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월요시편지_918호
아무것도 기록하고 싶지 않았던 아무 날의 일기
- 옮긴이의 말
휘민
오늘 오후에 엄마와 배드민턴을 쳤다.
- 아이의 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아이가 처음으로 백핸드를 시도한 날이었다.
이 어려운 기술을 나는 두 번이나 성공시켰다.
- 아이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런데 셔틀콕이 나뭇가지에 걸렸다.
- 나는 느티나무 둥치를 잡고 흔들었다. 나무는 꿈쩍하지 않았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손에 들려고 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쉽게 물러날 엄마가 아니었다.
- 나는 갈라진 줄기 사이에 한쪽 다리를 걸고 간신히 손에 잡힌 나뭇가지를 붙들고 매달렸다. 나는 온몸으로 나무를 흔들고 나무는 꽁지 뽑힌 깃털의 무게만큼 나를 흔들었다.
셔틀콕이 바닥에 내려왔다. 결국은 엄마의 승리였다.
- 그러나 날개가 없는 나는 나무늘보처럼 늘어져 나무에서 내려오지 못했다.
나는 느티나무와 씨름하는 엄마가 스모 선수 같다고 생각했다.
- 자기 몸의 줄무늬를 세다 기린에게 들킨 얼룩말의 기분 연필 끝에 침을 묻혀 내 것이 아닌 감정을 기록해 두기로 했다.
거위가 최초로 비행을 시도했을 때의 자세는 어떠했을까.
신탁이라도 받는지 아이는 자면서도 입을 실룩거린다.
- 『중력을 달래는 사람』(걷는사람, 2023)
***
휘민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중력을 달래는 사람』에서 한 편 띄웁니다.
오늘 띄우는 시편은
- 아무것도 기록하고 싶지 않았던 아무 날의 일기
이지만
처음 골랐던 시편은
- 어머니와 개와 쥐가 있는 잠포록한 보름치의 풍경 안에서
였습니다.
전자가 동화의 서사를 지녔다면 후자는 단편소설의 서사를 지녔습니다.
오늘은 동화에 조금 더 마음이 기울어진 것이지요.
시집을 읽어본 후라면 중력이 어떤 의미로 쓰였을지 금세 눈치 챌 수 있을 텐데요... 불가항력의 슬픔 정도를 힌트로 남겨둡니다.
아이의 일기를 엄마가 한 줄 한 줄 옮기며 주석을 달고 있지요.
어쩌면 그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아이(누군가)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것은 어쩌면 나의 주석(오역誤譯이거나 반역反譯이거나)을 다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 한 사람이 지나간 뒤에야 나는 그의 눈빛을 기억해내려 애썼다
- 뒤늦은 변명처럼 원문에도 없는 주석을 달고 있었구나
라는 휘민 시인의 말은 나와 당신에게도 틀림없이 적용됩니다.
오해와 곡해, 오독과 오역을 견디고 버티며 함께/홀로 살아내는 일을
중력이라 부르고 싶은 아침입니다.
2024. 1. 8.
달아실 문장수선소
문장수선공 박제영 올림
카페 게시글
시사랑
아무것도 기록하고 싶지 않았던 아무 날의 일기 / 휘민
박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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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73
24.01.08 09:06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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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시도 시지만... 누군가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것은 어쩌면 주석을 다는 걸지 모른다는 말이 인상 깊네요... 그렇지요 주석을 달려면 깊이 들여다 보았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