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쟁의 전개 과정은 크게 네 국면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각 국면에서 잉글랜드와 프랑스 양국은 국내정치에서도 유사한 패턴의 반복이 나타났습니다.
제1국면(1337-1360)
전황: 잉글랜드의 승리와 프랑스의 패배
전쟁 전개: 에드워드 3세의 약탈 원정과 블랙 프린스 에드워드의 남불 공격. 칼레 함락. 프랑스의 잉글랜드군 저지 실패
전투: 슬뤼이스 해전, 크레시 전투, 푸아티에 전투
패전국의 내전과 봉기: 자크리의 봉기, 에티엔 마르셀의 봉기, 나바르 왕 샤를 2세와의 내전
기타: 흑사병(1340s~)
제2국면(1364-1392)
전황: 프랑스의 승리와 잉글랜드의 패배
전쟁 전개: 샤를 5세 왕정의 안정화. 베르트랑 뒤 게클랭의 활약. 영토 수복.
전투: 라 로셀 해전, 코크렐 전투
패전국의 봉기: 잉글랜드 농민 봉기(와트 타일러의 봉기)
패전국의 반정: 리처드 2세의 폐위와 헨리 4세의 즉위
제3국면(1392-1429)
전황: 잉글랜드의 승리와 프랑스의 위기
전쟁 전개: 부르고뉴 공국과 연대한 잉글랜드의 북불 지방 점거. 헨리 6세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 확정.
전투: 아쟁쿠르 전투
패전국의 내전과 봉기: 카보쉬앙의 봉기, 샤를 6세의 광기와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의 내전
제4국면(1429-1453)
전황: 프랑스의 최종적인 승리와 잉글랜드의 패배
전쟁 전개: 잔 다르크의 활약과 영토의 수복. 부르고뉴 공국과 내전의 종식
전투: 오를레앙 전투 등
패전국의 내전과 봉기: 헨리 6세의 광기와 장미전쟁
이미 백년전쟁의 발발 이전부터 프랑스와 잉글랜드는 종래의 권력 파편화를 극복하고, 국가 시스템의 기반이 얼추 갖추어진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백년전쟁은 이전에 있었던 한시적인 전쟁과는 그 성격이 구분되는 것이었고, 잦은 전쟁은 곧 강한 군대와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전국 단위 과세의 일상화, 곧 근대 군사-재정 국가 시스템의 태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강대한 국가state의 등장은 곧 국가의 운영과 존재에 대해 논의하는 전국적인 정치장political field의 출현과 국가적 사안에 대한 논의와 행동의 분출로 이어졌습니다. 곧,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내전’과 ‘봉기’가 등장한 나타난 것입니다.
일례로 에티엔 마르셀의 요구 사항은 필리프 4세 시기 구축된 프랑스 국가를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대신, 푸아티에 전투로 포로가 된 국왕과 국왕을 지키지 못한 무능한 귀족들에게 국정 운영의 자격이 부족함을 전국 단위의 논의의 장인 총신분회의(estates general, 이른바 삼부회)에서 성토하고 부르주아지에게 국정 운영 권한의 요체인 재정과 인사를 양도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자크리의 봉기와 1381년 잉글랜드 농민 봉기 역시, 국가 및 국왕, 그리고 전국적인 과세와 이를 제대로 운영하지 못한(패전) 귀족의 국가 운영에 대한 불만의 제기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물론 봉건 이데올로기에 충실했던 나바르 왕 샤를은 충성이고 뭐고를 떠나 감히 농민이 ‘검’을 드는 것 자체를 용납할 수 없었기에 학살로 응답하였지만요. 이러한 봉기는 모두 전통적인 봉건 사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습니다.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의 대립은 샤를 6세의 친척들인 왕실 대귀족들 간의 투쟁에서 기인합니다. 샤를 5세는 악랄할 정도로 총신분회의를 패싱하며 열심히 일방적인 과세를 단행하며 전비를 축적하였고, 그의 자식들인 왕실 대귀족들의 생활 양식은 이미 국가 재정에 의존하였습니다. 이는 이전의 봉건 사회와는 큰 구분점이지요(bastard feudalism). 샤를 5세 사후 뒤를 이은 샤를 6세는 나이가 어려 친정에 나서지 못했고, 대신 정치를 좌우한 왕실 대귀족들은 과세의 유지와 완화를 놓고 대립하였습니다. 특히 부르고뉴 공은 인민의 부담을 위해 과세의 완화를 주장했고, 이는 왕제 오를레앙 공과 주된 대립 관계를 형성하다 끝내 갈등이 두 공작의 암살과 내전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작센, 바이에른 등 개별 국가가 territorial states로 발전한 독일은 실패한 사례..라고 일반적으로 얘기가 많이 됐었는데, 30년 전쟁 이후까지도 오스트리아가 개별 국가들간의 갈등을 성공적으로 관리하고 영향력을 투사하는 초국가적 정치체(?)로서 신성로마제국을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힘을 얻고 있더군요. 이탈리아도 사시 주요 국가들 간에 평화조약이 있었지만, 특히 프랑스와 합스부루크의 침투가 컸죠.
첫댓글 에스파냐도 수백년간의 레콩키스타를 치르고 왕국별 강력한 집권을 확립한 것을 보면, 장기적 집단 대결이 근대국가 형성에 추진제인듯 합니다.
반면 집단 내 내전이 지속되는 양상인 독일, 이탈리아는;;;
작센, 바이에른 등 개별 국가가 territorial states로 발전한 독일은 실패한 사례..라고 일반적으로 얘기가 많이 됐었는데, 30년 전쟁 이후까지도 오스트리아가 개별 국가들간의 갈등을 성공적으로 관리하고 영향력을 투사하는 초국가적 정치체(?)로서 신성로마제국을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힘을 얻고 있더군요.
이탈리아도 사시 주요 국가들 간에 평화조약이 있었지만, 특히 프랑스와 합스부루크의 침투가 컸죠.
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