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부르지 못한 이름들이 남아 있다 [창비 주간 논평]
김 동 현(제주민예총 이사장)
“4월의 섬바람은/뼛속으로 스며드는 게 아니라/뼛속에서 시작되는 것”(이종형 「바람의 집」)이라고 했다. 하지만 제주4·3은 4월의 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수많은 죽음들은 어느해 보다 추웠던 그해 겨울에 일어난 비극이었다. 참으로 모진 겨울이었다. 1948년 11월로 접어들자 토벌은 초토화 작전으로 바뀌었다. 1948년 11월 중순부터 1949년 2월까지 4개월 동안 제주 중산간마을 대부분이 전소됐다. 토벌대의 강경진압은 무차별적이었다. 그 4개월 동안 희생당한 사람들이 전체 희생자 중 80%에 달한다. 열다섯살 이하 어린이 희생자 중에서 76.5%가, 61세 이상 희생자 중 76.6%가 이 기간에 희생되었다(『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어린이와 노인들의 희생이 많았다는 사실은 토벌이 대상을 가리지 않는 학살이었음을 잘 말해준다. 1949년 1월 3일 제주시 도평리, 1월 5일 화북 곤을동, 1월 12일 남원 의귀리, 1월 17일 북촌, 1월 22일 서귀포 정방폭포. 이 기간에 벌어진 학살은 제주도 전역에서 자행되었다. 1월 제주의 겨울밤은 죽은 자들을 애도하는 향냄새가 섬에 가득하다. 오늘은 이 마을에서, 내일은 저 마을에서, 찔려 죽고 불타 죽은 부모와 미처 피어나지 못한 아이의 울음을 기억하는 슬픔이 가득하다.
그해 1월 무장대로 위장해서 주민들을 속이고, 사망한 토벌대의 원한을 갚는다고 불태우고, 도피자 가족이라고 폭포에서 밀어 죽였다. 집단 학살로 죽은 사람만 800명이 넘는다. 크고 작은 학살까지 합치면 죽음은 수를 헤아릴 수 없다. 1949년 1월 4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학살당한 북촌마을 이야기는 소설 『순이삼촌』의 소재가 되었다. 겨울이면 당시 처참한 학살의 현장이었던 너분숭이에는 하얀 수선화가 핀다. 너분숭이 애기무덤 옆에 수선화를 심은 이는 4·3을 오랫동안 노래한 김경훈 시인이다. 그는 이 처참한 죽음을 아무런 이유 없는 죽음이 아니라 죽어서 이유가 없어져버린 죽음이라고 말한다.
1월 제주의 겨울바람은 불타 죽고, 찔려 죽고, 찢겨 죽은 이들이 내지르는 비명이다. 남녘의 겨울이 유달리 매서운 이유도, 4월이 넘어서도 “뼛속에서 시작되는” 바람이 부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4월 3일 항쟁은 참혹한 보복으로 돌아왔다. 1947년 3·1절 발포에 항의해 총파업으로 맞섰던 제주였다. ‘탄압이면 항쟁이다’라는 봉기 당시의 문구는 그들의 저항이 지극히 당연한 선택이었음을 보여준다. 항쟁은 마땅하고 옳은 일이었다. 해방된 조선을 점령한 미군을 거부하고 친일 잔재의 청산을 외치며 폭력을 사유화한 권력에 맞서는 것은 마땅한 수순이었다. 다만 그들이 간과한 것은 미국의 존재였다. 새로운 제국으로 등장한 미국에 대항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예측하지 못했다. 2년 전 일본에서 만났던 김시종 시인은 무장봉기의 결과가 참혹한 학살로 귀결된 사실에 마음 아파했다. 74년이 지났지만 일본으로 도피한 자신의 비겁을 오랜 기간 용서할 수 없었던 시인의 고백이었다.
제주4·3특별법이 개정되면서 희생자 보상이 본격화되고 있다.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그리고 보상까지 국내 과거사문제 해결의 모범사례로 제주4·3에 주목하기도 한다. 과거에 비하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제대로 된 재판도 없이 형을 선고받고 육지 형무소로 끌려갔던 수형인들의 재심 청구가 받아들여지고 무죄 선고도 내려지고 있다. 법원의 무죄 판결이 내려지자 ‘이제 죄 없수다’라는 현수막을 들고 눈물을 흘리는 어르신들을 보면서 ‘이제는 정말 봄이 오는가’라는 기대도 한다. 하지만 그 환호의 뒤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전한 금기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자유민주주의 질서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반공주의다. ‘죄 없음’을 인정하는 사법적 판단의 기준은 그들의 행동이 ‘자유민주주의’에 반하는 행위를 저지르지 않은, 순수한 희생자에 한하는 경우에만 해당된다. 그것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와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심각한 훼손을 초래한 자들’이 아닌 그야말로 무고한 희생자들에게 내려지는 무죄 선고다. ‘죄 없는 양민’이어야만 받을 수 있는 무죄 선고다. 지극히 당연한 무죄를 선고받기까지 70여년이 걸렸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막힌 일이기에 그 자체에 감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무고한 양민’으로만 기억하는 것은 당시의 다양한 욕망과 열정을 지워버린다. 4·3항쟁 이전에 있었던 3·10총파업에는 제주도민 대다수가 참여했다. 민간인뿐만 아니라 도청 공무원도 함께 했다. 3·1절 발포사건의 책임자를 처벌하라는 제주도민들의 당연한 요구에 미군정과 경찰은 폭력으로 응수했다. 체포하고, 고문하고, 죽였다. 항쟁 당시 조천중학원 학생들이 입산을 한 이유도 자신의 친구였던 김용철이 고문 끝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해방이 되고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시대적 욕망 또한 만만치 않았다. 4·3항쟁에 참여했다 일본으로 밀항했던 김민주는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항쟁의 이유를 ‘인민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라고 말하기도 했다. ‘인민’이라는 말만 들으면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 해방기 ‘인민’이라는 용어는 지금으로 치면 시민, 국민이라는 말과 다름없다. 말 그대로 피플people, 시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고자 했던 그들의 욕망을 ‘무고한 양민’이라는 표백된 언어에 담을 수 있을 것인가.
4·3 70주년 추념식이 있었던 2018년, 문재인대통령은 제주를 찾아 “이념이라는 것을 알지 못해도 도둑 없고, 거지 없고, 대문도 없이 함께 행복할 수 있었던 죄 없는 양민들이 영문도 모른 채 학살을 당했다”라고 말했다. ‘이념을 알지 못했던, 죄 없는 양민들’이라는 말은 몰역사적인 용어다. 그들을 그렇게 호명할 때 역사적 주체로서의 인간 존재는 사라진다. 제주 사람들은 ‘이념이라는 것을 알지 못해’도 ‘함께 행복할 수 있었던’ 몰역사적 존재가 아니었다. 착취와 수탈을 일삼았던 중앙권력에 맞서 상호부조와 호혜와 환대의 전통 속에서 공동체를 영위해 갔던 능동적인 존재들이자, 역사의 주체였다. 역사적 진실은 법의 외부에 있다. 법이 기억하지 못하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면 ‘무고한 양민’이라는 박제된 언어는 이제 그만 버려야 한다. 기억은 안전하게 관리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불편하지만 응시하고, 대면해야 하는, 끝내 버리지 말아야 하는 질문이어야 한다.
겨울, 차가운 바람이 제주 섬에 가득하다. 아직 부르지 못한 이름들이 겨울산 어느 구비에 있을 것이다. 눈 쌓인 한라산의 설경만큼이나 환한 기억들이 빛나는 오늘이다.
김동현 / 문학평론가, 제주민예총 이사장
2022.1.19.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