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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RPG의 등장인물이나 사건은 실제 인물이나 사건을 비하 및 조롱하려는 의도가 아니며 이를 통해 불쾌감을 느끼게 할 의도가 없다는 것을 알립니다.
이 RPG에서 언급되거나 묘사된 인물, 지명, 회사 또는 단체, 그 밖에 모든 명칭 그리고 사건과 에피소드 등은 모두 허구적으로 창작된 것이며 만일 실제 같은 예도 있더라도 이는 우연에 의한 것임을 밝힙니다.
이 RPG는 실제 존재하는 국제적 역학관계를 찬양 또는 비판하거나 특정한 사상, 이념, 정치 체제, 인권 탄압과 폭압적 정치 질서를 옹호, 미화하거나 찬양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밝힙니다.
박현주 기자 :선생님과 동료들은 어떤 나라를 만들고 싶었나요? 이효정(경성트로이카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어떤 나라? (웃음) 우리가 좋아하는 나라를 만들고 싶었지요. 박현주 :그게 어떤 거였어요? 이효정 :다 잘 사는 나라지요. - 2009년, 이효정의 타계 1년 전 진행된 인터뷰에서 |
조선노동당이 김일성의 개인숭배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치 않는다면, 장차 인민의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 정추
Fin. 군사혁명의 꿈?
1962년 8월 15일, 총선거의 결과는 민주주의민족전선을 중심으로 청우당까지 합치면 60%의 의석으로써 북한의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할 수 있다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남북 통합 입법기관인 가칭 [통일주체회의]에서는 두 달 내로 남북한에 통용될 간소화된 형태의 헌법을 제정하고, 넉 달 내로 신정부를 선출하는 데 합의했습니다. 그러나, 사소한 부분에서 시작된 갈등은 점점 커져 헌법 초안 작성 참여를 희망했던 유진오가 길거리에서 습격받는 '유진오 습격 사건'이 일어나고,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10월 22일 쿠바에 건설 중인 소련의 핵미사일 기지를 폭로하자 세계의 긴장도 극에 달했습니다.
통일된 국군과 북한군의 통수 기관이 없는 상태에서 북한군과 국군이 각각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양국의 지도부를 벙커로 이송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기회는 북한과 한국의 마지막 남은 반란 세력이 움직일 기회를 주었습니다. 특히, 비우익과 이덕삼을 통해 북한의 행보를 성공리에 방해해 온 북한 내 반란 세력은 승기를 눈앞에 두었단 생각에 방심 중이었죠. 이들은 북한 지도부가 대피한 각지의 벙커를 봉쇄하고 통신을 끊는 한편, 이권무와 방호산을 납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한편, 같은 시기 혹시 일어날지도 모르는 남북한 군대의 충돌을 막기 위해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중앙위원 대부분 및 한국 측 인사 여럿과 파주공단 건설 현장으로 직접 나아간 이덕삼과, 조평통 부위원장 중 한 명으로 방치되어 있던 비우익 또한 위기를 맞았습니다. 누군가의 지시를 받은 국군 제1보병사단이 파주공단을 봉쇄한 것이었죠. 1사단장 황영시 준장은 자신과 담판을 지으러 나온 이덕삼이 시간을 끌려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즉시 북한 및 한국 대표에 대한 체포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사이, 피해망상증이 또 도진 비우익은 이덕삼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발언을 일삼다 유일한 희망을 없앨 뻔했죠.
다행히 이화영의 남편인 박철환과 통신이 닿아, 조일봉과 이화영은 반란군이 장악한 항공기로 벙커의 입구를 막는 폭격을 하기 전에 탈출해 인민무력부-총참모부 통합벙커로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그 직후, 북한 내 쿠데타의 배후가 드러났죠. 그는 바로 북한 내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원수 계급 보유자였던 최현이었습니다.
'사회주의'라는 단어를 전혀 쓰지 않았던 데다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김일성의 연설을 빼다 박은 최현의 연설 내용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불합리하게' 내쳤다는 사고방식만 가득하던 이화영은 개인적인 인연이 있는 조일봉에게 최현을 지지해야 한다고 설득하려 했습니다. 박헌영의 지지자였던 조일봉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고, 호위사령부와 접촉하여 여러 정보를 얻는 데 성공했습니다. 쿠데타에 105땅크사단이 가담했다는 것이나, 공군 중 일부 항공기가 반란군의 손에 넘어갔다는 것 등이었죠.
파주공단에 감금된 비우익과 이덕삼도 라디오 방송을 통해 한국 측 쿠데타의 배후를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재미동포의용군 사령관이자 전설적 독립운동가인 합동참모의장 이홍립 중장이 수괴였던 것입니다. 북한이 한국에 저질러 온 만행을 지적한 이홍립은 최현보다 더 많은 권한과 능력이 있었기에 순식간에 행동을 개시해 큰 성과를 볼 수 있었던 것이죠.
조일봉이 얻은 가장 중요한 정보는 호위사령관이 직접 보낸 인편을 통해 얻은 '최고사령부 벙커와의 통신을 위한 암호책'이었습니다. 조일봉은 박헌영을 설득해, 과감하게 자만한 최현이 사령부를 차린 모란봉 극장을 미사일과 소이탄으로 폭격해 최현과 그 일당을 확인 사살해 버리자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한국 측에서도 급변 사태가 발생했고 이덕삼과 비우익만 있으므로 이관술과 박철환을 보내 그들을 돕고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죠.
결국, 박헌영은 고민 끝에 조일봉의 주장에 동의했습니다. 대형 순항미사일 탑재를 위해 개조된 경폭격기가 이륙하여 한 발 만으로 모란봉 극장을 격파하고, 뒤이어 날아온 근접항공지원기들이 소이탄을 투하하며 최연, 이을설, 김도만이라는 3인의 쿠데타 수뇌부가 현장에서 사망하며 북한의 정변 시도는 허망하게 종료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위험의 불꽃은 남아있었습니다. 전위당 중심의 독재정권 건설에 몰두하던 이화영이 박헌영을 찾아가, 반란 세력의 청소를 명분으로 조선민주당을 비롯한 우익을 쓸어내자고 설득한 것이었죠. 설득에 넘어간 박헌영은 국가정치보위부장 김삼룡을 우회해 이화영에게 '청명계획'이라는 숙청안을 만드는 것을 맡겼습니다.
한국 측의 상황은 좀 더 어려웠습니다. 간신히 연락이 닿은 9사단장 원충연 준장이 출동해 1사단을 쫓아내고 파주공단에 감금된 남북 인사들을 구출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원충연의 증언에 따르면 서울이 이미 반란군에게 넘어갔다는 것이었죠. 이제야 비우익과는 도저히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이덕삼은 비우익을 아예 무시해 버리고는, 도·감청을 감수하고 북한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우연인지 의도적인지, 이덕삼은 다른 누구도 아닌 주북한 소련대사 박진순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박진순은 이 쿠데타가 한국의 이홍립과 최현의 사전 교감을 통해 '남북 대립 관계를 다시 구성하려는 자'들의 음모라는 것을 이덕삼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이덕삼은 어느 나라의 반란군이든 함부로 대응할 수 없는 위치인 판문점으로 이동해 안전을 꾀한 뒤, 강릉항에서 실제로 남북 반란 세력 간의 비밀 접촉이 있었단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새 또 피해망상이 도진 것인지, 혹은 정말로 미국의 간첩이었던 것인지 망언을 시작한 비우익을 재빨리 체포해 감금한 뒤, 이덕삼은 정오가 되기 직전 도착한 조일봉과 이관술, 박철환으로부터 북한 쿠데타 진압 소식의 자세한 정보와, 이관술과 박철환이 대남 정책의 총책임자와 부책임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습니다. 비우익의 곁에 오래 있어서인지 비우익과 마찬가지로 이관술에게 이유 없이 시비를 걸려 했던 이덕삼은 간신히 진정한 뒤, 아예 민주주의에 익숙한 한국인들이 직접 반란군을 뒤집어엎어 버리자는 새로운 계획안을 만들어냈습니다.
조일봉이 목숨을 걸고 헬리콥터에 타 선전 방송을 하고, 각종 통신으로 잘못된 정보와 사실이 발신되어 혼란을 일으키는 사이, 이덕삼과 이관술, 고정훈 등은 목숨을 걸고 판문점의 미국과 중국, 중립국 대표단과 함께 서울로 공개적으로 향했습니다. 이홍립은 일이 글렀다는 것을 깨닫고 빠르게 포기했지만, 윤필용을 비롯한 인사들은 여론전을 시도해 저항하려 하였죠. 그러나, 제주도 기지를 포기할 수 없었던 미국이 주미대사를 통해 쿠데타를 비판하며 한국의 반란 상황도 끝장이 났습니다.
E. 무궁화와 목란화
1962년 10월 24일, 모든 사태가 종료되었습니다. 고령에 건강이 좋지 못했던 김창숙 대통령이 양국의 군사 반란 시도를 비판한 뒤 쓰러져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대통령의 자리를 메운 최근우 부통령은 ‘그 누구도 통일의 물결은 막을 수 없다’라고 선포하였습니다. 남북한 정부는 6개월 간의 과도정부 설립에 합의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자고 발표하였습니다. 통일의 최대 걸림돌이었던 이용문 계파가 내분으로 허망하게 몰락한 상황에서 얻은 성과였죠. 통일은 북한이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남북한의 사태를 반면교사로 미국과 소련이 쿠바 위기의 해결에 합의하는 사이, 이홍립과 연계된 친일파 세력과 북한 내 강경파 세력의 최후 보루가 서서히 정리되기 시작했습니다.
일명 '통일준비최고회의'라고 불리는 6개월 간의 임시정부는 이상한 타협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쿠데타를 먼저 진압하는 데 성공해 박헌영의 권력을 온전히 유지한 북한, 민주적으로 쿠데타군을 몰아냈지만, 김창숙 대통령이 지병으로 타계하고 만 한국의 대결은 단순히 '체제가 안정된 북한의 승리'로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한국의 대중은 민족 통일과 사회평등은 원했지만, 마르크스주의까지 원하느냐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았습니다.
박헌영의 선택지는 이덕삼의 발언에서 착안한 '정통성 지키기'였습니다. 어차피 민족주의를 더 중시했던 이덕삼을 비롯해 옛 조소앙, 엄항섭을 비롯한 인사들로 한국독립당의 체급을 크게 키우고, 북한식의 정치체제를 사용하되 그 명칭은 전부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의 것으로 하며, 국기는 임정 시대의 태극기를, 국장은 북한의 인공 상징을 쓰고 국명은 둘을 합쳐 '대한인민공화국'으로 하는 것이었죠.
임시정부도 의정원에서 정부를 선출하는 집단지도체제였고, 한국도 국회에서 대통령이 선출되는 체제였기 때문에 한국인들에게도 최고 입법부에서 지도부를 선출하는 것 자체는 어색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태극기, 임시정부 정통성 인정 등은 철저히 한국을 존중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문제는 이것들이 그야말로 '이름만 임시정부'고, '사회주의라는 단어만 안 쓰는' 사회주의 체제의 도입이었단 것이었습니다.
오른쪽을 가리키며 왼쪽으로 달리는 게 말이 되냐는 주요 도용 피해자 조소앙의 지적에 북한은 아예 북한식 사회주의에 삼균주의의 이름을 도용해 붙이려던 시도를 접고, 박헌영이 출마하지 않는 초강수를 두어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관철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해방정국 때 자생적으로 생긴 인민위원회와, 그 위에 이식된 임시정부의 정부직제도를 합친 결과물은 사회주의 공화국인 게 된 것이죠. 박헌영은 물론 청명계획을 통해 권력에 복귀할 계획이었지만, 청명계획이 그리 쉽게 들통날 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1964년 5월, 문화훈련국에서 독립된 조선인민군 보위사령부에서 근무하던 홍계성 하전사가 탈영해 청명계획을 폭로하였습니다. 홍계성은 보위사령부가 운영하던 위장카페 '모비딕'에서 민간인 사찰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폭로, 개중에는 진보당 최고위원 조봉암을 비롯한 집권 세력 대표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알려졌습니다. 최현의 사위였기에 ‘동요 계층’으로써 박헌영으로부터 갖은 탄압과 모욕을 받던 홍계성의 폭로는 엄청난 여파를 낳았습니다.
일명 [인민군 보위사령부 민간인 사찰 폭로 사건] 이 시작되자, 박헌영 주석은 엄청난 타격을 받습니다. 무엇보다, 이를 청명계획이 만들어지던 당시 국가정치보위부장인 김삼룡조차 몰랐다는 것은 박헌영에게서 측근들마저 등을 돌리게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박헌영이 '왜' 믿을만한 남로당파와 콤그룹계에 이 계획을 알리지 않았었는지는 추측할 만한 이유는 있습니다. 바로 박헌영이 이화영의 스탈린주의에 대한 신봉은 신뢰했지만, 그 신봉이 ‘자신’에게 오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청명계획이 폭로되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이화영은 확실하게 끝장이 나고, 자신도 몰락하면서도 남로당파와 콤그룹계는 멀쩡히 살아남을 수 있는 시나리오를 짜 두었단 것이었죠. 박헌영은 자신의 계파가 자신을 버리는 상황에서 마치 이 상황을 예측한 것처럼 사임했습니다. 계획의 입안자인 이화영은 구속되었고, 김국태를 시작으로 가담자들도 줄줄이 체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혼자 죽지 않았습니다. 한국독립당 최고위원이었던 이덕삼에 대한 박진순 대사의 비밀스러운 폭로문이 그를 사임하게 했고, 이는 전 조평통 부위원장 비우익이 실종된 상태에서 사실상 한때 조석중 아래 묶였던 그룹의 완전한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비밀리에 박헌영과 면담을 한 뒤, 박헌영계의 '황태자'였던 이행규는 마찬가지로 박헌영계의 핵심이었던 조일봉과 손잡고 박헌영 비판에 나서 콤그룹계와 남로당계의 통합 및 쇄신을 이룩해내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이용문계의 김종필을 과감히 영입한 그는 새로운 문화부장으로 정권의 실세가 되었습니다.
박헌영의 ‘복수’는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국가정치보위부와 보위사령부의 사찰과 조사를 통해, 비우익과 이덕삼이 최현 일당에 의해 눈과 귀가 가려진 상태에서 피해망상과 아집, 고집 등으로 북한의 국체와 사회주의를 파괴하려 했다는 결론을 내렸고, 이 정보를 자신의 후계자 그룹인 김시형, 이행규, 박진홍 등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들은 무자비한 암살과 테러로 화답했습니다.
그러면서 한때 ‘사박카’를 몰아내기 위해 김영천의 집에서 조석중의 아래 모였던 인사들은 끝장이 났습니다. 잘못된 판단, 피해망상과 아집, 사리사욕과 개인적 목표…. 수많은 갈등이 첨예하게 맞닿은 결과물은 참극이었습니다.
이제, ‘붉은색의 무궁화’가 피었습니다.
[비우익]
최종 직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생몰년도 :1918~?
1962년 '이홍립-최현 정변 미수사건' 당시 정변 진압을 방해하다 체포된 이후 실종. 평양으로 압송된 뒤 박헌영을 만났으나 박헌영에게 비참한 모양새로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였고, 박헌영은 비우익을 풀어주었지만, 이현상의 공작으로 비우익은 보통강에서 익사
[이덕삼]
최종 직위 :한국독립당 상무위원
생몰년도 :1924~1964
1964년, 조선공산당 탈당 후 한국독립당 상무위원 재임 중 박진순 대사의 폭로에 대해 반박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 평양국제비행장 인근에서 교통사고로 사망. 최현이 관계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뒤, 박문규가 직접 제거를 주장하여 교통사고를 위장해 암살
[이화영]
최종 직위 :국가정치보위부 부부장
생몰년도 :1920~1964
1964년 '인민군 보위사령부 민간인 사찰 폭로사건' 이후 체포. 미리 내려졌던 박헌영의 비밀스러운 지령에 따라 투옥 약 5개월 뒤 극독에 중독되어 병사를 가장한 암살
[박헌영]
최종 직위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주석
생몰년도 :1900~1965
'인민군 보위사령부 민간인 사찰 폭로사건' 이후 수사 대상이 된 상태에서 심근경색으로 급사. 다른 사망사건과는 달리 타살 의혹 없음
[박철환]
최종 직위 :전략로케트군 사령관, 대장
생몰년도 :1920~1965?
이화영 부부장의 수감 이후 소련으로 망명, 핵 개발과 대소련 로비를 폭로하기 위한 ‘메트로폴 청문회’ 준비 도중, 모사드 공작원들에 의해 납치 및 피살
[조석중]
최종 직위 :국가계획부장
생몰년도 :1909~1975
국가계획부장으로 사실상 종신 재임 중 과도한 흡연과 음주, 스트레스로 인한 암 발병으로 병사
[조일봉]
최종 직위 :대한인민공화국 국방부장, 원수 계급
생몰년도 :1920~1977
국방부장 재임 중 강연을 위해 방문한 여천대학교에서 당시 여천대학교 정치철학과 교수 기타코우지 사토시의 정치테러로 사망, 이는 조일봉이 일본 좌익반란을 사주하여 일부러 몰락하게 한 것이 발각된 것 때문으로 확인됨
[오승택]
최종 직위 :쌍성 평의회 제2비서
생몰년도 :1919~1982
1963년, 최현 일당의 쿠데타 가담 제의를 받고 거부하였지만, 북한에 알리지도 않았단 사실이 발각된 뒤 강제로 은퇴한 후 농부로 일하며 은거하던 중 조용히 병사
[최종 목표 1 :독립된 사회주의 체제 건설 및 수호] :진행 단계 6/6
달성 성공
[최종 목표 2 :개인숭배와 일인 독재 혁파 및 재발 방지] :진행 단계 6/6
달성 성공
[생존자]
없음
* * *
[도서정리사업]
구 국가계획위원장 김책이 민족주의자들을 북한 정권에 대거 끌어들인 뒤로, 북한과 한국이 한공이라는 새로운 체제로 통합된 뒤에도 조선공산당, 후일 한국공산당 내에는 최현 쿠데타미수에 가담한 김도만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자들이 남아있었습니다. 이러한 민족주의자들의 제거에 앞장선 것은 정통 사회주의자임을 자임하는 조세웅과 남로당파의 간부 중 한 명이었던 박문규였습니다.
특히, 박문규는 자신이 이덕삼과 친하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이덕삼은 사회주의에 대한 이해도 없으면서 사회주의자인 척 하며 고위직에 올라 최현을 이롭게 했다'라는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특히, 최현 일당이 이덕삼과 비우익 등을 골라 북한 정권에 해를 끼치는 공작에 이용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뒤에는 이덕삼을 빠르게 제거해버리고, 그와 관련된 공산당 내의 민족주의자들까지 다 출당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민족통일이 달성된 이상 사회보수주의와 민족주의를 내세울 이유가 없었던 공산당은 박문규 본인을 제외하면 공산당 내에 동지가 없었던 이덕삼을 제거해버리자는 말에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이덕삼은 이미 한국독립당에 가담하여 공산당을 비판하는 데 앞장서고 있었으니까요.
박진순이 이덕삼에게 불리하도록 취사선택된 녹취록을 기반으로 이덕삼의 최현-이홍립 쿠데타미수 당시 행적을 폭로하자, 이덕삼은 주북한 소련대사 박진순의 폭로에 반박하기 위해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평양국제비행장 근처에서 차량이 '빗길에 바퀴가 미끄러지며' 도로를 이탈, 전복되며 현장에서 사망하였습니다. 차량의 휘발유에 불이 붙어 전소되었고, 이덕삼의 신원은 치아로 확인할 수 있었죠.
1964년부터 1967년 말까지 박문규는 인민검열부장에 임명된 이행규, 중앙인민위원회 간부국장 조세웅과 함께 '민족주의 세력 제거'에 나섰습니다. [공산당이 민족주의 세력과 손잡았던 것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민족해방운동과 계급해방운동이 결합될 수 밖에 없었던 이중억압체제의 시대적 한계였으며, 그러한 이중억압체제가 끝난 이상 쇼비니즘적 경향은 공산당에서 사라져야 한다]라는 한공 중앙당의 발표는 이 제거사업에 큰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설명은 '시대적 한계, 잘못된 민족우월주의적 경향'등의 서술이 붙었고, 최현과 김도만, 이덕삼은 김일성과 묶어 '다시는 나와서는 안될 사회주의의 배신자'로 낙인찍혔습니다.
박문규가 민족주의 세력과 결별했을 뿐만 아니라 이덕삼을 '배신'한 이유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친우인 최용달과 이강국과는 달리 박문규는 한치의 실수도 하지 않는 기계 같은 사람으로 유명했고, '절대로 위험한 발언은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이덕삼을 산제물로 바친 셈이었습니다. 그가 자행한 도서정리사업은 공산당을 진짜 마르크스주의 정당으로 변화시키는데는 성공했지만, 상당히 오랜 시간 남을 내상을 한공에 입혔습니다.
[약속의 땅]
남북통일 이후 군축을 감행하면서 한공은 무기와 인력을 전 세계로 판매, 대여, 파견하며 쿠바와 함께 '사회주의 혁명의 수출국'이라는 악명을 떨치기에 이르렀습니다. 특히, 팔레스타인의 페다이들과 끊임없는 전투를 벌이는 이스라엘은 북한의 주요 동맹으로써 귀중한 실전경험 자료를 한공에 제공하는 중요한 출처였죠.
그러나, 수에즈 전쟁 이후 이를 갈아온 이집트-시리아-이라크의 '아랍 민족주의 동맹'은 프랑스의 군사 고문단과 최신 장비를 들여와 전쟁 준비에 나서며 이를 갈고 있었습니다. 북예멘 내전에서 아랍 왕정국가들을 반동이라 비난하며 사이가 멀어진 이 파시스트 국가들에게는 성과가 필요하였고, 이를 이스라엘에 대한 가짜 전쟁 협박으로 풀려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 협박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은 다른 문제였습니다.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은 철저히 준비된 기습을 통한 선제 공격으로 이집트 공군의 80%를 전쟁발발 첫날에 격파한 뒤 6일만에 삼국 동맹은 물론 동맹으로 참전한 요르단이나 아랍 각국의 지원군까지 철저히 파괴하는데 성공한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와 요르단강 서안 지구, 골란 고원을 점거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레비 에슈콜 총리는 전쟁의 종굘 일주일 후 '세계 사회주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방문, 사회주의권의 영웅 대접을 잡으며 미국과 프랑스에 큰 엿을 선물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군사적 승리는 전례없는 정치적 위기가 되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에서 아랍인 인구는 40%에 육박하였고, 엄연히 사회주의 국가인 이스라엘은 더 이상은 이들을 기상천외한 이유로 탄압할 수 없었습니다. 오랜 격론과 난맥상 끝에, 급진 좌파였던 하말 하카람은 결국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아랍인들과 손잡아야 한다'라는 자신의 의견을 관철,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과 유화정책에 돌입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 국경 밖으로 추방당하는 한편, 또 적지 않은 이들이 새로이 탄생한 국가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연방, 일명 '가나안 연방'의 국적을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분명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유지하던 기성 이스라엘 정치권이 하카람의 의견에 동의한 이유는 확실하지 않지만, 추측되는 이유는 한가지 있습니다. 바로 유대계 종교근본주의 세력의 성장을 먹기 위한 것이었죠. 아랍인들이 이슬람교와 아랍어를 기반으로 한 거대한 민족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으니, 이를 깨뜨리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종교정책을 탄압해야 했고 이스라엘의 후신인 가나안은 자신들도 무신론자였던 노동당 인사들조차 너무 과격하다고 느끼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세속화된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예상치 못한 역효과 또한 낳았습니다. '가나안인'이라는, 팔레스타인어(실상은 이스라엘에서 쓰이던 아랍인들의 구어)와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새로운 시민내셔널리즘적 민족정체성이 생겨나며, 이들이 고대 이스라엘, 유다, 사마리아 등의 '고토를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 것이었습니다. 일명 자연국경 회복론은 결국 1973년의 '라마단 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발레리 미하일로비치-유리 이르세노비치 사건]
1964년, 이화영과 관계자들이 청명계획과 함께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린 뒤 북한에 아직까지 남아있던 반수정주의자들 중 청명계획에 관계되지 않았던 이들은 최후의 저항을 노렸습니다. 이들은 단순한 김일성 추종이나 권력투쟁 같은 것에서 벗어나, '정말로 이념적으로 순순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추구하는 근본적 방향으로 돌아섰고, 그랬기에 대중을 각성시켜 노동계급이 사회를 뒤집게 한다는 고전적 방법론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1968년, 일이 터졌습니다.
당시 인민검열부장 이행규가 이 사태에 얼마나 관련되어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확실한 건 태평양 함대 정치위원이었던 발레리 사블린과 소련 문화계의 떠오르는 샛별이었던 유리 이르세노비치 킴이 주동자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혁명을 운운하며 자신도 타락해버린 나약한 즈다노프'의 이미지와, 미국과 자유주의 진영의 위협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미국과의 무력 충돌을 계획, 1968년 1월 23일 한공 해군 소속의 방철갑 중좌와 손잡고 공해에서 항해하던 푸에블로함을 공격해 납치했습니다.
국가수반인 이관술 주석과 정부수반인 고정훈 부주석이 대응하기도 전에, 소련에서 '푸에블로함 나포'를 주제로 한 단편영화가 출현, 한공의 영해를 침범한 미제에 대한 선전이 들끓었습니다. 하필, 구정 공세로 직격탄을 맞은 미국 여론이 얄궃게도 이 선전영화를 전적으로 사실이라 믿고 미군을 비난하는 촌극까지 벌어졌죠.
3차 중동전쟁, 베트남에서의 확전 등의 위기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이관술은 박헌영의 전철을 밟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는 방철갑을 바로 체포해버리고, 즉시 제주도의 캠프 앳킨슨을 통해 선원은 물론 미국의 첨단 정찰장비까지 탑재된 귀중한 함선이던 푸에블로함까지 반환했습니다.
이관술은 나약한 지도자 같은 프레임이나, 실수를 봐주다가 자신의 목숨까지 잃게 된 박헌영의 전철 등을 피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혁명재판소'라는 이름의 특검을 실시해 1개월만에 관련자들을 모조리 체포하거나 기소하는 초강수를 두었고, 개중에는 콤그룹계의 황태자인 이행규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박헌영보다 대중정치에 이해도가 높았던 이관술은 굳이 부패나 추문을 지어내는 대신, '중앙 정치활동 규제'를 통해 관련자들의 영향력을 개성 정부 내에서 제거해버리면서 최종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한편, 유리 이르세노비치와 발레리 사블린이 '화화대표회의공화국'으로 망명하였고, 이로 인해 1969년 3월 중국 공농홍군과 소련 노농적군이 무력충돌 직전까지 가는 사태가 일어나며 이 사태는 '세계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대중민주주의 중국-동독'과 '현실정치에 중점을 둔 교도민주주의 소련-발칸'간의 경쟁으로 번졌습니다. 이는 1979년 발칸연방이 핵개발을 성공하고 '유럽 사회주의 동맹'을 선포, 유럽의 사회주의 국가가 모조리 발칸으로 넘어가기까지 이어졌습니다.
[국가계획부의 내분]
폐암 말기 진단을 받은 조석중이 1975년 갑작스럽게 사망한 뒤, 조석중의 경제노선을 지지하는 남덕우가 새로운 국가계획부장이 되었습니다. 수출과 성장 중심의 경제기획을 계속 지지하는 남덕우는 조석중의 후계자 라인이라 할 수 있는 김정렴, 공진태, 홍성남, 김재익과 같은 노선인 '사회주의시장파'로 88년도 올림픽 준비가 경제적 낭비라며 반대하는 한편 무리한 복지정책이나 완전고용은 '좌경모험주의'라며 최대한 미뤘습니다. 흥미롭게도, 재계의 김필중 회장이 이러한 조석중 노선을 지지하며 옛 한국의 서강대학교 인맥을 중심으로 한 이들이 주 지지층을 이룬 것이었죠.
그러나 김경련, 김복신을 중심으로 한 '경제민주화'파가 조공의 거물인 박남기와 진보당의 라살주의자 중 한명인 김종인을 영입하는데 성공하며 전세는 크게 변했습니다. 조선민족혁명당과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20년 아성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1977년, 김종인의 제안으로 시작된 의료개혁이 대성공을 거두자, 이들의 입기는 더 커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정치권의 떠오르는 샛별인 조세웅이 이들을 지지하자, 일명 '경제민주파'는 급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란 이슬람 혁명이 2차 석유 파동을 일으키기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새로이 들어선 이란의 후견사회주의 정권이 한공이 이스라엘과 무척 친하다는 이유로 유가에 특별세를 매긴 것이었죠. 서울에 '테헤란로'라는 이름의 거리까지 만들 정도로, 사회주의 진영임에도 불구하고 아크하비 군사정권과 친했던 한공으로써는 뭐라 말할 수도 없이 속앓이를 할 뿐이었습니다.
2차 석유파동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한공의 경제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습니다. 경제민주파의 중핵이었던 박남기와 조세웅조차도 '건전한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하는 것이 맞다'라고 동의한 것이었죠. 국가계획부의 최고권력자로 등극한 남덕우는 자신의 오른팔 홍성남과 함께 사회주의근로인민전선을 해체하고 호선 의석을 완전히 없애는 한편, 노동자자주관리법을 도입해 노동자들에게 당근을 쥐어주며 이후 '3저 호황'이라 불릴 경제호황을 이끌었습니다.
[이란 혁명]
하산 아크하비 장군의 군사독재 정권이 내분 끝에 종말을 맞은 것은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파시스트 테러단체를 선동해 대아야톨라 호메이니를 암살하는 데 성공한 것은 그가 혁명을 막아보려 한 마지막 시도였고, 호메이니의 빈자리를 채운건 정치적 술수를 펼칠 능력은 모자랄지언정 인망은 더 높았던 대아야톨라 후세인알리 몬타제리와, '후견사회주의' 운동을 이끄는 알리 샤리아티였습니다.
자신의 카리스마로 이슬람 성직자와 즈다노프주의 투데당, 신민주주의 이란민병기구, 자신을 추종하는 인민전사기구를 묶어낸 샤리아티는 '반동적이다'라는 중국과 소련의 비판과 직접적 지원 거부에도 불구하고 아크하비 정권을 끝장내버렸고, 모든 기업의 국유화 및 중앙통제, 이란 민족주의, 문화적 보수주의에 입각한 후견사회주의 체제를 건설했습니다.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탄생이었죠.
종교세력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끌어온 것에 경악한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이 이란을 공격하면서 시작된 이란-이라크 전쟁은 모든 것을 바꾸었습니다. 몬타제리가 약속한 다당제 민주주의는 이뤄지지 않았고, 샤리아티는 그때까지 남아있던 이란의 모든 정치단체를 강제로 하나로 묶은 '민족전선'의 총비서로 취임했습니다. 이어 총리가 되어 국가의 전권을 장악하였죠. 그는 군사정권의 잔재라며 감옥에 넣어버렸던 이란군을 사면복권하는 대신 정치위원 제도를 도입하였고, 이라크를 상대로 한 대조국전쟁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간신히 명맥만 남아있던 옛 스탈린주의자들이 후견사회주의의 이론이 아닌 '실제 적용'은 2차대전 당시의 스탈린주의와 아주 똑같다는걸 발견, 후견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사회주의권이 발칸과 소련이 중심이 된 현실사회주의 베오그라드 조약기구, 동독과 화하가 중심이 된 좌파공산주의 공산노동자집단에 이어 후일 반수정주의적 세계공산주의자협회, 즉 'ARICA'의 세 곳으로 구분되는 것의 시초였습니다.
[유럽사회주의동맹]
1979년 초, 발칸 연방이 핵개발 성공에 선언한 것은 모두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동독과 소련을 제외한 동유럽의 모든 사회주의 국가를 묶어 '유럽사회주의동맹'을 선포한 발칸은 소련 대사의 방문 자리에서 유럽사회주의동맹과 베오그라드 조약기구, 소련의 관계는 유럽경제공동체와 북대서양조약기구, 미국의 관계와 다를 바가 없다면서 소련을 안심시키는 한편, 오랜 외톨이였던 동독을 동맹체제에 끌어들이는데 성공했습니다.
처음에는 화하와 동독처럼 영향권 이탈을 우려하였던 소련에서는 '사회주의를 내세우는' 동맹이 쉽사리 해체하거나 변화되기는 어렵다는 것을 간파하고, 오히려 이것이 소련의 오랜 숙원이었던 [유럽 완충지대의 완성]이라는 걸 파악했습니다. 영토가 유라시아에 걸쳐있다는 이유로 일부러 유럽사회주의동맹에 가입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소련은 베오그라드 조약기구의 조직 가맹국의 자유와 분담금 배분 등을 조정하며, 기존의 위성국 직접통치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영향력의 상실을 걱정하는 인민들에게, 소련은 그 동안 엄청난 성과를 거둔 경제성장의 과실이 어디로 갔는지를 방송으로 증명했습니다. 바로, '앨리타 계획'의 성공을 통해 화성 착륙에 성공한 소련 우주인들의 모습이었죠...
[제한주권론]
제3세계가 사실상 친소 경향을 유지하는 상황에서, 미국은 급진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서독에서 나치가 돌아와도 묵인하고, 프랑스가 알제리를 어떻게 탄압하여도 묵인하였고, 중동의 파시스트 정권들도 묵인하였습니다. 필요하다면 해병대를 상륙시켜 정권을 뒤엎는 것 조차 거리끼지 않았죠. 닉슨 대통령이 발표한 '닉슨 독트린'은 이러한 미국의 자유주의 진영 유지를 위한 이론적 체계가 되었습니다. 일명 제한주권론이었죠. 미국과의 군사동맹이나, 친미 정권의 존재를 위협하는 것은 그 어떤 나라에도 허용된 것이 아니며 무엇이 사회주의고 무엇이 자유주의인지는 미국이 결정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는 순탄치 않았습니다. '소련과 사이가 애매모호니 혹시?'라는 생각에 접근했던 화하와 동독이 [자본주의자는 꺼져라]라는 희대의 외교적 결례를 퍼부으며 미화 재접근은 처참하게 실패하였고, 파키스탄에 대한 접근은 '소련-화하-인도 동맹을 보고 싶냐'라는 인도의 으름장에 물러나야만 했습니다. 동남아에 대한 개입을 늘리는 것이 닉슨이 할 수 있는 한계였죠.
남베트남은 결국 내부 체제의 한계를 이기지 못하고 몰락했지만, 일찍이 소련과 화하가 모두 손절한 캄보디아를 침공해 크메르 루주를 지도에서 없애버린 것 정도가 닉슨이 주장한 '제한주권론'이 제대로 작동한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하고, 그렇게 힘들게 지킨 캄보디아조차 통일된 베트남의 괴뢰국가로 전락하며 미국의 제한주권론은 80년대 들어 최대의 위기를 맞기 시작했습니다...
[제1차 독도해전]
1975년 재일 한인 문세광이 조선공산당 중앙위원이자 정치국원인 이철수를 저격해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 이후, 이미 냉랭하던 한일관계는 정경분리 원칙조차 잊을 적도로 극심히 악화되었습니다. '남쪽의 한국과 북쪽의 조선' 둘 다의 후계국임을 자임하던 한공 정부는 오래도록 잊혀져가던 '평화선'을 선포하고, 평화선을 침범한 일본 어선과 상선을 무차별 나포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 해상자위군이 주력함인 타카즈키급 호위함과 구축함 아마츠카제를 독도 근해로 파견하였고, 해상자위군의 특성상 비싼 돈을 들여 도입한 타우러스 대함미사일의 사용이 어려운 상황에서 출동한 구식 스베르들로프급 순양함인 개성함의 존재는 상당한 위협이었습니다.
해상자위군은 결국 자체 유도기능이 없는 타우러스를 발사하기 위해 무인 헬리콥터인 DASH를 출격시켰지만, 개성함에 장착된 152mm 주포는 양용포였고 근접신관이 장착된 포탄이 DASH를 허공에서 산산이 분해한 것은 물론, 뒤이어 152mm 고폭탄 세 발이 나가즈키함에 명중, 두 발이 폭발하며 타카즈키급 호위함인 나가츠키를 대파시키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미국과 소련의 급한 중재로 교전의 격화는 막을 수 있었지만, 명색이 헌법개정을 해 제한적으로는 교전권이 있다는 자위군이 아무것도 못하고 2차대전식의 구식 함선에 포탄을 얻어맞아 사상자가 수십명이나 난 것은 일본의 대망신을 유발했습니다. 특히,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가 외교에 심혈을 기울이던 화하가 침묵을 지킨건, 다나카 내각의 붕괴와, 이후 15년 간 이어질 한공과 일본 간의 건함 경쟁을 유발했습니다.
한편, 나가즈키급에 박힌 포탄 한 발을 면밀히 분석한 미국은 이 포탄이 사실은 멍텅구리 폭탄이 아닌, 종말고도에서 접이식 날개를 펼치는 반유도 포탄이라는 것을 알고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거의 처음으로, 미국이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지상 화력지원용'으로 남아있는 것이라 추측하였던 소련 해군의 구식 함선인 스베르들로프급 경순양함과 볼고그라드급 순양전함이 사실은 대함 전투용이란 걸 깨달은 순간이었죠.
첫댓글 생존자 "없음"
5개월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오… 결국 1화부터 에필로그화까지의 중심 이야기는 처음 김영천 고택에서 모였던 조석중의 발탁자 세명이 어떻게 권력으로 진입하여 어떻게 잘못된 판단을 하여 어떻게 몰락했는가에 관한 것이네요. 조일봉은 결과적으로는 이 3인방의 만행(?)을 보고 주석의 복수?를 도우려는 일종의 반동인물이고요 ㅋㅋㅋ
의도한건 아닌데 그렇게 된 것이, 약속의 땅 보다는 깔끔한 결말입니다.
원래라면 셋 다 리타이어 했어야 한다는 말대로... 진짜 만행이긴 하네요 ㅋㅋ 반동도 제대로(?) 반동이었고(...)
@렌지파일 만일 3번째 작품(하신다면...?) 도 있다는 전제로 이번엔 몰락하지 않는 길을 걸어보고 싶네요(...)
@dear0904 역시 마지막에 쿠데타->전원 쓱싹(…)을 했어야 했는데 ㅂㄷㅂㄷ…
@E.E.샤츠슈나이더 류메이란 이야기 자주 하시더니 결국 물드시고 마셨군요... ㅋㅋㅋㅋㅋ...
이야.. 그 내용을 전부 요약 ㄷㄷ...
그동안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에필로그 에피소드를 정리해 추가했습니다. 아마 이후에 몇개 더 나올 수도 있겠네요.
추가된 내용 이제야 확인했네요. 샤리아티의 이슬람 민족사회주의 ㄷㄷㄷㄷㄷ…
엌ㅋㅋ 대체적으로 오마주가 많습니다 ARICA라던지..
@렌지파일 라마단 전쟁은 베이퍼웨어가 된 약속의땅 시즌2의 흔적인건가요(?)
@E.E.샤츠슈나이더 영토확장에 성공(?)한 뒤 1989년 소련처럼 된 가나안을 살리는 내용일 예정이었습니다만, 실제 이스라엘이 저렇게 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