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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 풀린 연못을 보러 숲으로 갔었다
안개의 덧문을 지나
일월과 이월 안에 갇힌 새들의 발자국을 꺼내러
겨울 물고기들의 소식을 들으러
연못은 그 심장까지 얼지는 않았으므로
심장까지 얼지 않기 위해 밤마다
저의 언 몸을 추슬렸을 것이므로
움직이는 물은 그 안에
꽃의 두근거림을 지니고 있으므로
꽃의 두근거림이 언 연못을 깨우는 것이므로
저마다 가슴 안에 얼음 연못 하나씩 가지고 있으므로
허공에 찍힌 새들의 발자국을 따라 갔었다
얼음 풀린 연못을 보러
모든 것 속에 갇힌 불꽃을 보러
다시 깨어나는 깊이를 보러.
- 류시화 시 '얼음 연못' 모두
1.당나귀는 가난하다
아무리 잘생긴 당나귀라도 가난하다
색실로 끈을 엮어
목에 종을 매달고도 당나귀는 대책없이 남루하다
해발 5천 미터
레에서 카루등라 고개를 넘어 누브라 밸리까지
몇 날 며칠을 당나귀를 타고 간 적 있다
세상의 탈것들은 다 타 보았지만
내가 나를 타고 가는 것 같은
내가 나를 지고 가는 것 같은
기분은 처음이었다
당나귀 등에 한 생애를 얹고 흔들리며 벼랑길 오르는 동안
청춘을 소진하며
어찔한 화엄의 경계 지나오는 동안
한 소식 한 당나귀에게서 배웠다
희망에 전부를 걸지도 않고
절망에 전부를 내주지도 않는 법을
그저 위태위태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법을
당나귀여, 너는 고난이 멈추기를 갈망하지도 않는다
나도 너처럼 몇 생을 후미진 길로 걸어 다녔다
그러나 그곳이 폐허는 아니었다
자학이 아니라 자족이었다
바람이 불었으나 너무 오래 걸어 무릎에서
새어 나오는 바람이었다
나의 화엄은 당나귀와 함께 벼랑이었다
2.인사동 귀천에서 만난 한 시인은
시를 끌고 가는 힘이 부족하다고 고백했다
절망의 힘으로도 끌고 가기 힘들다고
밖으로 나오니
새 한 마리
가볍게 생을 끌고 피안으로 날아간다
일생의 힘으로 시를 끌고 간
천상병 시인이 눈 내리는 귀천을 끌고 턱없이 웃으며
하늘 모퉁이로 가고 있다
시보다도
한 생을 끌고 가는 힘이 턱없이 부족했다
인사동 벗어나기 전 뒤돌아 보니
눈보라 속 당나귀들이
저마다 자신을 지고 서역의고개를 넘고 있었다.
- 류시화 시 '당나귀' 모두
*천상병 시인, 당신은 어디에 있으며 거기서도 시를 쓰고 있는가
당신은 홍차에 레몬 한 조각을 넣고
나는 아무것도 넣지 않은 쌉싸름한 맛을 좋아했지
단순히 그 차이뿐
늦은 삼월생인 봄의 언저리에서 꽃들이
작년의 날짜들을 계산하고 있을 때
당시은 이제 막 봄눈을 뜬 겨울잠쥐에 대해 말했고
나는 인도에서 겨울을 나는 흰꼬리딱새를 이야기했지
인도에서는 새들이 흰디어로 지저귄다고
쿠시 쿠시 쿠시 하고
아무도 모르는 신비의 시간 같은 것은 없었지
다만, 늦눈에 움마다 뺨이 언 꽃나무 아래서
뜨거운 홍차를 마시며 당신은
둘이서 바닷가로 산책을 갔는데 갑자기
번개가 쳤던 날
우리 이마를 따라다니던 비를 이야기하고
나는 까비 쿠시 까비 감이라는 인도 영화에 대해 말했지
때로는 행복하고 때로는 슬프고
망각의 이유를 물을 필요도 없이
언젠가 우리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새들이 날개로 하루를 성스럽게 하는 시간
다르질링 홍차를 마시며
당신이 내게 슬픔을 이야기 하고
내가 그 슬픔을 듣기도 했다는 것
어느 생애선가 한 번은 그랬었다는 것을
내가 좋아했다는 것을
흉터가 있다는 것은
상처를 견뎌 냈다는 것
노랑지빠귀 우는 아침, 당신은 잠든 척하며
내가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지
그리고 어느 날엔가는 우리가 아주 잠들어 버리겠지
그저 당신의 찻잔에 남은 레몬 한 조각과
내 빈 찻잔에 떨어지는 꽃잎 하나
단순히 그 차이뿐
그리고는 이내 우리의 찻잔에서 나비가 날아올라
꽃나무들 속으로 들어가겠지
날짜 계산을 잘못해 늦게 온
봄을 따끔하게 혼내는 찔레나무와
늦은 삼월생의 봄눈 속으로
- 류 시화 시 '홍차' 모두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 뒤에선
인기척과 함께 곧 들키고 말지만
안개 속에서는
가까이 있으나 그 가까움은 안개에 가려지고
멀리 있어도 그 거리는 안개에 채워진다
산다는 것은 그러한 것
때로 우리는 서로 가까이 있음을 견디지 못하고
때로 멀어져감을 두려워 한다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 뒤에선 누구나 고독하고,
그 고독을 들킬까 굳이 염려하지만
안개 속에서는
삶에서 혼자인 것도 여럿인 것도 없다
그러나 안개는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머물 수 없는 것
시간이 가면
안개는 걷히고 우리는 나무들처럼
적당한 간격으로 서서
서로를 바라본다
산다는 것은 결국 그러한 것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시작도 끝도 알지 못하면서
안개 뒤에 나타났다가 다시 안개속에 숨는 것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 류시화 시 '안개 속에 숨다' 모두
비로 만든 집에서
나는 살았네
안개로 만든 집
구월의 오솔길로 만든 집
구름 비나무로 만든집
비로 만든 집에는 언제나
비가 내리지
비를 내리는 나무
비를 내리는 길
비를 내리는 염소들
세상이 슬픔으로 다가올 때마다 나는
그곳으로 가서 비를 맞았네
비의 새가 세상의 지붕위를 날고
비를 내리는 오솔길이
비의 나무를 감추고 있는 곳
비로 만든 집에서
나는 살았네
비의 새가 저의 부리로
비를 물어 나르는 곳
세상 어디로도 갈 곳이 없을 때 나는
그곳으로 가서 비를 맞았네
비로 만든 집에는
언제나 비가 내리지
비를 내리는 나무
비를 내리는 길
비를 내리는 염소.
-류시화 시 '비로 만든 집‘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뭇잎의 집합이 나뭇잎들이 아니라
나무라고 말하는 사람
꽃의 집합이 꽃들이 아니라
봄이라는 걸 아는 사람
물방울의 집합이 파도이고
파도의 집합이 바다라고 믿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길의 집합이 길들이 아니라
여행이라는 걸 발견한 사람
절망의 집합이 절망들이 아니라
희망이 될 수도 있음을
슬픔의 집합이 슬픔들이 아니라
힘이 될 수도 있음을 잊지 않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벽의 집합이 벽들이 아니라
감옥임을 깨달은 사람
하지만 문은 벽에 산다는 걸 기억하는 사람
날개의 집합이 날개들이 아니라
비상임을 믿는 사람
그리움의 집합이 사랑임을 하는 사람.
- 류 시화 시 ‘ 내가 좋아하는 사람‘
*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 류시화 2022 수오서재
모든 꽃은 발끝으로 선다
다른 꽃보다 높아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옷자락 잡아당기는
어둠보다 높이 서기 위해
무채색의 세상에
자기 가슴 물들인 색으로
저항하기 위해
꽃으로 핀다는 것은
톱니 모양 잎사귀의 손을 뻗어
불확실한 운명 너머로
생을 던지는 자기 혁명 같은 것
모든 꽃은 발끝으로 선다
마음 자락 끌어내리는
절망보다 높이 서기 위해
다른 꽃들을 향해 얼굴 들고
자기 선언을 하기 위해
- 류 시화 시 ‘ 꽃의 전언‘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수오서재/2022
꽃눈 틔워 겨울의 종지부를 찍는
산수유 아래서
애인아, 슬픔을 겨우 끝맺자
비탈밭 이랑마다 새겨진 우리 부주의한 발자국을 덮자
아이 낳을 수 없어 모란을 낳던
고독한 사랑 마침표를 찍자
잠깐 봄을 폐쇄시키자
이 생에 있으면서도 전생에 있는 것 같았던
지난겨울에 대해 나는 아무 할 말이 없다
가끔 눈 녹아 길이 질었다는 것 외에는
젖은 흙에 거듭 발이 미끄러졌다는 것 외에는
너는 나에게 상처를 주지만 나는 너에게 꽃을 준다, 삶이여
나의 상처는 돌이지만 너의 상처는 꽃이기를, 사랑이여
삶미라는 것이 언제 정말 우리의 것이었던 적이 있는가
우리에게 얼굴을 만들어 주고
그 얼굴을 마모시키는 삶
잘 가라, 곁방살이하던 애인아
종이 가면을 쓰고 울던 사랑아
그리움이 다할 때까지 살지는 말자
그리움이 끝날 때까지 만나지는 말자
사람은 살아서 작별해야 한다
우리 나머지 생을 일단 접자
나중에 다시 펴는 한이 있더라도
이제는 벼랑에서 혼자 피었다
혼자 지는 꽃이다
- 류 시화 시 ‘ 이런 시를 쓴 걸 보니 누구를 그 무렵 사랑했었나 보다‘
* '삶이라는 것이 언제~ 마모시키는 삶"-옥타비오 빠스 <태양의 돌>에서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문학의숲, 2012.
바람의 찻집에 앉아
세상을 바라보았지
긴 장대 끝에서 기도 깃발은 울고
구름이 우려낸 차 한 잔을 건네받으며
가장 먼 곳에서 날아온 새에게
집의 안부를 물었지
나 멀리 떠나와 길에서
절반의 생을 보내며
이미 떠나간 것들과 작별하는 법을 배웠지
가슴에 둥지를 틀었다 날아간 날개들에게서
손등에서 녹는 눈발들과
주머니에 넣고 오랫동안 만지작거린 불꽃의 씨앗들로
모든 것이 더 진실했던 그때
어린 뱀의 눈을 하고
해답을 구하기 위해 길 떠났으나
소금과 태양의 길 위에서 이내
질문들이 사라졌지
때로 주머니에서 꺼낸 돌들로 점을 치면서
해탈은 멀고 허무는 가까웠지만
후회는 없었지
탄생과 죽음의 소식을 들으며
어떤 게절의 중력도 거부하도록
다만 영혼을 가볍게 만들었지
찰나의 순간
별동별의 빗금보다 밝게 빛나는 깨달음도 있었으나
빛과 환영의 오후를 지나
가끔은 황혼과 바람뿐인 찻집에서 차를 마시며
생의 지붕들을 내려다보고
고독할 때면 별의 문자를 배웠지
누가 어둔 곳에 저리도 많은 상처를 새겼을까
그것들은 폐허에 핀 꽃들이었지
그러고는 입으로 불어 별들을 끄고
잠이 들었지
봉인된 가슴속에 옛사랑을 가두고
외딴 행성 바람의 찻집에서
- 류시화 시 ‘ 바람의 찻집에서‘
* 류시화 제 3시집 중에서
흉터라고 부르지 말라.
한때는 이것도 꽃이었으니
비록 빨리 피었다 졌을지라도
상처라고 부르지 말라
한대는 눈부시게 꽃물을 밀어올렸으니
비록 눈물로 졌을지라도
죽지 않을 것이면 살지도 않았다
떠나지 않을 것이면 붙잡지도 않았다
침묵할 것이 아니면 말하지도 않았다
부서지지 않을 것이면, 미워하지도 않을 것이면
사랑하지도 않았다
옹이라고 부르지 말라
가장 단단한 부분이고
한 때는 이것도 여리디 여렸으니
다만 열정이 지나쳐 단 한번의 상처로
다시는 피어나지 못했으니
- 류시화 시 ‘옹이’
시를 쓴다는 것이
더구나 나를 뒤돌아본다는 것이
싫었다, 언제나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나였다
다시는 세월에 대해 말하지 말자
내 가슴에 피를 묻히고 날아간
새에 대해
나는 꿈꾸어선 안 될 것들을 꿈꾸고 있었다
죽을 때까지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것이
나는 두려웠다
다시는 묻지 말자
내 마음을 지나 손짓하며 사라진 그것들을
저 세월들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는 법이 없다
고개를 꺾고 뒤돌아보는 새는
이미 죽은 새다
- 류 시화 시 ‘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시월의 빛 위로
곤충들이 만들어 놓은
투명한 탑 위로
이슬 얹힌 거미줄 위로
사랑의 기억이 흐려져간다
가을 나비들의 날개짓
첫눈 속에 파묻힌
생각들
지켜지지 못한
그 많은 약속들 위로
사랑의 기억이 흐려져간다
한때는 모든 것이
여기에 있었다, 그렇다, 나는
삶을 불태우고 싶었다
다른 모든 것이 하찮은 것이 되어 버릴 때까지
다만 그것들은 얼마나 빨리
내게서 멀어졌는가
사랑의 기억이 흐려져간다
여기, 거기, 그리고 모든 곳에
멀리, 언제나 더 멀리에
말해 봐
이 모든 것들 위로
- 류 시화 시 ‘사랑의 기억이 흐려져 간다‘
안녕! 내 혼의 무게로 쓰여진 이 시들을 이해하려면
너 또한 네 혼의 무게로 잠 못 이루어야지
어디, 나와 함께
이 낯선 저녁 안개 속을 지나갈까?
손잡고서
그러나 조심하거라
저 나뭇가지 위에 무서운 검은새가 있어
너의 눈을 공격할까
두려우니
이곳은 시인들이 사는 이상한 나라가 아닌가
벌레들이 내 시집의 네 귀퉁이를 갉아먹고
나는 너의 두꺼운 안경이 무서워
아, 무서워
신발을 내던지고 모래언덕 너머로 달아나는데
너는 어느 별에서 왔길래 그토록
어려운 단어들을 가방 속에 넣고 있니?
머리가 아프겠구나
머리를 식힐 겸
우리 그 별의 이야기를 동무삼아
더 나아갈 수 없는 곳에 이를 때까지
이 저녁 안개속을
한번 헤쳐가 볼까?
죽음 너머의 세계를 너는 보았니?
아니다, 너에게는 너만의 세계가 있는 것이겠지
너 또한 시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 있겠지
버림받은 어린시절, 그 상처 같은 것
슬픔 또는 허무 같은 것
안녕! 잘 자라, 아가야
- 류 시화 시 ‘ 시를 평론한다는 사람들에게‘
비 그치고
나는 당신 앞에 선 한 그루
나무이고 싶다
내 전 생애를 푸르게, 푸르게
흔들고 싶다
푸르름이 아주 깊어졌을 때쯤이면
이 세상 모든 새들을 불러 함께
지는 저녁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 류 시화 시 ’ 비 그치고‘
*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이마에 난 흉터를 묻자 넌
지붕에 올라갔다가
별에 부딪친 상처라고 했다
어떤 날은 내가 사다리를 타고
그 별로 올라가곤 했다
내가 시인의 사고방식으로 사랑을 한다고
넌 불평을 했다
희망 없는 날을 견디기 위해서라고
난 다만 말하고 싶었다
어떤 날은 그리움이 너무 커서
신문처럼 접을 수도 없었다
누가 그걸 옛 수첩에다 적어 놓은 걸까
그 지붕 위의
별들처럼
어떤 것이 그리울수록 그리운 만큼
거리를 갖고 그냥 바라봐야 한다는 걸
- 류 시화 시 ‘ 첫사랑‘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넌 알겠지
바닷게가 그 딱딱한 껍질 속에
감춰 놓은 고독을
모래사장에 흰 장갑을 벗어 놓는
갈매기들의 무한 허무를
넌 알겠지
시간이 시계의 태엽을 녹슬게 하고
꿈이 인간의 머리카락을 희게 만든다는 것을
내 마음은 바다와도 같이
그렇게 쉴새없이 너에게로 갔다가
다시 뒷걸음질친다
생의 두려움을 입에 문 한 마리 바닷게처럼
나는 너를 내게 달라고
물 솔의 물풀처럼 졸라댄다
내 마음은 왜
일요일 오후에
모래사장에서 생을 관찰하고 있는 물새처럼
그렇게 먼 발치서 너를 바라보지 못할까
넌 알겠지
인간으로 태어난 슬픔을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을 사랑하는
무한 고독을
넌 알겠지
그냥 계속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것을
그것만이 유일한 진실이라는 것을
- 류 시화 시 ‘인간으로 태어난 슬픔‘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그럴 수 없다.
물속을 들여다보면
물은 내게 무가 되라한다.
허공을 올려다보면
허공은 또 내게 무심이 되라한다.
허공을 나는 나는그저 자취없음이 되라한다.
그러나 나는 무가 될 수 없다.
무심이 될 수 없다.
어느 곳을 가나 내 흔적은 남기고는
내게 피 없는 심장이 되라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
그는 도둑처럼 밤중에 이슬을 밟고 와서
나더러 옷을 벗으라 하고
내 머리를 바치라 한다.
나더러 나를 버리라한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다.
그는 내게 물이 되라 하나
나는 불로서 타오르려 한다.
그는 내게 미소가 되라 하지만
그러나 아직 내 안에 큰 울음이 넘쳐난다.
그는 내게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라 하나
나는 그럴 수 없다.
- 류시화 시 ‘ 그럴 수 없다‘
인생은 끝이 없는 움직임
사랑 또는 이별하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날개짓
나는 그 자리에 정지해 있기 위해
무한히 움직인다
내게 다가와 입술만 허락하고 도망치는
희망
아니면 바다처럼 항상 거기 있으면서
끝없는 운동으로 나를 거부하는
너
무궁동
내 마음처럼 그렇게
끝이 없이 움직임은 없으리라
언제나 너에게로 달려가는
내 부질없는
마음
한 생각에서 끝없이 다른 생각으로 이동하는
그런 고독은 없으리라
오래 망설이다가 결국은 어리석은 길을 가고 만
해오라기처럼
아니면 슬픔 때문에 참을성이 없어진
한 마리 물고기처럼
끝없이 떨고 있는
내 마음
차라리 나는 자유를 버리리라
비늘을 가르는 아픔으로 헤엄치다가
이제는 모래 침대 위에 누운
흰 물고기뼈가 되리라
나는 이제 그만 멈추고 싶다
무궁동
- 류시화 시 ‘무궁동’
누가 죽었는지
꽃집에 등이 하나 걸려 있다
꽃들이 저마다 너무 환해
등이 오히려 어둡다, 어둔 등 밑을 지나
문상객들은 죽은 자보다 더 서둘러
꽃집을 나서고
살아서는 마음의 등을 꺼뜨린 자가
죽어서 등을 켜고 말없이 누워 있다
때로는 사랑하는 순간보다 사랑이 준 상처를
생각하는 순간이 더 많아
지금은 상처마저도 등을 켜는 시간
누가 한 생애를 꽃처럼 저버렸는지
등 하나가
꽃집에 걸려 있다
- 류 시화 시 ‘꽃등’
그것은 갑자기 뿌리를 내렸다, 뽑아낼 새도 없이
슬픔은
질경이와도 같은 것
아무도 몰래 영토를 넓혀
다른 식물의 감정들까지 건드린다
어떤 사람은 질경이가
이기적이라고 말한다
서둘러 뽑아 버릴수록 좋다고
그냥 내버려 두면 머지않아
질경이가
인생의 정원을 망가뜨린다고
그러나 아무도 질경이를 거부할 수는 없으리라
한때 나는 삶에서
슬픔에 의지한 적이 있었다
여름이 가장 힘들고 외로웠을 때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슬픔만이 있었을 뿐
질경이의 이마 위로
여름의 태양이 지나간다
질경이는 내게
단호한 눈짓으로 말한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또 타인으로부터
얼마만큼 거리를 두라고
얼마나 많은 날을 나는
내 안에서 방황했던가
8월의 해시계 아래서 나는
나 자신을 껴안고
질경이의 영토를 지나왔다
여름의 그토록 무덥고 긴 날에
- 류시화 시 ‘질경이’
내 입술 속의 새는 너의 입맞춤으로
숨막혀 죽기를 원한다
내가 찾는 것은
너의 입술
그 입술 속의 새
길고 긴 입맞춤으로 숨 막혀 죽는 새
나는 슬픔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너를 껴안는다
내 모든 것을 잊기 위해
삶은 다만 그림자
실날 같은 여름 태양 아래 어른거리는
하나의 환영
그리고 얼마큼의 몸짓
그것이 전부
나는 고통 없는 세계를 꿈꾸진 않았다
다만 더 이상 상처받는 일이 없기를
내가 찾는 것은 너의 입술
단 한 번의 입맞춤으로
입술 속에서
날개를 파닥이며 숨 막혀 죽는 새
밤이면 나는 너를 껴안고
잠이 든다 나 자신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온 몸으로 너를 껴안고
내 모든 걸 잊기 위해
- 류시화 시 ‘입술 속의 새 ‘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
내 앞에 빵이 하나 있다
잘 구워진 빵
적당한 불길을 받아
앞뒤로 골고루 익혀진 빵
그것이 어린 밀이었을 때부터
태양의 열기에 머리가 단단해지고
덜 여문 감정은
바람이 불어와 뒤채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또 제분기가 그것의
아집을 낱낱이 깨뜨려 놓았다
나는 너무 한쪽에만 치우쳐 살았다
저 자신만 생각하느라고
제대로 익을 겨를이 없었다
내 앞에 빵이 하나 있다
속까지
잘 구워진 빵
- 류시화 시 ‘빵’
나무는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는 걸까
그러나 굳이 바람이 불지 않아도
그 가지와 뿌리는 은밀히 만나고
눈을 감지 않아도
그 머리는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있다
나무는
서로의 앞에서 흔들리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쓸는 걸까
그러나 굳이 누가 와서 흔들지 않아도
그 그리움은 저의 잎을 흔들고
몸이 아프지 않아도
그 생각은 서로에게 향해 있다
나무는
저 혼자 서 있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는 걸까
세상의 모든 새들이 날아와 나무에 앉을 때
그 빛과
그 어둠으로
저 혼자 깊어지기 위해 나무는
얼마나 애를 쓰는 걸까
- 류시화 시 ‘나무는‘
들풀처럼 살라
마음 가득 바람이 부는
무한 허공의 세상
맨몸으로 눕고
맨 몸으로 일어서라
함께 있되 홀로 존재하라
과거를 기억하지 말고
미래를 갈망하지 말고
오직 현재에 머물러라
언제나 빈 마음으로 남으라
슬픔은 슬픔대로 오게 하고
기쁨은 기쁨대로 가게 하라
그리고는 침묵하라
다만 무언의 언어로
노래부르라
언제나 들풀처럼
무소유한 영혼으로 남으라
- 류시화 시 ‘들풀’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집을 떠나 길 위에 서면
이름없는 풀들은 바람에 지고
사랑을 원하는 자와
사랑을 잃을까 염려하는 자를
나는 보았네
잠들면서까지 살아갈 것을 걱정하는 자와
죽으면서도 어떤 것을 붙잡고 있는 자를
나는 보았네
길은 또다른 길로 이어지고
집을 떠나 그 길 위에 서면
바람이 또 내게 가르쳐 주었네
인간으로 태어난 슬픔을
다시는 태어나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자와
이제 막 태어나는 자
삶의 의미를 묻는 자와
모든 의미를 놓아 버린 자를
나는 보았네
- 류시화 시 ‘ 길 가는 자의 노래‘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살아갈 날들보다
살아온 날이 더 힘들어
어떤 때는 자꾸만
패랭이꽃을 쳐다본다
한때는 많은 결심을 했었다
타인에 대해
또 나 자신에 대해
나를 힘들게 한 것은
바로 그런 결심들이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삶이란 것은
자꾸만 눈에 밟히는
패랭이꽃
누군가에게 무엇으로 남길 바라지만
한편으론 잊혀지지 않는 게 두려워
자꾸만 쳐다보게 되는
패랭이꽃
- 류시화 시 ‘패랭이 꽃’
소금별에 사는 사람들은
눈물을 흘릴 수 없네
눈물을 흘리면
소금별이 녹아 버리기 때문
소금별 사람들은
눈물을 감추려고 자꾸만
눈을 깜박이네
소금별이 더 많이 반짝이는 건
그 때문이지
- 류 시화 시 ‘소금별’
*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세상을 잊기 위해 나는
산으로 가는데
물은 산 아래
세상으로 내려간다
버릴 것이 있다는 듯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는 듯
나만 홀로 산으로 가는데
채울 것이 있다는 듯
채워야 할 빈 자리가 있다는 듯
물은 자꾸만
산 아래 세상으로 흘러간다
지금은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
눈을 감고
내 안에 앉아
빈 자리에 그 반짝이는 물 출렁이는 걸
바라봐야 할 시간
- 류시화 시 ‘지금은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
소금이
바다의 상처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소금이
바다의 아픔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세상의 모든 식탁 위에서
흰 눈처럼
소금이 떨어져내릴 때
그것이 바다의 눈물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눈물이 있어
이 세상 모든 것이
맛을 낸다는 것을
- 류시화 ‘소금’
*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슬픔이 그대를 부를 때
고개를 돌리고
쳐다보라
세상의 어떤 것에도 의지할 수 없을 때
그 슬픔에 기대라
저편 언덕처럼
슬픔이 그대를 손짓할 때
그곳으로 걸어가라
세상의 어떤 의미에도 기댈 수 없을 때
저편 언덕으로 가서
그대 자신에게 기대라
슬픔에 의지하되
다만 슬픔의 소유가 되지 말라.
- 류시화 시 ‘ 저편 언덕‘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살고 싶다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사랑하고 싶다
두눈박이 물고기처럼 세상을 살기 위해
평생을 두 마리가 함께 붙어 다녔다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사랑하고 싶다
우리에게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을 뿐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혼자 있으면
그 혼자 있음이 금방 들켜 버리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싶다
- 류시화 시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날이 밝았으니 이제 여행을 떠나야 하리
시간은 과거의 상념 속으로 사리지고
영원의 틈새를 바라본 새처럼 그대 길 떠나야 하리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냥 저 세상 밖으로 걸어가리라
한 때는 불꽃 같은 삶과 바람같은 죽음을 원했노니
새벽의 문 열고 여행길 나서는 자는 행복하여라
아직 잠들지 않은 별하나가 그대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고
그대는 잠이 덜깬 나무 밑을 지나
지금 막 눈을 뜬 어린 뱀처럼 홀로 미명 속을 헤쳐가야 하리
이제 삶의 몽상을 끝낼 시간
날이 밝았으니불면의 베게를 머리맡에서 빼내야 하리
오 아침이여, 거짓에 잠든 세상 등 뒤로 하고
깃발 펄럭이는 영원의 당으로 홀로 길 떠나는 아침이여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자
혹은 충분히 사라하기 위해 길 떠나는 자는 행복하여라
그대의 영원은 아직 투명하고
사랑함으로써 그것 때문에 상처 입기를 두려워 하지 않으이
그대가 살아온 삶은 그대가 살지 않은 삶이니
이제 자기의 문에 이르기 위해 그대는
수많은 열리지 않은 문들을 두드려야 하리
자기 자신과 만나기 위해 모든 이정표에게 길을 물어야 하리
길은 또다른 길을 가리키고
세상의 나무 밑이 그대의 여인숙이 되리라
별들이 구멍 뚫린 담요속으로 그대를 들여다 보리라
그대는 잠들고 낯선 나라에서 모국어로 꿈을 꾸리라.
- 류시화 시 ‘여행자를 위한 서시 ‘
거리에서
한 남자가 울고 있다
사람들이 오가는 도시 한복판에서
모두가 타인인 곳에서
지하도 난간 옆에 새처럼 쭈그리고 앉아
한 남자가 울고 있다
아무도 그 남자가 우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아무도 그 눈물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거리에서 한 남자가 울고 있다
한 세기가 저물고
한 세기가 시작되는 곳에서
모두가 타인일 수밖에 없는 곳에서
한 남자가 울고 있다
신이 눈을 만들고 인간이 눈물을 만들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 역시 그가 우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나는 다만 그에게
무언의 말을 전할 수밖에 없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눈물이라고
- 류시화 시 ‘거리에서’
* 외눈박이 물고기의사랑
아주 가끔은
사과나무 아래 서 있고 싶다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들이
두 팔 벌리고 서 있는
사과나무밭
태양이 눈부신 날이어도 좋고
눈 내리는 그 저녁이어도 좋으리
아주 가끔은 그렇게
사과나무 아래 서 있고 싶다
내가 아직 어린 소년이어도 좋고
사과나무처럼 늙은 뒤라도 좋으리
가끔은 그렇게
사과나무 아래 서 있고 싶다
- 류시화 시 ‘사과나무’
슬픔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안이 환하다
누가 등불 한 점을 켜놓은 듯
노오란 민들레 몇 점 피어 있는 듯
슬픔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민들레밭에
내가 두 팔 벌리고
누워 있다
눈썹 끝에
민들레 풀씨 같은
눈물을 매달고서
눈을 깜박이면 그냥
날아갈 것만 같은
- 류시화 시 ‘눈물’
시집,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바다의 깊이를 재기 위해
바다로 내려간
소금인형처럼
당신의 깊이를 재기위해
당신의 피 속으로
뛰어든
나는 소금인형처럼
흔적도 없이
녹아버렸네
- 류시화 시 ‘소금인형’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류시화 시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우리는 한때
두 개의 물방울로 만났었다
물방울로 만나 물방울의 말을 주고받는
우리의 노래가 세상의 강을 더욱 깊어지게 하고
세상의 여행에 지치면 쉽게
한 몸으로 합쳐질 수 있었다
사막을 만나거든
함께 구름이 되어 사막을 건널 수 있었다
그리고 한때 우리는
강가에 어깨를 기대고 서 있던 느티나무였다
함께 저녁강에 발을 담근 채
강 아래쪽에서 깊어져 가는 물소리에 귀 기울이며
우리가 오랜 시간 하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바람이 불어도 함께 기울고 함께 일어섰다
번개도 우리를 갈라 놓지 못했다
우리는 그렇게 영원히 느티나무일 수 없었다
별들이 약속했듯이
우리는 몸을 바꿔 늑대로 태어나
늑대 부부가 되었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늑대의 춤을 추었고
달빛에 드리워진 우리 그림자는 하나였다
사냥꾼의 총에 당신이 죽으면
나는 생각만으로도 늑대의 몸을 버릴 수 있었다
별들이 약속했듯이
이제 우리가 다시 몸을 바꿔 사람으로 태어나
약속했던 대로 사랑을 하고
전생의 내가 당신이었으며
당신의 전생은 또 나였음을
별들이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그러나 당신은 왜 나를 버렸는가
어떤 번개가 당신의 눈을 멀게 했는가
이제 우리는 다시 물방울로 만날 수 없다
물가의 느티나무일 수 없고
늑대의 춤을 출 수 없다
별들의 약속을 당신이 저버렸기에
그리하여 별들이 당신을 저버렸기에
- 류시화 ‘우리는 한때 두 개의 물방울로 만났었다‘
겨울 숲에서 노려보는 여우의 눈처럼
잎 뒤에 숨은 붉은 열매처럼
여기
나를 응시하는 것이 있다
내 삶을 지켜보는 것이 있다
서서히 얼어붙는 수면에 시선을 박은 채
돌 틈에 숨어 내다보는 물고기의 눈처럼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건방진 새처럼
무엇인가 있다
눈을 깜박이지도 않는 그것
눈밖에 없는 그것이
밤에 별들 사이에서, 내가 좋아하는
큰곰별자리 두 눈에 박혀
나를 내려다본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때로 그것은 내 안에 들어와서
내 눈으로 밖을 내다보기도 하고
내 눈으로 나를 들여다보기도 한다
그것은 무엇일까
내 삶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고 있을까
여기 겨울숲에서 노려보는 여우의 눈처럼
잎 지고 난 붉은 열매처럼
차가운 공기를 떨게 하면서
나를 응시하는 것이 있다
내 삶을 떨게 하는 것이 있다.
- 류시화 시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너였구나
나무 뒤에 숨어 있던 것이
인기척에 부스럭거려서 여우처럼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이
슬픔, 너였구나
나는 이 길을 조용히 지나가려 했었다
날이 저물기 전에
서둘러 이 겨울숲을 떠나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만 너를 깨우고 말았구나
내가 탄 말도 놀라서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숲 사이 작은 강물도 울음을 죽이고
잎들은 낮은 곳으로 모인다
여기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또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한때 이곳에 울려퍼지던 메아리의 주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무들 사이를 오가는 흰새의 날개들 같던
그 눈부심은
박수치며 날아오르던 그 세월들은
너였구나
이 길 처음부터 나를 따라오던 것이
서리 묻은 나뭇가지를 흔들어 까마귀처럼 놀라게 하는 것이
너였구나
나는 그냥 지나가려 했었다
서둘러 말을 이 겨울숲과 작별하려 했었다
그런데 그만 너에게 들키고 말았구나
슬픔, 너였구나
- 류시화 시 ‘슬픔에게 안부를 묻다‘
그것이 내 안에 있다
어지러운 풀냄새가 나는 것으로
그것을 알았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이미 내 안으로 들어왔다
처음 나는 그것이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일종의 모래장미라고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질 그 무엇
나는 들판으로 걸어갔다 내 현기증이
다만 풀냄새 때문이라고
곧 사라질 것이라고
열에 들떠 내가 손을 뻗자
강 하나가 둥글게 뒤채이기 시작했다
나는 걸어간다
걸어가면서 내 안에
더 강렬한 무엇을 느낀다
그것이 나에게 명령한다
나무 아래 양팔을 벌리고 서서
태양을 부르라고
그래서 나무를 불태우라고
들판 가장자리에 더 많은 불꽃이 일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내 구두는 돌들과 부딪쳐
맹수처럼 튀어오른다
어떤 뜻을 가지고 신이
나를 만들었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런데 내 안에 있는 그것은
확실하다 신의 손이 그것과 맞닿아 있다
옷들을 벗고
알 수 없는 곳으로 날아올라
한없이 투명한 빛과 나는 만난다
내 몸 안에 머리 둘 달린
뱀이 있어
내 두 눈으로 혀를 내어미는 것 같다
그러자 어떤 힘이 나를 흔들었다
소리쳤으나 그 소리는 소리나지 않고
나는 공중에서 회전하였다
날개 하나가 천천히 돋아나
불붙는 구름 그 끝없는 들판 위에
나를 눕힌다
- 류시화 시 ‘엉겅퀴풀에게 노래함‘
외딴 집에 홀로 사는
남자, 침묵은 그의 것
오후의 나른함과 권태는 그의
어깨죽지에서 피어오르고, 한두 시간쯤
시간을 내어 그가 산책하는
길에는 잎사귀가 넓은
붉은 꽃들이 피어 있다, 붉은 꽃들
그의 그림자는 그의
것, 반항하지 않으며 그가 좋아하는
엉겅퀴풀들, 엉켜 있는 뿌리들, 시간의
얼룩들 위를 지나
우리와 가끔 마주치기도 하는
남자, 태양은 등 뒤에서 그의
뇌를 미지근하게 부풀린다 둥글고
딱딱한 것, 열에 들뜬 열매들
좁고 가파른 돌길을 걸어내려와 우리가
한쪽으로 비켜섰을 때 우리 발 앞을
지나쳐간 남자, 그의 시간은
그만의 것, 그가 꿈꾸는 것과
위험한 생각들도
그만의 것
그가 비탈을 걸어내려갈 때 그의 발이
굴려 떨어뜨리는 흙은 비탈에게 한 세계를 준다
그는 왜 모자를
썼을까, 왜 모자로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을까, 그는 살아가는 일보다
꿈꾸는 일이 더 두렵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는 홀로 사는 남자, 이따금
한번도 내려가보지 않은 강 아래쪽의 풍경과
한낮의 수증기, 구름들에 이끌리기도 하지만
오후에 한두 시간쯤 시간을 내어 그는
어느 곳에 이른다 그의 삶은
그의 것, 그가 이르는 곳에는
그만이 서 있다, 꽃들의 그림자
그림자가 감추고 있는 그림자
산책하는 이들의 발길을 비웃는
비탈길에서 그는 미끄러진다, 미끄러져 내린다
우리가 놀고 있는 강 아래쪽으로 떠내려온
남자, 죽음은 그의 것
햇빛을 피해 얼굴을 물 속에 처박고
뒤통수에 앉아 있는 검은 물잠자리도
그의 것, 이미 그는 알 수 없는 곳에 가 있고
알 수 없는 그만의 것에
이끌려 있다
- 류시화 시 ‘그만의 것‘
여기 죽은 나무가 있다
누군가 소리쳐서 뒤돌아보니
그곳에 내가 쓰러져 있었다
물을 주면 살아날지도 몰라
누군가 다가가서 흔들어 본다
죽은 나무는 기척이 없다
나무는 자살을 꿈꾸지 않는다
그냥 잎을 버리고
죽을 뿐이다
- 류시화 시 ‘ 나무는 자살을 꿈꾸지 않는다‘
1
그토록 많은 비가 내렸구나
밤 사이 강물은 내 키만큼이나 불어나고
전에 없던 진흙무덤들이 산 아래 생겨났구나
풀과 나무들은 더 푸르러졌구나
집 잃은 자는
새 집을 지어야 하리라
그토록 많은 비가 내려
푸르른 힘을 몰고 어디론가 흘러갔구나
몸이 아파 누워 있는 내 머리맡에선
어느새 이 꽃이 지고 저 꽃이 피어났구나
2
그토록 많은 비가 내리는 동안
나는 떡갈나무 아래 선 채로 몸이 뜨거웠었다
무엇이 이곳을 지나 더 멀리 흘러갔는가
한번은 내 삶의 저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모든 것이 변했지만
또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리고 한 번은 이보다 더 큰 떡갈나무가
밤에 비를 맞으며 내 안으로 걸어들어온 적이 있었다
그리하여 내 생각은 얼마나 더 깊어지고
떡갈나무는 얼마나 더 풍성해졌는가
3
길을 잃을 때면
달팽이의 뿔이 길을 가르쳐 주었다
때로는 빗방울이
때로는 나무 위의 낯선 새가
모두가 스승이었다
달팽이의 뿔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나는 먼 나라 인도에도 다녀오고
그곳에선 거지와 도둑과 수도승들이
또 내게 길을 가르쳐 주었다
내가 병들어 갠지스 강가에 쓰러졌을 때
뱀 부리는 마술사가 나게 독을 먹여
삶이 한 폭의 환상임을 보여 주었다
그 이후 영원히 나는 입맛을 잃었다
4
그때 어떤 거대한 새가 날개를 펼치고
비 속을 날아갔었다
밤이었다
내가 불을 끄고 눕자
새의 날개가 내 집 지붕을 덮어 주었다
그리고 나서도 오랫동안
비가 내렸다
나는 병이 더 깊어졌다
- 류시화 시 ‘그토록 많은 비가’
봄비 속을 걷다
아직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봄비는 가늘게 내리지만
한없이 깊이 적신다
죽은 라일락 뿌리를 일깨우고
죽은 자는 더 이상 비에 젖지 않는다
허무한 존재로 인생을 마치는 것이
나는 두려웠다
봄비 속을 걷다
승려처럼 고개를 숙인 저 산과
언덕들
집으로 들어가는 달팽이의 불들
구름이 쉴새없이 움직인다는 것을
비로소 알고
여러 해만에 평온을 되찾다
- 류시화 시 ‘봄비속을 걷다‘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걸까
마치 사탕 하나에 울음을 그치는 어린아이처럼
눈 앞의 것을 껴안고
나는 살았다
삶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태어나
그것이 꿈인 줄 꿈에도 알지 못하고
무모하게 사랑을 하고 또 헤어졌다
그러다가 나는 집을 떠나
방랑자가 되었다
사람들은 내 앞에서 고개를 돌리고
등 뒤에 서면 다시 한번 쳐다본다
책들은 죽은 것에 불과하고
내가 입은 옷은 색깔도 없는 옷이라서
비를 맞아도
더 이상 물이 빠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걸까
무엇이 참 기쁘고
무엇이 참 슬픈가
나는 짠 맛을 잃은 바닷물처럼
생의 집착도 초월도 잊었다
- 류시화 시 ‘ 짠 맛을 잃은 바닷물처럼‘
여기에 둥근 기둥이 있어 아무도 그것을 둘러가지 못하리라
그리고 여기에 흙 위에 솟아나온 뿌리가 있어
그것은 방향 없는 눈
아무것도 아닌 것
발에 채인다 여기
모든 흐름을 멈추게 하는 것
빛을 갉아먹는 황금색
벌레들
아무것도 아닌 것들
새삼 사랑을 공개할 필요는
없으리라 눈 위에 눈 위의 감시자들에게 새삼
나의 애인을 들추어 낼 까닭은 없다
여기
하늘에서는 조용히 구름이 날고 이미
이전에 왔던 이가 또 소리친다
이제 곧 종말이 오리라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렇게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안다
우리는 우리가 온 곳으로 되돌아가는 도중에 있음을
안다
눈 속의 감자들, 감자의 죽은
눈들
우리는 소리 없이, 줄지어
검은 나무들 아래로 지나간다
안개, 기둥들,
들리지 않는 소리들
한때 눈 속에 파묻혀 있던
것들, 눈을 아프게 하는 것들
여기에 멈추지 않는 흐름이 있어 우리와 함께
지나간다
소리지른다, 언제나 들리는
소리들
여기에 우리가 서 있어 아무도 우리를 구속하지 못하리라
그리고 여기에 찬란한 기둥들이 서 있어 아무것도
우리의 찬양을 받지 못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
- 류시화 시 ‘아무것도 아닌 것들‘
누구든 떠나갈 때는
날이 흐린 날을 피해서 가자
봄이 아니라도
저 빛 눈부셔 하며 가자
누구든 떠나갈 때는
우리 함께 부르던 노래
우리 나누었던 말
강에 버리고 가자
그 말고 노래 세상을 적시도록
때로 용서하지 못하고
작별의 말조차 잊은 채로
우리는 떠나왔네
한번 떠나온 길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었네
누구든 떠나갈 때는
나무들 사이로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가자
지는 해 노을 속에
잊을 수 없는 것들을 잊으며 가자
- 류시화 시 ‘누구든 떠나갈 때는‘
그 언덕 위에 내 집은
서 있다 언덕의 나무들과 새와
그토록 많은 곤충들의 집 위에
내 집은 서 있다 저녁시간이 만드는 한없이
투명한 강 위에 이름붙일 수 없는
그 무엇 위에
나와 오래된 집은 서 있다
얼마만큼의 거리를 갖고 내 집은
저녁에 나무들 사이에서 나를 본다
나는 나무 뒤에 숨어서 내 집을 지켜본다 그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아름다워 보일 만큼 거리를 두고
나무들 사이로 서로 바라보는 일
그리고 나는 지붕을 올려다본다 내 집의 지붕과
그곳에서 돌고 있는 바퀴 하나
내 머리 위에 있다 무엇의 바퀴인지는 모르지만
모든 집들 위에 세워진 내 집의
넓은 지붕 위 그것은 그림자차럼 돌고 있다
때로 구름 뒤에 얼굴을 감추기도 한다
그것은 왜 그토록 눈부시고 무슨 밀어올리는
힘이 있어 그것을 모든 지붕에 올라서게 하는가 바퀴는
저의 돌아가는 힘으로 돌들을 강으로 나르고
강을 더 먼 바다로 밀어보낸다
아직 때가 되지는 않았지만 나는
내 집 밑에서 기다리는 곤충들을 위해
손을 흔든다 지는 해를 등지고 서서 그 다음 그들에게
설탕을 던져 준다 날이 어둡기 전에 될수록 많이
눈을 뜨면서 나는
바라보는 법을 배운다
그러나 얼마만큼 거리를 갖고 지붕 위의 바퀴를
숨어 볼 수는 없다 바퀴는 벌써 내 안에 있고
매일 저녁 나는 내 집의 숲과 그 너머 강물들 위로
바퀴의 그림자가 누워 천천히 돌고 있는 것을 본다
그리고 그 밑으로는 기적처럼 구름과 강물과
수많은 곤충들이 어디론가 움직여 가고 있다
땅 속의 감자들처럼 하늘에도 어떤
둥근 뿌리가 있어 안개에 부풀고
저녁별들에게로 얼굴을 내어미는 곳 그곳에서
바퀴는 무엇을 노래하는가 내 몸은 가벼워져서
어느날 나도 그곳으로 올라갈 것이지만
매일 저녁 어김없이 나는 내 곤충들을 위해
수백 자루의 설탕이 필요하고 그 곤충들 위에
내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다
- 류시화 시 ‘너무나 큰 바퀴‘
집이 없는 자는 집을 그리워하고
집이 있는 자는 빈 들녘의 바람을 그리워한다
나 집을 떠나 길 위에 서서 생각하니
삶에서 잃은 것도 없고 얻은 것도 없다
모든 것들이 빈 들녘의 바람처럼
세월을 몰고 다만 멀어져갔다
어떤 자는 울면서 웃을 날을 그리워하고
웃는 자는 또 웃음 끝에 다가올 울음을 두려워한다
나 길가에 피어난 풀에게 묻는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았으며
또 무엇을 위해 살지 않았는가를
살아있는 자는 죽을 것을 염려하고
죽어가는 자는 더 살지 못했음을 아쉬워한다
자유가 없는 자는 자유를 그리워하고
어떤 나그네는 자유에 지쳐 길에서 쓰러진다
- 류시화 시 ‘길위에서의 생각’
** 류시화: 시인, 번역가. 1958년 충청북도 옥천군에서 태어났으며(현재 64 ~ 65세) 본명은 안재찬이다. '류시화'는 안재찬이 작품상에서 쓰는 필명으로 현재는 이 이름을 고정적으로 사용한다. 이 필명만 보고 류시화를 여성으로 착각했다가 아저씨라는 것을 알고 놀랐다는 사람도 있다. 프로필로 쓰는 사진에서는 오직 장발 스타일만을 고수하기에 더더욱 착각하기 쉽다.
들리는 여담으로는 같은 학교 선배의 본명을 허락받고 빌려 쓴 것이라고 한다. 그 선배는 '류시화'라는 이름이 이렇게까지나 유명해질 줄 몰랐다고.
필생의 역작으로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라는 인디언 연설문집이 있다. 무려 페이지가 1000쪽 가까이 되는 백과사전급의 책이다. 그리고 수필 '나의 모국어는 침묵'은 미래엔의 중학교 2학년 국어교과서에 수록되었다.
독자층에서는 필력이 좋은 평가를 받는, 대학생 및 젊은층들 사이에서 가장 선호하는 시인으로 알려졌다. 그 때문에 서점가에서 류시화의 시집은 물론 번역물까지 베스트셀러에 오른 적도 많다. 교보문고에서 2004년부터 2014년까지 10년간 시집 판매 순위를 집계한 결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2005)이 1위,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1998)이 2위,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2012)이 5위에 올랐다.
창작 이외에도 외국 시를 번역하는 작업도 겸하는 편으로 실제 본인은 책을 많이 독파하는 독서광이라고 한다. 그것도 원어본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고... 해외여행도 하는 편으로 특히 인도를 방문했었던 때가 많았다. 방송인이자 탤런트인 김혜자 씨와도 친분이 있어서 함께 인도여행을 갔다, 다녀오기도 했다. 김혜자 역시 류시화의 시를 좋아해서 방송에서 언급하기도 했다.
첫댓글 류시화 시인의
시집을 통째로 읽은 듯 합니다
갑진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이 좋아지길 기원합니다
2023년에 시인별로 시를 정리하고 있었는데,, 류시화 시인의 시는 그중에 인용하여 글을 쓴 시들중에 10위권 안에 들더군요.
수많은 시인들이 존재하지만, 가슴으로 이어지는 시인들은 손에 꼽게 되는것 같아요.
푸른 청륭의 해, 복 많이 받으시고
가족과 더블어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