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생의 운세 [채인숙]
다시 태어나면 살던 마을을 떠나지 않으리
지붕 낮은 집에서 봄을 맞고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기
다리고 겨울을 지나리
뒷산에서 주워 온 나무 둥치로 의자를 만들어
눈이 멀도록 저녁놀을 보리
가지런히 발을 모으고 앉아 먼 나라의 당신이 보내온
엽서를 읽으리
내 몸을 움직여 돈을 벌고
아이들을 낳아 늦가을 볕 같은 곁을 내어 주리
사랑에 실패하고 우는 아이 옆에서 함께 훌쩍이며 눈
물을 훔치리
누군가 떠났고 누군가 돌아온다는 소식은 천변에서 들
으리
혼자 기다리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으리
아, 내 어린 날의 바닷가 마을에 다시 태어난다면
수심을 헤엄쳐 바위 틈에 낀 성게를 줍는 해녀가 되리
봄 쑥을 캐고 생미역을 잘라 먹으며 웃는 날이 많으리
쉬는 날에는 문구점에 들러 색 볼펜을 고르고
책상에 앉아 밑줄을 그어 둘 문장을 찾으리
시를 쓰는 것은 안부를 묻는 것이었다고
먼 당신에게 편지를 쓰리
어릴 적 사투리를 고치지 않으리
친구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이국의 언어로 말하지 않으리
꿈에 속아 짐 가방을 싸는 일은 다시 없으리
나무 캥거루와 쿠스쿠스의 서식지를 멀리서 그리워만
하리
사는 곳이 고향이 되는 법은 없었으므로
- 여름 가고 여름, 민음사,2023
* 이제 한 해가 저물고 새해를 맞이할 때다.
해가 바뀐다고 특별히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게다.
그래도 작년과는 좀 다르게 살아보겠다고 이것저것 궁리하고
작심해보지만 삼일만에 되돌아오는 스프링 같은 작심삼일이다.
올해의 운세가 그러했듯이 내년의 운세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자기의 심성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습관이 바뀌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어릴 적 사투리를 서울말로 바꾸었다고 해도
은연중에 어느 문장에선가는 툭 튀어나오듯.
사는 곳이 고향이 되는 법은 없듯.
내년의 운세도, 생활도, 마음가짐도 지금의 운세와 같을 것이므로
봄 쑥을 캐고 생미역을 잘라 먹으며 웃는 날이 많기를 바라는 게 가장 좋은 운세가 아닐까.
그래도 송구영신의 기도는
새해에는 올해보다 웃는 날이 조금 더 많아지길,
친구들의 엽서는 사치이니 카톡이라도 몇 번 더 주고받을 수 있길,
몸 아프지 말고 병원 가는 횟수는 줄어들길,
사랑에 실패해서 좌절하고 우는 사람이 주변에 없길,
그저 만사가 다 형통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