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칠복아범 내외, 칠복이와 함께 가마와 마차 편에 먼저 떠 나셨고 아버님과 나는 아버님께서 그 후로 소식 듣고 달려온 몇몇 지기들과 잠시 환담을 나누느라 오시(午時.註1)경에야 출발하였다. 그날 아버님을 찾아온 손님들 중 뻔질나게 집안에 드나들 던 당상 관(註2)이상의 관료는 없었다.
아버님께서 상소를 올리신 후 혹 아버님과 연루되어 자신들에 화가 미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출발을 하려는 데 그제서야 달랑 보따리 하나인 내 짐을 보고 아버 님께서 물으셨다. “너는 그 많은 책은 어디 가고 달랑 보따리 하 나이냐?" 나는 이 질문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사마천의 열전(註3) 몇 권외에 나머지 책 들은 모두 머릿속에 넣었습니다.” 라 고 아버님께 답하니 아버님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며 “내 이따 객에 닿거든 너를 시험하여 볼 터이니 네 말이 거짓이거 든 네는 걸어서 담양 집까지 가야 할 것이다.”하셨다.
부지런히 말을 달린 결과 아버지와 나는 어둑해질 무렵에 말죽거리 에 도착하였다. 허름한 객사에 짐을 풀고 저녁밥을 시켰다. 찬이라 곤 푸성귀와 나물 몇 접시가 고작이었다. 나는 아버님 앞에 놓인 놋그릇과 놋수저를 보고 그제서야 아버님이 야인으로 돌아오셨구 나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아버님은 내 이런 기분과는 아랑곳도 없이 “시장이 반찬이라 하더니 이보다 진수성 찬이 없구나. 네 참으로 오랜만에 너랑 겸상을 하는구나. 네 술 좋 아하는 지 알거늘 이 애비랑 술 한잔 하겠느냐?” 하고 갑자기 기 분이 좋아지신 아버님은 주모를 불러 술을 시키었다. “네가 네 방 의 그 많은 책을 모두 네 머리에 집어 넣었다 하니 내 시험해서 묻 노니 고문진보(古文眞寶주4)에 나오는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주5) 를 한 번 읊어 보아라.”
歸去來兮여, 田園이 將蕪어늘 胡不歸리오.
돌아가자꾸나! 전원이 장차 거칠어지려 하니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 가?
旣自以心爲形役(주6)하니 奚추(주7)愴而獨悲오.
이미 마음이 육신에 사역하니 어찌 근심하여 슬퍼만 하겠는가?
悟已往之不諫하고 知來者之可追라,
이미 지나간 일은 소용없으나 앞으로 올 일은 바로잡을 수 있나니
實迷塗其未遠하니 覺今是而昨非
실로 길을 잘못 들어 헤메었지만 이제 오늘이 옳고 어제가 잘못됨 을 알았노라.
舟搖搖以輕앙하고 風漂漂(주8)而吹衣
배는 가볍게 흔들리고 바람은 한들한들 옷자락을 날리는 데
問征夫以前路하니 恨晨光之喜微로다.주9)
길가는 나그네에게 남은 길을 물으니 새벽 빛이 희미함이 안타깝구나.
아버님은 어느새 지극히 눈을 감고 가끔씩 좋구나 좋구나 하시며 내 낭송을 음미하셨다. 그러다가 신이 나신 듯 손으로 무릎을 두드 리시며 장단을 맞추시기도 하였다. 나는 아버님의 이런 다감하신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당황하여 하마터면 암송을 잊어버릴 뻔도 하였다.
중략
富貴는 非吾願이요 帝鄕은 不可期
부귀는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요, 임금 계신 곳이야 기대할 수 없 어라.
중략…..
聊乘化以歸盡하니 樂夫天命復奚疑아
변하는 데로 살다가 삶을 다하니 천명을 즐겨 무엇을 의심하리오
낭송을 간신히 끝마쳤을 때도 아버님께서는 여전히 눈을 지그시 감 으시고 스스로 귀거래사의 몇 대목을 암송하셨다. 이때의 아버님 은 도연명이 현령으로 있을 때 군에서 보낸 상급관리에게 예복을 입고 문안하라는 영을 받자 “내 닷 말 곡식 때문에 소인 앞에 허 리를 꺾을 수 없다” 하고 그 날로 사표를 내고 이 귀거래사를 읊 으며 고향으로 돌아간 도연명과 같은 심정이었음을 비로서 느낄 수 있었다.
“한 데 왜 사마천이냐?” 어느새 눈을 뜨신 아버님이 내게 물었다.
다음호에 계속
주1)午時: 오전 11시에서 1시 사이
주2)당상관: 정3품 이상의 관료로 지금의 차관급 이상의 고급관료.
주3) 사마천의 사기는 중국의 요순시대(하나라와 은나라)부터 전 한의 무제시대까지 2500년의 역사를 기록한 130권으로 된 방대한 역사사책이다. 이 중 열전은 개인의 전기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70 권에 달하는 데 200명 이상의 여러 인물들의 전기가 다루었 다. 사기중 문학적인 가치가 매우 높으며 우리가 알고 있는 제자 백가 시대의 공자, 노자, 맹자를 비롯한 위대한 사상가들의 전기 가 실려 있다.
사마천은 각계각층의 사람들의 전기를 다루면서 이미 이때 인간이 란 도대체 무엇인가? 라는 의문에 나름대로 해답을 찾으려고 했던 것 같다.
주4)고문진보는 말 그대로 고대의 문장이란 의미인 데 여기서 고 문은 고대의 詩와 文을 말함. 중국에서는 1366년 원나라 임이정이 란 사람이 고대의 명시와 글을 모아 편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말에 간행된 것으로 보임.
주5)중국 진나라 때의 시인 도연명(365-427)이 지은 240자로 된 운문 으로 작자 자신이 지방의 말단 관직에 있다 중앙의 높은 관료가 시찰 나오니 의관정제하고 나와 절하라는 영에 사표 쓰고 고향으 로 내려가며 지은 시로 수 천 년간 소신껏 일하며 여차 할 때는 사직하고 낙향하는 선비의 귀감이 되었음.
주6)心爲形役(심이형역): 직역을 하면 마음이 육체의 행동에만 따 른다는 뜻으로 오로지 육신의 영달만을 위한 벼슬살이에 마음이 노예가 된다고 의역할 수 있는 바 내 개인적으로는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모습인 듯…즉 사느라고 바빠 늘 마음은 육신을 쫓아가니….
주7)원래는 사람 人변의 부끄러워할 추字이나 컴의 한자 변환기에 없어 한글로 씀
주8)위와 같은 이유
주9) 직역하면 길 가는 나그네에게 남은 길이 얼마인가 물으니 벌써 동이 트는 것이 안타깝구나 라는 의미인 데 밤새워 갈 길은 먼 데 동이 트기 시작한다는 의미인 지 여러 해석을 봐도 잘 이해 가 안 되는 부분인 데 아시는 분이 계시면 댓글 부탁 드립니다.
첫댓글 좋은글 너무 감사 합니다.Ps:주9)은 제 생각으로는 날이 밝아오는게 안타깝다고 하신게 아니고 허무한 세월을 안타까워 하는 뜻인것 같습니다긴글이지만 너무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늘 건안,건필 하세요
긴 글 읽어 주시느라 감사합니다. 그렇게도 해석할 수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