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RPG의 등장인물이나 사건은 실제 인물이나 사건을 비하 및 조롱하려는 의도가 아니며 이를 통해 불쾌감을 느끼게 할 의도가 없다는 것을 알립니다.
이 RPG에서 언급되거나 묘사된 인물, 지명, 회사 또는 단체, 그 밖에 모든 명칭 그리고 사건과 에피소드 등은 모두 허구적으로 창작된 것이며 만일 실제 같은 예도 있더라도 이는 우연에 의한 것임을 밝힙니다.
이 RPG는 실제 존재하는 국제적 역학관계를 찬양 또는 비판하거나 특정한 사상, 이념, 정치 체제, 인권 탄압과 폭압적 정치 질서를 옹호, 미화하거나 찬양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밝힙니다.
너희들의 주장대로 나는 미제의 간첩이었다. 그러나 너희들이 주장하는 미제 간첩과 내가 주장하는 미제 간첩은 엄격히 다르다. 나는 남조선에 있을때, 아니 그 훨씬전부터 미국사람들과 교분이 있엇다. 그 교분은 조국의 해방과 독립통일을 위한 차원이지 결코 간첩행위가 아니다. -1955년 12월, 재판 중 피고 박헌영의 발언 |
민주적으로 보이면서도, 전부 우리 손 안에 들어 있어야 하네.
-발터 울브리히트
13. 진보당 사건
이범석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고, 장면을 중심으로 한 민주국민당 신파가 '민중당'이라는 이름으로 정권을 잡고 대북 초강경책을 천명합니다. 이는 본의도 섞여있지만, 한국을 뒤흔드는 미지의 '제5열' 세력을 무마하려는 움직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부통령에는 박순천이, 국무총리에는 윤보선이 임명되었는데, 민중당과 자유인민당간의 동거가 제대로 진행될리 없는데다 친일행적이 있는 박순천의 부통령 당선은 많은 논란을 낳을 것이었습니다.
한편, 성재호 납남에 도움을 줬던 '북한 내 반란세력'이 최후의 저항을 위해 북한 정권 곳곳에서 사보타주를 개시, 이미 잘못된 판단으로 박헌영 흔들기에 가담해 있던 이덕삼, 비우익 등에게 거짓 정보를 제공하여 두 명의 눈과 귀를 막고 이들의 해임과 좌천을 막는 공작에 돌입했습니다. 말은 아니라면서 무력강경파에 가담한 비우익,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중 갈피를 못 잡는 이덕삼은 이러한 반란세력의 공작에 완전히 속아넘어갔고, 이는 후일 자신들에게 엄청난 재앙을 불러올 터였습니다.
한편, 1958년 8월 한국 원내정당인 진보당의 대표 조봉암이 내란죄로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반북 자유주의 민중당이 집권한 상태에서 북한과 별반 연이 없고 오히려 적대적인 관계에 가까웠던 조봉암이 체포되었단 사실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고, 북한의 모처에서 요인들은 긴급회의에 돌입했습니다.
북한의 각 기관들은 각자 다른 의견을 냈습니다. 국가보위성은 진보당이 그나마 북한의 입김이 들어가긴 한 세력이니 지원을 해야한다 주장하였고, 문화선전성은 진보당은 좌익이라기보단 사실 파시스트 정당에 더 가깝다며 지하정당 건설이나 더 하자고 주장했습니다. 군부는 차라리 한국의 혼란을 극대화시키자는 의견을 공공연히 내비쳤죠.
반란세력의 공작으로 인해 '완전히 잘못된 판단'만을 반복하게 된 비우익이 한국의 혼란을 더 키우자는 군부와 손잡고, 박헌영의 정권을 흔드는 것이 박헌영보다 더 독재를 추구하는 이들이란 사실에 눈감았던 이덕삼이 또다시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동안, 사리분별이 가능했던 조일봉은 박헌영의 허가를 받고 북한의 간첩 중 가장 유능한 박정호에게 비밀리에 지령을 내렸습니다. 간첩 네트워크를 통해 이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고 정보를 더 입수하란 것이었죠.
그러나 박정호가 한국에서 검거되고, 다른 간첩이었던 양이섭에 대한 신뢰도가 높지 않았던 상황에서, 조일봉은 그나마 몇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한국의 국군이 '사단장 그룹'(백선엽을 비롯해 6.25전쟁 당시에 사단장 이상이었던 친미 장성 그룹)과, 군부의 난맥상과 부패에 질린 '소장파 그룹'으로 나뉘어져있단 것이었죠.
최종적으로는 사실은 이중간첩이었던 양이섭이 정체를 드러내 북한의 정보를 가지고 한국으로 완전히 복귀하면서, 비우익이 몰래 공작한 '사단장 그룹이 한국에서 활개치는 제5열이다'라는 가짜정보가 한국 정권에 들어가면서, 제5열의 힘은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정부는 조봉암을 불기소 처분했지만, '자유주의 반공'주의자인 장면 대통령과 '수구반공'주의자인 윤보선 국무총리 간의 간극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자유인민당과 민중당이 날치기로 '신국가보안법'을 통과시키는 동안, 박정호와 양이섭이 줄줄이 날아가자 반란세력의 잘못된 정보를 공급받던 박헌영은 대남총국장 이효순을 경질하고 남도부를 정계에 복귀시키는 한편, 허봉학-김창봉 일파의 손을 들어주기 시작했습니다.
14. 대약진 운동
소련이 '농부의 직업화, 농장의 기업화'를 의외로 성공리에 진행하자, 농업정책에서만큼은 뒤지지 않고 싶었던 중국은 농업집단화를 재개하고, 공용식당을 필두로 한 인민공사제도를 도입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무리한 농지 확장 등으로 자연파괴가 발생하고 있고, 집에서 철을 만드느니 쌀을 빽뺵하게 심느니 하는 '혁명적인 이론'들도 줄줄이 나왔습니다. 다만, 일각에서 제기되었던 '참새 사냥'같은 제안은 말도 안된다며 반려되었고, 또한 나라의 자존심을 지킨답시고 식량을 수입 대금으로 써버리는 만행은 일단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는 중국의 여러 인사들이 '최소한의 선'은 지킬 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정책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는지, 1959년 2월, 중국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사실이 여러 경로를 통해 북한에 들어왔습니다. 양림, 김학철, 조남기, 김원, 정율성 등 중국 당정에 포진한 인사들은 연변조선족자치구 주석 주덕해와 함께 연길에서 최창익을 대표로 한 북한 대표단과 만남을 가졌습니다. 연길의 거리는 깨끗하고 정돈되어 있지만 가게와 노점마다 줄이 길게 서 있는 것이 물자의 부족 현상이 있었죠.
조사 끝에 밝혀진 내용은 농업정책의 주도권을 잡은 천보다와 커칭스, 탄전린의 허무맹랑한 정책이 중국 전역에 물자 부족 사태를 일으키고 있었고, 소련은 '중국의 자립'(두 대국 중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에 속박될 수 없다는 신사협정에 따른)을 강조하며 기술 이전 대신 유학을, 완제품 대신 원자재 지원을 해 주는 쪽으로 노선을 바꿨기 때문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비우익은 전국인민대표회의에서 북한을 대표하여, 천보다와 커칭스의 허무맹랑한 정책 대신 현실주의 노선을 지지하는 장원톈-펑더화이-천윈 그룹을 지지하는 연설을 하려 했지만 이미 농업정책의 주도권은 완전히 천보다 일파가 쥔 뒤였습니다. 펑더화이를 제외한 인사들이 온건하게 좌천되는 상황에서, 북한 인사들은 다른 방법을 택했습니다.
티베트에서 진행되는 미국의 공작을 막아내며 중국의 새로운 권력자들의 신임을 얻은 조일봉, 비우익, 이덕삼은 베이징으로 돌아와 잘못을 돌아보고 세심하게 준비했습니다. 소련 대표인 야코프 블룸킨 등과 이야기해본 끝에, 조일봉은 이 모든 사단은 '보통의 방책으로는 물질-정신 모두 낙후된 중국 농촌의 현실을 개혁할 수 없다는 절박함' 때문이라며, 커칭스의 수하 중 한 명인 장춘차오를 '제2차 신문화운동'으로 낚아올려 이상한 농업정책 대신 [사회주의적 농촌계몽]을 내세우게 만들었습니다.
북한에서 자체적으로 시행한 중국식 농법이 대참사라는 보고서를 마침내 장원톈 일파에게 넘겨주어, 농촌 정책을 장원톈 일파가 맡고 '제2차 신문화운동'을 천보다 일파가 맡는 일종의 권력 분점이 이뤄지며 중국의 혼란은 깔끔하게 해소되었습니다. 윤기복을 비롯한 일부 인사가 중국이 불안정해야 북한이 운신할 폭이 넓어지는 것 아니냐고 지적하긴 했지만, '아직은 사회주의 성향이 남아있던' 세 명의 결정을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중국에서 핵폭탄 기술과 탄도미사일 기술을 보상으로 받았으니까요.
15. 해위 파동
태풍 사라호의 상륙 후 북한의 지원을 또다시 한국이 거부한 뒤, 1960년 3월 즈음 한국에서 다시금 혼란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북한에 들어왔습니다. 2월 28일 대구에서 고등학생들이 대거 시위를 벌인 것을 시작으로 '대중적 반발'이 점점 퍼지고 있다는 것이었죠. 이 원인은 충격적이게도, 국무총리인 윤보선이 자유인민당과 민중당 간의 정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군부를 끌어들이려 했다는 논란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허봉학-김창봉 일파가 '이번이야말로 남침을 통한 국토완정'의 절호의 기회라고 주장하였고 많은 이들이 동조하였습니다. 미국의 지원군이 이동해야 할 일본이 '안보투쟁'에 휩싸인 상태였으니까요. 북한은 이 기회를 아예 놓칠 수는 없다고 보았고, 여러 방안이 준비된 가운데 조일봉, 황태성, 김시형이 목숨을 걸고 직접 한국에 3월 13일 잠입했습니다.
김시형이 민족일보 사장인 조용수와의 접촉에 실패하는 동안, 황태성과 조일봉은 박창암을 연결고리로 국군 내 소장파 그룹의 핵심 인사 중 한 명인 박정희와 접촉했습니다. 박정희는 황태성을 보고 깜짝 놀랐고, 대화 과정에서 '반북 공작을 하며, 북한의 공작시도를 꿰뚫어 대응하는' 인사들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바로 남로당의 간부이자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였죠. 1946년 당시 대피 과정에서 두 다리에 장애가 와 걷기 힘들어진 박상희는 어직 머리는 비상하였고, 북한의 남침 이후 좌익 성향은 유지하면서 '평양 공산당'에 대해 극도로 이를 가는 반공 사회주의자가 된 뒤였습니다.
이후, 최대한 온건한 방안을 내세우는 이덕삼과 반란세력에게 완전히 속아 넘어가 강경파를 지지하는 비우익의 사이에서 조일봉은 온건한 방안을 찾습니다. 최대한 '친공세력'이 드러나지 않는 선에서 자유인민당을 견제하기 위해 한국 내에서 민중당과 진보당의 동맹을 주선하고, 재북인사들을 이용해 북한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선전을 하는 한 편 '중립화 통일론'을 지원하는 것이었죠.
대부분 아주 잘 풀리지는 않았지만, 민중당과 진보당은 '개혁동지총연맹'이라는 이름의 단일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여, 다음 총선때까지는 어떻게든 동맹을 유지하자는 협정을 맺습니다. 다만, 북한이 원하는 극단적인 국론분열의 조짐도 한국 내에서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족청계 인사들이 개혁동지총연맹에 가담하고, 자유인민당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었기 때문이죠.
한국과 북한의 협상을 통해 열린 제3차 남북연석회의도 '허울 좋은' 결과만을 낳았습니다. 재북인사의 참가가 원천 차단된 가운데, 남북조절위원회가 설치되 한국 측 공동위원장으로 안경근이, 북한 측 공동위원장으로 이극로가 선임되었습니다. 이는 아직까지는 별 의미가 없었습니다. 아직까지는요.
16. 교원노조 운동
일본에 방문했던 미국 대통령보도관 제임스 해거티가 섹트와 일본 경찰의 총격전 중 유탄을 맞는 사태가 발생해 기시 총리가 치안출동, 즉 비상계엄을 선포했습니다. 소련 상공에선 U-2가 재차 격추되어 미-소 회담이 결렬되고 미국이 대망신을 당했습니다. 북한의 입장에선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한국에서도 '교원노조'(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가 설립되며, 북한으로 넘어와 있던 월북 교육자와 과학자들이 옛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일제로부터 독립한 교육기관에서 미군정을 상대로 싸워야 했던 인사들은 북한이 한국의 교원노조 투쟁에 함께해주기를 원했습니다.
민족주의자라던 이덕삼이 개입을 반대하다가 좌우, 강경파와 온건파 양쪽에서 공격을 받는 동안 무력강경파의 '불편한 속내'가 드러났습니다. 이들은 결국 평양을 중심으로 북한군을 통한 무력합병에 동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자생적인 사회주의 혁명이라도 일어난다면 무력강경파는 그날로 남로당파에 의해 박살이 날 터였습니다.
협상과 논의 끝에, 북한은 역공작을 겸비해 '실제로' 교원노조를 약간이라도 지지하자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자유인민당이 비우익이 만든 가짜문서에 속아 교원노조가 용공세력이라며 몰아가는 동안, 북한의 재건 조선교육자협회는 교원노조를 탄압하는 한국 정부를 온건한 색채로 비판했습니다. 여기에 비우익이 '더 공들여 만든' 진짜 가짜문서를 통해 미국 국무부가 교원노조 탄압을 우려한다는 가짜뉴스가 퍼지자, 자유인민당은 직접적으로 성토받는 한편 정치적 논란이었던 해위 파동까지 재점화됩니다.
교원노조중 강경파는 마르크스 없는 마르크스주의를 내세우며 일부는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일부는 영국 노동당을, 일부는 루즈벨트 대통령을 언급하며 노동자들을 상대로 한 교육에 나서는 한편 정치권 중 혁신계와 행동을 함께하기 시작했습니다. 제대로 역풍을 맞은 자유인민당은 8월 19일 '또' 쪼개져 양일동, 김병로, 김영삼을 중심으로 북한과는 관계없는 '신민당'이 탄생하였습니다. 처참한 모양새로 사임한 윤보선 국무총리의 자리를 서상일이 메우는 가운데, 윤보선에 대한 경찰의 내사가 시작되었습니다...
17-1. 민족통일연맹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여 장면 대통령과 회담을 하고, 서울 시민 이백만 명 중 백만 명이 아이젠하워를 환영하러 나오는 소동이 있었습니다. 이는 미국이 장면 정부를 지지한다는 신호였죠. 이 와중, 혁신계가 힘을 얻고 북한의 태도가 전향적으로 변한 것이 감지됨에 따라 한국 혁신계를 중심으로 중립화 통일론이 더욱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1960년 11월 1일 출현한 서울대 민족통일연맹은 중립화 통일을 정식으로 지지하기 시작했습니다. 교육계, 정치권, 노동자에 대학생들까지 중립화 통일을 지지하기 시작하자 북한은 흥분에 휩싸였습니다. 어느 때보다도 '국토완정'이 가까워진 것이었죠.
남북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 조일봉은 옛 경평축구정기전, 즉 서울과 평양의 축구대결을 부활시키자는 의견을 냈습니다. 장면 대통령이 이에 대해 서울에서 1경기, 평양에서 1경기라는 조건으로 승인하자 북한은 한국으로 갈 실사단 인사들을 구성했습니다. 그러나, 반란세력의 공작으로 잘못된 정보를 접한 실무진은 이덕삼과 비우익을 방한 대표단에 넣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두 명은 장면의 앞에서 망언과 도발을 일삼아 남북 대화의 물꼬는 완전히 박살이 나 버렸습니다. 이덕삼의 경우 자리는 보전했지만, 비우익은 박헌영이 '비우익의 친구들'이라고 보는 무력강경파들과 새로이 만들어진 통일전선국이라는 [격리수용소]에 들어가는 결말을 맞았습니다.
17-2. 2대악법 반대 투쟁
북한을 전혀 믿을 수 없게 된 장면 대통령이 강력한 반북반공 정책을 천명하고, 반민중당 봉기가 한국 전역에서 지속되었습니다. 그 이유에는 단순한 남북교류 실패뿐만이 아니라, 한미경제기술원조협정을 비롯한 미국에 의존적인 경제정책 등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북한의 극좌파는 이 경제협정에 대한 대안으로 '북한이' 한국을 지원하는 모양새를 만들어보자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은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한국 정부는 비우익의 행동으로 북한에 대한 불신이 깊었기 때문에 제안을 최종적으로는 거절하였고, 미국과의 조약을 개정하고 한국의 주권 존중을 약속받았습니다. 혁신계 인사들은 시위를 했지만, 장면은 전혀 타협하지 않고 도리어 '1958년 반공법이 한 치의 실수도 없이 정확히 적용될 것'을 선언하며 개혁동지총연맹을 해산시켜버리고 신민당의 아나키스트 정치인인 양일동을 국무총리로 임명하는 초강수를 두었습니다. 반공법과 집시법이 다시 드러남에 따라, 시위는 점차 이 두 법에 반대하는 '2대악법 반대 투쟁'으로 번졌습니다.
17-3. 민족민주해방 투쟁
한편, 유리한 입지에 섰다고 판단한 장면 대통령은 1961년 3월 9일 다시 북한 대표단의 방문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번에는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있던 이덕삼이 먼저 사과를 하며 대화는 화기애애하게 진행되었고, 역사교류단과 북한이 지원하는 공단의 건설, 무역 특구 등이 제안되었습니다. 서신 교환과 축구경기 등도 논의되며 모두가 웃음꽃을 피웠습니다.
비우익과 이화영은 한편 일명 '민자통'이라 불리는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에 대한 지원 논의를 진행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반란세력의 조작정보로 인해 거의 합리적인 판단이 불가능했던 비우익은 민자통이 용공 몰이로 파괴될 것이라고 주장하다가 반대로 민자통이 북한의 지원을 받지 않고도 살아남을 것이라는 등 자신의 말도 일관적으로 지키지 않다가 이화영과 박헌영의 면박을 받고 그대로 격침되었습니다. 민자통 지원이 결의되는 동안, 서울에서는 의외의 정보가 도착했습니다.
의외의 정보는 조일봉이 떠올린 것이었습니다. 역사교류단을 논의하던 조일봉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친 것이었죠. 바로, 북한이든 한국이든 언젠가는 해결해야 할 [대일배상청구]였죠. 박헌영에게 이 문제를 상신하며 조일봉은 '친일파가 중앙정치권에서 가지는 힘이 더 큰 한국의 특성상, 대일배상청구를 함께 하자고 제안한다면 회담은 [한국의 책임] 때문에 파토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란세력에 의해 과대대표되는 무력강경파에 의해 눈과 귀가 가려져 있던 박헌영은 고심 끝에 이 대일배상청구를 제안해보라고 지시했습니다. 조일봉은 '조선민족의 역사 공동 연구는 너무나 가치있는 것이므로, 대일협상 공동전선도 좋지 않겠냐'며 제안했습니다. 유명한 친일파였던 주요한 상공부장관이 벌떡 일어나 반대하고, 조재천을 비롯한 친일파와 최규하와 신현돈을 비롯한 중립파, 양일동과 박제환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끼리 충돌이 일어나며 회담장은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장면은 고함을 질러 회의를 멈췄지만, 회의 내용은 결국 누출되었고 한국에서는 '전후 최대의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민중당의 반란표와 진보당을 주도로 한 정당들의 지지로 대단히 제한적인 국회해산이 가능해지는 '원포인트 개헌'이 통과되자, 한국 국회는 바로 해산해버렸습니다. 1961년 5월 16일 새로운 선거가 예정되어, 조봉암이 당수 자리에 돌아와 '민주사회주의 돌풍'이 일어났습니다. 군부의 소장파 그룹까지 이들을 지지하고 대거 정치권에 데뷔하며, 이들의 실체가 밝혀졌습니다.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의 스승이었던 김재규도 있었지만, 박헌영의 오랜 동지였던 임원근이 반공 사회주의자가 되었고 그의 사촌동생인 김재춘을 출마시켰단 것이었죠. 여기에, 임병직을 필두로 한 구 이승만계가 가담해 있다는 사실까지 드러나며 그동안의 '반북 테러공작'은 임병직-임원근-박상희의 소행이었다는게 완전히 드러났습니다.
마침내 진행된 총선거에서 진보당이 압승하고, 최근우-정순종-김창숙-이창근을 필두로 한 좌파 민족주의 세력이 승기를 쥐었습니다. 이들은 중립화 통일을 열렬히 지지하며 사회주의에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운명이 북한의 편을 든 것만 같았습니다.
17-EX. 비욱익 반당반혁명사건
한편, 박헌영은 마치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자신의 앞길을 막을 뿐만이 아니라 북한의 정책에 반대를 일삼고 혼란만 끼얹는 비우익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는 선전선동과 사상 전문가인 이화영을 필두로 한 인사들과, 공작과 인민재판, 민간인 사찰의 전문가인 문성술 등을 불러 무력강경파를 숙청할 계획을 밝혔습니다. 이화영은 비우익의 행동이 '진짜로 간첩이 아니라면 말이 안된다'라며 비판하였고, 이전 이강국의 실각 이후 비우익에게 원한이 있던 박헌영은 그 말을 듣고 칭찬하며 비우익을 간첩혐의로 묶을 것을 결정하였죠.
18-A. 일본 내각정령 제 44호
1961년 6월, 일본에서의 사태가 이상해졌다는 소식이 북한에 들어왔습니다. 조일봉은 나진항에서 조련 대표인 김병식과 영강은 물론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의 대표인 기타코우지 사토시와 만났습니다. 기타코우지 사토시는 '일본인들의 본성'을 운운하는 기상천외한 사상을 내세웠지만, 그가 일본에 대해 내놓은 해결책은 결국 스탈린주의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스파이로 몰려 사라진 줄 알았던 이강국을 모처에서 만난 조일봉은 사실 미국과 선이 닿아 있었던 남로당 인사들인 이강국, 임화 등을 통해 외국의 정보를 얻고 충격적인 결론을 내렸습니다. 바로, '일본 사회주의 혁명의 실패가 조선 혁명(통일 한국)에 도움이 된다'라는 것이었죠.
박헌영은 기시와 담판을 지으라고 조일봉을 일본에 비밀리에 보냈습니다. 필요하다면 대일청구권을 포기해서라도 담판을 지으란 것이었죠. 임화와 이강국의 분석에 따르면, '일본과 대만에 핵무기를 배치하고 불침항모로 개조함으로써 주한미군을 포기해도 되도록' 만들려면 기시 정권이 강고해야했습니다. 주한미군이 사라지거나 약해진다면, 남북통일은 따 놓은 당상이었죠. 기시는 의외로 전향적이었습니다. 그는 일본의 병영국가화와 경제 경색에 대비, 정경분리에 입각한 대북 수출 및 무역 확대를 제안했습니다. 로비스트 세지마 류조를 통해 들어온 이 소식은 조일봉에게 성공의 기쁨과 깊은 죄책감을, 그리고 이후 그의 생명을 끊어버릴 칼날을 주었습니다.
18-B. 라비린토스의 이카로스
한편, 같은 시기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는 허봉학, 김창복, 비우익, 김정태를 필두로 한 인사들이 '청문회'에 참가했습니다. 청문회의 의장으로는 방학세가 임명되었고, 청문회의 증인들은 이 청문회의 진행 여부 자체에 대해 전혀 들은 바가 없었죠. 방학세가 증인들을 비난하며 청문회의 포문을 열자, 증인들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최광과 김양춘 등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자아비판을 시작하였고, 반란세력이 제공한 정보와 자행한 공작으로 인해 아예 현실과 괴리된 상황에 처해 있던 비우익은 자신이 청문회, 아니 '전시재판'에 끌려왔단 사실을 인지하지 못해 망언과 앞뒤가 안 맞는 말만 내뱉었습니다. 소련검찰 출신인 방학세가 비우익의 논리적 허점을 몇 번이나 지적하고나서야 비우익은 이것이 전시재판이라는 것을 알 수는 있었습니다. 그는 결국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척'을 했습니다.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믿기 싫어하는 그는 외부의 입장에서 보면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박헌영은 결과에 대단히 흡족했습니다. 북한의 남침을 주도했던 정통파 인사들이 대부분 제거되며 그는 반김일성 지도자로써 한국에서 우호적인 입지를 갖추는데 성공했습니다. 최용건 원수마저 사임하며 군권까지 장악한 그는 누군가 부추기지만 않는다면 현재까지 진행된 사회주의 노선을 진행하며 조타수의 역할을 맡을 터였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누군가 부추기지만 않는다면요.
18-C. 체스터 B. 볼스의 평양 방문
1961년 중후반에 시작된 일본 좌익 봉기가 완전히 실패하여 일본 좌익이 멸망하고, 파시스트 세력이 일본 혁명운동의 빈 자리를 차지하는 동안 1961년 8월 1일, 독일을 둘러싼 미국과 소련의 대립이 치열한 가운데 미국의 국무차관 체스터 B. 볼스가 평양에 직접 방문했습니다. 여러가지 우호적인 방안을 이야기하던 볼스는 결국 미국의 실제 속내를 밝혔습니다. 제주도 남해에 거대한 미군기지를 건설해 남은 주한미군을 그곳으로 이전하고,일본과 대만을 핵으로 무장한 미국의 불침항모로 만들고 '일본 자위군', 즉 재건 일본군이 이 방위라인의 핵심을 맡게 한다는 것이었죠.
민족주의자인줄 알았던 이덕삼이 '일본이 싫어 통일도 반대하겠다'는 망언을 미국 국무차관 앞에서 함으로써 박헌영에게 뇌졸중과 심근경색을 유발해 암살하려는 음모가 잠깐 있긴 했지만, 박헌영은 계획이 있었습니다. 중국이 제공한 기술로 제작되는 핵폭탄으로 민족주의 인사들의 마음을 잡는 것이었죠. 물론 비우익과 마찬가지로 반란세력의 공작으로 사실상 피해망상에 시달리던 이덕삼은 박헌영의 포섭에 감화된 척 하고 박헌영을 흔들 계획만 꾸밀 따름이었습니다.
볼스가 주장한 '한일 수교'가 무역-영사관계만 있는 수준으로 격하되어 협상이 종료된 가운데, 박헌영은 이덕삼의 연기와 반란세력의 공작에 속아 넘어가 그를 장관급으로 재임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덕삼의 문제는 결국 박헌영이 아닌, 다른 이가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쌍성에 유배되어 있던 비우익을 다시 '숙청 대상자를 모을 피뢰침'으로 불러낸 박헌영이 절대권력을 손 안에서 만지작거리는동안, 중요 행사가 기획되었습니다. 1961년 8월 15일 한국 대표단의 평양 방문 다음으로, 1961년 11월 10일 음력 개천절에 남북 정상회담이 기획된 것이었습니다.
19-A. 북한의 8월 종파사건
1961년 8월 말, 박헌영은 자신이 신뢰하게 된 이화영을 다시금 불렀습니다. 비우익이 다시는 사고를 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면서 비웃음 같은 것을 보였다는 녹취록이 비밀리에 공개되었고,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비우익과 같은 세력'들을 완전히 쓸어내자는 계획이 필요하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여러 논의 끝에, 한국 측 국회의원인 김성곤의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김성곤은 소정의 정치자금을 받고 언론에 '북한 인사들을 비판'함으로써 북한 정부에 명분을 제공하는 거래를 제안했습니다. 처음에는 사기 아니냐는 말이 많았지만, 실제로 김성곤의 언론공작을 통해 김열을 숙청하는 데 성공한 박헌영은 무척 만족했습니다.
선전선동과 공작분야의 실질 책임자로써 이름을 떨치게 된 이화영은 북남 통일정부나 과도적 연합체제의 출범에 대비한 새로운 사상체계를 준비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황장엽이 민족주의를 이용하자는 이야기를, 허정숙이 필요하다면 우익과도 손잡자는 이야기를, 정태식이 중도파와 좌익과 손잡자는 이야기를, 박길룡이 노동계급 독재를 수립하자는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복잡한 타협을 거쳐 최종적으로 [조국통일의 대사변기를 맞는 조선인민의 정치 조직방침에 대한 해설서]가 작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화영은 해설서에 따라 민주주의민족전선으로 북한의 정당 대부분을 묶어놓고, 자신의 정당인 조선민족혁명당 내에서 공작을 하다가 사실상 조선공산당에 더 큰 타격을 주는 최악의 선택을 하였습니다. 박헌영은 이화영조차도 신뢰할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화영을 이용하면서도 [필요하다면 언젠가 이화영조차도 숙청]할 계획을 비밀리에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19-B. 벽을 넘어
1961년 11월 10일, 김창숙 대통령이 탑승한 항공기가 북한에 도착했습니다. 재북인사에게 전면적 자유를 허가한 북한의 결정에 따라 장건상, 엄항섭 등이 김원봉과 함께 김창숙과 감격의 해후를 가진 뒤, 실무회담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것들이 논의되었습니다. 한글학회의 남북공동 공립기관화, 조선말 대사전 기준의 한국어 표준화, 송전선 재개통과 북한이 지원하는 한국의 승압사업, 육로와 항공편과 항로의 개설, 제주도 미군기지의 허가와 제주도의 경제특구화 등이었죠.
모두가 준비를 해온 회담이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논의는 문제 없이 합의되었고, 남북한 단일법안의 경우 선거로 선출될 입법부가 정하게 하자는 상식적인 결론이 내려졌죠. 남북한 총선거를 폐쇄명부식 연동형 비례대표제와 도별 상원을 도입하는 대신 '인구대로' 한다는 파격적인 조일봉의 제안이 통과되며, 남북 통합 총선거의 막이 올랐습니다.
이윽고 자본가 세력인 자유인민당과 친일 세력인 정민회가 분열하고, 통일혁명당이 정당건설 대신 진보당을 지원하는 한편 여러 정당들이 이합집산을 거치며 선거는 점점 국론 통합이 아닌 '대결'의 양상을 띄어갔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체제 대결의 연장선상에서 보던 남북한 인사들조차도, 이 '대결의 양상'이 어떤 참사로 이어질 줄 알지 못하고 있었죠. 1962년 8월 15일에 예정된 총선거를 향해, 모두가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E(20)-A. 핵위협, 핵의 위협 + E(20)-B. 자유롭고 평화로운 통일조선
한편, 중립국이든 아니든 통일 한반도의 국체를 보존할 '핵폭탄의 개발'은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1963년에 첫 폭탄의 기폭실험이 가능할 것이란 희망적 전망까지 나온 상태였죠. 그 와중, 핵개발의 총책임자가 된 조일봉은 1961년 12월 2일 소련 부외무인민위원 루카 팔라마르추크의 방북을 갑작스레 맞이해야 했습니다. 팔라마르추크는 북한이 핵폭탄 개발을 '유예'해 달라며,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하자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속사정을 밝혔습니다. 쿠바에 소련의 핵미사일이 배치되는 것은 일본과 이탈리아에 미국의 핵미사일이 배치된 것에 대한 국제정치적인 대응인데, 한국과 중국이 핵무장을 발표할 경우 '대응'이 아닌 '공세'가 되어 핵전쟁 위험이 필요 이상으로 커질 수 있다는 것이 그 속사정이었죠.
국가정치보위부 부부장인 이화영이 선거전략과 불법과 합법의 선을 넘나드는 선거지원을 논의하는 동안, 비우익은 북한의 여러 '버림패'중 하나로 소액(?)인 100만 달러를 들고 일본으로 향했습니다. 그는 컴퓨터를 밀수하여 중국에 제공, 중국의 핵실험 데이터를 얻고 이스라엘과 협력하여 핵개발을 비밀리에 먼저 해버리자는 북한의 계획의 도구 중 한 명이 된 상태였죠.
비우익이 만난 코다마 요시오는 여러 방안을 통해 일제 컴퓨터 부품을 중국에 밀수출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망상증이 또 다시 도진 비우익은 갑자기 코다마가 미국 간첩이 아닌가 의심했지만, 오히려 코다마는 미국의 일본 반半식민지론을 믿는 반미 파시스트였죠. 다행히 코다마에게 '미국 간첩이지?'라고 물었다가 총탄에 맞고 죽는 결말만은 피하는 데 성공한 비우익은 컴퓨터 밀수입 사업과 관련해 10만 달러라는 막대한 수익을 올렸습니다. 자신만이 북한을 '정상화'시킬 수 있다는 망상은 버리지 못했던 비우익은 10만 달러를 정권에 바침으로써 정치적 생명을 연장하고자 하였죠.
조평통 부위원장인 이덕삼은 한편 최종 선거 캠페인을 위해 개성에서 회의를 진행했습니다. 비우익과 마찬가지로 피해망상에 시달리던 그는 오승택이 불의의 피해자라 믿고 오승택을 불러와야 한다는 망상에 잠깐 빠지기도 했지만, 김영남을 포섭해 미국의 선거 불개입 약속을 받아내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선거가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최종 목표 1 :독립된 사회주의 체제 건설 및 수호] :진행 단계 4/6
[최종 목표 2 :개인숭배와 일인 독재 혁파 및 재발 방지] :진행 단계 4/6
첫댓글 마지막 이벤트와 에필로그 이전의 내용을 정리한 글입니다.
본문에서 누락되었는데 궁금한 부분이나 기타 궁금한 점이 있으시다면 댓글로 질문해주세요.
오… 아수스 로그가 이런 느낌이었던 것 같은데(…)
수고하셨습니다..
평수스 드립을 실제로 했던 것 같은데 말이죠(?)
@렌지파일 하셨죠 ㅋㅋㅋ 그때부터 정상이 아닌걸 알아야 했는데(??)
@렌지파일 파수스는 안만들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E.E.샤츠슈나이더 대신 파국을 만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E.샤츠슈나이더 '과감'하셔야 합니다. 이화영에게 과감하지 못했던것하고, 조일봉 엔딩도 과감하지 못했던걸 반면교사 삼아서..!
@렌지파일 다된 죽에 코 빠뜨릴까봐 쿠데타 망설였는데 그게 정답이었을 줄이야..!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4.07.23 13:48
수고하셨습니다!
에필로그의 행방입니다. 그래도 쓰던건 백업했네요.
최현 반란패당 놈들이 기어이 컴퓨터까지(?)
정보전사들이 또 공격했나요?
포맷후 재설치 성공기념으로 오늘 올리겠습니다.
오...
에필로그 올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