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닥속닥 “독대(獨對)”는 국민의 귀를 피하기 위해서다 !!
독대(獨對)는 “홀로독(獨) 대할대(對)” 다른 사람은 없이 나 혼자만 상대방과
대면(對面)한다는 뜻이다.
지금은 신문방송에서 “독대(獨對)”라는 말을 예사로 하지만
조선 시대에서 “독대(獨對)”는 매우 긴장감 넘치는 단어였다.
“독대(獨對)”란 말은 임금과 신하가 옆에 배석(陪席)한 사람 없이 단 둘이 앉은 것을
말한다.
왕과 특정(特定)한 신하(臣下)와 둘이서 주위사람 모르게 대화(對話)를 하는 것이다.
임금과 신하(臣下)가 대화를 나누는 데는 명칭이 있다.
▷“소대(召對)”가 있다.
임금이 신하(臣下)를 불러 정치나 경전(經典)에 대한 의견을 듣는 것을 말한다.
※소대(召對)-왕명으로 불리어가서 정사(政事)를 나누는 것
▷“윤대(輪對)”가 있다.
여러 신하가 차례로 돌아가며 임금 앞에서 자기 의견을 말하는 것이다
※윤대(輪對)-바퀴처럼 돌아가면서 차례로 임금과 대화하는 것
그런데 조선 시대에는 어떤 형태든 왕(王)과 신하(臣下)가 만나 대화할 때는 반드시
그 자리에 배석(陪席)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왕의 비서인 승지(承旨)와 역사책의 원고인 사초(史草)를 쓰는 사관(史官)이었다.
그런데 “독대(獨對)”는 바로 이 승지(承旨)와 사관(史官)마저도 없는 채로 왕과 신하 한사람 딱 두 사람만 대화하는 자리다.
최고 권력자와 또 한사람 단둘이서 대화하면 어떤 결과를 낳게 될까?
“독대(獨對)”한 두 사람이 대화한 내용을 말을 하지 않으면 누구도 알 수 없다.
임금의 사소한 일정을 기록하는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쓰기 위한 사관(史官)의 사초(史草)에도 독대(獨對)
내용은 없다.
비서실장인 승지(承旨)가 매일 임금을 수행하며 온갖 일정과 대화와 읽은 문서들을
기록하는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와 사관(史官)이 쓴 사초(史草)를 바탕으로 편찬되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어디에도 왕과 신하가 독대(獨對)한 대화(對話)의 내용은
기록되지 않게 된다.
다르게 말해 남몰래 두 사람이 나누는 밀담(密談)인 것이다.
공개적이고 투명한 행정을 원칙으로 삼았던 조선 왕조의 관료 사회에선 바로
이 독대를 금기(禁忌)로 여겼다.
특정 신하가 임금을 독대하게 되면 두 사람 사이에 비밀스러운 음모가
있었을 것으로 의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간원(司諫院)과 사헌부(司憲府)소속의 관료들이 임금에게 쓴 소리를 하고 여러 관료의
잘못을 따졌던 관리들을 “대간(臺諫)”이라고 했다.
“독대(獨對)”는 이들 “대간(臺諫)”에게 비판받기 딱 좋은 일이었다.
※사간원(司諫院)-조선 시대에 임금과 조정 신하들의 하루 일과에 대한 여러 가지
충고하는 말이나 논박(論駁)을 기록하는 임무기관.
현재의 국가기록원, 야당 성향 국회의원 등이다.
※사헌부(司憲府)-조선 시대에 감찰 업무를 담당하던 행정기관, 관리들의 비행을 조사하고
탄핵하는 역할을 했다. 현대의 기관으로 비유하자면, 감사원과 헌법재판소의 기능이다
조선 초기에는 “독대(獨對) 불가(不可)” 원칙이 아직 확립되지 않았다.
그래서 세종(世宗) 임금도 민심과 여론 파악을 위해 신하와 독대(獨對)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11대 중종(中宗) 때도 권신(權臣)인 김안로(金安老)가 왕과 독대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 독대(獨對)를 금(禁)하게 된다.
독대(獨對)가 심각한 정치적 파장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건이 1659년(효종 10년)의 “기해독대(己亥獨對)”다.
효종(孝宗)이 당대의 큰 학자이자 서인(西人)당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송시열(宋時烈)과
독대(獨對)한 사건이다.
창덕궁(昌德宮) 희정당(熙政堂)에서 송시열과 독대(獨對)한 효종은 북벌(北伐)
문제를 의논했다고 한다.
북벌(北伐)이란 당시 유학자(儒學者)들이 정통성이 없다고 생각한 청(淸)나라를
군사적으로 공격해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치욕을 씻으려 했던 계획이다.
끝내 실행되지 못했지만 효종(孝宗)하면 떠오르는 것이 “북벌계획(北伐計劃)”이다.
효종(孝宗)과 송시열(宋時烈)과의 독대(獨對)였는데 어떻게 그 내용이 역사 속에
알려지게 된 것일까?
독대(獨對) 당사자인 송시열(宋時烈)이 “악대설화(幄對說話)”란 책을 썼기 때문이다.
이 기록에서 효종(孝宗)이 북벌(北伐)의 구체적인 계획을 제시했다는 내용이 있다.
송시열은 효종(孝宗)의 큰 뜻에 동의하면서도
우선 국내 문제부터 해결하고 민심을 수습하는 게 우선이라 제안했다고 한다.
“악대설화(幄對說話)”책 내용에는 아래의 부분이 있다.
【1659년 3월 11일 즉위 11년차 효종(孝宗)이 송시열과 독대(獨對)했다.
사관(史官)도 없었고 내시도 없었다.
▷효종(孝宗)-나는 포병(砲兵) 10만을 길러 청나라 산해관(山海關)으로 쳐들어갈
계획이다.
▷송시열(宋時烈)-나라(조선)가 망하게 된다면 어찌하시렵니까?
▷효종(孝宗)-그렇다면 무엇이 급선무인가?
▷송시열(宋時烈)-군자금(軍資金)과 군사 모집 방법을 자세하게 계획한 뒤에 실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이 모든 것은 기강(紀綱)을 먼저 세워야 시행할 수 있습니다.
기강은 전하가 사심(私心)을 없애야 세울 수 있나이다.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봤자 사회질서가 바로서지 않으면 헛일이라는 말이었다.
송시열(宋時烈)은 “북벌(北伐)보다는 선비들 습관을 바로잡는 일이 급선무”라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송시열은 북벌(北伐) 계획 동참(同參)을 실질적으로 거부한 것이다.
독대(獨對) 한 달 뒤 효종이 갑자기 죽었다.
16년 뒤인 1675년 남인에 의해 정치적 수세에 몰렸을 때 송시열(宋時烈)은 본인이 작성한
효종(孝宗)과의 독대 대화록을 전격 공개했다.
이는 훗날 “효종대왕-송시열” 듀엣(duet)의 북벌 대계(大計)로 확대 포장됐다.
노론(老論)과 갈등을 빚다가 타협한 정조(正祖)는 송시열(宋時烈)을 북벌론 주도자로
포장해 비문 까지 썼다.
1787년에는 송시열 문집인 “송자대전(宋子大全)”도 편찬했다.
우리는 학교 때 송시열이 “북벌론자(北伐論者)”라는 엉터리 역사교육을 받았다.
※송자(宋子)-송시열을 높여서 부르는 호칭
제주도로 송시열을 귀양 보낸 남인(南人)은
“송시열 나이가 80이 넘었으니 굳이 국문(鞫問)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숙종(肅宗)은 남인들 요구를 수용해
“의금부도사가 송시열을 만나는 그 자리에서 사약(賜藥)을 내리라”고 명했다.
1689년 6월 3일 상경 중인 송시열이 전북 정읍을 지날 무렵 조정에서 보낸 의금부도사가
송시열 앞에 나타났다.
송시열은 사약(賜藥)을 받았다.
42년 뒤 송시열의 제자 이의현(李倚鉉)은 그 자리에 비석을 세우며
“흉악한 무리가 독 묻은 손을 먼저 뻗쳤다”라고 기록했다.
위선과 조작(造作)과 공작(工作)이 난무했던 17세기 피비린내 가득한 정치 이야기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중에서)
▶세자 교체로 들끓은 숙종(肅宗)과 이이명(李頤命) “정유 독대(丁酉獨對)”
“정유독대(丁酉獨對)”는 조선 숙종 43년에 일어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숙종(肅宗)이 노론(老論)의 영수인 이이명(李頤命)과 단독으로 면담한 것이다.
이 독대는 숙종이후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 간의 갈등이 심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장희빈의 아들 숙종의 장남인 후일 경종(景宗)의 즉위문제다
노론은 연잉군(延礽君 후에 영조)과 연령군(延齡君 숙종의 6남)을 지지하였다.
소론은 숙종의 장남 경종(景宗 장희빈 아들) 편이었다
소론(小論)은 노론(老論)이 세자(世子)를 바꾸려 한다고 의심했다
이처럼 독대(獨對)는 예나 지금이나 뒤에 말거리를 남기게 되는 원인이다
속닥속닥 독대(獨對)는 항상 아리송한 뒷말의 원인이 된다.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