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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적, 카르타고가 로마에게 망한 이유
새벽 카톡방에 올린 아래의 글을 대했다. 검색해 보니 작년부터 공유된 글에 의견을 더한 것이었다. 기회에 카페에 올려두었던 글을 찾아보고 포에니 전쟁으로 유튜브, 백과사전도 열어보았다. 자유 대한민국 내일의 안녕을 기원하며 옮겨둔다.
알프스를 넘는 한니발
저는 가능하면 카톡방을 통하여 정치이야기, 특히 민감한 시기의 개인 의견은 서로 다를 수 있음으로 특정 사안에 대한 의견을 내지 않으려 노력해왔습니다.
그러나 근래 집권당의 원내 대표란 사람이 공적 장소에서 이번 총선이후 우리의 정체를 자유민주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바꾸는 작업을 추진하겠다며 기본권을 포함, 사회 경제. 체제를 광범위하게 바꿀것이라 떠벌린 것을 보고 그냥 보아넘길 수 만은 없다고 판단하여 제가 받은 내용의 글을 빌려 한 말씀 올립니다
저는 이글을 읽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망국의 기로에서 생각없이 산다면 우리. 모두가 민족과 역사앞에 배신자가 되는게 아닐까? 해서입니다.
''무적, 카르타고가 로마에게 망한 이유''
국민들은 깊이 생각하셔야합니다
누가 대한민국을 옳지않은 길로 가게 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기원전 246년부터 146년까지 약 100년간 지중해의 북쪽에 있는 로마와 남쪽에 있는 카르타고는 각자 국력을 쏟아가며 상대를 궤멸시키려고 싸웠습니다.
그것이 저 유명한 1, 2, 3차 퓨닉 (Punic) 전쟁이었습니다.
카르타고의 영웅 한니발과 로마의 명장 스키피오가 카르타고 근처 자마 평원에서 대회전을 벌인 것은 2차 퓨닉 전쟁이었습니다.
서로 이기고 지기를 반복했지만, 로마는 카르타고를 섬멸할 수 없었고, 카르타고 역시 로마를 궤멸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때 카르타고 성벽은 세계에서 가장 치밀하고 견고하고 거대하고 완벽하게 지어져서 함락할 수 없었고, 지하에는 바둑판처럼 수로들이 건설되어 있었고, 카르타고 자체가 비옥한 곡창지대여서 로마가 카르타고를 포위한다고 해도 카르타고는 10년 먹을 물과 곡식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실제적으로 난공불락이었던 것이죠.
그러나 제3차 퓨닉 전쟁에서 로마는 간단하게 카르타고를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가요?
카르타고 원로원 위원이었고 카르타고에서 모든 것을 누리고 출세했던 귀족 ''아스틸락스''가 카르타고의 성벽 도면들과 지하 수로들의 도면들을 훔쳐 가지고 로마로 도망가서 로마 원로원에 팔아넘겨 억만장자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아스틸락스''는 카르타고를 공격하는 6만명의 로마군과 함께 카르타고에 와서 성벽의 약한 부분들과 샛길들과 지하 수로들의 출입구들을 샅샅히 알려 주었답니다.
드디어 절대로 함락될 수 없는 카르타고 왕국이 철저히 폐허가 되고 카르타고 사람들은 도륙되고 목숨을 부지한 사람들은 모두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로마보다 일찍 건국되었고, 당시의 정치, 문화, 군사, 예술, 모든 분야에서 세계적 선두주자였던 카르타고는 이렇게 한 자국민의 배신으로 역사에서 사라지고 지도에서 지워졌으며 가르타고 인들은 멸종했습니다.
당시에 살았던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카르타고의 서쪽 문이 뚫리고 나서 6시간 후의 참상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너무 참혹해서 조금만 인용해 봅니다.
"'전쟁터에 시체들이 나뒹구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내가 카르타고에서 본 것은 지난 30년 동안 어느 전장터에서 본 것보다 더 처참하고 말로 설명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 발가벗겨진 여자가 피범벅이 된 채 시체로 메워진 우물 맨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신전 계단은 시체들이 즐비했고, 머리가 깨진 어린 아이들의 피로 인해 거리는 무척 미끄러웠다. 신전 입구에는 거세된 병사의 가슴 위에 목이 잘린 개가 얹혀져 있었다.
한 집 안에는 3, 40명의 여자들이 있었다. 여자? 이제는 그렇게 부르지 못할 터였다. 흐느낌과 찢긴 옷가지, 바닥에 깔린 멍석들이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
백인대장이 말했다. '모든 병사들이 순번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루에 15명씩 병사들을 받는다고쳐도 저 여자들은 곧 죽을 것입니다. 그래서 병사들의 복무기간에 따라 .... 허락하고, 일반 병사들은 3분씩만 하고 나오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나머지는 생략합니다.
절대 망할 수 없다던 카르타고가 망한 것은 카르타고 귀족의 배신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위해 매일 살고 계십니까?
누가 지금 대한민국을 배신하고 있는가? 누가 지금 대한민국을 적의 칼날 아래 밀어넣고 있는가?
생각해 보셨습니까?
누가 서해안 해도를 적에게 넘겨 주었고, 누가 전방에 설치된 탱크 방호벽을 임의로 철거하여 적의 침투를 용이하게 하였고, 누가 법치를 문란케하였으며, 누가 실속없이 이상한 합의를해서 군사훈련을 하러 장비와 병력이 외국으로까지 가야하는지를 알고 계십니까?
왜. 이렇게 대한민국을 약화시키고 무력화 시키고 있는지?
누가 지금 대한민국의 약한 부분들을 적국에게 알려 주고 있는지?
''나는 공산당이 좋아요!''라고 외치는 무리들이 서울의 중심가를 활보해도 무감각한 사람들은 사그러진 영광의 카르타고처럼, 영광스러운 조국 대한민국이 무너지고 지워지고 사라지는 것을 보기만 하고 계실 것입니까?
* 기억하십시요!
대한민국이 망한다면, 그것은 적국 때문이 아니라, 바로 대한민국 안의 배신자들 때문이 될 것이라는 것을!
누가 배신자일가요?
지금 아무 생각없이 사는 우리 모두가 배신자 일수도 있음을 잊지마십시요!
지금 손을 쓰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몰락을 막을 기회가 영원히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긴 시간 어려움을 참아내고 전력으로 나라 발전을 위하여 힘써 이루어 낸 우리의 조국입니다. 그 귀중한 꽃이 이제 철없는 모리배들의 장난감이 되도록 수수방관할 수만은 없습니다. 단란한 가정과 빛나는 조국의 미래를 위해서 생각만 하실 때가 아닌듯 합니다.
''권리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하지 않는다''는 법언이 있습니다.
우리의 권리가 저들의 장난감이 되지 못하도록 힘을 모읍시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십시요!
안락하고 빛나는 조국의 내일을 상상합니다! 그 품에서 이룩할 미래를 축원합니다!
** 제가 참고한 글을 주신 분은 참고하신 문헌을 아래와 같이 적시해 주셨습니다
(참고문헌: Carthage by Ross Leckie)
2019.06.13 03:21
"교육이란 게 참 무섭다."
처음 칸나에에 갔을 때 동행했던 방송 PD가 독백처럼 던진 말이었다. 그때 우리는 칸나에 평원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서 있었다. 고고학 발굴지인 언덕에는 먼 옛날 있었던 전투를 기리듯 부서진 칼럼 하나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알고 보면 그 전투와는 상관도 없는 기둥이다. 그날따라 비가 왔다. 촉촉하게 칸나에를 적시는 비를 맞으며 우리는 상념에 젖어 있었다. 감정이 묘했다. 역사책에서나 있을 법한 '칸나에'가 눈앞에 펼쳐져 있는데, 이곳에서 그 옛날 무려 7만에 달하는 로마군이 몰살당했는데, 평원은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평온했기 때문이다. 침묵을 깨는 독백은 그때 튀어나왔다. '무슨 뜻이냐'고 묻자, 대답이 이랬다.
"한니발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로마에 대한 증오를 배웠다는데 결국 이곳 칸나에까지 와서 수만 명의 로마군을 몰살시키지 않았느냐? 아버지 하밀카르의 집요한 교육이 없었다면 칸나에의 비극도 없지 않았을까?"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하밀카르의 교육이 한니발을, 유독 로마를 미워하고, 로마를 이기기 위해 평생을 바치도록 한 건 맞는다. 그러나 그런 교육이 없었어도 한니발은 칸나에에 섰을 것이다. 한 산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함께 살 수 없듯이, 지중해에 두 제국이 공존할 수는 없었다. 로마와 카르타고, 둘 중 하나는 사라져야 했다. 그리고 한니발은 카르타고 주전파의 리더였다. 칸나에는 그의 운명이었다.
로마는 포기하지 않는다
1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년~기원전 241년)에서 패배한 후, 이베리아 반도를 토대로 권토중래를 꿈꿨던 카르타고의 주전파는 한니발의 기치 아래 이탈리아로 진격해 들어왔다. 그들은 알프스를 정복했다. 트레비아 전투(기원전 218년)와 트라시메노 전투(기원전 217년)에서 로마군을 상대로 연이어 대승을 거뒀다. 트라시메노 전투 결과, 로마는 이탈리아 중부 전체를 잃었다. 로마로 가는 길이 한니발 앞에 뚫렸다. 순간 패닉에 빠졌으나 로마는 빠르게 냉정을 되찾았다. 로마로 이어진 티베리스 강의 다리를 부수고, 성벽을 보수했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독재관에 임명했고, 새롭게 군단을 재편성했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2200년 전에 로마와 카르타고는 칸나에에서 지중해 세계를 두고 건곤일척의 전투를 벌였다. 그날 하루 동안 무려 7만6000명에 달하는 양측 군인의 피가 대지에 뿌려졌다. 모든 것은 역사 속에 묻혔고 현재는 주변 언덕 위에 외롭게 서 있는 옛 기둥만이 칸나에를 바라보고 있다. /Jorg Schulz 위키피디아
만약 이런 일이 우리 사회에서 벌어졌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니 다른 나라였다면 어땠을까? 예측하기 어렵지 않다. 그런데 로마에서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책임 소재를 둘러싼 공방도, 바로에 대한 비난도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원로원 의원 전원이 성문까지 나가 바로를 맞이하며 '조국을 포기하지 않고 돌아온 것'에 감사를 표했다. 참사를 미사어구로 감추려는 허언도 아니었고, 가련한 사내를 향한 조롱도 아니었다(몸젠'로마사'). 트레비아, 트라시메노에 이은 칸나에의 패배로 로마는 12만명에 달하는 병사를 잃었다. 당시 인구수를 고려하면 '회복 불가능한 손실'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지금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비방이나 책임 공방이 아니라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국가를 구하고 재건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로마인들 간의 신뢰를 회복하고 화합을 이뤄야 했다. 바로를 향한 감사는 이를 위한 처절하고 현실적인 몸부림이었다. 로마는 아직 지지 않았다.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대역전극은 화합을 통해 시작될 참이었다.
*걸작이라 불리는 역사 최고의 전투, 한니발의 칸나에 전투 https://youtu.be/rkh7tW2fX_s
[패전 장군 처벌 않는 전통, 로마군 최강으로 만들어]
고의 아닌 실수·무능이므로 처벌하면 위축될 뿐이라 생각
책임 추궁, 권력투쟁화 우려도
로마 군대는 어떻게 최강의 군대가 됐을까? 많은 이유가 있지만 로마가 현장 사령관에게 폭넓은 재량권을 부여했고, 패전의 경우에도 장군에 대해 도를 넘는 처벌을 하지 않는 전통도 중요하게 손꼽힌다(마키아벨리'로마사논고'). 이는 로마의 전쟁과 인간에 대한 인식과도 관련돼 있다.
로마인은 누구도 패전을 원하지는 않는다고 봤다. 패배는 고의가 아니라 실수이거나 무능에 기인했다. 여기에는 패전 장군이란 오명만으로도 당사자에게는 충분한 벌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패전에 대해 과도하게 책임을 물으면 현장에 나가 있는 장군들이 적극적으로 임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된다. 장군들이 움츠러들면 어떻게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다. 로마는 기본적으로 집정관과 법무관 같은 고위 정치인들이 사령관을 맡았다. 그들에게 패전의 책임을 묻는다는 미명하에 결국 정적을 제거하는 기회로, 정치적 투쟁으로 변질될 우려가 컸다.
실제로 한니발 전쟁 과정에서 로마가 대패했던 트레비아, 트라시메노, 칸나에 전투는 총사령관이 모두 평민파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귀족들이 패전을 이유로 이들을 제거했다면 정치 투쟁에서는 승리했을지 몰라도, 로마는 분열로 멸망했을 것이다. 원로원이 칸나에의 패전 장군인 바로를 비난하지 않고 따뜻하게 맞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강추! 포에니 전쟁에 대한 이해 크게 도움되었습니다.^^
[토크멘터리 전쟁史] 23부. 포에니 전쟁 https://youtu.be/s6EFhtEEhwc
*포에니 전쟁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13XX33400006
기원전 264년 시칠리아 북안에서 카르타고 군과 로마 군이 부딪치면서 제1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었다.
기원전 218년 한니발이 로마의 동맹 도시인 사군툼을 공격하면서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었다.
기원전 146년 제3차 포에니 전쟁의 결과로 카르타고가 파괴되고 로마의 아프리카 속주로 편입되다.
*기원전 세계대전! 카르타고vs로마- 포에니전쟁 - 최준영박사의 지구본연구소 시즌2-14, 튀니지2부 https://youtu.be/iGUdt6nCX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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