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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너무 깊어
갈수록 철 지난 로봇처럼 되는 몸
길이나 잃지 말아야겠다.
길이라니?
버스와 전철 번갈아 타고 걸어
서촌보다 더 서쪽 동네 가게에 들러
맥주 한잔 시원하게 들이키고
인왕산 서편을 달관한 로봇처럼 천천히 걸으며
빈 나무에 단풍 몇 잎 떨어지지 않고 모여
가르랑대고 있다.
'이제 말 같은 건 필요없다. 가르랑!'
로봇도 소리 물결 일으킨다.
'평생 찾아다닌 거기가 결국 여기?'
그래, 내고 싶은 소리 다들 내보게나.
숨 고르려 걸음 늦추자 마침
해 지는 곳을 향해
명상하듯이 서 있는 사람 하나 있다.
나와 비슷한 수준의 로봇이군.
방해되지 않을 만큼 거리 두고 나란히 선다.
흰 구름장들 한참 떼 지어 흘러가고
붉은 해가 서편 하늘을 뜬금없이 물들이다
무엇엔가 빨리듯 하늘 뒤로 넘어간다.
옆 로봇이 천천히 내쪽으로 몸을 돌리며
혼잣말처럼, '하늘에도 앞뒤가 있군요.'
내가 머뭇대자 그는 혼잣말처럼,
'앞보다 뒤가 더 큽니다.'
말을 아끼는 로봇이군!
혼자 언덕을 내려오며
나도 모르게 그의 말을 풀이했다.
'앞서간 삶보다 뒤에 남은 삶이 더 버겁습니다.'
내리받인데
숨이 찼다.
- 황 동규 시 ‘ 서촌(西村)보다 더 서쪽 ’
* 오늘 하루만이라도, 문학과지성사, 2020
'지금 내 마음은 저 붉고 둥근 해 넘어가기 직전
아직 빛이 남아 있는 검푸른 하늘 한 조각
돌돌 말아 속에 간직하고 싶다.
저 빛마저 사라지면
지난해보다 전깃불 두 배로 켜서 밝히는
덜 어둠으로 더 어둠을 밝히는 밤이 오리라.
허나 조금 전 신문에서 이름 글자 하나 잘못 읽고
이름 좀 제대로 달고 다녀! 내뱉은
내 속의 어둠이 더 캄캄하다.
방금 발 헛디뎌 휘청거린 저 보도블록 파인 자리도
내 속보다는 덜 파였다.'
47년 만이라는 추위를 헤치며
카페인 파낸 커피 사러 슈퍼에 가면서
누군가 촌스럽게 투덜댔다.
이번엔 파인 보도블록을 슬쩍 피하며
누군가 다독엿다.
'마음보다는 그래도 눈을 믿게'
- 황 동규 시 ‘ 마음보다 눈을‘
간 겨울 눈에 주저앉은 비닐하우스가
생시처럼 여기저기 널려 있는 꿈
깬다.
초여름에 겨울 꿈을 꾸다니!
프로이트에 의하면 진짜 꿈은 다 개꿈이라지만,
꿈의 출구에 삶의 입구 표지를 붙일 수는 없다.
새벽길 나서니 길섶 흥건히 젖어 있고
먼동 트는 하늘에는 금빛 별 무리
땅에는 은빛 별꽃 무리
별꽃, 석죽과의 막내 꽃,
별빛 한 줄기 줄기는 별꽃잎의 하트형이라고
초여름 새벽이 일러준다.
지금 뛰는 가슴도 하트형이다.
가라.
그냥 가라.
별꽃이 삶의 이마에 뜰 때까지,
삶의 출구가 꿈의 입구로 열릴 때까지.
가라.
그냥 가라.
별꽃이 아니면 또 어떠리.
이 세상 어디엔가 꽃이 눈뜨고 있는 길이면,
초여름 새벽을 가라.
- 황 동규 시 ‘초여름의 꿈‘
*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문학과지성사. 2003
추석 가까운 가을날 오후
새로 건물을 짓는지 여기저기 숨어 발을 걷어차는
잡석雜石들에게 험담하며 산길 오르다 만난
진한 냄새!
막 벌초한 무덤가에서 발을 멈췄다.
예초기가 앵앵 날카로운 소리로 돌아다니며
풀들의 생 허리를 잘랐군.
이맘때 한창 맵시 내는 패랭이 쑥부쟁이 들의
아랫도리도 날렸겠지.
숨 한번 깊이 들이쉰다.
인근의 풀냄새 나무 냄새 흙냄새에 사람 냄새까지
모두 합친 것보다도 더 화끈한,
삶을 삶 밖으로 내놓고야 드디어 낼 수 있는 냄새가
이처럼 삶 가까이에 고여 있다니!
- 황 동규 시 ‘화끈한 냄새’
* [오늘 하루만이라도],문학과지성사, 2020.
1
오디오 둘러메고 한강 남북으로 이사 다니며
개나 고양이 곁에 두지 않고
칠십대 중반까지 과히 외롭지 않게 살았으니
그간 소홀했던 옛 음악이나 몰아 들으며
결리는 허리엔 파스 붙이고
수박씨처럼 붉은 외로움 속에 박혀 살자,
라고 마음먹고
남은 삶을 달랠 수 있을까?
2
사는 건물을 바꾸지 않고는 바꿀 수 없는 바램이 있다.
40년 가까이 아파트만 몇 차례 옮겨 다니며
'나의 집'으로 가는 징검다리거니 생각했다.
마지막 디딤돌에서 발을 떼면
마련한 집의 담을 헐고
마당 절반엔 꽃을 심자.
야생화 밟지 마라 표지 세워논 현충원 산책길엔 도통 없는
노루귀 돌단풍 은방울꽃
그래, 몰운대(沒雲臺)에서 눈 크게 뜨고 만난 은방울꽃
카잔차키스 묘소에 열심히 살고 있던 부겐벨리아
루비보다 더 예쁜 루비들을 키우는 노박덩굴을 심자.
겨자씨 비유의 어머니 겨자도 찾아 심자.
나머지 반은 심지 않아도 제물에 이사 와 자리 잡는 풀과
민박 왔다 눌러앉은 이름 모를 꽃들에게 내주자.
개미와 메뚜기 그리고 호기심 많은 새들이 들르고
벌레들도 섞여 살겠지.
그래, 느낌 서로 주고받을 마당이 있고
귀 힘 아주 빠지기 전 오디오 볼륨 제대로 올려줄 집이 주어진다면!
오크통에 30년, 책장 구석에 30년, 세상 잊고 산 위스키 앞세워
와인과 막걸리와 칵테일을 모아 친구들을 불러
먼저 가버린 자들도 번호 살아 있으면 문자를 보내
파티를 열자. 바램은 아직 유효하다.
3
유효할까?
파티 다음 날, 종일 속도 마하 0으로 움지이는 텅 빈 맛이
몸에 버틸 힘을 줄까?
가을 들어 처음으로 은행잎이 비행 연습을 시작하는 저녁
동향한 창밖으로
건너편 언덕 아파트의 모든 창들이 일제히 황금향으로 피어난다.
대가(代價) 없이 자신을 태우는 황금의 절창들!
지금 사는 아파트에서는
한 해 가운데 이 한때가 가장 마음에 든다.
'가장'이라는 말에는 지금까지라는 뜻이 숨어 있고
다음은 텅 빔?
조금 전 건물 입구에서
시들고 있는 꽃에게 안부를 물었다.
코끝에 맴돌자마자 사라지는 향기로
꽃은 답했다. 텅 빔?
바램의 속내가 가짐인가 텅 빔인가?
햇빛 스러지며 한 자락씩 황금에서 어둠으로 바뀌는 창들이
차례로 물음을 던진다.
4
그간 군(郡)에서 주차장 집어넣고
매점과 화장실 내고 길 펴고 넓혀
오르내리는 맛을 한껏 줄인 몰운대,
발걸음 멈추게 하던 제비꽃 달개비들 사라지고
숨었다 들키던 은방울꽃 자취 감추고
미끄러워 마음 잡아주던 바윗길은 보이지 않고
올라보면, 시야 가득 차오는 비닐하우스들
뜬구름도 뜨지 않고
아 '몰운대'에서 풀려난 몰운대!
그 언저리에 집 한 칸 마련해
강원도에서 차를 몰다 덜 살고 싶을 때면 슬그머니 들러
낮에는 대에 올라 다른 아무데도 눈 주지 않고
밤에는 모깃불 피워놓고 모기 침 쿡쿡 맞으며
답답함에서 풀려나리라던 긴 긴 꿈에서
이젠 새삼 놓여나지 않아도 괜찮게 되었는가?
영영 놓여나지 못하게 되었는가?
5
바위틈에 발톱 박고 서 있는 나무 다섯 그루
바로 뒤에 야트막한 초막
비어 있다.
그 뒤로 흐르는지 안 흐르는지 말없이 넓게 펼쳐진 물
물 건너 그림자 하나 없이 커다랗고 깨끗한 산.
원나라 화가 예찬(倪瓚)의 한없이 맑고 적적한 산수는
은둔 신호만 켜지면 모든 것 놔두고 들어가
신선인 듯 가볍게 거닐고 싶었던 곳.
오늘 그의 그림 다시 들여다보니
사람들도 짐승들도 그냥 들여다보기만 했을 뿐
멧새 하나 날지 않는다.
들어오려면 그림자도 놔두고 오라?
읽던 책 그대로 두고 휴대폰은 둔 데 잊어버리고
백주(白酒) 한 병 차고 들어가
물가에 뵈지 않게 숨겨논 배를 풀어 천천히 노를 저을까?
건너편을 겨냥했으나 산이 통째로 너무 크고 맑아
무심결에 조금 더 무심해져
느낌과 꿈을 부려놓고 그냥 떠돌까?
바람이 인다. 갑자기 구름 떼들이 이리저리 몰려다니고
여기저기 물기둥들이 솟아 상체를 흔들고
얼음처럼 투명한 해가 불타며 하늘 한가운데로 굴러 나온다.
바위에 발톱 박은 나무들이 불길처럼 너울대자
부리 날카론 새들이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몰려든다.
느낌과 상상력을 비우고 마감하라는 삶의 끄트머리가
어찌 사납지 않으랴!
예찬이여, 아픔과 그리움을 부려놓는 게 신선의 길이라면
그 길에 한참 못 미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간간이 들리는 곳에서 말을 더듬는다.
벗어나려다 벗어나려다 못 벗어난
벌레 문 자국같이 조그맣고 가려운 이 사는 기쁨
용서하시게.
- 황 동규 시 ‘사는 기쁨’
* 사는 기쁨, 문학과지성사, 2013
집에서보다는
길에서 가고 싶다.
톨스토이처럼 한겨울 오후 여든두 살 몸에 배낭 메고
양편에 침엽수들 눈을 쓰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눈
혼자 터벅터벅 걸어 기차역에 나가겠다가 아니라
마지막 쑥부쟁이 얼굴 몇 남은 길섶,
아치형으로 허리 휘어 흐르는 강물
가을이 아무리 깊어도
흘러가지 않고 남아 있는 뼈대
그 앞에 멎어 있는 어슬어슬 세상.
어슬어슬, 아 이게 시간의 속마음!
예수도 미륵도 매운탕집도 없는 시간 속을
캄캄해질 때까지 마냥 걸어.
- 황 동규 시 ‘집보다는 길에서’
*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문학과지성사, 2003
쌀알 눈 사르락사르락 내리다 말다 할 때
어느 골짜기도 좋지만
우연히 들른 이름 없는 골짜기
일주문도 없이 숨어 있는 조그만 절에 닿기 직전
꽃이라든가 녹음이라든가
여럿이 내는 새소리라든가
돌 박힌 길에 제대로 착지 못하고 구르는 낙엽이라든가
긴 눈 맞고 있는 전나무 길이라든가
그런 게 없어
걷던 발걸음 그대로 오른다.
다 왔다.
깨끗이 비질한 마당에 눈 더 내리지 않아
무언가 더 쓸거나 지울 것이 없다
꽃 있던 자리에 꽃 없고
풀 있던 자리에 풀 없고
사람 있던 자리에 사람 없는 곳
그나마 마음 앗던 수국 불두화 배롱꽃이 없으니
박태기꽃마저 없으니
나비처럼 날아가 나비처럼 앉으려 해도 닿을 수 없었던
그래서 더 닿아보고 싶었던
생각이 끝 갈 데가 어딘가, 마음속에 떠올릴 연유마저 없다.
한눈에 들어오는 마당, 전부를 그대로 느껴버린다.
사람 사는 거리에서 그처럼 외우고 지우고 하던
색(色)의 본색이 바로 이것이었나?
어디선가 눈 한 톨 날려와 손등에 앉는다.
느낌 하나가 새로 태어나
자리 잡으려다 자리 잡으려다 잠잠해진다.
무언가 짧게 흐르다 만다.
- 황 동규 시 ‘ 잘 쓸어 논 마당‘
* 겨울밤 0시 5분, 문학과지성사, 2015
뻐꾸기 둘이 번갈아 성대(聲帶) 겨루면서
사람의 목젖 풀어주는 늦봄 아침,
산책 코스에서 빼버렸던 현충원 윗목 장군 묘역
오늘은 한잔 거나하게 걸쳤는지 얼굴 불콰하게 앉아 있길래
생각 고쳐먹고 축대에 오르니, 아 장미들,
달고 싸한 향내 속에서 막 고개 드는 이마,
살짝 옆으로 돌린 목덜미,
이슬 가볍게 문 입, 몰래 웃는 뺨,
불꽃심과 불꽃이 아직 한 몸인 저 막 당겨진 불길들!
불 위에서 날개 접은 채
내가 어떻게 날아다녔지? 회상에 잠긴 나비와
불 한가운데 몸을 박고 떠는 벌,
장미, 나비, 벌, 다 넘쳐흐르는 삶의 박(拍)을 타고 있다.
서로 속삭이느라 한참 놔두어도
좀체 떨어지지 않는 젊음 한 쌍을 뒷눈으로 보며
두근대는 불꽃 하나를 슬쩍 뜯어 씹어 삼켰다.
뜨겁고 환한 것이 천천히 실하게 배 아래까지 내려와
하체를 달궜다.
기동훈련?
이것 봐라!
그래, 상스러움도 모시고 살자.
장미 불길이 여기 타오르고 저기 타오르는 이 공간
무슨 몰기교가 따로 필요하겠는가?
- 황 동규 시 ‘ 몰기교(沒技巧)‘
[사는 기쁨],문학과지성사, 2013.
휴대폰은 주머니에 넣은 채 갈 거다.
마음 데리고 다닌 세상 곳곳에 널어뒀던 추억들
생각나는 대로 거둬 들고 갈 거다.
개펄에서 결사적으로 손가락에 매달렸던 게,
그 조그맣고 예리했던 아픔 되살려 갖고 갈 거다.
대낮이다. 밥집으로 갈까,
쥐똥나무 꽃 하얗게 핀 낮은 울타리 길을 걸을까?
꽃은 떨어져 흙으로 돌아가는데
떨어지는 높이가 낮을수록 뭔가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흙이 아니고 아스팔트면?
피곤한 아스팔트 같은 삶의 피부에 비천상(飛天像) 하나 새기다
퍼뜩 정신 들어 손 털고 일어나 갈 거다.
- 황 동규 시 ‘연옥의 봄 4‘
* 연옥의 봄, 문학과지성사, 2016
산책 도중 봄비에 갇혔다.
비 내린다는 날씨 예보 깜빡했던가?
내 언제 그런 데 고분고분 귀 기울이며 살았던가?
하늘의 절반 이상을 벚꽃과 나비와 새들로 수놓던
햇볕 슬쩍 퇴장하고
막비 쏟아진다.
난간 없는 마루에 지붕만 얹은 빈 정자에 걸터앉아
꽃잎들 마구 떨어져
아스팔트 위로 씻긴 그림처럼 흘러오는 것을 본다.
한때 빗줄기 속을 내달리며 짐승 소리 내지르게 했던
봄비,
지금도 엇비슷한 얼굴과 목소리로 내린다.
멀거니 보고 있으려니 속이 답답하다.
누군가 빗줄기 속을 내달리며 들어오라 소리 지르면
같이 달리며 소리칠 수 있을까?
무슨 소리?
미래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인간의
내도 좋고 안 내도 그만인 소리?
그 소리도 성대(聲帶)를 울려 내는 소리가 아니겠는가
가만, 비 한쪽이 훤해진다.
가늘어진 비 맞으며 집에 내려가려다
마음 잠시 끄고 좀더 앉아 있기로 한다.
마음의 채 꺼지지 않는 부분은
저 앞에 혼자 치고 있는 번개로 족하다
- 황 동규 시 ‘봄비에‘
[사는 기쁨], 문학과지성사, 2013.
개나리 필 무렵 성했던 눈마저
황반변성 안구주사 맞기 시작했다.
앞으론 확대경 없이 신문 읽을 생각 말게!
안됐다는 듯 서달산이 아지랑이 피워 올리고
노랗고 하얗고 빨간 꽃들을 꾸역꾸역 뱉어낸다.
아지랑이 자욱이 오르는 오솔길이
한때 마음 되게 빼앗아갔던 발라드 같다.
가만, 생각해보면
지난 삶의 반절은 괜히 바쁘게 살았다.
우연히 한번 들어보니 가뿐한 호박.
나머지 반도 볼 것 못 볼 것 미리 가리지 않고
제대로 살았던가?
봄이 몸살 톡톡히 앓고 있는 곳,
오솔길 굽이를 돌자
눈이 밝아진다.
아지랑이 속에서 하양 노랑 나비들이
화들짝 날아오른다.
많은 수는 아니지만
세필細筆 춤사위들이 시각視覺을 춤추게 한다.
눈높이가 여직 이토록 눈부실 줄이야!
발라드의 끝머리에서
삶을 가볍게 날려 보내는 황홀을 노래했지.
황홀 뒤엔 지나온 길만 무겁게 남았던가.
황홀 속에 나비들이 일제히 춤추며 날았다면
발라드가 눈부신 오솔길로 이어지진 않았을까?
- 황 동규 시 ‘발라드의 끝‘
[오늘 하루만이라도], 문학과지성사, 2020.
아픔을 별처럼 노래한 만젤스탐*의 시를 읽다
현충원으로 산책 갔다.
높은 자들의 묘역에 오르는 계단 양옆의 향나무들이
전정받고 있었다.
자연스레 사방으로 뻗치던 가지들이 잘리고
모두 동그랗고 가지런한 나무들이 되고 있었다.
가지 잘릴 때
나무들은 속으로 치를 떨지 않았을까?
가지 하나는 전정 톱에 잘리고도
몸에서 떨어지지 않고 한참 건들거렸다.
산 것이 인간의 마음에 들려면
자연스런 제 모습 포기해야 하는가?
인간도 힘 거머쥔 자의 비위 거스르지 않으려면
가지 자르고 동그래져야 하는가?
그러지 않는다면?
좀 단순해지자.
압수 피하기 위해 만젤스탐이
새로 쓴 시들을 아내에게 몽땅 외우게 하고
시 없는 시인이 되어
시베리아에서 흔적 없이 사라져야 하는가?
* Osip Mandelstam. 러시아 시인. 문학 모임에서 스탈린을 회화하는 시를 읽고 이곳저곳 유배되다 시베리아에서 증발하듯 세상 떴다. 그의 주요 시는 압수를 피해 모두 외워두었던 부인이 해빙기에 기억에서 꺼내 출판했다.
- 황 동규 시 ‘산 것의 노래‘
[오늘 하루만이라도], 문학과지성사, 2020.
러시 아워에 비좁은 지하철을 타고
오랜 만에 발도 한번 밟히고
돌아와 저녁을 짓는다
창 밖에 어둠이 밀려와 쌓인다
책을 읽다 보면
마음이 너무 비좁다는 생각이 든다
어지럽게 쌓여 있는 기억과 기억, 추억,
저 시효가 영 지나가지 않는 부끄러운 일들,
조금씩 밀어 자리를 만들고
또 몇 개의 이름과 年代와 사건을 쌓아놓는다
잠간 졸다 벌써 늦은 밤이다
일기예보를 보려고 텔레비를 튼다
AIDS걸린 흑인 고아 소녀애를 양녀로 맞아
입맞추며 좋아하는 삼십대 백인 여자가 나타난다.
갑자기 한쪽으로 확 쏠리는 정신,
세상은 비좁아도 살아볼 만하다는 생각이······
- 황 동규 시 ‘ 뉴욕 日記 4‘
[견딜 수 없이 가벼운 존재들], 문학과비평사, 1988.
늙마에 미국 가는 친구
이메일과 전화에 매달려 서울서처럼 살다가
자식 곁에서 죽겠다고 하지만
늦가을 비 추적추적 내리는 인사동에서 만나
따끈한 오뎅 안주로
천천히 한잔할 도리는 없겠구나
허나 같이 살다 누가 먼저 세상 뜨는 것보다
서로의 추억이 반짝일 때 헤어지는 맛도 있겠다.
잘 가거라.
박테리아들도 둘로 갈라질 때 쾌락이 없다면
왜 힘들여 갈라지겠는가?
허허.
- 황 동규 ‘이별 없는 시대‘
[사는 기쁨], 문학과지성사, 2013.
1
만나는 사람들의 몸놀림 계속 시계침 같고
"반포 치킨"에 묻혀 맥주 마시는
내가 지겨운 기름 냄새 같을 때
읽는 책들도 하나같이 맥빠져 시들할 때
알맞게 섞인 잎갈이나무와 늘푸른나무들이
멋대로 숲을 이루고 서서
눈발 날리는 강진만을 내려다보고 있는
다산초당에 오르곤 한다,
는 실은 거짓말이고
다산 초당은 달포 전에 처음 갔다
해가 떴는데 눈발이 날리는 희한한 날이었다
몇 대의 버스와 택시를 종일 번갈아 타고
강진의 귤동 마을에 도착했다
공터에서 차의 맥박이 끊어지자
흰 눈발이 앞창을 한번 완전히 지웠다가
다시 열어 주었다.
2
바쁘게 뛰다 보면
온갖 냄새와 욕지기가 다 섞여서
멍하게 사는 것이 그 중 제일로 된다
혹은 띵하게 사는 것이......
예전 같으면 왕들이 그 사정을 눈치채고
아랫사람들에게 분부를 내리거나
친구들이 알아서 獄事를 일으켜
그대를 날오이처럼 싱싱한 곳으로 귀양보냈다
제주도 변두리나 두만강가에서
마음이 헐거워질 때까지 잊혔다 돌아온다면
혹시 진정한 "나"가 눈 앞에 보이지 않을까?
사는 맛이 화장 지운 제맛으로?
그게 안 되는 오늘날 마음이나마 유배보내야겠지
마음의 유배라니,
어느 고장에 가서 마음을 떨구고 오지?
3
떠나는 길이 떠올라야 한다
그대가 제주로 유배간다 하자
김포에 가서 KAL을 타면 빠르기야 하겠지
이젓저것 따지다 보면 그게 속도 편하고......
허나 아니지 그건,
제주 詩人 文忠誠씨가 호송관처럼 염라대왕처럼
왕방울눈 부릅뜨고 제주 공항에 나타나더라도
그건 귀양길이 아냐,
공항에서 몸검색을 하는 것까지는 유배 같지만
(혹 自決할지도 모르니)
땀구멍 하나 열지 않고 떠나며 끝나는
그런 귀양길이 어디 있어?
보다는 세면도구를 꾸려 가지고
새벽 일찍 터미널에 가서
첫출발 광주행 고속버스를 타는 거야
(莞島 배 시간에 맞춰야 하니까)
톨게이트 벗어나면 곧 눈덮인 청계산이 나타난다
운 좋으면 길 양편으로 雪花가 따라온다
운이 나쁘더라도 옆자리에서
알맞게 화장한 젊은 여자가 졸며 어깨를 그대에게 기대거나
중년 남자가 읽던 주간지를 아낌없이 건네준다
그대도 잠깐 졸고
수염 없는 새우처럼 광주 터미널에 내린다.
4
시외버스로 나주 평야를 가로지르며
마음 가라앉히고 영암으로 다가간다
평범한 산들 사이에서 月出山이 나타난다
병풍처럼 둘러친 산을 오른편에 끼고 돌 때
그대 마음을 벗어 유리창에 걸어라
바위와 하늘이 서로 치차처럼 물려 돌고 있다
같이 내려앉고 같이 솟구치며 몸부림치고 있다
몇 해 전 大興寺行 때 뛰어들었던
월출산 남쪽 無爲寺 극락보전도 月南寺터 五層石塔도
몸부림 속에 물려 돌고 있다
솟구쳤다가 가라앉는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대가 몸부림치고 있다
옆자리에서 소년 하나가
삶은 달걀을 먹다 말고 놀란 눈으로
그대를 찬찬히 쳐다본다.
5
강진행 갈림길 成田에서 그만 내린다
흰 햇무리가 하늘에 쳐 있고
성긴 눈발이 날리고 있다
그 성긴 감촉을 더듬어
월남사 터, 혹은 무위사 극락보전 후불벽화 속으로
들어가 볼 것인가?
가서 잦아든 몸부림을 확인할 것인가?
아니면 과거에도 마냥 고요했던 월남 저수지를 찾아가
홑이불처럼 내리는 눈발 속에서
견디다견디다 못해 고요를 깨뜨리고 싶어질 때까지
눈과 마음을 감고 기다릴 것인가?
이 고요 속에 갑자기 사람이 뛰어든다면
저수지 고기들이 모두 어이없어 하리라
생각에 잠긴 사이
마침 강진행 버스가 와 멎는다.
도로
6
강진은 조그만 고을
정류장 앞에서 하품을 하고 있던 택시 운전사는
엄청난 값을 불렀다
할 수 없군, 내일 버스를 타고 갈 수밖에,
돌아서자 곧 뒤에서 경적을 울리고
값이 반으로 깎였다
海南行 도로를 달리다가
세차장 있는 곳에서 비포장 도로로 접어들어
강진만을 바로 왼편에 끼고 마구 흔들댔다
茶山丁若鏞先生 유적비가 나타나고
곧 萬德山 품으로 기어들어가
드디어 귤동 마을에 닿았다
7
가파른 언덕
옷벗은 벚나무와 옷껴입은 비자나무가
질탕하게 한데 어울리고
검푸른 대숲과 꽃망울진 동백숲이
띄엄띄엄 널려 있다
마른 물푸레나무 줄기 하나가 내 얼굴을 쳤다
귀가 먹먹해지고
낮은 음성이 들려 온다
"여기까지 와서 나무타령이 웬일이뇨?"
"제주로 귀양가다 월출산에 마음 앗겨
莞島길 잃은 사람올시다
숲이 하도 그윽하길래......"
"아니다, 네것은 여행이지 귀양이 아니다"
"귀양과 여행이 뭣 때문에 다릅니까?"
"여행에는 폭력이 없느니라, 삶의 한쪽 턱밖에 들어 있지 않지"
"그렇다면......?"
음성이 끊겨 올려다보니
기와집으로 단장한 草堂이
늦오후 햇빛 속에 미소 띠고 서 있었다
8
丁石 바위가 정답고
茶山東庵도 山房도 두루 마음에 들지만
놀라운 것은 동편 언덕마루에 있는 天一閣
(茶山이 붙인 이름치고는 좀 촌스럽지만)
강진만을 한눈에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바다와 땅이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서로 안고 있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바다 건너에서는 조그만 마을들이 숨어 있고
마을 사이에는 가느단 길들이 그어져 있었다
발밑 강진읍 쪽으로
동백과 사철나무로 가득 채워진 飛來島 양편으로
거짓말처럼 돛단배 한 척씩 들어오고 있었다
오른편 하늘에선 성긴 눈발이 날렸다
두 손 무낑ㄴ 채강진만을 내려다보는
한 사내의 모습이 마음 속에 비쳤다
눈이 갑자기 환해지고
봄의 송진 냄새가 풍겨 왔다
어디선가 탁 소리가 나고
오래 용서되지 않던 친구 하나가 마음 속에서 해방된다
(이 자슥아!)
점퍼의 지퍼를 내리고 심호흡을 한다
몇 년의문으로 남아 있던 예이츠의 詩 한 가닥이
배호의 노래처럼 우습게 풀린다.
9
옆에 놓인 플라스틱 바가지를 들고
茶山이 차 달일 때 썼다는 藥泉물을 뜬다
샘안에 눈길을 주자 두꺼미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었다
버리려던 물을 그냥 들고 마신다
참 달군!
마른 연못 속에서
붉은뺨멧새 두 마리가 마음놓고 푸드덕거리다 날아간다
새가 날아간 자리에서
한 사내가 세상을 마주하고 앉는 공간이 완성된다
하늘에 다시 날리는 눈발
눈송이 몇은 천천히 內臟에서 녹이리라.
- 황 동규 시 ‘茶山草堂 ‘
[견딜수 없이 가벼운 존재들], 문학과비평사, 1988.
선배랍시고 한마디 한다면
시에도 시독(詩毒)이 있네.
일단 삼키면
꽃들이 근접 촬영, 근접 촬영! 얼굴 들이밀고
뭇 벌들 일제히 꽁지 구부리고 달려들지,
주위 사물의 범상한 표정들, 홀연히 진해져
시신경 파고드네.
해독제 찾아 인사동, 몰운대, 해남 땅끝,
지도에서 막 지워지고 있는 강원도 폐광촌을 헤맸지.
해독제는 중독된 다음에나 찾게 되는 것,
그때는 이미 죽거나 살거나 둘 중 하나네.
입 열었다 하면 늘 아귀 척 들어맞게 말하는 신기한 사람들과도
허허롭게 만나고 헤어질 수 있다면,
생각의 진실, 오래 남아 소중하고
느낌의 진실, 즉시 사라져 절실하다는 한물간 소리도
새 물건처럼 들을 수 있다면,
누런 시 가슴에 주렁주렁 매단 시인들 큰길 가게하고
목에 두른 시구(詩句) 같은 것 모두 풀어버리고
시원하게 '나'도 풀어버리고
시가 아니어도 좋은 시의 세상에
길 트시게.
- 황 동규 시 ‘ 젊은 시인에게‘
[연옥의 봄], 문학과지성사, 2016.
저 돌담 저 돌탑 저 돌무더기
끊겠다 이어졌다 저들 속에 흐르고 있는 화강암 결이
어느 날 떠올라 하늘이 되고
흐린 겨울 저녁이 되고
과일 함지 머리에 이고 걷는 아낙들이 되었으리.
너나없이 춥고 배고팠던 겨울날
옷 벗은 모델 살 돈 없는 박수근이
할 수 없이 나무들을 옷 벗겨 그리다가
달도 별도 없이 흐린 저녁 하늘 내다보며
이게 아마 마지막 물감이지 되뇔 때
몸과 마음에 화강암 옷을 해 입고
마냥 봄을, 봄을 향해 걸은 아낙들.
- 황 동규 시 ‘박수근의 그림’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문학과지성사, 2003.
게처럼 꽉 물고 놓지 않으려는 마음을
게 발처럼 뚝뚝 끊어버리고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조용히, 방금 스쳐간 구름보다도 조용히,
마음 비우고가 아니라
그냥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저물녁, 마음속 흐르던 강물들 서로 얽혀
온 길 갈 길 잃고 헤맬 때
어떤 강물은 가슴 답답해 둔치에 기어올랐다가
할 수 없이 흘러내린다.
그 흘러내린 자리를
마음 사라진 자리로 삼고 싶다.
내림 줄 쳐진 시간 본 적이 있는가?
- 황 동규 시 ‘ 찡한 사랑노래’
휴대폰 안 터지는 곳이라면 그 어디나 살갑다
아주 적적한 곳
늦겨울 텅 빈 강원도 골짜기도 좋지만,
알맞게 사람 냄새 풍겨 조금 덜 슴슴한
부석사 뒤편 오전(梧田)약수 골짜기
벌써 초여름, 산들이 날이면 날마다 더 푸른 옷 갈아 입을 때
흔들어도 안 터지는 휴대폰
주머니에 쑤셔 넣고 걷다 보면
면허증 신분증 카드 수첩 명함 휴대폰
그리고 잊어버린 교통범칙금 고지서까지
지겹게 지니고 다닌다는 생각!
시냇가에 앉아 구두와 양말 벗고 바지를 걷는다.
팔과 종아리에 이틀내 모기들이 수놓은
생물과 생물이 느닷없이 만나 새긴
화끈한 문신(文身)들!
인간의 손이 쳐서
채 완성 못 본 문신도
그대로 새겨 있다.
요만한 자국도 없이
인간이 제풀로 맺고 푼 것이 어디 있는가?
- 황 동규 시 ‘ 탁족(濯足) ‘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문학과지성사, 2003.
태평양전쟁, 유년 시절에 거치고
소년 시절엔 6·25
청년 땐 4·19와 5·16을 맞고 겪으며
매끄러운 삶은 삶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번역 책이 별로 없던 시절
집과 동네에서 혀에 굴려보지 못한 거북한 언어로
조이스, 랭보 또는 만젤스탐을 읽다 말고
언 땅에 얼굴 비빈 적 한두 번인가.
오늘 『뉴욕타임스』에서 랭보가
지금도 한참 외진 에티오피아 하라르 시市에 가서
모기와 열병에 시달리며 무기를 팔다
죽을병 얻은 기사를 읽고 잔잔하게 흥분한다.
그래, 죽을병을 얻으려면 거기쯤은 가야지!
슈베르트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 첫 악장,
죽음의 집 현관에 한발 들여 논 그의 귀에는
먼 우레 소리가 저음 트릴쯤으로 들렸겠지.
브렌델을 비롯한 여러 피아니스트들은
때로는 연주의 흐름까지 늦추며
저음 트릴을 우레 소리로 환원시키려 했지.
어쩌지, 폴 루이스는
아예 우레가 없는 것처럼 연주한다.
귀 기울인다. 온갖 고음高音으로 시끌벅적해진 세상을 향해
그의 매끈한 저음 트릴은 속삭인다.
동화처럼 순진한 행운이 지평선 어디선가 우레 소리처럼
그대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 여태 지니고 있는가?
바깥세상이 마냥 우르릉 부르릉댈 때
그 소리 실 잣듯 자아 마음의 실패에 감을 수 있다면
뵈지 않는 행운은 뵈지 않는 게 바로 행운이라고
지구의 고개쯤을 끄덕이게 할 수 있지 않을까?
- 황 동규 시 ‘ 폴 루이스의 슈베르트를 들으며‘
<문학과사회>, 2015년 겨울호.
혼자 사는 자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네.
친구여, 빈 뜰에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눈
한낮에도 멀리 뜬 해
방 안에는 조용치 않은 물
스토브의 실루엣, 아 도스토예프스키의 못 말릴 혼(魂)
스토브 위 걸대에서 마르는 속옷들
알맞게 끊긴 빈 소주병의 행렬.
꿈도 알맞게 어둡고
손바닥만 흔들어도
꺼질 듯 펄럭거리네.
- 황 동규 시 ‘겨울날 엽서 1‘
[비가悲歌], 문학동네, 2004(개정판).
아파트 낡으면서 사람도 낡아
엘리베이터에서 오래된 이웃 만나면
언제부터 우리 이렇게 됐지? 생각이 들곤 한다.
그러나 잠깐, 지금도
마음 홀리는 와인 한 병 잡으려
주머니 사정 살펴가며 마트의 와인 부스를 뒤지고
늦저녁 전철에서 빈자리 놔둔 채 꼭 껴안고 서 있는
젊은 남녀를 멍하니 바라보기도 한다.
죽음이 없다면
세상의 모든 꽃들이 가화가 되는 건 맞다.
꽃들이 죽는 이 세상에는
덮어씌운 눈 간질간질 녹이다가
살짝 웃음 띠고 얼굴 내미는
복수초의 샛노란 황홀이 있고,
해 진 줄 모르고
독서 안경 끼고도 잘 안 뵈는 잔글씨를
죽음아 너 어딨어? 하듯
읽을 수 있는 마지막 글자까지 읽어내는 인간이 있다.
- 황 동규 시 ‘ 죽음아 너 어딨어?‘
[오늘 하루만이라도], 문학과지성사, 2020.
걸음 뗄 때마다
오른편 발뒤꿈치 아프게 땅기는 족저근막염에 걸려
침을 아홉 번 맞아도 통증 기울지 않고
복수초가 피었다 졌을
지금쯤 개나리 한창일
산책을 두 달여 못 나가고
지난 주말엔 친구들이 부르는 술자리에도 못 낀 채
미술책이나 들척이다가 떠오른 것이
사 년 전인가 터키 에베소에서 다리 절면서
'원 달러, 원 달러!' 외치며 사진첩 팔던 사내
물러갈 때 심하게 다리 절름댔으나
사람들 앞에서 알아챌 만큼만 가늘게 절던 사내,
그의 얼굴 어둡지는 않았어.
몇 시간 전 거리에선 사람들 날듯이 걸어다니고
그들의 삶이 내 삶보다 더 탱탱하고
이 세상이 생각보다 훨씬 더 탄력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
틈 내어 힘들게 내려간 사당역 부근 지하서점 '반디앤루니스'에선
닷새 전 나온 내 시집 어떻게 꽂혀 있나 살펴보려다 말고
듬직한 미술책 하나 집어 들고 난간 잡으며 올라왔지.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젊은 남녀가 수화를 하고 있었다
남자는 턱 높이까지 올린 한 손 두 손 쉬지않고 움직이고
여자는 두 손 마주 잡고 열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다시 발길 옮기려다, 아 여자 눈에 불빛이 담겨 있구나!
여자가 울고 있었다
참을 수 없이 기쁜 표정 담긴 얼굴이
손 없이 수화하듯 울고 있었다
나는 절름을 잊고 그들을 지나쳤어.
- 황동규 시 ' 발 없이 걷듯' 모두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 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姿勢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 황동규 시 '즐거운 편지'모두
올더스 헉슬리는 세상 뜰 때
베토벤의 마지막 현악사중주를 연주해달라 했고
아이제이어 벌린은
슈베르트의 마지막 피아노소나타를 부탁했지만
나는 연주하기 전 조율하는 소리만으로 족하다
끼잉 낑 끼잉 낑 댕 동, 내 사는 동안
시작보다는 준비동작이 늘 마음 조이게 했지
앞이 보이지 않는 갈대숲이었어.
꼿꼿한 줄기들이 간간이 길을 터주다가
고통스런 해가 불현듯 이마위로 솟곤 했어.
생각보다 늑장부린 조율 끝나도 내가 숨을
채 거두지 못하면
친구 누군가 우스갯소리 하나 건넸으면 좋겠다.
너 콘돔 가지고 가니?
- 황동규 시 '세상 뜰 때' 모두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환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 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 눈.
- 황동규 시 '작은 사랑의 노래' 모두
나흘 몸살에 계속 어둑어둑해지는 몸,괴괴하다
비가 창을 한참 두드리다 만다.
한참 귀 기울이다 만다. 고요하다.
생시인가 사후(死後)인가.
태어나기 전의 열반(涅槃)인가?
앞으론 과거 같은 과거만 남으리란 생각,
숨이 막힌다. 실핏줄이 캄캄해진다.
일순 내뱉는다. 그럼 어때!
비가 다시 창을 두드린다.
나뭇잎 하나가 날려와 창에 붙는다.
그걸 떼려고 빗소리 소란해진다.
빗줄기여,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이어온 몸살과 몸살의 삶.
사로잡힘, 숨막힘, 캄캄함, 그리고
불현듯 긴 숨 한 번 들이쉬고, 그럼 어때!
이게 바로 삶의 맛이 아니었던가?
한줄기 바람에 준비 안 된 잎 하나 날려가듯
삶의 끝 채 못보고 날려가면 또 어때!
잎이 떨어지지 않는 것까지만 본다.
- 황 동규 시 ‘ 그럼 어때‘
다 왔다.
하늘이 자잔히 잿빛으로 바뀌기 시작한
아파트 동과 동 사이로
마지막 잎들이 지고 있다, 허투루루.
바람이 지나가다 말고 투덜거린다.
엘리베이터 같이 쓰는 이웃이
걸음 멈추고 같이 투덜대다 말고
인사를 한다.
조그만 인사, 서로 살갑다.
얇은 서리 가운 입던 꽃들 사라지고
땅에 꽂아논 철사 같은 장미 줄기들 사이로
낙엽은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밟히면 먼저 떨어진 것일수록 소리가 엷어진다.
아직 햇빛이 닿아 있는 파라칸사 열매는 더 붉어지고
하나하나 눈인사하듯 똑똑해졌다.
더 똑똑해지면 사라지리라
사라지리라, 사라지리라 이 가을의 모든 것이,
시각을 떠나
청각에서 걸러지며.
두터운 잎을 두르고 있던 나무 몇이
가랑가랑 마른기침 소리로 나타나
속에 감추었던 가지와 둥치들을 내놓는다.
근육을 저리 바싹 말려버린 괜찮은 삶도 있었다니!
무엇에 맞앗는지 깊이 파인 가슴 하나 있다.
다 나았소이다. 그가 속삭인다.
이런 삶을,삶을 살아낸다는 건......
나도 모르게 가슴에 손이 간다.
- 황 동규 시 ‘ 삶을 살아낸다는 건‘
[겨울밤 0시5분].현대문학사,2009.
2006년 7월 25일 오후
마음의 사방 벽을 온통 눅눅하게 만든
장맛비와 장맛비 사이 반짝 얼굴 내민 햇빛 속에
하얗게 빛나는 화강암 돌계단 올라가
녹음 속에서 혼자 인사하고 들어간 대웅전
부처도 장엄도 건물도 잠들어 있다.
두 손 모아 아는 체해도 모르는 체 잠들어 있다.
밖으로 나온다.
곁채 그늘에서 강아지가 엎드러 졸고
눈앞에는 점박이 나비 하나
소리 없이 날고 있다.
이게 혹시 고요의 한 모습?
이끄는 발길 따라 조심조심 대응전 뒤로 돌아가본다.
환하다.
땅바닥에 큰 타원 수놓으며 깔려 있는 저 융단, 저 이끼,
저 색깔!
몸 오싹할 만큼 마음을 쪽 빨아들이는,
그냥 초록도 아니고 빛나는 연초록도 아닌
그 둘을 보태고 뺀 것도 아닌
초록 불길 속에서 막 나온 초록 불길 같은,
슬픔마저 빼앗긴 밝은 슬픔 같은,
이런 색깔이 이 세상 어디엔가 있었구나.
이 만남을 위해 70년 가까운 세월이 훌쩍 지나갔는가?
바로 이게 혹시 저 세상의 바닥은 아닐까?
살아서는 두 발을 올려놓지 말라는.
- 황 동규 시 ‘ 안성 석남사 뒤뜰‘
* 겨울밤 0시 5분/현대문학
빈센트 반 고흐처럼
계속 물감 바르라 보채는 캔버스들을 벗어나
어디 숨 좀 쉴 공기를 찾아 피스톨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
까마귀 줄지어 나르는 누런 밀밭이 아직 있을까?
가며가며 금속피로처럼 쌓이는 마음의 안개 잠시 밀어내고
과일과 과자 꾸러미를 사들고
뵈지 않게 숨어서 우는 아이들을 찾아가
‘눈물 그만, 여기 맛있는 사과와 과자가 있네’ 달래
울음을 그치게 하고
파워레인저 로봇들을 하나씩 손에 쥐어주고
‘이제 나는 가도 되지?’ 말하고
넌지시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눈 한번 딱 감고 걸어
사방에 아무도 없이 밑불들만 간지럼 타듯 타는 곳으로
나갈 수 있을까?
- 황 동규 ‘빈센트’
[겨울밤 0시 5분] 현대문학.2009.
2005년 8월 6일 오후 크레타 섬의 이라클리온 항(港) 동편 성벽에 올라 비석에 망인의 이름 대신
자유인이라는 글발 몇을 적은 『희랍인 조르바』작가의 무덤을 찾았다.
꽃 속에 꽃을 피운 부겐빌레아들이
성근 바람결에 속 얼굴을 내밀다 말다 했다.
오른팔을 약간 삐딱하게 치켜든 큰 나무 십자가 뒤에
이름 대신 누운 자가 '자유인'이라는 글발이 적힌 비석이 있고
생김새가 다른 열 몇 나라 문자로 제각기 '평화'라고 쓴
조그만 동판(銅版)을 등에 박은 무덤이 앉아 있다.
인간의 평화란 결국 살림새 생김새 다른 사람들이 모여
함께 정성 들여 새기는 조그만 판인가?
내려다보이는 항구엔 크기 모양새 다른 배들이
약간은 헝클어진 채 평화롭게 모여 있다.
떨치듯이 떠나가는 배도 두엇 있다.
발밑에서 메뚜기가 튄다.
뒤에서 누군가 속삭인다 나직이,
그래, 자유는 참을 수 없이 삐딱한 거야.
- 황동규 시 ‘ 카잔차키스의 무덤에서‘
* 문학과지성 시인전312
황동규시집 ||꽃의 고요 ,문학과지성사,2006
아직 멎지 않은
몇 편(篇)의 바람.
저녁 한끼에 내리는
젖은 눈, 혹은 채 내리지 않고
공중에서 녹아 한없이 달려오는
물방울, 그대 문득 손을 펼칠 때
한 바람에서 다른 바람으로 끌려가며
그대를 스치는 물방울.
- 황동규 ‘더 조그만 사랑 노래‘
연못 한 모통이
나무에서 막 벗어난 꽃잎 하나
얼마나 빨리 달려가는지.
달려가다 달려가다 금시 떨어지는지.
꽃잎을 물 위에 놓아주는
이 손.
- 황동규 ‘더욱더 조그만 사랑 노래‘
배가 속력을 늦춘다.
제부도 앞바다 봄날 해질녘
꽃불.
바람섬 승봉성 이작섬 벌섬 동백섬
앞에 떠도는 꽃불 서로 먼저 건지려다
옆 섬에게 자리를 내주며 한 발 물러서는 것을 보노라면
마음결 한껏 성글어진다.
인간들이 저리 정답게 노는 광경 본 게 언제지?
빗물 얼룩진 유리 훔치듯
눈을 훔치면
수평선이 섬들 사이로 홍옥(紅玉) 끈처럼 흘러 들어와
섬의 허리들을 가볍게 맨다.
자 허리의 끈을 당겨라!
학처럼 날기 시작하는 섬들
쿵쿵대는 바다의 심장 박동.
이 순간만은
신(神봄)의 눈길과 인간의 눈길 가르기 힘들리.
눈길 서로 헷갈릴까
인간의 눈을 잠시 시야(視野) 박으로 밀어놓는다.
- 황 동규 시 ‘ 봄날은 간다’
-시집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중에서
** 황 동규: 황동규, 시인, 전 대학교수
1938년 4월 9일, 서울. 85. 아버지황순원딸황시내
1958년 현대문학 '시월' 등단
서울대학교 대학원 영어영문학 박사
에든버러대학교 대학원 영어영문학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교육학 석사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경력사항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대한민국예술원 문학분과회장
2006.~
제4대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부위원장
1968.~2003.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수상내역
2016.
제26회 호암상 예술상
2011.
제3회 구상문학상 본상
2010.
은관문화훈장
2009.
제20회 김달진 문학상 시 부문
2006.
제10회 만해대상
2003.
홍조근정훈장 홍조근정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