합군은 파리를 봉쇄하여 꽉 가두어 두었다가 나중에 해방시킬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드골은 파리의 즉각적인 해방을 위하여 아이크에게 계획을 당장 재검토하도록 재촉하였는데 그 이유는 파리가 공산주의자들의 큰 위협에 놓여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 2차대전 당시 드골, 왼쪽은 아들
그러나 아이크는 파리 해방을 위하여 연합군이 시가전이라는 매우 곤란한 전투에 말려들 것을 우려하면서 드골의 제의를 일단 일소에 부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드골은 퇴짜를 맞았으나 내심은 결코 포기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드골이 기대하고 있는 장군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르클레르 장군이었습니다. 그는 파리에서 150km 이상 떨어진 아르장탕에서 프랑스 제2기갑사단을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지휘하에는 병사 1만6000명, 차량 2000대, 탱크 450대가 있었고 파리 진격명령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 르클레르 장군(앉아있는 사람)
레클레르가 비밀리에 드골로부터 파리진격을 준비하고 있으라는 지령을 받고 있는 사이에 파리에서는 롤 대령의 선동 하에 파리시민들이 대규모 시가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파리 시민들은 400개 이상의 바리케이트를 구축해 놓고 있었습니다. “바리케이트는 올가미처럼 독일군을 시시각각으로 포위하고 있었다” 당시 목격자의 말입니다.
시가전이 격화됨에 따라 레지스탕스는 착실히 승리를 거두기 시작했습니다. 신문사, 정부 청사, 프랑스 국가원수 관저인 엘리제궁 등 주요 건물들이 속속 레지스탕스의 수중에 들어왔습니다. 파리의 운명이 콜티츠의 손에 달려 있었다는 것은 파리를 위해 정말 다행스런 일이었습니다.
* 드골과 르클레르 장군
콜티츠는 파리를 파괴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을 한껏 무시하기로 내심으로 결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시가전이 격화되면 파리의 파괴는 아니더라도 자구책으로 그도 어쩔 수 없이 한바탕 전투를 벌여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콜티츠는 노르드링크를 만나 다른 손을 써보기로 했습니다. 사령부가 있는 무리스 호텔에서 콜티츠는 노르드링크에게 드골을 만나 협의를 하는 방안이 어떠냐는 뜻밖의 제안을 하게 됩니다. 노르드링크가 현재의 파리 사태를 진정시킬 수 있는 인물은 드골밖에 없다는 얘기에 콜티츠의 답변이었습니다. 이어서 콜티츠는 누군가가 독일군 전선을 통과하여 연합군 사령부까지 그를 찾으러 갈 수 있도록 정식 허가증을 내주겠다고 말했습니다.
* 영화에서...이브 몽땅
이어서 콜티츠는 윗도리 안주머니에서 파리를 파괴하라는 베를린으로부터의 명령서를 끄집어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변명을 대면서 명령을 거역하여 왔지만 이제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처지임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러니까 적인 연합군이 한시 바삐 파리로 들어와서 이 상황을 정리해야 하지 않겠냐는 취지였습니다.
통해 허가증을 손에 들고 독일군 사령부에서 나온 노르드링크는 같이 동행할 인물 4명을 긴급히 수배했습니다. 먼저 파리 레지스탕스의 회계담당인 알렉산드르 드생 팔레였고 두 번째는 1940년 당시 국방성에서 드골과 함께 근무한 적이 있던 장 로렝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에밀 보비 벤데르라는 인물로 스위스계 종이.펄프 회사의 파리 주재원이었으나 사실은 독일 첩보기관인 방어국의 정보원이었습니다.
* 영화에서...
그는 파리를 구하기 위한 이 공작을 돕기로 결심을 했는데 그의 지위로 인해 검문소 통과가 훨씬 쉬워질 터였습니다. 다섯 번째 인물은 아르누라고 칭하는 인물이었는데, 표면상으로는 적십자사의 대표로 되어 있었으나 영국 첩보기관의 국장 클로드 올리비에 대령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급작스러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62세의 라울 노르드링크가 갑자기 심장발작을 일으키는 바람에 이 공작이 실패로 돌아갈 위기에 처했던 것입니다. 급히 그의 핀치 히터로 뽑힌 사람은 그의 동생 롤프 노르드링크였는데, 다행히 머리글자와 성이 통행허가증의 것과 똑같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되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일행이 연합군 사령부에 도착한 것은 이튿날 아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레클레르 전차대가 파리를 향해 질주하고 있었습니다. 이 일에 불을 지른 사람은 이들 일행과 별도인 레지스탕스군이 보낸 두명의 밀사였습니다. 두명의 밀사는 애초에 연합군으로부터 무기를 얻어내기 위해 파리를 탈출하였으나 오는 도중에 목적을 바꾸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 파리에 입성하고 있는 탱크부대
둘 중의 한사람인 로제 갈로와 소령은 롤 대령의 참모장이었습니다. 또 한사람 모노 박사는 파리 지역의 위생검사관이자 레지스탕스의 의료 책임자였습니다. 갈로와와 모노는 레지스탕스 대원들의 무기 공급이 시급하다는 롤 대령의 요청에 의해 급히 파리를 빠져 나왔습니다. 두 사람은 파리 근교 어느 마을에서 숙박하면서 장시간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모노는 갈로와에게 봉기에 의해 파리를 장악하려는 롤의 음모에 가담하지 말도록 강력하게 설득했습니다.
그러기 보다는 연합군을 하루라도 빨리 파리에 오게 함으로써 독일군에 의한 파리의 파괴를 막아야한다는 논지였습니다. 갈로와는 모노의 이러한 주장에 설복 당하자 당장 목적을 변경했습니다. 롤 대령을 위해 무기를 입수하는 일을 팽개치고 연합군이 파리를 해방시키도록 이들을 만나 설득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이튿날 이들은 미군을 만나 패튼 장군에게 인도되었습니다. 패튼은 대충 이들의 의견을 듣고 자기가 결정할 사항이 아니라고 하면서 이들을 짚차에 실어 상급부대인 브래들리 사령부로 보냈습니다.
* 콜티츠, 친한 장군들과...뒷줄 왼편
그러나 최후의 결정은 아이크에 달려 있었습니다. 아이크도 파리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차차 알기 시작했습니다. 콜티츠가 파리를 파괴한 자로서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고 싶어하지 않듯이 아이크 역시 파리의 파괴를 방관했다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또한 드골의 얼굴을 계속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파리가 파괴된 이후 이 고집덩어리 장군을 만날 생각을 하니까 끔찍하기도 했고 한편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면 드골의 애국심에도 어느 정도 수긍이 가지 않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아이크는 워싱턴에 있는 마셜 육군 참모총장에게 파리해방에 대한 긍정적인 그의 생각을 타전했습니다.
* 영화에서...
마침 브래들리와 갈로와 일행이 도착하여 파리의 상황을 보고하자 아이크의 마지막 망설임은 사라졌습니다. 아이크는 후에 파리로 진격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 결단은 파리 시내의 자유 프랑스군의 행동에 의해 부득이 취해진 것이다...정보에 의하면 큰 전투는 없을 듯 싶었다. 1개사단 혹은 2개 사단이 밀고 들어가면 파리 해방은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래서 르클레르 사단의 파리 진격이 결정되었던 것입니다.
르클레르 휘하의 제2기갑사단의 파리 진격은 8월 23일 새벽에 개시되었습니다. 이들이 출발했을 무렵, 늦기는 했지만 롤프 노르드링크 일행이 브래들리 사령부에 나타났기 때문에 일은 더욱 다급해졌습니다. 노르드링크 일행의 보고로 콜티츠가 파리의 파괴를 더 이상 지연시킬 수 없게끔 되었다는 것이 명백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브래들리는 프랑스 기갑사단이 최고의 속도로 진격하도록 하고 이어 제4사단에게도 파리 진군의 명령을 내렸습니다. "저 독일 장군이 생각을 바꾸어 파리를 날려 버리면 큰일이다."라고 참모에게 외쳤습니다.
* 영화에서...
프랑스군은 엉덩이에 불이 나도록 진격하고 싶었으나 파리의 진격은 생각대로 쉽지 않았습니다. 콜티츠는 양심과 군인으로서의 의무감의 틈바구니에서 고뇌하고 있었습니다. 파리의 파괴는 피할지언정 파리 외곽에서는 가급적 총력을 다하여 방어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파리로 향하는 길목마다에서 양군은 치열한 접전을 사양하지 않았습니다. 하루 종일 전투는 계속되었습니다. 하여튼 프랑스군은 점차 파리에 가까워져 가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오후 9시22분 선봉에 선 전차 3대가 파리 중심부의 시청사 앞에 도착했습니다.
* 오른편에 <드골 만세, Vive De Gaulle>이라는 팻말이 보입니다
다음날 8월25일 르클레르 사단은 오전 8시부터 10시30분 사이에 파리에 입성했습니다. 그 바로 뒤로 미 제4보병사단이 뒤따랐습니다. 프랑스군의 도착과 함께 열광적인 축제가 막을 올렸습니다. 그날 오후 3시 경, 콜티츠는 파리 주둔 독일군의 항복문서에 서명했습니다.
1시간 쯤 후에 샤를 드골이 검은 호치키스 콘버터블을 타고 파리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환호하는 인파를 제치고 몽파르나스역에 있는 사령부로 천천히 걸어갔습니다.
사령부에는 르클레르와 참모들 그리고 롤 대령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다가 드골이 먼저 라이벌의 손을 잡았습니다. 드골의 승리였습니다. 파리해방과 더불어...
* 샹젤리제 대로를 걷고있는 드골
* 파리를 잿더미 직전에 구한 콜티츠 파리 방위사령관
상기한 바와 같이 콜티츠는 히틀러의 명령을 거부하면 가족이 총살당할 수 있는 위기에서 결국 그는 부하들을 설득하고 파리를 파괴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심지어 히틀러가 무려 9번이나 전화를 하며 그에게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라고 말했으나 콜티츠는 히틀러에게 모두 불태워버렸다고 허위보고까지 하였습니다. 또한 자신의 아내에게 전화를 하여 히틀러의 명령을 거부하겠다고 결정했을 때 아내는 '당신이 자랑스럽다.'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 항복문서에 조인하는 콜티츠
파리가 해방 된 후 항복 문서에 조인한 콜티츠는 이후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 회부되었으며 1947년에 석방되어 비로소 가족과 재회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1966년 독일의 도시 바덴바덴에서 숨을 거둡니다.
그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면서 나치에 대항했던 연합군과 프랑스 시민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모였습니다. 콜티츠는 파리를 구한 영웅으로 영원히 기억될 겁니다. 아래는 그가 남긴 말입니다.
"히틀러의 배신자가 될지언정 인류의 죄인이 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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