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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뿌리아름역사동아리 원문보기 글쓴이: 麗輝
한국성(韓國性)...
한국 사람(韓國人) 혹은 한국(韓國)이라는 나라, 그리고 한국의 역사(韓國史) 등등 이 모든 것을 한국성이라는 한마디로 정리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분명 아니다. 고로 글 첫머리에 한국성이란 무엇일까 고민해 보겠다고 화두는 던져놨지만 필자에게 있어 이후 글을 써 나간다는 것은 상당한 고역(苦役)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필자는 한국성이 무엇인지 나름의 생각을 써 내려갈까 한다.
물론 수업을 듣는 학생으로서 선생님이 내주신 일종의 과제물을 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어차피 수업을 듣고 과제물을 제출하고 한 학기 점수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만 하는 지금, 그저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하나의 통과의례라고 생각하면 한결 마음이 편해지고 사뭇 진지하게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리 마음먹으리라.
처음 이 화두를 갖고 고민하면서 학교 도서관을 기웃거렸던 생각이 난다. 물론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성이 무엇인지 서술해놓은 고마운 참고자료(?)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한국성이 무엇인지 심도 있게 고찰해놓은 자료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수박 겉핥기식으로 한국성을 표현한 흔적들은 종종 찾아볼 수 있었다.
먼저 필자가 고등학교 때 읽었던 어떤 책에는 ―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필자에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 못 했던 책 같다 ― 한국사는 바로 한(恨)의 역사라고 써 놨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한(恨)이라. 원통하고 억울하고 원망스러운 역사? 아니, 대체 우리 역사가 어떻길래 한국사는 한의 역사라고 했단 말인가. 뭐가 그렇게 매일 당하고만 살았길래 한국사를 한마디로 한(恨)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다가 군대에 있을 때 그 말의 의미를 어느 정도 깨우칠 수 있었다.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이제 자대 배치를 받을 때쯤이면 늘 상급부대에서 우수한 자원을 차출하기 위해 각 훈련소를 방문한다. 흔히 전방의 수색임무를 맡는 부대들이 자주 오는데 그 중, 모 수색중대 인사과장의 직책을 가진 소령님이 오신 적이 있다. 그때 그 소령님이 하신 말의 요지는 “우리는 모두 창녀의 자손이다.”라는 것이었다.
이 무슨 해괴망측한 말인고 하니, 우리 역사는 끊임없이 외침을 받았고 그 횟수가 무려 1,000여회에 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외침을 받으며 외적들에게 더럽혀진 여인들이 낳은 자식들이 끝까지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될 것이며 이왕 군대에 온 거, 강한 신체와 정신력을 길러보지 않겠냐, 그러기 위해서 수색중대로 자원하라는 것이었다. 그 연설이 일견 대단해 보였는지 필자의 동기들 중 꽤 많은 수가 수색중대로 자원해 그 중에서 상당수가 그 곳으로 자대배치를 받은 적이 있었다. 창녀의 자손…그래서 한국사는 한의 역사라고 하는 것인가.
그런데 놀란 것은 이후 살아가면서 ‘한국사는 한의 역사’라는 것이 마치 공식이라도 된 듯이 상당수의 책에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대체 무슨 근거 없는 유전자 정보가 수천 년을 타고 전해졌기에 너나 할 것 없이 이런 망발 ― 필자는 이게 망발(妄發)이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 을 내뱉는단 말인가. 패배의식 ․ 피해의식도 이 정도면 거의 병적인 수준이다.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 이런 생각을 하나같이 하고 있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우리나라가 역사적으로 당하기만 하였고, 빼앗기기만 하였고, 늘 강력한 주변국가에 가려져 살아왔었는가. 한번 자문자답해보자. 정말 그러한지. 그러면 힘들 때마다 찾는 고구려는 무엇이며, 민족의 조상으로 추앙받는 단군은 무엇이며 중국인이 두려워하는 경국의 주인공 연개소문은 무엇이며, 일본 천황이 자신은 백제의 후손이라고 말한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대체 그 놈의 한(恨)이 뭐 길래, 그렇게 한(恨)에 집착한단 말인가.
물론 한(恨)이라는 단어가 원통하고 억울한 면모를 극복하기 위한 도전과 응전의 방향을 제시하는 그런 뜻으로 쓰일 수도 있겠다. 한(恨)이 많아서 그 한을 풀기 위해 끊임없이 전진하고 수양했다고 말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한(恨)이라는 단어에서 이런 의미를 애써 뽑아 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정말 한(恨)은 부정적인 의미의, 한없이 약한 우리 민족의 나약함이 고스란히 담겨진 단어가 아닐 수 없다.
그럼 한국성에 대해 필자가 뭐라고 생각하길래 이런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가?
글쎄, 필자도 잘은 모른다. 그래도 굳이 필자의 생각을 말하자면 한국성이란 ‘여유로움’이 아닐까 싶다. 한문으로는 餘裕라고 쓰는데 그 단어의 의미를 보면 넉넉하고 풍요롭고 관대하고 느긋하다는 뜻이라 한다. 영어 단어를 한번 찾아봤더니 장소의 여유, 시간의 여유, 기계의 여유, 활동의 여유, 마음의 여유 등 여유라는 단어 그대로를 포괄하지 못하고 왜 그렇게 세분화시켜놨는지 적절한 단어가 없었다. 그래도 굳이 필자의 생각과 맞는 부분을 찾는다면 An easy and composed attitude나 Keep one´s composure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래도 역시나 한 단어로 표현해내기란 어렵다.
여유로운 태도, 그리고 그 태도는 마음의 여유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리고 여유가 있는 자는 남에게 관대할 수밖에 없으며 삶이 조급하지 않고 느긋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그가 게으르다는 것은 아니다. 남에게 관대한 사람은 남에게 베풀 줄 아는 사람이며 또한 그것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기에 그는 풍요로운 사람이다. 딱히 재물이든, 마음이든 뭐든 풍요로운 사람은 여유롭다. 그런 사람은 게으르지 않으며 항상 자기 자신을 수양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반대로 지금의 ‘빨리빨리 문화’처럼 시간을 쪼개가면서 바쁘게 사는 사람도 아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마음의 여유나 안락을 즐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이것이 한국성과 무슨 큰 차이가 있는지 잘 전달이 안 될 것이다. 솔직히 지금 이런 말을 하고 있는 필자 역시 이렇게 덜컥 내뱉은 말을 어떻게 전달해야 듣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필자 나름의 생각을 잘 전달하고자 조금이라도 노력해보겠다.
신화(神話) 속의 한국성(韓國性)
단군신화, 동명신화, 고주몽신화, 김수로신화, 박혁거세신화 등등 한국에는 수많은 문헌신화가 등장한다. 무속신화까지 합한다면 수백 개에 달하는 신화가 존재한다고 해도 무방하며 이들을 하나의 계보로 연결한다면 그리스 ― 로마 신화처럼 하나의 신화적 체계를 완성할 여지도 충분히 있을 정도이다. 필자가 왜 첫머리에 신화를 꺼냈는고 하니, 신화야말로 인류가 태어나 문명이라는 선진 ― 복합사회를 맛보는 그 순간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간 두뇌 속에 전해지는 수만년 동안의 유전자 정보 안에 녹아있는 거의 유일한, 단일화된 기억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얘기하면 인류가 태어나 보고, 느끼고, 듣고, 말했던 정보들 중 전해진 것이 바로 신화라는 뜻이다. 해가 나면 아침이요, 해가 지면 밤이다. 비가 오고 천둥이 치고 눈이 내리는 것은 모두 자연현상이지만 반대로 말하면 인간의 힘이 도달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는 이런 자연현상들을 미약한 인간의 두뇌로 이해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신화로 전해지게 된 것이다. 그러니 신화는 오늘날까지도 우리 인간에게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원시적인 과거의 사상 체계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니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성이라는 것을 찾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을 다 제쳐두고서라도 한국에 전해지는 신화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겠다. 한국 신화 중 유명한 것은 각 왕조들의 건국신화(建國神話)일 것이다. 그리고 실제 대부분의 건국신화들은 시각적으로 확인 가능한 자료의 형태로 전해져 구전으로 기록되는 구전신화보다 훨씬 신빙성과 사실성을 부여하고 있다.
이 말은 즉슨, 원초적인 형태의 신화가 변형될 여지가 더 적었으며 그 갈래가 여러 갈래로 나눠지지 않아서 단일화된 신화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는 소리가 된다. 하지만 문헌신화 이외의 무속신화 역시 어떤 형태로든지 변형되어서라도 현재까지 전해진 존재이기 때문에 그 역시 중요하게 취급받아 마땅하다 할 수 있다. 고로 본고에서는 문헌신화는 물론, 무속신화까지 언급하도록 하겠다.
대부분의 건국신화를 보면 특이하게 우리나라의 경우, 그 상대가 누구이든 간에 투쟁적이고 경쟁적인 부분이 적게 등장한다. 하백과 해모수의 대결, 고구려 추모왕과 비류국 송양왕의 대결, 석탈해와 김수로의 대결 등이 신화에서 확인되지만 표현상 도술(道術) 대결로 상대방의 실력을 가늠하는 것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물론 실제적으로는 군대를 휘몰아 피바람을 일으키며 전투를 벌였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신화 상에서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리스 신화만 보더라도 크로노스(Cronos)는 아버지 우라노스(Uranos)를 거세하여 천상의 왕위에 오르고 아버지 우라노스는 크로노스에게 아들에 의해 쫓겨날 것이라고 저주한다. 그리고 크로노스는 5남매 이후 태어나는 자식들을 계속 삼켜버리고 운 좋게 태어난 제우스가 훗날 아버지를 몰아내고 천상의 왕위에 오르게 된다. 얼핏 보면 굉장히 잔인하고 가정파탄적인 내용이 신화에 반영되어 있는 셈이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보다 현실적인 건국신화에서조차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극단적인 대립구도보다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 동화 등이 반영되어 있는 셈이다.
북구의 신화 역시 ‘신들의 황혼’이라 불리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이 역시 거마(巨魔) 연합군과 신들의 일대 결전이 주요 내용이다. 북구에서 가장 상위에 속하는 신이 바로 ‘전쟁의 신’으로 불리는 오딘(Odin)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처럼 다른 신들과 투쟁하는 식의 설정은 서구의 전통적인 신화 체계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신화 속의 신이라는 것은 자연이든 사상이든 하나의 상징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따지고 보면 서구의 신화는 남들과 타협 ․ 동화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남을 억누르고 그와 경쟁하여 그 위에 군림하는 이야기인 셈이다.
전 세계적으로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기독교 역시 유대교라고 하는 것과 엄연히 다르며 로마제국 내에서 주변 문화권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대표적인 것이 로마 군사집단이 숭배하던 태양신 숭배사상과의 통합이며 이밖에도 메소포타미아, 그리스 일대의 신화 체계와도 상당히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렇게 형성된 기독교였기에 초기부터 이단(異端) 논쟁이 치열했으며 그에 따른 교리와 경전에 대한 논쟁 역시 치열했다.
심지어 야훼는 악신이고 하느님은 선신이라는 이중적인 사고방식을 표방하기까지 하는 교단이 있었으며 악마, 마녀 탄압이라는 잔학한 행위를 통해서 끊임없이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했던 종교가 바로 기독교였다. 심지어 십자군 전쟁 내내 보여줬던 기독교 문화권의 잔학한 문화 파괴 행위와 비인간적인 행동은 지금도 널리 알려진 것들이다. 동시대 조금만 동쪽으로 넘어와 이슬람교를 살펴본다면 서구식 사상과는 전혀 다른 사상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슬람교에서는 타종교에서 개종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세금을 더 걷을 뿐, 이단이니 마녀니 하면서 살육을 즐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강 살펴만 봐도 서구의 사상은 투쟁과 경쟁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성취하는 것으로 향하였고, 또 다듬어져 왔다. 하지만 동양이라고 불리는 광범위한 문화권에서는 그런 모습이 찾아지기 어렵다. 동 ― 서 문화권의 접점 지대인 중앙아시아나 서남아시아 일대는 제쳐두고 독특한 문화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한 ․ 중 ․ 일 3국으로만 넘어와도 서구식 사상 체계나 신화 체계를 찾아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한국은 중국이나 일본과는 엄연한 차이를 갖고 있다.『일본서기(日本書紀)』를 보면 천조대신(天照大神)이라고 하는 신이 등장하는데 일본의 신화체계를 보면 성적인 묘사가 등장하면서 보다 원초적인, 다듬어지지 않은 듯 한 이야기들이 등장하는데 너무 신화적인, 허구의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다 보니 그 안에서 어떤 일본성을 찾아내기란 쉽지가 않다. 또한 일본의 신화는 외부(한반도)에서 유입된 지배집단의 존재를 가리기 위해서 지어낸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는 만큼 그 안에서 일본이라고 하는 나라의 정체성을 골라내기란 힘든 일일 것이다.
또한 중국의 경우는 워낙 거대한 영토를 갖고 있고 다양한 문화권의 다양한 신화 체계를 흡수하고 있던 터라, 한 마디로 ‘중국성’이라고 단정지을만한 문화체계를 골라내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 한국인, 일본인의 경우는 문화적으로도 그렇지만 혈연적으로도 어느 정도 단일민족이라고 구분하고 있지만 한족(漢族)의 경우는 문화적인 개념일 뿐, 혈연적인 개념이 적용될 수 없는 것만 봐도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다민족 국가에 있어서 단일화된 민족성이나 문화성을 골라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까 싶다. 하물며 각 변방 민족들은 자치구를 두어 다스리니 신강성의 위구르족이나 연해주의 조선족, 청해성 등지의 티벳족 등이 진정한 한족이라 할 수 있는지 자체가 의문이다.
흔히 중국의 신화를 얘기할 때 나오는 것이『산해경(山海經)』일텐데 거기에 나오는 대부분의 괴이한 이야기도 모두 중국 주변에 대한 묘사이지, 중국 자체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게 본다면 중국성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다양성’에서 그 원류와 계통을 찾을 수 있다 하겠다. 물론 한국성 역시 중국성처럼 ‘다양성’에서 그 원류와 계통을 찾을 수 있지만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궁극의 어느 지점에 도달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후한서(後漢書)』를 보면 王制云 東方曰夷 夷者 根本也 言仁而好生 萬物 地而出 事見風俗通 故天性柔順 易以道御 至有君子 不死之國焉라 하여 동방의 이(夷)가 세상의 근본으로 표현된 것만 보더라도 중국인 스스로가 자신들의 문화가 다양한 문화권을 흡수하여 만들어진 것이며 그 중의 하나인 동방의 이에서는 이러한 세상의 근본에 대한 부분을 받아왔음을 적고 있다. 공자가 이러한 동방의 이에서 살고 싶어했다는 것만 보더라도 당시 천하의 진정한 도(道)와 예(禮)가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중국인들에게 추앙받던 동방의 이, 즉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면 중국이 흉내내 중국화한 것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으니 바로 그것이 누차 강조하는 ‘여유’인 것이다.
무속신화 중에 ‘자청비신화’ 혹은 ‘세경본풀이’라고 하는 유명한 신화가 있다. 여주인공인 자청비가 여러 고난을 이겨내고 결국은 농경신으로서 신격화되는 모습을 그려낸 것인데 자청비는 이야기 속에서 평소 자신을 괴롭히고 결국 자신을 겁탈하려하여 죽이고마는 정수남이라는 인물을 위해 이런저런 모험을 하게 되고 종내에는 그를 목축신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언뜻 보면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의 무조건적인 희생심의 발로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바리공주 신화’라고 하는 또 다른 여주인공이 등장하는 신화 속에서도 아들을 낳기 위해 계속 자식을 낳다가 딸만 나와 자신을 버린 부모님이 등장하는데 결국 그녀는 부모님이 죽을병에 걸리자 수십 년간 지옥과 천상을 오르내리며 수많은 시험에 통과하여 결국 부모님을 살리기까지 한다. 이처럼 우리나라 신화에서는 그리스 신화에서처럼 혈연간의 상잔(相殘)이나 예를 어긋나는 행위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일본에서처럼 혈연관계가 있는 신들끼리의 근친상간(近親相姦)에 대한 이야기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 점 특이하다 할 수 있는데 한국의 이런 신화들이 모두 유교(儒敎)라는 것이 중국에서 전해진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상기했을 때 이 부분 역시 한국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단군신화에서부터 이미 한민족이라 불릴만한 우리 민족은 이런 여유로움을 보였다. 바로 곰과 호랑이에 대한 언급인데 결국 선택된 것은 곰이요, 버티지 못한 것은 호랑이지만 신화 내에서 호랑이가 냉대 받고 탄압받는 장면은 전혀 없다. 호랑이는 동예에서 신물(神物)로 취급받았다는 기록만 보더라도 이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어떤 결정을 내려야할 상황에서 우리는 취사선택(取捨選擇)을 할 뿐이지, 양자택일(兩者擇一)하여 어느 한쪽을 무조건 고집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바로 동화(同化)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자연과의 동화, 그리고 다른 집단과의 동화, 그리고 그 안에서 갖게 되는 타협과 절충의 미덕(美德)이 우리 민족에게는 오래전부터 있어왔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최치원이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풍류도(風流徒)라는 것이 있어 유 ․ 불 ․ 선 삼교와는 다른 독특한 사상 체계가 존재했다고 언급한 것 역시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자연과의 동화, 자연과의 타협 속에서 생겨난 것이 바로 여유로움이며, 이는 단순히 가진 자의 여유로움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고차원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는 이런 사상적인 면에 스며들어 있는 여유로움을 일상적인 것에서 한번 찾아보고자 한다.
즐김 속의 한국성(韓國性)
즐김. 굳이 비교하자면 한문의 樂, 영어의 Enjoy 정도? 한글의 수려한 표현 기법에 적이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이 ‘즐김’이라는 단어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분명 즐기다는 타동사의 변형이지만 ‘ ― ㅁ’으로 마무리하면서 명사가 되었고 그 안에 의미를 파헤치다보면 형용사 혹은 부사로서의 의미마저도 내포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다양한 해석의 여지는 한문이나 영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한글만의 특징이니 이 역시 한국성이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앞서 신화에 대해서 간단하게 알아보면서 필자는 한국성이 ‘여유로움’이라는 것을 약간이나마 고찰해봤다. 그럼 이런 ‘여유로움’이 주변에서 어떤 형태로 나타날까, 하고 생각해봤을 때 필자가 꼽은 것이 바로 이 ‘즐김’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놀이와 음주가무, 축제 등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문화 속에서 한국인들의 여유로움이 나온다고 필자는 본다. 그럼 예로부터 어떤 모습이 나타나기에 필자가 이런 생각을 했는지 한번 보자.
『후한서』혹은『삼국지(三國志)』를 보면 우리 고대 왕조에 대한 기록들이 자세히 실려 있다. 그 중에서 부여에 대한 부분을 살펴보면 대강 다음과 같다.
以臘月祭天 大會連日 飮食歌舞 名曰迎鼓 是時斷刑獄 解囚徒 『後漢書』
以殷正月祭天 國中大會 連日飮食歌舞 名曰迎鼓 於是時斷刑獄 解囚徒 『三國志』
하나같이 부여에서는 영고라고 하는 큰 행사를 여는데 음주가무를 즐기는 것뿐만 아니라 죄인들을 풀어주는 것과 죄를 논하지 않음을 언급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우리나라는 국경일이나 국가적 행사가 있을 때면 으레 특사(特赦)라 하여 죄인들을 특별 사면조치 시키고는 한다. 그리고 당시 연일 음주가무를 온 나라 사람들이 즐기는 이런 대규모 축제 현장은 동시대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 축제에 대한 다른 문화권과의 극명한 차이는 고구려에 대한 표현으로 넘어가면 더욱 쉽게 찾아볼 수 있다.
其俗淫 皆 淨自憙 暮夜輒男女 聚爲倡樂 好祠鬼神社稷零星 前書音義 龍星左角曰天田 則農祥也 辰日祠以牛 號曰零星 風俗通曰 辰之神爲靈星 故以辰日祠於東南也 以十月祭天大會 名曰東盟 『後漢書』
其民喜歌舞 國中邑落 暮夜男女 聚 相就歌戱 『三國志』
이제는 아예 중국인들이 그 풍속이 음란(淫亂)하다고까지 칭하는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남녀가 밤이 되면 서로 어울려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는 것 때문이다. 아마 부여에서도 고구려에서 동맹이 열릴 때처럼 영고가 열릴 때면 남녀가 밤낮으로 이렇게 한데 어울려 놀았을 가능성이 높은데도 중국인들이 그런 기록을 남기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부여가 친(親) 중국적인 정권이었기 때문에 그러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어찌했든 중요한 것은 음란하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당시 중국인의 시각일 뿐,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난잡(亂雜)한 개념이 고구려에 적용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이런 대규모 집단 축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음주가무를 즐길 줄 알고, 또한 평소에도 노래 부르고 춤추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선조들이었다. 이런 현상은 오늘도 존재한다. 뭔지 잘 감이 안 잡히는가? 바로 월드컵 축제와 레드데블스 응원이 그것이다. 수백만 명의 관중이 시청 앞이나 운동장에 집결해 ‘대~한민국’을 외치는 그런 엑스타시하면서도 익사이팅한 장면이 또 이 세상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2002년 월드컵 때 한국이 세계 4위라는 엄청난 성적을 올리며 세계 축구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대규모 축전에 힘입었기 때문으로 봐야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현대판 동맹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남녀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한데 어울려 음주가무와 함께 우리나라 축구 대표팀의 승전고를 위해서 응원하고 또 기원하는 그 가운데 희로애락이 교차한다. 하긴『구당서(舊唐書)』에 의하면 人能蹴鞠이라 하여 고구려인들이 축국(蹴鞠)을 잘 했다고 하니 그런 전통이 지금까지 내려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기실 축제가 별거란 말인가? 이런 것이 바로 축제인 셈이다. 꼭 브라질에서처럼 국가에서 수십억의 돈을 들여 학교를 세워 교육하고 수만 명의 사람들이 매년 열릴 카니발을 위해 수없이 연습하고 또 고생하는 것처럼 이뤄지는 것만이 축제가 아니다. 시시때때로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한데 어울려 하나의 목표를 위해 외치고 즐길 수 있는 그 자리가 바로 축제의 장(場)인 셈이다.
중국이나 일본에서 이와 같은 축제의 장이 있다는 기록은 고대 문헌에 등장하지 않는다. 뭐 그러니 중국에서 고구려의 동맹을 음란하다고 여겼을 테니 말이다. 게다가 고대 우리 선조들의 이러한 놀이는 단순히 일반 백성들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삼국사기(三國史記)』를 보면 온달에 대한 열전에도 잘 나와 있지만 고구려는 매년 3월 3일, 낙랑 언덕에서 사냥대회를 열었고『수서(隋書)』에 의하면 봄과 가을에 열리는 사냥대회에 왕이 직접 참가한다고 적고 있어 이런 대규모 축전이 전 국민적인 놀이 문화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혹여나 사냥대회는 일반인들이 참석 못 하는 상류층만의 전유물이라고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럼 다음의 기록을 한번 보자.
每年初 聚戱於浿水之上 王乘腰輿 列羽儀以觀. 事畢 王以衣服入水 分左右爲二部 以水石相濺擲 諠呼馳逐 再三而止 『隋書』
그 내용인즉슨, ‘매년 초 패수 ― 대동강으로 추정 ― 에 모여서 놀고 왕은 요여 ― 가마의 일종 ― 를 타고 와서 의장 깃발인 우의(羽儀)를 나열해 놓고 구경한다. 놀이가 끝나면 왕이 옷을 물속에 던지는데 좌우 두 패로 나누어서 물과 돌을 서로 뿌리거나 던져 시끄럽게 소리치며 쫓고 쫓기기를 두세 번 하다가 그만둔다’는 내용이다. 어떠한가? 세상 어느 천지에 지엄한 일국의 군주가 본인이 입고 있던 옷을 집어던져 놀이에 참가한다는 말인가. 필자는 그렇게 성군(聖君)이니 명군(明君)이니 칭송받는 역대 중국 천자들 중에서도 이처럼 일반 백성들과 한데 어울려 놀았다는 얘기는 들어보질 못 했다.
마치 지금 우리나라 대통령이 조기축구회에 나가 동네 아저씨들과 공차고 끝나면 막걸리를 한잔 들이키는 것과 같은 일일 것이다. 어떻게 고구려의 역대 임금들은 이처럼 일반 백성들에게 다가설 수 있었단 말인가. 이는 바로 앞서 언급했던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 더 언급하자면 여유로움이라는 것은 가진 자만의 특권이 아니다. 상대적인 의미에서의, 갖고 있는 물질의 많고 적음은 여유와는 하등 상관이 없다. 여유는 그 사람이 얼마나 대인(大人)이냐 하는 정도의 차이에서 나오는 것이다.
항상 암살의 위험에 처해있고, 신변 보호에 만전을 기하느라고 주변 신하들이나 금군(禁軍)조차도 주변에 가까이 두지 않았던 진시황제를 비롯해 역대 중국 황제들은 항상 독살이라든가, 암살, 반역 등에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속 좁고 간이 콩알만한 중국 황제들이 이처럼 일반 백성들이 노는 곳에 와서 옷을 집어던져가면서, 같이 사냥을 하면서 즐길 수 있었을까.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야말로 고구려 역대 임금이 영토는 비록 작지만 대국(大國)다운 풍모를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풍모가 있었기에 백성들과 그렇게 한데 어울릴 수 있는 여유가 나왔으리라.
앞서도 몇 번 언급했지만 자고로 우리 민족은 자연과 동화되었고, 자연과 타협했으며 자연을 거스르지 않았다. 이는 자연에 굴복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서로 상생(相生)의 길을 걸었다는 의미가 된다. 이는 단순히 자연을 굴복시켜 정복한 연유에 그 위에 인간이 군림한다는 개념과는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민족은 대지의 커다란 마음을 가슴 속에 품고 지낼 수 있었으며 영토가 작고 각종 물자가 중국보다 적었음에도 그들에게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안에서 나오는 ‘여유로움’을 당연히 중국인들이 따라올 재간이 있었겠는가. 필자는 공자가 찾으려 했던 도(道)가 바로 이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런 우리 민족의 여유로움이 극(極)에 달하는 것은 바로 사자(死者)에 대한 개념이다. 죽은 사람을 저승으로 보내는 장례의식(葬禮儀式) 마저도 우리는 즐겼던 것이다. 장례의식? 한쪽에서는 사람이 죽었는데 이를 즐긴다고? 얼핏 들으면 미친 놈 소리를 들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여기서 즐긴다는 것은 사람이 죽은 것을 좋아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 자체를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그 슬픔을 저승세계에서의 새로운 탄생으로 승화시켜 이해했다는 뜻이다. 그에 대한 기록들이 여러 문헌에서 확인된다.
初終哭泣 葬則鼓舞作樂以送之 埋訖 取死者生時服玩車馬置墓側 會葬者爭取而去 『北史』
初終哭泣 葬則鼓儛作樂以送之 埋訖 悉取死者生時服玩車馬置於墓側 會葬者爭取而去 『隋書』
造欌萬功日煞牛羊酒□米粲 不可盡掃旦食鹽豆食一記 之後世寓寄無疆「德興里古墳 墨書銘」
이와 같이 중국인들이 봤을 때 분명히 고구려인들의 장례의식은 독특했다. 왜냐하면 장례의 시작과 끝에는 울지만 정작 시신을 매장할 때는 북을 치고 풍악을 울리면서 장송했기 때문이다. 이런 괴이한 장례식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는 모두 사자가 이승에서의 고난과 역경을 잊고 편안한 저승세계로 간 것을 기뻐하였거나, 아니면 새로운 세계에서 또 다른 삶을 시작하는 것을 축하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나 싶다. 즉, 우리 나름대로 죽음이라는 것을 여유롭게 받아들이고 즐길 줄 알았기에 이런 행동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죽은 자가 생전에 썼던 각종 의복, 노리개, 수레, 말 등을 무덤 옆에 두고 장례식에 모였던 사람들이 그것을 나누어 가졌던 것이다. 이 얼마나 대범하고 의연한 자세로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다 할 수 있겠는가. 부모님의 죽음을 앞두고 유산 상속을 두고 다투는 자식새끼들이나 흥행에 성공했던 ‘공공의 적’이라는 영화에서처럼 재산을 위해 부모님을 죽이는 비정한 자식 놈에 대한 이야기들이 판을 치는 요즘 세상이다. 어쩌다가 사회가 이 모양이 됐는지 정말 한탄스럽기까지 하다.
실제 덕흥리고분이라는 벽화고분의 묵서명(墨書銘)을 보면 5세기 초, 고구려 상류층의 장례의식에 대해 얼핏 엿볼 수 있는데 무덤을 만드는데 있어 1만 명의 공력이 들었고 날마다 소와 양을 잡아서 술과 고기, 쌀은 먹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처럼 누군가를 저승으로 보내는 행위는 그들에게 있어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침식사로 먹을 간장을 한 창고분이나 보관해두고 이 무덤을 방문하는 자가 후세에 끊이지 않기를 바랐다고 하니, 피장자 사후에도 그 사자를 기리는 즐김이 지속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은 이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지금도 장례식에 가면 삼삼오오 모여 술을 먹고 한탄을 하고 고스톱을 치면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말이 나도는 것도 다 이런 정서 속에서 나온 말이리라. 이처럼 다른 사람의 죽음은 위로해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연하게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하는 그런 모호한 경계에 놓인 대상이었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의식까지도 우리 민족은 대대로 즐길 줄 알았던 것이다. 죽음을 즐길 줄 안다. 이 얼마나 대범하고 대단하지 않은가. 영원히 늙지 않고 죽지 않으려는 헛된 꿈에 불로불사약을 구하려고 막대한 노력을 들인 진시황도 결국은 장수를 위해 수은을 장기 복용함으로써 죽음에 이르렀고, 수많은 사람들이 불로불사를 꿈꾸다가 한 세상 헛되게 보내고 말았다. 그처럼 좁고 짧은 세상 아등바등 살았던 것에 비한다면 우리 선조들의 죽음에 대한 의연한 자세는 정말 존경의 범위를 넘어선 득도(得道)의 경지가 아닐까 싶다.
이런 즐김 속에서 필자는 또 한 번 한국성이라 생각하는 ‘여유로움’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국 대표팀이 다른 나라 골대에 골을 작렬시키는 그 순간, 온 몸이 찌르르 울리는 전율을 느낄 것이다. 그것이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그런 전율을 느낄 정도의 짧은 여유로움을 가진 민족이 바로 우리들이다. 그렇기에 사자를 보내는 순간에도 울음으로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번쯤 미소를 지어보이며 사자를 저승으로 보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 모든 것이 많이 갖고 내가 부자여서 느끼는 것들이 아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여유의 유무는 갖고 있는 물질의 다소 차이가 아니다. 이는 생각하는 여부에 따라서 달라지기 마련이며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우리 민족은 비록 가진 것은 적지만 그 안에서 행복과 만족을 느낄 줄 알았기에 풍족한 여유로움을 즐길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문화유산(文化遺産) 속의 한국성(韓國性)
필자가 고고미술사학과에서 고고학과 미술사학을 공부하다 보니 이러한 학문 속에서 한국성을 찾아볼 수는 없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이런 실증적인 유물과 유적, 즉 문화유산 속에서 한번 한국성, 즉 ‘여유로움’을 찾아보고자 한다.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고구려인들은 생전의 피장자가 쓰던 물건을 매장이 끝나고 모두 장례식 참가자들에게 나눠준다고 했다. 그런 때문인지 실제로 현재 고구려 유물로 알려져 있는 것들 중 대부분은 보루나 기타 왕궁지, 건물지 등에서 출토되는 토기와 철제유물 등이 대부분이며 실제 고분에서 출토되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물론 고구려의 고분이 연도와 현실을 갖춘 횡혈식 석실분 형태이기 때문에 후대에 도굴되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지만 원래 고분 자체에 부장품을 많이 넣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것만으로도 고구려인들의 여유로움이 드러나 있는 것임은 앞서 언급한 바 있으니 넘어가도록 하겠다.
그 밖에 고구려 고분벽화를 보면 당대 고구려인들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 천수백년 전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을 복원할 수가 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특이한 점이 고구려 병사들이 하나같이 카이젤 수염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코 밑에서 팔(八)자로 갈라져 끝이 뾰족하며 약간 위로 올라가기도 한 이 수염의 연원에 대해서는 라틴어의 황제를 뜻하는 ‘카이제르’에서 왔다는 설도 있고, 프러시아의 빌헬름 황제가 이 수염을 즐겨한 이후로 유행했다는 설도 있는데 어찌했든 이 수염을 고대에서부터 권위의 상징으로서 많이 했다고 하는데 하나같이 고구려 병사들이 이런 수염을 하고 있어 주목된다. 그 상징적인 의미는 둘째 치고 이 수염을 관리하려면 상당히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요된다고 한다.
그런데 매일같이 치고 박는 전쟁터에서 병사 개개인이 이런 수염을 유지하려면 어떠했을까? 필자는 이런 것 역시 고구려인들이 느끼던 여유로움의 소산이 아닐까 싶다. 속세를 탈피했다고까지 말하면 너무 비약적인 것이겠지만 분명한 것은 긴박한 전쟁터 속에서도 매일매일 수염 한번 매만질 정도의 여유로움을 잃지 않았음을 알 수 있으니 이 또한 얼마나 대담하고 의연한 삶의 자세가 아닌가.
고구려는 병사 개개인이 이처럼 여유로움을 갖고 전쟁터에 임했음에도 불구하고 수 ․ 당의 병사들은 이런 여유로움은 느끼지 못 했을 것이다. 오죽하면 당 태종의 고구려 침입을 두고 그가 느낀 열등감과 여유로움의 부족함이라고들 하겠는가. 대대로 중국은 광활한 영토와 풍부한 물자를 갖고 있으면서도 만족하질 못해 국제 사회에서 늘 문제아 역할을 하였다.
중국 황제 중심의 일원적 천하관(一元的天下觀)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무리한 원정을 통해 주변 세력들을 정복하고 굴복시켜야만 직성이 풀렸으며 수 양제의 경우는 그렇게 하다가 망국(亡國)의 군주가 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게다가 보다 후대의 송나라의 경우는 연운 16주를 차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거란의 요나라에 분쟁을 걸어 제 나라 백성들을 고통 속에 빠뜨리기도 했다.
이에 대해 Arthur F.Wright는 절대권력과 수많은 성공을 원하는 수 양제나 당 태종 같은 역대 중국 황제들에게서 확인되는 개성과 행동의 형태를 ‘한무제병(漢武帝病)’이라고 부르기까지 하였다. 흉노, 고조선, 월남, 서역 등을 정복해 최초로 천하를 통일했다고도 할 수 있는 한 무제의 치세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힘이 강해지면 사이(四夷)를 모두 굴복시키려는 헛된 희망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욕망과 탐욕 속에 허둥대며 살아가는 중국인들의 모습을 단적으로 묘사한 것이니, 이런 자들에게서 어떻게 삶의 여유로움이 느껴지겠는가.
많이 갖고 있으면서도 더 많이 갖고 싶어 하는 탐욕은 언제나 화를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 민족은 탐욕을 갖질 않았다. 전성기 고구려가 왜 중국을 공격하여 지배하지 않았느냐는 말들을 많이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필자가 보기에는 차면 만족할 줄 알고 부족하다 하여 억지로 채우려 하지 않았던, 그런 여유로움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고구려의 선택은 현명하여 중국에서 수십 개의 왕조가 나고 지는 사이에 고구려는 700년이라는 세월을 버텨왔으며 신라사는 세계사상 유례가 없을 만큼 긴 1천년에 가까운 시간을 단일왕조로서 유지해 왔었다. 다 이런 한국성에서 기인한 결과였을 것이다.
덧붙여 말하는 것이 왜 우리나라 건축물들은 이렇게 작으냐 하는 것이다. 경복궁은 자금성보다 분명히 작으며 고구려의 장안성도 당나라의 장안성보다 작았다. 또한 고려의 개경도 동시대 송나라나 요나라의 도성보다 작았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규모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한번 삼국시대 도성을 비교해보자.
중국은 대개 평지성이 많으며 이는 도성인 장안성이나 낙양성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당대 장안성은 인구 100만이 넘는 대규모 도시로서 세계사상 가장 많은 인구를 수용하고 있던 도시였음이 틀림없다. 그리고 동시대 고구려의 장안성은 비록 그 규모가 작은 것은 아니지만 성 안팎에 수용할 수 있는 인구는 30~50만 가량으로 장안성에 비하면 반 정도밖에 안 되는 규모였다.
하지만 고구려의 장안성을 가만히 살펴보면 외성, 내성, 중성, 북성까지 총 4겹의 성벽으로 둘러쳐져 있으며 산과 평지에 절묘하게 걸쳐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도성의 특징은 고려에게도 이어져 고려의 개경은 산자락에 비스듬히 꺾여 세워졌으며 일반적인 정사각형, 혹은 직사각형 도성과는 다른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동시대 일본이 당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여 그 수도를 장안성을 본따 사각형의 평지성으로 만든 것과 비교하면 분명 독특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이 바로 당대 사람들의 자연과 타협하고 자연과 동화되어 가는 그런 사상에 기인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평지에 거대한 도성을 지을 생각을 왜 못 했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산과 평지에 걸쳐서 독특한 구조를 이룬 복합적인 도시계획을 실시했고 또 그렇게 만들어진 도성은 실용성까지 겸비하게 된 것이다.
비단 도성 건축에서만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은 아니다. 흔히 한국의 문화를 다른 나라와 비교할 때 자주 등장하는 것이 바로 정원(庭園)의 조성인데, 한국의 정원은 그 크기가 그리 크지도 않고 그렇다고 작지도 않으면서 자연과 동화된 자연미(自然美)가 돋보인다고 한다. 백제의 정원인 궁남지라든가, 경복궁의 경회루, 신라의 안압지 등을 보면 하나같이 자연미가 돋보이는 정원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분명히 거대한 정원에 갖가지 화려한 초목과 꽃들을 심어 보는 이로 하여금 압도당하게 만든 중국의 정원, 억지로 자연을 이리저리 꺾고 비틀어 자연미처럼 보이게끔 노력한 조형미를 표현한 일본의 정원과 다른 현상이다. 일본에서 왜 분청사기나 막사발 같은 조선에서는 별로 대접받지 못하던 그릇들을 환장해서 가져갔는지 얼핏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그들은 자연미, 자연스러움, 자연과의 동화라는 부분에 있어서 한국인의 발꿈치도 따라가지 못했던 것이다. 귀얄로 한 바퀴 슬쩍 돌려 자연미를 풍긴 분청사기가 일본에서 나지 않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간단하다.
이처럼 건축물에 있어서도 한국인들은 오히려 여유로움과 자연스러움을 멋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인들의 당당함이 표출되는 건축물이나 유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장군총을 ‘동방의 피라미드’라고 하며 칭송함과 동시에 이집트의 피라미드보다 작다는 이유로 별로 신경을 쓰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장군총의 축조 수법을 언급하면 장군총이 이집트의 피라미드보다 더 대단하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장군총은 정연하게 다듬은 거대한 돌을 끼워 맞춘 적석총으로서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축조수법에 있어서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그 맞물린 돌들을 자세히 보면 ‘그랭이공법’이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랭이공법이 뭐인고 하면, 돌과 돌이 맞닿는 곳은 자연석의 생김새대로 돌을 맞추어 공사했다는 뜻이다. 즉, 있는 그대로를 사용했던 것이지 억지로 정연하게 가공해 끼워 맞춘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런 그랭이공법은 한국 전역에 퍼져있는 산성에서 심심치 않게 확인 가능하며 등산하러 자주 올라가는 남한산성에서도 쉽게 확인된다. 게다가 고려시대때는 기단석 위에 기둥을 세울 때 이런 그랭이공법을 사용하여 나무를 다듬어 건물을 세울 정도로 그 수법이 폭넓게 쓰였다. 이는 자연과 동화되고 자연과 타협하려는 마음가짐이 없으면 나올 수 없는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민족은 자연히 여유로움이 삶에 배어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장군총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광개토태왕비’는 세계 최대의 비석으로서 그 크기가 어마어마하다. 그 어느 나라, 그 어느 시대에 이처럼 하나의 돌을 얼마 다듬지 않고 자연석 그대로 표면만 마연하여 수천자의 글자를 새겨놓았단 말인가. 이 비석은 크기로서도 세계 최고라고 칭해야 마땅하지만 자연석을 거의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반짝반짝 대리석으로 만든 서구식 조형물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누구든지 억지로 만들어 가공해서 미적 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자연에서 그대로 미적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이끌어내는 것은 거의 신의 영역이라 생각한다.
더불어 말한다면 예로부터 돌(石) 다루는 데는 일가견이 있던 민족이 바로 우리 민족이었다. 돌멘이라고 부르는 고인돌, 이 고인돌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곳이 어디인줄 혹시 아는가? 그렇다. 전라남도 지역에만 1만 5천기가 넘는 고인돌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고 기타 선돌이나 다른 거석 기념물들까지 합한다면 역사시대 이전의 이 땅은 그야말로 ‘석조 건축물의 왕국’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해 사자를 매장하는 공간 혹은 제사를 지내던 공간으로 쓰던 옛날 우리 선조들. 실제 고인돌을 보면 강이나 등고선 등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다고 하니 이미 그때부터 자연과의 친화성(親和性) ․ 동화성이 엿보인다 아니 할 수 없겠다. 이런 전통이 뒤이어 전해져 전국적으로 수많은 탑과 부도, 석등 등을 남기게 했던 것은 아닐까. 수천 년 전부터 전해진 유전자 정보가 우리 핏줄에 고스란히 전해져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온 것이라고 전적으로 부인도, 긍정도 할 수는 없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그런 혈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온 것만은 확실하다. 그게 아마도 전통이고 민족성이겠지.
하물며 동양 최대 규모였다는 황룡사 9층탑, 그와 비견될 수 있는 익산 미륵사지 동 ․ 서탑 등등 우리가 갖고 있는 유적 중에는 그 규모에 있어서 다른 나라 어디와도 비교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다. 단순히 규모뿐만 아니라 그 조형 수법이나 미적 감각까지 친다면야 단연코 세계 최고로 부상할 수 있는 것들이다.
신라는 경주 전체를 불국토(佛國土)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해 수많은 불상과 절과 탑을 건축했으니 오죽하면 후대인이 경주에는 하늘의 새와 구름만큼이나 사찰이 많다고 적었을까. 통일신라 경주의 인구가 근 100만에 달했다고 하니 도시의 규모는 당나라 장안성에 필적하다 할 텐데 세상 어느 천지에 이런 규모의 도성 전체가 불국토로 치장되었단 말인가. 이런데도 우리나라의 규모가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작다고 할 것인가. 100만 인구가 사는 도시 하나를 불국토로 치장한다는 발상 자체가 쉽게 나올 수 없는 것임에도 실제 그것을 일궈낸 신라인들을 보면 대단하다는 말 밖에 할 말이 없다.
그런 것들로서는 불국사 뒤에 있는 석굴암의 본존불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인도에는 1,200개가 넘는 석굴사원이 존재하고 그 영향으로 남북조 때부터 꾸준히 조성되기 시작한 중국의 석굴사원은 600여개에 달한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있는 석굴사원은 100개도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 단연코 최고로 꼽히는 석굴암을 한번 보라. 그 과학적인 축조 방법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니 넘어가고 그 본존불을 한번 보고자 한다.
마치 살아있는 것과 같다. 필자는 중국의 석굴사원에 그려진 수많은 벽화와 그 안에 안치된 많은 불상들을 봐왔지만 석굴암 본존불만큼 정연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만들어진 불상은 보지 못 했다. 중학교 국어 수업 시간이었을 것이다. 피천득 선생님인지 아닌지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본존불을 보고 난 수필에 대해 배울 때였다. 지금도 기억나는 문구가 있으니 바로 ‘본존불 핏줄에 피가 흐르고 살이 통통하게 매만져지는 육감적인 표현’이라는 것이었다. 딱 그렇다. 석굴암 본존불은 석불(石佛)이면서도 살아있는 생불(生佛)이였던 셈이다.
이 본존불을 만든 사람이 부처는 아니었을까.
이런 유물 ․ 유적들은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하나만 더 언급하도록 하겠다. 바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 그것인데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대장경은 비단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 전반적으로 널리 만들어지던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팔만대장경의 그 엄청난 규모뿐만 아니라 그것이 전쟁 와중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현종 때 의천대가사 만든 ‘초조대장경’이 몽고의 침략으로 불타 없어지자 다시 대장경을 만들었기에 ‘재조대장경’이라고도 불리는 팔만대장경은 몽골군의 침입을 불교의 힘으로 막아보고자 하는 뜻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장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여 새긴 것이다.
경판의 크기는 세로 24㎝ 내외, 가로 69.6㎝ 내외, 두께 2.6∼3.9㎝로 양끝에 나무를 끼어 판목의 평형을 유지시켰고, 네 모서리에는 구리판을 붙인 뒤, 앞면에는 얇게 칠을 하였다. 판목은 남해지방에서 나는 후박나무를 썼고, 무게는 3∼4㎏ 가량으로 현재도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전국 각지에서 나무를 베어 바다를 통해 동에서 서로, 1년여에 걸쳐 띄어 보내고 소금기를 제거하고 나무를 다듬는데 다시 1년, 그리고 거기에 글자를 새겨 넣기까지 또 다시 1년의 시일이 소요되었다고 하니 고려로서는 전쟁 와중에 엄청난 국가적 재원을 팔만대장경 조성에 투자한 셈이다.
특히 글자를 새기는 과정은 그야말로 지성의 발현 그 자체다. ‘1자 1배’, 즉 글자 한자를 새기곤 절을 한번 하면서 열과 성을 다했기에 그 천문학적 숫자에 달하는 각자에 오자나 탈자가 거의 없다고 하니, 이것은 세계 인쇄사에 전무후무한 기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각자공 한 사람이 하루 평균 40자를 새긴다고 하면, 각자에만도 연인원 130만 명이 동원된 셈이다. 그밖에 필사공, 목공, 칠공, 운반부, 교정사, 기도승 등 인부도 매일 200명 이상이 함께했으니 판각을 완성하는 데는 연인원 약 250만 명이 참여한 것으로 추산된다. 한 장의 무게를 3kg씩만 잡아도 240톤이나 되는 경판 전체를 지천사에서 해인사로 옮기는 데만 꼬박 2년이 걸렸다고 한다.
이러한 우리 대장경을 저본으로 중국은 청나라 말엽에 와서야 ‘빈가정사장판’이란 장경을, 일본은 ‘축쇄장경’을 각각 만들어냈다. 뒤늦게 불교를 전해 받은 일본은 틈만 생기면 갖은 술수로 ‘팔만대장경’ 경판을 빼가려 시도해왔다.『고려사(高麗史)』나『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면 고려와 조선 시대에 일본은 여러 구실을 붙여 83회나 우리 대장경 인쇄를 요청했으며, 거절당하면 온갖 추태와 협박을 마다하지 않았으니 세종 때는 요청이 거부되자 일본 사신이 3일간 항의 단식하는 희극이 벌어졌으며, 전함을 보내 약탈하겠다는 엄포를 놓기도 하였다. 또한 조 ― 일 전쟁 때는 의병과 승병들이 해인사로 쳐들어오는 왜병들을 ‘왜구치’란 고개에서 막아 대장경을 지켜냈고 이후 일제는 총독부 시절에도 대장경 전부를 훔쳐갈 계략까지 꾸미고 야금야금 몇 장씩을 빼돌렸지만 결국 팔만대장경은 한국에 남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겠는가.
전쟁을 불교의 힘으로 퇴치하려는 의지, 그러나 정작 고려인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대장경을 만들어야 그 불력으로 외적을 물리칠 수 있다고 믿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고려인들의 의지였으며 고려인들의 역량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런 의지와 역량으로 인해 고려는 거란의 3차례 침입을 막아내 동북아시아에서 제후국도 아니요, 천자국도 아닌 애매하지만 확고부동한 자신의 지위를 확립했으며 원의 지배 하에서도 독자적인 문화권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원사(元史)』를 보면 세조 쿠빌라이칸이 고려를 두고 ‘전 세계에서 왕조를 보존하는 왕조는 삼한, 즉 고려뿐이다’라고 칭했을 만큼 고려인들은 당시 누가 봐도 대단한 민족이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고난과 역경을 여유로움으로 이겨냈던 선조들의 지혜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런 문화유산들이 한국에 남아있어 한국성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문화유산으로 하여금 후손들은 선조의 발자취를 더듬을 수 있고 그것을 계승할 수 있다. 고대로부터 역대 군신(君臣)들이 역사를 공부하여 그것을 기반으로 나라를 다스렸다는 것만 봐도 이런 전통성이 남아있는 문화유산의 보존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 모든 것이 여유라고 하는 한국성을 보존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통(傳統)과 한국성(韓國性)
그럼 이제 어느 정도 글을 마무리해보자. 한국성이라는 것, 한국인의 특질을 생각할 때 같이 고려해야 할 부분이 바로 흔히 전통이라고 부르는 것들이다. 왜냐하면 한국성이라는 형이상학적인 개체가 전통을 매개물로 하여 현재까지 전해진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양자의 관계는 불가분(不可分)의 관계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전통이라는 것은 직역하면 ‘큰 줄기 혹은 혈통을 전하다’는 뜻이다. 즉, 이전부터 죽 내려오는 어떤 것을 후손들이 대대손손 계승하여 전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이라는 것은 그 범위를 설정하기가 상당히 어렵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어느 민족이든, 산속에서 수천 년간 완전히 고립되어 살지 않는 이상은 다른 문화권 혹은 다른 집단과의 교류를 통해서 그 문화를 영속시켜가기 때문이다. 하물며 오늘날 미국이나 러시아, 중국과 같은 다민족 국가라면야 문화라는 것에 대해 정의를 내리기가 더 어려울 것이다.
필자는 그렇게 봤을 때 전통이라는 것이 당대 사람들이 어떤 이유에서, 어떤 계기로, 어느 범위까지 설정하게 되고 그렇게 그 범위 안에 들어간 문화적 요소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변형되기도 하고 혹은 폐기되기도 하면서 전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후손의 필요성에 의해 임의로 설정된 것이 전통이며 전통 그 자체로서의 객관적인 실체는 엄밀히 말하면 없다고 보는 것이다.
역사가 늘 그렇듯이 그 당대에 그 가치를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은 없다. 괜히 새 왕조가 개창하면 이전 왕조의 역사를 새롭게 정리하고, 새 왕이 등극하면 이전 왕의 일대기를 그제야 편찬하는 것이 아니다. 당대의 시각으로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바라보면 지극히 주관적인 시각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본질적인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한세대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이 흐른 뒤에 이전의 역사나 문화를 되돌아보면 보다 객관적으로 그것을 평가할 수가 있다.
물론 이때 주의할 점은 뒤 세대의 주관적 가치가 개입될 여지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크게 개의치 않아도 되는 것이 이전 시대의 역사적 사실은 그대로 전하되 그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후손의 시각이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본래의 역사적 사실만 훼손되지 않으면 얼마든지 객관적으로 후대에 그것들에 대한 가치 평가가 이뤄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조선 후기 정치판도에 첨예한 대립구도를 형성하게 된 예송논쟁(禮訟論爭)의 경우 지금 와서 보면 얼마든지 융통성 있게 처리할 수 있는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정치인들, 그러니까 유학자들은 민감하면서도 세세한 부분까지도 차이점을 들어 논쟁을 그치지 않았다. 이런 예송논쟁은 그 논쟁이 벌어지는 당대의 시각에서 본다면 그야말로 각자의 생각이 옳은 것이고 상대방의 생각이 틀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예송논쟁이 정치권의 쟁탈과도 연관이 되기 때문에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한 발짝 물러나 뒷세대가 보기에 예송논쟁은 정치적 권력 다툼에서 발생한 논쟁일 뿐, 진정한 예와 의를 논하려는 학문적 논쟁이 아니었다. 즉, 논쟁이라고 하는 본질적인 의미가 퇴색된 것이다.
즉, 어느 역사적 사실이든지 그것을 바라보는 시대의 주관적 시각은 개입될 수 있다. 단, 그 역사적 사실이 사실 그대로만 전해진다면 그에 대한 각 시대별 객관적인 평가는 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객관적인 평가는 당대에는 절대 이뤄질 수가 없는 것이라 본다.
이는 문화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데 예전에는 남자가 ‘장가간다’는 말이 당연시되지만 요즘에는 여자가 ‘시집간다’는 말이 더 널리 쓰이는 것이 그러하다. 이는 2차례의 조 ― 일 전쟁 이후 예학과 보학의 강화로 인해 조선시대 남성들이 여성들의 순결과 혈통을 강조하며 그네들의 삶을 옥죄다보니 생겨난 것인데 그 말을 쓰기 시작한 그때, 앞으로는 ‘시집간다’는 말만 써야 하므로 그렇게 하라, 고 정책적으로 확실하게 정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즉, 이는 당대에 정해진 것이 아니라 후손들이 어느 시점에 보편화시키면서 널리 통용되어 오늘날 하나의 상용어구로 자리 잡은 것인 셈이다.
이처럼 어느 문화든지 그것을 후대에 대대손손 전통으로 남기고자 하는 의도에서 정착되는 것은 없다. 물론 타국을 식민지배하는 과정에서 토착 문화를 말살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자국의 문화를 심는 경우가 있으며 우리나라 역시 일제강점기 35년 때문에 본의가 아니게 의도적으로 일본 문화를 이식받은 사례가 적지 않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우리는 전통문화라고 명명하지는 않는다. 그저 여러 문화적 요소들 중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전통은 다르다. 그렇게 정책적으로, 정확하게 어느 시기를 기점으로 퍼져나가는 것이 아니다.
James E. Dougherty와 Robert L. Pfaltzgraff는 ‘국력’의 요소로서 인구, 국토의 크고 작음, 천연자원, 국민의 교육과 기술수준, 국민총샌산, 과학기술인프라, 수출입(대외무역의 규모), 해외투자, 군비지출, 군사력, 농업생산력, 그리고 식량의 자급 생산능력 등을 들고 있다. 이것은 경제적, 생산력, 군사력을 대변한 가시적인 요소들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Joseph Nye는 여기에 더해 연력(Soft ― Power), 즉 국민의 사기, 정치체제의 안정, 단결, 행정의 효율, 법 제도의 운용, 남을 끌어들이는 요소 등의 비가시적 요소를 더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봤을 때 문화적인 부분이 국력의 일부분으로서 처리될 수도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이는 곧 문화나 전통이라는 것이 어느 시점에 후손들에 의해 설정된 것이라는 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문화라는 것은 그 나라의 국제적 영향력을 가늠하는 척도로 작용할 수 있으며 더불어 국민의 사기, 정치체제의 안정, 단결 등과도 밀접하게 연결되기 때문이다. 앞서 봤던 ‘현대판 동맹’이라고 할 수 있는 월드컵 특수가 그것이다.
도자기가 영어로 China로 소개되어 세계 각지로 판매되는 것도 그러하며 사무라이와 일본도가 강인하고 꼿꼿한 일본의 이미지로 자리매김하는 것, 중국이 두려워할 정도로 아시아를 강타하고 있는 한류(韓流) 열풍 등 이 모든 것들이 그 나라의 연력으로서 작용하는 것들이다. 바야흐로 ‘문화(文化)의 세기(世紀)’가 도래하는 것이다.
과거 고구려의 맥적(貊炙)은 오늘날의 김치처럼 중국인은 물론 북방 유목민들도 즐겨 먹을 정도의 인기 있는 음식이었으며, 당시 약재로서 널리 통용되던 고구려의 인삼은 현재까지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특산품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더불어 고려청자는 청자의 본고장인 중국을 누르고 세계 최고의 상품으로서 천하를 주유(周遊)했었다. 이 모든 것들이 실질적인 무역이라는 형태를 띠고 일어난 결과물이지만 그 안에는 문화라고 하는 연력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전통(傳統)과 김치
그럼 무궁화의 나라, 김치의 나라로 알려져 있는 우리나라의 전통의 시작은 어디이고, 어디까지가 전통이고, 전통이라는 용어의 정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글쎄, 결론을 도출해내기 상당히 어려운 시점에 이르렀다. 앞서 봤듯이 우리민족의 전통의 시작은 일단 어느 정도 문화적 공통점을 확인할 수 있는 시점인 단군조선 때부터가 아닐까 싶다.
물론 그 이전부터 단군조선이 형성될 수 있는 문화적 기반이 마련되어 있었을 것이지만 문헌상 확인할 수가 없고, 관련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선사시대(先史時代)를 우리 문화와 전통의 시작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이다. 물론 선사시대에도 동북아시아 각지에서 다양한 문화권의 흔적들이 발견되고 있고 그런 각 문화권의 문화적 요소들이 한데 어우러져 단군조선이라고 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정치체를 형성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흔적들이 현재 고고학적 근거로만 남아있기 때문에 실증자료를 통해 그 당시 사회 전부를 복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문헌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러했을 때 우리가 그 상한점으로 잡을 수 있는 것도 단군까지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렇게 수천 년간 시간이 흐르면서 형성된 우리 민족, 즉 오늘날 한민족(韓民族)이라고 부르는 우리들의 혈통적인 면은 엄밀히 말하면 잡종(雜種)이다. 고구려나 발해만 하더라도 숙신, 읍루, 말갈, 거란, 오환, 선비, 돌궐족 등 무수히 많은 북방 유목민들과 접촉했으며 이후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 조선에 이르게 되면 여진, 몽골, 만주족 등 북방 유목민들과 지속적인 교류 속에서 문화권을 형성하게 된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백제의 경우는 남중국은 물론 베트남과 동남아시아 각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또한 일본과도 중요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심지어 신라의 경우는 이슬람인들까지 활동했다고 하니 혈연적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의 뒤를 이어 등장한 각 왕조의 구성원들 핏줄 속에는 정말 엄청나게 많은 다민족의 피가 섞여 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처럼 핏줄만 본다면 분명히 우리 민족을 두고 단일민족(單一民族)이라고 말할 수 없을 텐데도 이런 용어 사용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아마도 전통과 문화 등에서 우리 민족이 동일한 것들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으로 봐야할 것이다. 당연히 우리의 핏줄만큼이나 우리의 문화적 요소는 다양한 문명권에서 전해 받은 것들이 많다. 그리고 그 문화들을 전해 받는 과정에서 일부는 토착화하면서 변질되었고, 어떤 것들은 원형 그대로 자리매김하여 새로운 전통으로 등장했으며 어떤 것들은 점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변화의 접점에서 후손들의 필요에 의한 것들이 살아남았다고 필자는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이라는 용어의 일반적인 의미에 대해서 정의할 수는 있어도 전통의 갈래 혹은 전통의 범위를 어디까지 설정해야 하는지는 사람 나름대로 견해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을 끝맺으면서 필자는 김치 이야기를 하나 하고자 한다.
김치라는 것은 본래 별게 아니었다. 단순한 절임채소식품으로서 수분이 많은 채소류를 저장하기 위하여 소금에 채소를 절인 것이 바로 김치인 셈이었다. 이러한 채소절임류는 전 세계 각지에 존재했는데 그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들이 있다.
첫째는 중국 전파설인데『시경(詩經)』을 보면 저(菹)라고 하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것이 서쪽으로 전파되어 피클 및 사워크라우트가 되었고 동쪽으로 전파되어 식염보존권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다만, 차이점이라면 동양권에서는 소금뿐 아니라 장, 쌀기울, 술지게미 등 보다 진보된 형태로 남게 된 것 뿐이라 한다. 둘째는 자생설인데 식초나 제염 방법이 각 문화권에서 독특하게 자생한 것을 봤을 때 그것을 침채원으로 하는 소금절임채소 역시 각 문화권에서 자생했을 것으로 보는 설이다. 이 역시 각 나라마다 서로 상이한 형태의 형태로 소금절임채소가 남아있기 때문에 설득력 있는 설이라고 볼 수 있다.
어찌했든 이렇게 봤을 때 분명 김치는 ‘한국적인 것’이다, 라고 볼 수만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류 공통이 보편성을 획득하고 또 보편성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김치는 특수성을 획득하여 한국의 전통음식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일까. 필자는 그 수천 년의 김치 전래 과정이 바로 그 후손들의 필요성과 요구에 의해 지속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실제 상고시대부터 이런 채소절임을 먹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문헌에서는 쉽게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어염(魚塩)이나 해(醢) 등의 젓갈류 등에 대한 기록이 보여 소금으로 음식을 절여먹었던 것만은 분명한 듯싶다. 그밖에 된장과 같은 발효식품도 특산품으로서 산출된 것을 보면 채소절임을 먹긴 먹었으나 하나의 특화된 음식으로, 혹은 주목받은 주요 음식으로 인지된 것만은 아닌 듯싶다. 즉, 오늘날 한국인의 밥상에 꼭 매콤한 김치가 올라가야 하는 것과 달리 고대에는 이런 인식이 적었다는 소리도 될 수 있다.
문헌에서 확인되는 채소절임의 용례는『고려사(高麗史)』의 것(983)이 가장 빠르다. 그러나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그 이전부터 채소절임을 먹지 않았다고 볼 수만은 없다. 다만, 고려시대때부터 채소절임이 문헌에 따로 기재될 만큼 그 존재가 이전보다 부각되었다고 봐야만 할 것이다.
실제 고려시대가 되면 좀 더 독창적인 채소절임 방법들이 개발되는데, 김치의 원료가 더욱 다양해짐은 물론 담금법이나 각종 향신료 등의 첨가로 담금 김치를 비롯해 물김치까지 그 종류도 가지각색으로 늘었다. 문헌에는 미나리저, 부추저, 죽순저, 무저 등 4종의 김치가 나오는데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김치와는 분명 차이가 있다. 그리고 아직까지 우리만의 특징적인 면이 나오지는 않고 있다. 하지만 이규보의『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1168)을 보면 드디어 무김치에 대한 확실한 기록이 등장하고 동시대 고려의 각 문집에서 창포김치, 파, 마늘, 생강, 갓을 장에 절여 만든 장김치, 무나박김치의 형태를 띤 나복침채라는 김치에 대한 기록이 속속 확인된다.
그리고 여말선초가 되면 조선의 김치는 동양권의 다른 나라들과 확연히 다른 특화된 음식으로 변모하게 되는데 미나리, 생강, 마늘, 파, 여뀌, 차조기와 같은 향신채소가 첨가되는 양념침채법이 자리 잡게 시작하고 물김치류가 등장하면서 기존의 짱아찌 형태의 김치로부터 한 단계 진화된 형태의 김치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더불어 조선 후기 유입된 고추가 본격적으로 김치의 양념으로 사용되면서 그 형태는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재료가 더욱 다양해져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음식이 완성된 것이다. 뒤이어 1800년대에는 배추가 본격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했고 통배추 김치의 제법(製法)이 소개되면서 1870~1900년 초 사이, 조선 배추의 육종이 성공하면서 비로소 오늘날의 배추김치 형태가 완비된 것이다.
그럼 우리 김치 전통의 원형은 19세기 말부터라고 해야 할 것인가? 물론 아닐 것이다. 전통이라는 것은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존재가 아니기에 전통 계승의 유무는 현재의 형태를 기준으로 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후손들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좌우될 수밖에 없다. 만약 김치가 오늘날까지 문헌에 쉽게 등장하지 못할 정도의 중요하지 않은 음식이었다면? 필자가 보기에 그렇다면 김치는 비록 수천 년 전부터 우리 민족이 채소절임으로 해먹던 음식이었음에도 전통음식으로 자리 잡을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고려시대 때부터 주목받기 시작한 김치는 ―『고려도경』을 보면 당시 고려에서 육류를 섭취한다는 것이 상당히 어려웠던 듯싶은데 그런 과정에서 영양소를 효율적으로 섭취할 수 있는 채소에 주목했던 것이 아닌 듯싶다 ― 조선시대를 거쳐 분명히 중국이나 일본과 다른 길을 걸어 오늘날 우리 밥상에 올라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후손들이 김치를 전통음식으로 여길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 고려시대 때 김치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도 후손의 필요성과 당시 사회가 요구한 결과물이요, 조선시대 때 김치가 발전하여 조선의 특산품으로 완비된 것도 그러하며 오늘날 세계 시장에 한국의 전통음식으로 수출하는 것도 다 그러한 연유 때문인 셈이다.
즉, 시간이 흐르면서 매번 그 시대 후손들의 필요와 요구에 의해 결정되고 변화하는 것이 전통인 것이다. 그렇다고 매번 그 시대 후손들이 다른 생각과 전혀 새로운 사상체계를 갖고 있었다고 오해하면 안 된다. 이미 소금에 채소를 절여먹는다는 기본적인 보편성과 함께, 여타 다른 문화적 요소들을 인정함으로써 우리 민족은 분명히 이전 세대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한때 일본이 우리의 김치를 흉내내되 그들이 싫어하는 마늘, 고추, 젓갈의 함량을 줄이고 그들이 좋아하는 단맛을 강화하여 발효를 거치지 않는 겉절이식 김치인 ‘기무치’를 만들어 세계 시장에 내놓은 적이 있다. 마치 그것이 김치인 양, 김치가 일본 전통음식인 양 말이다. 뒤늦게 세계 시장에 뛰어든 우리가 결국 김치시장을 석권하였지만 이런 일들에서 볼 수 있듯이 문화라는 것은 연력이자 그 나라의 이미지, 오랜 영속성을 지니는 전통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하게 취급될 수밖에 없고 얼마든지 가변적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이 김치 전쟁(?)에서 승리했다면 세계는 기무치를 일본의 전통음식으로, 김치를 기무치의 변형으로 알지 않았겠는가 ― 얼마 전 세계의 5대 식품으로 한국의 김치가 꼽혔다 ―
선조들이 전해준 큰 틀은 유지하면서 그 안에서 얼마든지 변혁을 겪을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하는 존재, 그것이 아마 전통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런 전통이 하나하나 모여 한국성을 형성할 수 있는 것이고 핏줄 속에 대대손손 유전자 정보를 남겨놓아 ‘대~한민국’이라는 소리만 외쳐도 전율이 흐르게 하는 것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