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부처이니, 마음을 잘 써야 한다
‘마음이 부처(心卽是佛)’라는 말은 누구나 ‘자기 마음 안에 자기 부처가 있다’는 의미이다. 마음이 없는 사람이 없으니, 불성(佛性)이 없는 사람도 없다. 『열반경』에는 “일체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했으며,『화엄경』에도 “마음과 부처, 그리고 중생은 차별이 없다”고 하였다. 다만 이 가르침을 깨닫고, 깨닫지 못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부처이면서 부처임을 모르면 중생이고, 부처임을 알면 부처이다. 마음이 부처임을 믿어서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지 말아야 한다.
부처님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며, 모든 중생이 본래 제도 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기 위해 오셨다. 모든 진리가 자기 속에 구비되어 있는데도 자기 밖에서 진리를 구하려는 것은 우물 밖에서 물을 구하려는 것과 같다. 모든 생명이 본래 제도되어 있음을 바로 깨달아 모든 생명을 부처님으로 존중해야 한다.
양나라 무제 때, 비승비속(非僧非俗)으로 살았던 부대사(傅大士)는 이렇게 노래했다.
야야포불면(夜夜抱佛眠) 밤마다 부처를 안고 자고
조조환공기(朝朝還共起) 아침마다 함께 일어나네.
기좌진상수(起坐鎭常隨) 앉으나 서나 늘 따라 다니고
어묵동거지(語默同居止) 말할 때나 안 할 때나 함께 있네.
섬호불상리(纖毫不相離) 털끝만큼도 서로 떨어지지 않으니
여신영상사(如身影相似) 몸에 그림자 따르듯 하는구나.
욕식불거처(欲識佛去處) 부처가 간 곳을 알고자 하는가?
지저어성시(只這語聲是) 단지 이 말소리 나오는 곳이 부처라네.
잠잘 때 잠드는 주인공이 바로 부처이고, 일어날 때 일어나는 주인공이 바로 부처이다. 앉거나 서거나 일체 행동을 일으키는 장본인이 바로 부처인 것이다. 누가 내 이름을 부르면 듣고 대답하는데, 듣고 대답하는 거기에 부처가 있다. 이 밖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행복한 삶을 위해 여러 사람들과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는데, 상대를 부처로 대하느냐 대하지 않느냐에 따라 삶의 자세가 크게 달라진다. 상대를 부처로 대할 때는 고개 숙이는 것이 상대에 대한 배려가 되어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하지만, 부처로 대하지 않을 때는 고개 숙이는 것이 배려가 아닌 패배로 받아들여져 절대 고개 숙이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갈등을 풀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게 된다.
퀘벡에 남북으로 뻗은 계곡이 있는데, 서쪽 산등성이에는 소나무·측백나무·당광나무 등 다양한 나무들이 우거져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동쪽 산등성이에는 히말라야 삼나무만 있다. 이유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 때, 파경 직전이던 부부가 과거 연애시절의 애틋한 감정을 되살리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가 이 수수께끼를 풀었다.
이 부부가 계곡에 도착했더니, 마침 하얀 눈이 펑펑 쏟아졌다. 부부는 흩날리는 눈보라를 지켜보다가 특이한 광경을 목격했다. 바람의 방향 때문인지 모르지만, 동쪽이 서쪽보다 훨씬 더 많은 눈이 쌓이고 있었다. 잠시 후 동쪽의 히말라야 삼나무 위에 쌓였던 많은 눈이 나뭇가지를 압박하기 시작했는데, 탄력이 좋은 삼나무 가지가 아래로 휘어지더니 나뭇가지 위에 쌓인 눈들을 아래로 와르르 쏟아냈다. 눈이 어느 정도 쌓이면 가지가 휘어졌고, 이어서 눈 더미는 땅으로 떨어졌다.
이런 현상을 반복하면서 히말라야 삼나무는 세찬 눈보라에도 멀쩡하게 버티고 있었지만, 탄력이 없는 다른 나무 가지들은 눈덩이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뚝뚝 부러졌다. 이 모습을 바라보던 아내가 남편에게 말했다.
"예전에는 동쪽 산등성이에도 여러 나무들이 함께 우거져 있었을 거예요. 다만 가지를 굽힐 줄 몰랐기 때문에 눈보라에 쓰러져 하나 둘 사라진 거겠죠?"
아내의 말을 듣고는 울컥해진 남편이 아내를 꼭 껴안았다. 부부는 그동안 함께 살아오면서 상대에게 숙이는 것이 마치 자기가 잘못한 것처럼 느껴졌거나, 자존심을 버리고 비굴하게 행동하는 것처럼 느껴졌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눈보라 속의 나무들을 보며, 그동안 상대에게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던 것을 반성하게 되었다. 내가 먼저 고개를 숙이는 것이 결코 패배가 아니며, 상대를 위한 사랑스런 배려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이해하며 배려해야 하는데, 저마다 자기가 살아온 습관대로 상대를 이해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갈등과 오해가 생긴다. 옛날 강원도 건봉사는 늘 2, 3백 명의 대중이 수행하던 큰 절이었다. 금강산 가는 도중에 있어서 많은 스님들이 건봉사에서 쉬어가다 보니, 늘 식량을 조달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조실스님과 주지스님은 모든 스님을 수용할 수 없게 되자, 법거량을 통과한 객스님만 머물게 하였다.
어느 날, 한 객스님이 찾아왔다. 주지스님이 피곤하다면서 총무스님에게 대신 법거량을 하게 했다. 먼저 객스님이 손가락 하나를 들어보이자, 총무스님은 손가락 둘을 들어보였다. 객스님이 다시 손가락 셋을 들어보이자, 총무스님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랬더니 갑자기 객스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총무스님에게 절을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제가 오늘 법거량에서 졌으니 떠나겠습니다.”
객스님은 주지스님 방으로 가서 이렇게 말했다.
“주지스님, 이 산중에는 칼날같이 안목이 트여 있는 스님들만 계시는군요?”
“법거량에서 졌습니까?”
“제가 불법승 삼보의 불(佛)자를 들어 보이기 위해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였더니, 총무스님이 불(佛)만 있는 게 아니라 법(法)도 있다는 뜻으로 손가락 둘을 들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불(佛)과 법(法)만 있는 게 아니고 승(僧)도 있다는 뜻으로 손가락 셋을 들어보였더니, 총무스님은 불법승이 다 하나라는 뜻으로 주먹을 쥐어보였습니다. 제가 더 드릴 말씀이 없어서 절을 하고 나왔습니다.”
잠시 후, 총무스님이 주지스님에게 오자 크게 칭찬했다. 그런데 총무스님은 기뻐하기는커녕 몹시 화가 난 듯 했다. 화가 난 연유를 묻자, 총무스님은 객스님이 자신을 보고 놀렸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 스님은 제가 한 쪽 눈이 멀었다고 놀리며, 손가락 하나를 들어보였습니다.”
“그런데 왜 손가락 둘을 들어보였느냐?”
“그것은 내 눈은 하나지만, 자네는 눈이 둘이라는 뜻으로 한 것입니다. 그러자 다시 자기와 제 눈을 합해 셋이라며 손가락 셋을 들어보였습니다. 그래서 화가 나서 주먹을 쥐고 때리려고 했더니, 그만 겁이 났는지 떠나버렸습니다.”
조실스님이 주지스님에게 객스님은 어떻게 됐느냐고 묻자,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조실스님은 총무스님을 불러 크게 꾸짖었다. 이와 같이 법을 듣는 대중들은 저마다 자기 식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묻고 또 물어서라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상대 입장을 배려하며 돕는 삶이 바로 보살행이다.
백혈병에 걸린 아들을 둔 미혼모가 평소 소방관이 꿈이었던 아들을 위해 무작정 소방서를 찾아가 사연을 말하고는 이렇게 부탁했다.
“출동할 때 한 번만 아들을 소방차에 태워주세요.”
소방대장은 그 아이 체격에 맞도록 작은 크기의 소방복을 준비하고, 일일 소방관으로 위촉하여 화재현장으로 함께 출동했다. 이 사연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는데, 백혈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던 그 아이는 사망선고일보다 3개월이나 더 살았다. 죽음을 앞둔 하루 전, 병원 간호사가 소방서에 전화를 걸어 부탁했다.
“소방관 1명이라도 아이의 임종을 함께 해주세요.”
소방대장은 정복을 입은 모든 대원들과 함께 찾아왔다. 병원 창밖에 도열한 대원들이 ‘우리의 동료를 보낸다’는 의미로 거수경례를 올렸다. “저도 소방대원이죠?”라고 묻는 아이에게 “당신은 우리의 영원한 동료입니다”라고 말했다. 아이는 웃으며 눈을 감았다.
상대를 배려하면서 베풀며 산다면 지금 이대로도 좋은 세상이 될 텐데, 너무 정신없이 경쟁하며 살다보니 배려하는 마음을 내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옳고 그름, 빠르고 느림, 좋고 나쁨 등 끊임없이 분별하며 살다보니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 분별심만 내려놓아도 지금 있는 이대로 자유롭고 편안해진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어느 절의 주지스님이 마당 한 가운데 큰 원을 그려놓고, 동자승을 부르더니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마을을 다녀왔을 때, 네가 이 원안에 있으면 오늘 하루 굶어야 할 것이고, 원밖에 있으면 이 절에서 내쫓을 것이다.”
주지 스님이 돌아와 보니, 동자승은 빗자루로 원을 지워버렸다. 원을 없애자, 동자승은 원안이나 원밖에 머문 것이 아니었다. 우리 마음속에는 이러한 원을 하나씩 가지고 있을 지도 모른다. 물질, 명예, 욕심 등 여러 원들을 가지고 살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가 있기 마련이다. 이제 이 원들을 없애서 원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마음을 짓누르는 온갖 속박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