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빙 [한백양]
힘들다는 걸 들켰을 때
고추를 찧는 방망이처럼
눈가의 벌건 자국을 휘두르는 편이다
너무 좋은 옷은 사지 말 것
부모의 당부가 이해될 무렵임에도
나는 부모가 되질 못하고
점집이 된 동네 카페에선
어깨를 굽히고 다니란 말을 듣는다
네 어깨에 누가 앉게 하지 말고
그러나 이미 앉은 사람을
박대할 수 없으니까
한동안 복숭아는 포기할 것
원래 복숭아를 좋아하지 않는다
원래 누구에게 잘하진 못한다
나는 요즘 희망을 앓는다
내일은 국물 요리를 먹을 거고
배가 출렁일 때마다
생각해야 한다는 걸 잊을 거고
옷을 사러 갔다가
옷도 나도
서로에게 어울리지 않는 곳에서
잔뜩 칭찬을 듣는 것
가끔은 진짜로
진짜 칭찬을 듣고 싶다
횡단보도 앞 노인의 짐을 들어주고
쉴 새 없이 말을 속삭일 때마다
내 어깨는 더욱 비좁아져서
부모가 종종 전화를 한다 밥 먹었냐고
밥 먹은 나를 재촉하는 부모에게
부모 없이도 행복하다는 걸 설명하곤 한다
- 202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왼편 [한백양]
집의 왼편에는 오래된 빌라가 있다
오랫동안 빌라를 떠나지 못한
가족들이 한 번씩 크게 싸우곤 한다
너는 왜 그래, 나는 그래, 오가는
말의 흔들림이 현관에 쌓일 때마다
나는 불면증을 지형적인 질병으로
그 가족들을 왼손처럼 서투른 것으로
그러나 아직 희망은 있다
집의 왼편에 있는 모든 빌라가
늙은 새처럼 지지배배 떠들면서도
일제히 내 왼쪽 빌라의 편이 되는
어떤 날과 어떤 밤이 많다는 것
내 편은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아직 잠들어 있을 내 편을 생각한다
같은 무게의 불면증을 짊어진 그가
내 가족이고 가끔 소고기를 사준다면
나는 그가 보여준 노력의 편이 되겠지
그러나 왼편에는 오래된 빌라가 있고
오른편에는 오래된 미래가 있으므로
나는 한 번씩 그렇지, 하면서 끄덕인다
부서진 화분에 테이프를 발라두었다고
다시 한 번 싸우는 사람들로부터
따뜻하고 뭉그러진 바람이 밀려든다
밥을 종종 주었던 길고양이가 가끔
빌라에서 밥을 얻어먹는 건 다행이다
고양이도 알고 있는 것이다
제 편이 되어줄 사람들은 싸운 후에도
편이 되어주는 걸 멈추지 않는다
- 202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한 사람이 두개 신문사에서 신춘문예에 당선된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한백양시인은 2024년의 시 스타임이 분명하다.
곧 다른 시들도 접하면 좋겠다는 생각......
카페 게시글
시사랑
웰빙 / 왼편 [한백양]
joo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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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61
24.01.05 21:46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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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될 줄 알았다는 당찬 소감을 봤어요 두렵다는 소감도... 정말 열심히 준비하고 또 앞으로 열심히 써갈 분인 건 확실하네요~^^ 자세를 배우고 있습니다~ 우선 자세라도! ㅋㅋㅋ
맞아요. 당찬 소감.
어, 교만한 거 아냐,했는데 패기가 맘에 들었어요.
밀화부리님도 패기 넘치는 자세로, 어잇어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