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4년 4월 15일은 기념할 만한 날이다. 1789년을 프랑스 대혁명으로 기억하듯 말이다. 그렇다면 1874년 4월 15일 과연 무슨 일이 발생한 것일까. 프랑스 파리는 예술의 도시이다. 당시 예술계를 프랑스가 주도한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특히 미술분야에서는 단연 선두주자였다. 그런 프랑스 파리에서 전시회가 열렸다. 당시 프랑스를 주도하던 살롱전이 아닌 비주류들의 전시회이다. 훗날 사람들은 그날 전시회를 인상주의파들의 첫 전시회라고 부른다.
현대인들은 인상주의 화풍의 화가들에 대해 무언가 죄스러운 마음이 있는 듯하다. 뭔가 기존 질서 그리고 당시 기득권세력에 저항해서 피를 흘리며 새로운 것을 이루어내는 이른바 혁명가적 정신의 소유자에 대한 죄송스러움이라고 할까. 마치 프랑스 대혁명을 상대하듯 그렇게 생각하고 대하는 경향이 짙다. 당시 프랑스 파리에서 미술화가들의 최고 최대의 등용문은 바로 살롱전이었다. 1667년부터 시작됐으니 역사도 길었고 당대 최고의 화가들은 모두 살롱전 입상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말해 파리에서 행세를 하려면 살롱전 입상은 기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인상주의파를 탄생하는데 주도적이었다고 알려진 마네나 모네 등도 당연히 이런 살롱전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뿐 아니라 화가였다면 살롱전 입선이 최대의 목표였을 것이다.
에두아르 마네나 클로드 모네의 화풍이 어느날 영감처럼 그들의 뇌리를 스쳤고 그들이 그런 분위기를 화폭에 담았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은 당시 현실을 감안하지 않은 것이다. 마네나 모네 이전에 이미 인상주의 화풍을 시도했고 그런 방향으로 시선을 모은 화가들이 여럿 있었다.영국의 윌리엄 터너나 존 컨스터블 그리고 독일의 낭만주의의 효시인 프리드리히 등도 인상주의파 화가들의 앞날에 조그만 길을 놓아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프랑스 내부에서도 영국과 독일의 화가들과 맥을 같이 하는 화가가 존재했다. 모네의 스승인 유진 부댕이 대표적이다. 모네는 부댕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며 그의 화풍을 배워갔다.
인상주의 화풍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마네가 살롱전을 기피하고 새로운 화풍수립을 위해 맥진했다고 아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마네는 정말 살롱전에 올인한 인물이다. 물론 그가 새로운 화풍을 시도하고 추구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화가치고 뭔가 자신만의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화가뿐아니고 문학가 예술가 등 창작하는 모든 분야사람들이 그렇다. 자신만의 세계 남들이 가보지 않은 그 미답의 눈길에 첫발을 내딛고 싶은 것이 창작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심리일 것이다.하지만 마네는 새로운 방식의 전시회나 기존의 방식과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싶지는 않았다. 프랑스 혁명과 같은 구시대의 상황을 완전히 뒤집는 그런 행위는 그에게는 맞지 않다고 판단했다. 기존 질서속에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고 싶었을 뿐이다. 프랑스 혁명처럼 구질서를 붕괴시키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마네는 결국 인상주의파 전시회에 자신의 작품을 한번도 내놓지 않았다. 인상주의파 화가들과는 뚜렷한 선을 그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마네를 인상주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가 인상주의를 낳은 데 일조를 했기 때문이다. 화단의 평론가들의 입에 담지 못할 비평을 들으면서도 자신의 화풍을 유지하려고 노력한 그런 모습이 후배들인 인상주의파 화가들에게 영향을 크게 주었다는 것이다. 새로운 질서를 만들것인가 아니면 현질서속에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보일 것인가의 기로에서 마네는 기존 질서속에 남기를 바랐을 뿐이다.
요즘 일부 사람들은 인상주의파 화가들이 당시 프랑스 혁명 세력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연관관계가 전혀 없지는 않았겠지만 인상주의 화가로 대표되는 인물들이 혁명파와 교류가 있었다는 것은 아직은 나타나지 않은 역사적 사실이다. 물론 프랑스 혁명으로 야기된 사회질서 개척 정신이 예술계까지 영향을 끼친 것은 당연하다. 예술도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일인데 왜 그렇지 않겠는가. 하지만 인상주의 화가들이 미술계에 대혁명을 가하고자 계획했던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그들은 단지 당시 파리를 이끌던 신고전주의나 낭만주의 등과는 다른 화풍을 추구하려고 했던 혁신파에 속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당시 모델을 화실로 불러 스케치한뒤 몇날 몇달에 걸쳐 색을 입히는 그런 과정에서 탈피해 스케치북을 들고 야외로 뛰어나가 그 화려한 자연의 색조를 화폭에 담고 싶어했던 화가들이다. 이들은 그동안 기존 화단에서 소홀히 했던 빛의 변화에 주목했다. 빛의 변화에 따른 순간적인 변화와 아름다움을 그야말로 보이는 그대로 화폭에 담야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기존 화단에서 아주 번거롭게 생각했던 야외 작업이 기차 등 운송기관이 발달하고 튜브 등 물감 운반이 용이하게 된 것도 그들이 그런 과감한 시도를 하는데 일조를 한 것이 분명하다.
인상주의파 화가들은 첫 전시회를 단순히 살롱전에 맞서는 일시적인 이벤트로 생각했을까. 일반 관람객들에게 자신들의 새로운 풍의 작품을 선보이는 정도로 판단했을까. 우리는 사실주의의 혁명아 쿠르베가 행한 것처럼 반항적인 그리고 과감한 전시회 다시말해 살롱전이 열리는 장소 바로 앞에 전시장을 열고 살롱전을 향해 전면전을 펼친 그것을 기억한다. 하지만 쿠르베의 전시회와 인상주의파 화가들의 첫 전시회는 전혀 달랐다. 그들은 진정코 자신들의 전시회가 정말 대박이 나기를 기원하고 또 기원했다. 아니면 말고가 아니고 정말 그렇게 되기를 학수고대했다는 말이다. 그들은 즉흥적으로 전시회개최를 기획한 것이 아니고 6~7년이라는 비교적 긴 시간을 전시회를 위해 바쳤다. 자신들의 화풍으로는 당시 기존 화단이 주도하던 살롱전에 입상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선보일 기회는 개인전이 있지만 당시 가난한 젊은 화가들의 입장에서는 언감생심이었다. 그래서 합심하고 동지들을 규합해 겨우 만들어낸 것이 바로 1874년 4월 15일 그들의 첫 전시회인 것이다.
현재 파리와 서울을 오가며 화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김호수 작가는 초기 인상주의 화가들이 혁명적으로 화풍을 의도적으로 혁신하겠다는 확고한 뜻을 가진 것은 아니였다면서 당시 프랑스 혁명과 인상주의 화가들을 연관지으려 하는 것은 맞지 않는 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이 새로운 화풍을 추구하고 춥고 배고픈 힘든 젊은 화가들의 입장에서 새로운 길을 가는 것은 분명코 너무 힘든 일이었지만 그들의 화풍을 꺾지 않고 계속 유지해 나간 것은 그야말로 혁명적인 생활이었고 대단한 칭송을 들어도 부족함이 없는 업적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렇다. 우리는 현대의 관점에서 과거를 판단하려고 한다. 실제로 살아보지 못한 그 시절을 지금의 관점으로 파악하는 것은 상당한 무리가 있다. 당시 문헌과 그들이 남긴 작품 그리고 주위사람들의 남긴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과거를 유추해 볼 수밖에 없다. 물론 현대인이 가장 좋아하는 인상주의 화가들을 미화하고 싶은 욕구에 대해 뭐라는 것이 아니고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분석은 오류를 낳을 수 있다는 말이다. 반 고흐에 관한 숱한 이야기도 그래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뭐라해도 새로운 화풍을 일으키고 새로운 미술 조류를 탄생시킨 인상주의 화가들의 노고와 그들의 고뇌를 우리는 존중하고 칭송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인다. 1874년 4월 15일을 기억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2023년 3월 4일 화야산방에서 정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