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이진화 | 날짜 : 11-12-23 00:36 조회 : 2066 |
| | | 팥 이야기
이진화
동지가 가까워지면서 햇팥 생각이 나기에 한 되를 샀다. 한 줌 쥐어보니 붉고 투명한 느낌의 팥알이 딱 알맞은 크기와 감촉으로 손에 잡힌다. 자주색 구슬 같이 예쁘고 씨눈이 옹골차게 살아있는 팥은 쌀, 보리, 콩과는 좀 색다른 느낌을 주는 곡식이다. 팥밥이나 팥시루떡도 그렇고, 동지 팥죽이나 단팥죽도 특별한 먹을거리다.
도심을 걷다가 ‘단팥죽‘이라고 쓴 가게를 보면 문득 문을 밀고 들어가고 싶다. 예닐곱 살 무렵부터 어머니를 따라 외출했다가 사먹곤 하던 단팥죽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따뜻하고 달고 부드러운 팥죽 속에서 쫀득한 새알심을 찾아 입에 넣으면 계피향이 살짝 코끝을 스쳤다. 겨울 빵집에는 예외 없이 물주전자를 올린 무쇠난로가 달아오르고 유리창에는 보얗게 김이 서렸다. 추위에 종종 걸음을 치는 사람들이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빵집 선반에는 소보로, 팥앙금 빵, 크림빵, 도넛이 진열되어 있었다.
단팥죽을 먹을 때는 셋이나 되던 남동생들이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고 나와 어머니만 정지된 장면 속에 남아있다. 아마도 사남매를 키우느라 늘 애쓰시던 어머니의 짧은 외출에 큰 딸인 나만 동행을 했을 것이다. 이백 포기가 넘는 김장을 땅에 묻어두고 나서 피로와 허기를 시장가는 길에 잠시 덜어내던 어머니의 작은 비밀이 단팥죽 속에 녹아 있기 때문인지 단시간의 외출이 주는 휴식과 미식의 추억이 단팥죽과 연결되어 있다.
가끔 팥밥을 먹고 싶을 때가 있다. 콩과 달리 팥은 삶아서 밥을 지어야 한다. 쌀과 함께 넣어 밥을 지었다가는 딱딱한 팥을 씹게 된다. 친척 중에 공부만 하다가 결혼한 신부가 신랑에게 날팥으로 팥밥을 지어주었는데 신랑은 아무 말 않고 밥을 물에 말아 쌀 일듯이 일어서 먹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잘 무르지는 않지만 푹 삶긴 팥은 콩보다 부드러워 앙금을 만들기 쉽다. 자줏빛의 똘똘하게 생긴 모양과 따뜻하고 단 성질의 팥을 보면 마치 차가워 보여도 반듯하고 부드러운 심성을 가진 아가씨가 연상이 된다.
팥은 꼭 먹는 데만 쓰였던 것이 아니다. 운동회 날을 앞두고 팥주머니를 몇 개씩 가져 오라는 숙제가 있었다. 팥주머니를 던져서 장대에 높이 매달린 박을 터뜨리는 놀이는 운동회의 꽃이었다. 어머니는 동생들을 재우고 밤새 알록달록한 꽃무늬 헝겊으로 공 모양의 팥주머니를 만들어 주셨다. 어머니의 반짇고리는 여러 가지 색의 실과 단추, 헝겊으로 가득한 보물창고였다. 헝겊 조각들은 조각보가 되기도 하고 쉽게 해지는 옷에 덧대어 꿰매는 재료가 되었다. 색깔과 모양이 유난히 예쁜 나의 팥주머니는 헝겊을 알뜰하게 모으고 솜씨가 뛰어난 어머니 덕분이었다. 팥주머니에는 팥을 너무 많이 넣어도 안 되고 적게 넣어도 안 되고 손에 쥐기 좋을 만큼 알맞게 넣어야 한다.
과제물 외에 여유 있게 만든 팥주머니로 던지기 놀이를 하곤 했는데 골목에서 온 동네 아이들과 모여 떠들썩하게 놀던 기억이 난다. 팥주머니 던지기는 피구와 규칙이 비슷하지만 맞으면 아프고 위협적인 고무공보다는 부드러우면서도 착 감기는 느낌이 정겨웠다. 팥주머니를 피하여 소리를 지르며 반대 방향으로 달리던 아이들과 민첩하고 힘있게 팥주머니를 날리던 동네 친구의 상기된 얼굴이 떠오른다. 나는 그다지 놀이를 잘 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팥주머니 던지기, 고무줄놀이, 공기놀이, 줄넘기, 사방치기와 같은 골목놀이에 빠지지 않고 끼었다. 막내 동생을 업고 나왔다 내려놓고 놀이에 몰두하다가 겨우 걸음마를 하던 동생을 잃어버려서 울고불고 하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떨린다.
팥을 씻어 슬로우 쿠커에 안쳐 놓았더니 구수하게 팥 삶는 냄새가 온 집안에 퍼지고 있다. 따끈한 팥물을 한 잔 떠마셨다. 시장기도 가시고 속이 훈훈하다. 팥이 푹 퍼지면 설탕과 찰떡을 넣어 주말에만 모이는 식구들에게 단팥죽을 만들어주려고 한다. 내일 우리집에 오신다는 어머니 몫의 팥죽을 남겨놓고 찜질용 팥주머니도 만들어 드릴 계획이다. 팥주머니를 넓적하게 만들어서 전자레인지에 데워 어깨, 배, 무릎에 대고 있으면 온몸이 따뜻해지고 치료 효과도 있다. 어머니가 달고 부드러운 맛의 단팥죽을 드시고 따끈한 팥주머니로 찜질을 하면 고단하던 시절의 짧은 휴식과 위로를 다시금 누리실 수 있을까. 팥 한 움큼이 주는 행복으로 어머니와 나의 겨울이 따스하게 깊어간다. |
| 강승택 | 11-12-23 00:57 | | 동짓날 저녁 읽는 '팥 이야기'가 잊고 있던 유년의 기억을 새삼 떠올리게 합니다. 날팥으로 밥을 지은 신부도 예쁘지만 쌀 일듯이 물에 말아먹은 신랑의 속깊음에도 미소가 지어지네요. 이 부부, 지금 잘살고 있겠지요? | |
| | 이진화 | 11-12-23 13:52 | | 강승택 선생님, 팥죽을 만들며 팥에 대해서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해보았습니다. 날팥밥을 만든 신부는 그 후에 요리사가 되었고. 속깊은 신랑은 첨단 분야의 전문가로 성공하였고, 세 자녀를 훌륭하게 키워냈답니다. ^^ | |
| | 김용순 | 11-12-23 09:24 | | 우리도 그저께 마트에서 팥과 찹쌀가루를 사다 팥죽을 쑤었습니다. 이전에는 만들어 먹은 기억이 별로 없는데, 이제는 시간이 넉넉해서인지 시작하네요. 둘이서 새알을 비볐습니다. 너무 많이 쑤어서 몇날 며칠을 먹어야 할지.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추위에 감기 조심하세요. | |
| | 이진화 | 11-12-23 13:57 | | 김용순 선생님, 새알심은 먹는 갯수 만큼 나이가 든다는데 잘 세서 드셨겠지요? 두 분이 앉아서 찹쌀 새알심을 빚고 팥죽을 끓여 드시는 장면이 그려집니다. 풍성하고 즐거운 연말연시 보내세요.^^ | |
| | 임재문 | 11-12-23 13:47 | | 동지 팥죽을 쑤어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찹쌀로 갈아만든 새알심이 어찌 그리 혀끝을 자극하는지 팥에 대한 추억이 담긴 글 잘 읽고 갑니다. 이진화 선생님 !!!! 메리 크리스마스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ㅎㅎㅎ | |
| | 이진화 | 11-12-23 14:02 | | 임재문 선생님도 팥죽 맛있게 드셨군요. 사모님의 손길만큼이나 따스하고 구수한 팥죽이 별미였겠어요. 동지도 지났으니 행복한 연말연시 보내시고 메리 크리스마스~!^^ | |
| | 윤행원 | 11-12-23 20:22 | | 자주색 팥 이야기를 읽으니 입안에 춤이 흥건이 고입니다. 단팥죽 통조림을 마트에서 사서 냉장고에 있는 어름을 믹스기에 갈아서 얼음단팥죽을 만들어 먹던 생각이 납니다. 입에 감기는 시원하고 달콤한 맛이란...둘이 먹다 한 사람이 도망을 가도 모를 지경입니다..하하... | |
| | 이진화 | 11-12-24 00:11 | | 윤행원 선생님, 겨울에도 시원한 얼음 단팥죽을 즐기시나 봅니다. 오늘 밤에는 빙수 같은 눈이 쌓여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꿈꾸게 되네요. 행복한 성탄절과 연말 연시 보내세요. 메리 크리스마스~!^^ | |
| | 한동희 | 11-12-23 23:06 | | 어제가 동지라는 소리를 밖에 나가서 듣고 식구들한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답니다. 집안에 앉아 팥죽을 끓여놓고 식구들이나 기다렸으면 오죽이나 좋았을까... 친구같은 엄마가 곁에 계시니 부럽군요. 어머니가 만들어주시던 팥죽이 생각나는 밤이에요. 눈오는데 한참을 가야겠군요. 나는 집에 들어와 수필 읽고 있는데... | |
| | 이진화 | 11-12-24 00:28 | | 모처럼 고양시 문인협회 출판기념회에서 뵈니 반가웠습니다. 한 선생님께서 오시니 분위기가 흥겹고 화기애애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눈이 펑펑 내려서 차들이 엉금 엉금 기었지만 무사히 잘 돌아왔습니다. 즐거운 성탄절 보내시고 내년에는 더욱 기쁜 일들이 많으시길 빕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 |
| | 박원명화 | 11-12-24 23:36 | | 팥죽이야기에 옛날의 정감이 되살아납니다. 본래 동짓날 팥죽는 먹어야 하는 이유가 있답니다. 귀신을 쫓기 위함이란 말도 있지만 본시 팥은 사람의 몸안의 찬기를 거두어내고 따뜻하게 데워주는 역할을 한다고 하네요. 그래서 겨울엔 팥죽을 먹어야 한답니다. 아~ 맛난 팥죽 생각 절로 납니다. | |
| | 이진화 | 11-12-25 23:10 | | 박원명화 선생님, 팥이 대표적으로 따뜻한 음식이라 한의원에서 찜질용 팥주머니를 권하더군요. 아픈 곳에 대고 있으면 혈액순환이 잘 되어 통증이 가시고 몸이 찬 여성들에게 좋다고 하네요. 뭐니뭐니 해도 팥 하면 팥죽이 최고, 강추위가 오니 다시 팥죽 생각이 납니다.^^ | |
| | 정진철 | 11-12-26 00:18 | | 팥주머니가 오재미라는것 아닌가요? 어떻든 동짓날 핕죽 잘 쑤는집에서 식구수대로 사다가 참 맛있게 먹었지요 이선생님 메리크리스마스& 해피뉴이어!! | |
| | 이진화 | 11-12-26 00:31 | | 네, 맞습니다. 어릴 때는 그렇게 불렀는데 팥주머니가 우리말이더군요. 정진철 선생님, 새해에는 날마다 웃음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 | |
| | 임병식 | 11-12-26 07:33 | | 엊그제 동지에는 이웃에 사는 선배님이 집에서 쑨 동주죽을 손수 들고 몸둘바를 몰랐습니다. 팥이야기를 읽으니 그 일이 먼저 스치는군요. 왜 오자미에는 팥을 넣었을까요? 쌀도 있고, 보리도 있고, 다른 콩도 있는데... 문득 그런 의문이 스치네요. 성탄절 잘 보냈으리라 믿습니다.^^ . | |
| | 이진화 | 11-12-26 12:00 | | 네, 덕분에 잘 보냈습니다. 아마도 팥주머니는 조상들의 지혜가 축적되어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물론 콩주머니도 있고 종이 장판에 콩댐을 하던 기억이 납니다. 여러 차례 콩댐을 하면 비릿한 냄새가 나지만 장판이 황금색으로 빛이 났지요. 성질이 찬 메밀껍질로 베개를 만들지만 유독 갓난아기에게는 좁쌀로 베개를 만들어 주시던 외할머니 생각이 납니다. 부귀, 영화, 강녕, 생육과 번성의 기원을 담아 오방주머니에 오곡을 담아 신부집에 보내는 풍습도 있다고 들었는데 그냥 알고만 있을까 합니다. 많은 것을 생략하고 간소하게 하기로 했거든요. 추워지는 날씨에 건강하시고 늘 평안하시길 빕니다.^^ | |
| | 박영자 | 11-12-28 08:16 | | 모두들 팥죽을 쑤거나 사서라도 드셨군요. 이 '독거노인'은 이제 팥죽같은 건 관심도 없고 먹지도 못했네요. 동지 팥죽을 왜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같이 먹을 사람이 없으면 모두가 무의미 해 집니다. 전에는 요리책도 자주 들여다 보고 오늘의 요리 프로도 열심히 보았지만 이제 그런 장면은 그냥 꺼 버립니다. 나혼자 잘 먹고 살겠다고 하는 것같은 죄책감도 그렇고 더 맛있는 것 해 주지 못한 후회도 한몫합니다. 이진화 선생님 함께 사시는 분과 후회없도록 맛있는 것 많이 해서 드세요. 글 잘 읽고 갑니다. | |
| | 이진화 | 11-12-28 21:34 | | 박영자 선생님, 그러셨군요. 말씀을 들으니 마음이 짠합니다. 늘 재미있고 유머 넘치는 선생님께서 그런 이유로 팥죽을 안 드셨다니요. 저도 혼자 계시는 어머니 생각이 나서 팥죽을 끓였습니다. 2011년 잘 보내시고 건강하고 평안한 새해 맞으시길 기원합니다. | |
| | 김자인 | 11-12-28 22:23 | | 선생님 글을 읽다가 보니 콩주머니 팥주머니 던지던 예날 생각도 나고 갑자기 단판죽이 먹고싶어집니다. 늘 바삐 사시면서 팥죽도 만드시고, 좋은 정보도 주셨네요. 팥죽 저도 한 번 만들어야겠습니다. 어머니를 위해 팥죽을 만드시는 선생님의 따뜻함이 제게도 느껴집니다. 팥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 |
| | 이진화 | 11-12-29 00:20 | | 음식솜씨는 뭐니뭐니 해도 김자인 선생님이죠. 발을 다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진 덕에 김장도 갖가지로 하고 팥죽도 쑤어 먹었네요. 중요하고 급하다고 생각하는 일보다 어쩌면 순위가 밀렸던 일들이 행복과 삶의 질을 높이는 게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즐겁고 기쁜 순간 미루지 마시고 날마다 행복한 새해 보내시길 바랍니다.^^ | |
| | 임병문 | 11-12-29 10:15 | | 동지팥죽, 유년시절의 외갓집과 그 겨울의 할머니 생각이 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항시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더불어 격려의 말씀 고맙습니다. | |
| | 이진화 | 11-12-30 00:49 | | 임병문 선생님, 역시 음식과 추억은 밀접한 관계가 있더군요. 저에게도 동지팥죽과 외가는 언제나 편안하고 그리운 이름입니다. 올해 작가회를 통해 보여주신 열정과 우정에 감사드립니다. 새해에도 모든 소원 이루시고 건필하소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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