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농가녀(農家女)
http://m.blog.daum.net/shanghaicrab/16135262?categoryId=607324
[아래는 중국인터넷에서 커다란 논쟁을 불러일으킨 농가녀라는 닉네임을 가진 네티즌의 글임]
이글 제목을 보면 너희가 나를 욕할 거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를 욕할 정력이 있는 사람이면 아래의 내용을 자세히 본 다음에 다시 나를 욕해야할지 말지를 생각해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나는 북방의 아주 궁벽한 농촌에서 태어났다. 많은 사람들은 농촌이 뭐 좋지 않은게 있느냐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진짜 농촌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도로도 없어서, 가장 가까운 버스정류장을 가려면 20킬로미터를 가야 한다. 마을을 드나들 때 예전에는 모두 걸었고, 지금은 자전거를 탄다. 마을의 거리는 흙길로 구덩이가 있고 울퉁불퉁하다. 맑은 날 바람이라도 불면 옷에 먼지가 가득 달라붙는다. 비오는 날에는 온 몸이 진흙탕이 된다. 그리고 더러운 흙탕물 속에는 어디든지 소똥, 말똥, 당나귀똥, 돼지똥, 양똥, 닭오리똥등이 보인다. 거기서는 가축을 우리에 가두어 기르는 습관이 없고, 대변을 볼 때면 길거리로 나간다.
자기 집안이 더러워질까봐. 마을사람들은 1년내내 거의 신선한 채소를 먹어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의 땅에서는 무우와 배추만 심기 때문이다. 물론 고구마도 있다. 만일 고구마도 야채로 친다면. 그래서 그들은 그저 절인 무우와 절인 배추만 먹는다.
나한테 왜 절이고 튀기지 않는지 묻지는 말라. 누구든지 튀기는 것이 절이는 것보다 맛있다는 걸 안다. 그러나 기름이 아까워서 쉽게 튀기지를 못한다. 명절때나 친척이 방문했을 때가 아니면. 나는 대학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식당에서 일생에서 처음으로 유탸오(油條)를 먹어보었다.
의료보장은 말도 하지 말라. 나의 할아버지는 병이 나자 그저 죽기만 기다렸다. 병치료할 돈이 없기 때문이다. 나중에 병원에 갔는데, 약값이 2위안이 모자라서 약을 쓰지 못했다. 거기가 국영병원이었는데. 우리 전 식구가 병원에 꿇어앉아서 부탁했지만 안 되었다. 그저 두 눈을 멀거니 뜨고 할아버지가 병원에서 돌아가시는 것을 보아야 했다.
우리 농촌이 발전한다고는 제발 말하지 말라. 최소한 내가 어려서부터 현재까지 근 30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내가 태어난 그 마을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 나는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볼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70년대말에 태어났다. 집안에는 여동생이 셋, 남동생이 하나 있어서 합쳐서 자식이 다섯이다. 만일 돈도 없는데 어떻게 이렇게 자식을 많이 낳은 거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분명히 중국의 현재 상황을 잘 모르는 것이다. 현재 가족계획을 어기고도 많이 낳을 수 있는 사람은 아주 부자이거나 아니면 아주 가난한 사람이다. 아이를 낳는 이유는 내가 보기에 두 가지이다: 하나는 농촌에 아무 놀 거리가 없어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항(炕, 흙으로 만든 잠자리)에 올라간다. 아이를 낳은 것말고는 더 할 꺼리가 없다.
사실 그들도 아이를 낳고 싶지는 않다. 다만 아무도 그들에게 효과적인 피임방법을 알려주지 않았을 뿐이다. 나는 내 눈으로 모친이 임신한 후 밧줄로 졸라서 유산시키려고 하는 것도 보았고, 재를 먹어서 피임하려는 것도 보았다. 둘째는 농촌의 전통적인 관념과 환경에 따른 것이다. 농촌은 모두 힘든 노동일을 한다. 집안에 남자가 없으면 안된다. 농촌에는 수천년동안 대를 이어야 한다는 사상이 있다. 남자를 낳지 못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것이다. 우리 모친도 내 남동생을 낳기 전에, 가족 안에서 사람들에게 욕을 많이 먹었고, 마을의 아이들이 나를 괴롭히고, 욕했다: "절호두(絶戶頭, 사내아이가 없으니 집안의 대가 끊겼다는 말이다)"
농민들이 선량하다고 말하지 말라. 가난하고 마음이 좁다. 그들이 선량하다는 것은 상대적이다. 그때 집집마다 아이가 있고 서로 살기에 바빴다. 누가 누굴 돌봐줄 수 있을 것인가? 나는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다섯살 때, 부모가 모두 일하러 나가면서 나에게 여동생을 데리고 집을 보라고 시켰다. 이웃집에서 식칼을 빌리러 와서는 우지 집에서 밥을 하는 솥까지 가지고 가버렸다. 나중에 부모가 돌아와서 돌려달라고 했는데, 그들은 죽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모친에게 실컷 얻어맞았다. 우리 집은 오랫동안 솥없이 밥을 해먹어야 했다.
그리고 또 한번은 내가 아홉살 때, 혼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 때 마을의 한 아주머니가 이웃 당숙집의 면화를 훔쳐가는 것을 보았다. 나중에 당숙이 와서 그녀를 붙잡아서 마을사람들에게 알리겠다고 햇다. 그녀는 당숙에게 용서해달라고 하고, 그녀가 당숙과 같이 자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면화위에서 옷을 벗었다. 그때 그들은 내가 어려서 모르는 줄 알았을 것이다. 나도 나중에야 비로소 그 때 광경의 의미를 이해했다.
그러나, 매번 생각할 때마다 역겹다. 나중에 역시 이 일로 마을 사람들이 모두 알게 되었다. 아마도 당숙이 다른 사람에게 말해준 모양이다. 그런데 그 아주머니는 내가 우리 모친에게 말하고, 우리 모친이 마을 사람들에게 말한 줄로 알았다. 그래서 우리 집앞에 서서 여러 날을 욕하고 같다.
나중에 내가 등교하는데 나를 붙잡아서 때려주었고, 내 입술이 터졌었다. 모친은 하교후에 내 입술이 터진 것을 보고는 어찌된 일인지 물어보았다. 나는 부주의해서 넘어졌다고 하였다. 나는 내가 말하게 되면, 모친이 그들을 찾아가서 싸우게 되고 더 큰 전쟁으로 번질 것이 겁났었다. 그때 어머니는 우리 자식들을 키우느라 충분히 힘들었다. 그냥 말하지 말자. 어디든지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는 법이다. 농촌사람이라고 하여 선량의 대명사는 아니다.
나는 우리 그 마을 그리고 전체 향(鄕)에서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여대생이다. 남자아이들도 공부하지 못하는 곳에서 나같은 여자가 대학까지 갔다는 것은 기적이다. 이 모든 것은 나의 아버지에게 감사해야 한다. 부친은 퇴역군인이다. 마을에서는 세상물을 먹은 몇 안되는 사람중에 한 명이다. 그래서 나를 소학교에 보내어 공부하게 시켰다. 처음에는 그저 나에게 글자나 몇 개 가르쳐서 남자화장실과 여자화장실을 구분할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당시 마을에는 십여리길을 걸어서 소학교로 공부하러가는 십여명의 아이가 있었다.
그런데 모두 소학교도 마치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그저 나 혼자 계속했다. 내가 계속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 때문이다: 하나는 내가 아주 열심히 공부했고, 소학교에서 중고등학교까지 모두 학교를 대표하여 대회에 참가할 정도였다. 부친은 아마 나에게서 농촌을 벗어날 희망을 보았는지 모르겠다. 둘째는 내가 공부할 때 수업시간에 짚으로 줄을 꼬았다. 보리짚으로 꼰 줄은 나중에 짚모자의 재료가 되는데, 1판을 꼬면 2마오에 팔 수 있었다. 나는 하루에 다섯 판을 꼴 수 있었다. 나는 수업시간에 필기를 하거나 숙제를 하지 않고 그저 짚을 꼬았다.
즉 나는 공부하면서 돈을 벌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내가 공부하기 위하여, 세 여동생은 모두 공부를 포기했다. 가장 어린 여동생은 7살때부터 부친을 따라 벽돌공장에 가서 벽돌을 끌었다. 비쩍 마른 부친이 수레를 끌면 여동생이 뒤에서 밀었다. 수레 하나를 2킬로미터 끌고가면 2마오를 받았다.
그때 나는 중학에 다녔으므로, 집에서 멀어서 학교에서 기숙했으므로 짚을 더 꼴 수가 없었다. 소학교부터 중학교까지 반에서 가장 어린 학생이었다. 나는 몇번 월반했고, 나는 아주 조숙한 아이였다. 나는 공부가 너무 쉽다는 것을 알았다. 그저 몇년 덜 공부하면 그만큼 빨리 돈을 벌 수 있는 것이다. 대학에 들어갈 때 나는 겨우 16살이었다.
내가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공조생(公助生)이라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시험점수가 높으면 아주 적은 학비만 내면 된다. 내가 대학에 입학할 때 600위안밖에 들지 않았다. 이 600위아은 부친이 오랫동안 길러온 돼지를 한 마리 팔아서 마련한 것이다. 그리고, 학교에 다니면서 매달 45위안의 생활비를 받았다.
만일 현재의 비용기준이라면, 나는 계속 공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매달 받는 45위안으로 나는 매월 20위안을 아껴서 집으로 송금할 수 있었다. 나는 매일 만두와 절인채소만을 먹었고, 교복만 입어서 다른 옷을 살 필요가 없었고, 더더구나 화장품 같은 것은 알지도 못했었다. 바로 대학에서 나는 가난하다는 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지를 알게 되었다.
나는 대학에서 거의 친구가 없었다. 첫째는 나이가 어려서 그들과 함께 어울리기 힘들었다. 기숙사의 여학생들은 모두 길거리를 어울려다니면서 연애를 하곤 했다. 나는 매일 아르바이트를 하느라고 한밤중에야 되돌아왔다. 그녀들과 얘기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대학 4학년때, 나는 반의 동급생들조차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는데, 아마도 믿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그랬다. 그들은 생활을 즐겼고, 나는 생존을 위해 노력했다. 둘째는 가정출신이다. 그 당시 대학을 공부한 사람은 대부분 가정조건이 괜찮은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나의 생존환경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의 행위와 모습을 멸시했다.
나는 기억한다. 한 동급생의 어머니가 학교에 기숙사를 바꿔달라고 하였는데, 그녀의 보배같은 딸이 거지같은 애와 함께 살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설명해야 겠다. 당시 나는 더러운 것이 아니라 낡았다. 나는 어려서부터 자립심이 강했다. 옷을 빨아입고, 물건을 정리하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세탁할 돈이 없었다. 그저 친척이 입다가 준 낡은 옷을 입었다. 그리고 외투가 작아지면 집에 있는 여동생에게 보내서 기워입게 하였다. 가을웃옷과 가을바지가 낡으면 내의로 바꿔 입었다. 나는 손재주가 뛰어난 사람이다. 전에는 동급생이 버린 침대보를 가지고 여동생의 예쁜 치마를 만들어준 적이 있었다. 세심한 바느질 솜씨를 보고 나를 무시하던 동급생들도 새로 산 것같다고 말해주었다.
어렵사리 졸업을 했는데, 정책이 바뀌었다. 스스로 살 길을 찾아야 했고, 나라에서 분배해주지 않았다. 나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첫째는 집안조건이 이미 내가 살아가는데 맞지 않았다. 둘째는 그렇게 오랫동안 공부했는데 다시 농촌으로 돌아가면 시골사람들에게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되어, 아이들을 공부하지 못하게 하는 핑계가 될 수 있었다.
나는 도시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처럼 천천히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을 수는 없었다. 나는 반드시 먹고자는 문제가 해결되는 일을 찾아야 했다. 나는 졸업하자마자 수중에 돈이 한푼도 없었다. 나는 집에 손을 내밀 수는 없었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하여, 나는 여러 도시를 돌아다녔고, 여러 일을 해보았다. 나는 반드시 돈을 벌어야 했고, 일을 지나치게 많이 한 모친은 병이나서 병원비도 마련해야 했다. 남동생이 공부하고 있었고, 여동생에게도 기술을 배우게 해주고 싶었다. 나는 먹고 쓰는 것을 아꼈다. 그러나 돈은 아주 부족했다.
남동생이 대학에 합격하였을 때, 근 만위안이나 되는 엄청난 학비에 우리 식구들은 모두 입이 딱 벌어졌다. 우리는 학비대출을 받으려고 했으나, 승인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촌에서 증명을 제공해주지 않았다. 촌주임(우리동네에서는 支書라고 한다)이 우리 집은 조건이 맞지 않는다고 한다. 그의 말뜻은 고아이거나 홀어머니,홀아버지가정으로 생활보장이 없는 아이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 집은 부모도 건재하고, 딸도 대학생이어서 돈을 벌 수 있으므로 학비대출이 안된다고 한다. 사실 누구도 다 알아차렸다. 그는 우리 집에 대학생이 두 명이나 나오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해서 일부러 괴롭힌다는 것을. 그는 마을에서는 왕이었으므로 누구집에서 가서 먹고 싶으면 그 집에 가서 먹고, 어느 집 여자를 찾고 싶으면 그 집에 가서 그 여자를 찾았다.
다만 우리 집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이웃사람들이 돈을 빌려줄 수도 없었다. 누구나 다 가난해서 자기도 돌보기 힘든데 다른 집까지 돌보기는 어려웠다. 또한 농촌사람들은 그 자연환경하에서 통이 크고 선량할 수가 없었다. 네가 그들보다 가난하면 그들은 너를 무시하고 어울리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네가 그에게 돈을 빌리자고 할까봐 겁나기 때문이다. 네가 그보다 부자이면 그는 너에게 잘보이려 할 것이다. 왜냐하면 약간이라도 이득을 볼까 해서이다. 친척들도 마찬가지이다. 당시 우리는 그 곳에서 가난한 집이었다. 모두 나와 남동생이 공부했기 때문이다. 공부하지 않는 집의 아이들은 일찌감치 밖으로 나가서 일을 했다. 건축대(노가다)에 들어가도 돈을 벌 수 있고, 농촌이 바쁠 때면 돌아와서 일손을 거들 수도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오랫동안 공부했는데, 일도 못하고 돈도 벌지 못하는 아무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
나중에, 나는 부친과 동새의 학교로 가서 선물을 사들고 책임지는 부교장을 만났다. 겨우겨우 학비를 분맙하는 것으로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우리의 돈은 부족했다. 그때, 나는 정말 죽고 싶었다. 나는 사는게 너무나 힘들다고 느꼈다. 이전에는 오로지 공부만 하고 좋은 일자리를 찾아서 집안을 도와주고 싶었는데, 잘 생기지도 못하고, 영어도 뛰어나지 못하는(우리 농촌에서는 영어를 가르치지 않는다) 여자가 돈버는 일자리를 찾기는 너무나 어려웠다. 그렇다고 자신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졸지에 목표가 없어지니 생활이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죽고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죽으려고 해도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내가 죽은 후에 동생이 공부할 돈이라도 마련해주고 싶었다. 이 집안을 위하여 나 자신을 희생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자동차에 부딛치는 것을 생각했다. 번화한 거리(큰 거리에서는 차가 도망치기 어려울테니)에서 좋은 차를 찾아서 부닥치는 것이다. 자신의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물건을 몸에 지니고 간다.
이렇게 죽으면 최소한 가족들이 약간의 배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부끄러운 짓이기는 하지만, 좋은 차를 모는 사람이라면 그 정도의 돈이라면 신경쓰지 않지 않겠는가? 나중에 나는 정말 갔었다. 다만, 그 운전하는 사람이 급브레이크를 밟았기 때문에 죽지 않았을 뿐아니라, 차에서 내려서 나를 한바탕 때려주었다. 다행히 그 사람은 화가 나서 손발을 휘둘렀지만, 그 다음에는 나를 안고 병원에 데려다 주었다. 아마도 내가 여자여서 그랬을 것이다.
여기까지 읽은 사람들은 아마 믿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사실이 그랬다. 비록 나는 이 일을 아주 간단하게 썼지만, 되돌아보고 싶지 않다. 비록 이것이 나의 일생에서 가장 회고할만한 내용이기는 하지만. 그 사람은 나를 병원에 보낸 후 나에게 죽고싶었던 것이 아닌지 물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나의 생각과 처지를 말했다. 나중에 그는 나에게 오천위안을 던지고는 가버렸다. 그가 지금까지 나를 가장 많이 도운 사람이다. 나는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나이가 얼마인지, 어디에 사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른다. 나는 그를 찾아서 그에게 보답하려고 한 적이 있었다.
아쉽게도 나중에 내가 그를 찾기 전에 경찰이 먼저 나를 찾아왔다. 나에게 돈을 준 그 사람은 마약범으로 체포되었다는 것이다. 경찰의 입에서 나는 그의 이름을 듣게 되었다. 이 이름은 내가 평생 기억할 것이다. 이 일의 진실성을 의심하지 말아달라. 아마도 내가 얘기를 잘 하지 못해서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일은 진짜이다. 당시 있던 도시의 신문에도 경찰이 그를 붙잡았다는 뉴스가 떴다. 나중에 들으니 그는 무기징역을 받았다고 한다. 나는 지금도 나를 조사한 그 경찰을 기억한다. 나중에 나는 이름을 가지고 감옥으로 그를 찾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나를 맞이해준 그 경찰은 나를 속여서 100위안을 받아갔다. 말로는 어디에 있는지 물어봐주겠다는 것이었는데, 결국 알아봐주지 못했다. 나는 지금도 그가 어디에 갇혀 있는지 모른다. 만일 알 수만 있다면 반드시 가 볼 것이다.
현재 나는 상해에 있다. 상해의 급여가 높다고 해서 왔다. 그런데, 나이가 근 삼십이 다되고 예쁘다고 할 수도 없고, 중국어만 알고 영어는 모르는 여자가 상해에서 일이나 찾으면 다행이지, 무슨 돈을 버는 직장을 찾을 수는 없다. 나는 현재 한 회사에서 문서를 처리한다. 1개월에 1800위안을 벌고, 상여금은 없다. 집은 다른 사람과 함께 임차하였는데, 물값 전기세를 합하여 한달에 600위안이다. 매월 집에 800위안을 송금하고 있다. 나머지 400위안으로 식사, 교통 그리고 생활비로 쓴다.
아껴봐야 겨우 먹는데서 아낄 수 있다. 매일 한끼만 먹기도 한다. 가장 겁나는 것은 병이 드는 것이다. 병이 들면 월급도 못받고, 집세는 내야 한다. 병원비는 더 무섭다. 며칠전에 영양불량으로 쓰러져 병원에 간 적이 있다. 내가 병원에서 깨어나자 의사에게 괜찮다고만 말했다. 그러나 의사는 이것도 검사하고 저것도 검사하느라고 거의 1천위안이 들었다. 나는 병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놀라서 죽는 줄 알았다.
지금 나는 일자리를 잃었다. 신분증이 없기 때문이다. 며칠전 올림픽기간에 회사는 나를 해고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졸업때 학교에서 발급해준 10년짜리 신분증이었다. 이제 기한이 만료되었다. 나는 고향에 돌아가서 호구를 처리하려고 했는데, 시골의 호구느 내가 공부할 때 꺼내갔으므로 다시 농촌호구로 할 수가 없었다. 다시 고향이 소재하는 현소재지로 가서 처리했다.
먼저 집체호구로 하고, 나중에 신분증을 만들 때는 반드시 주소가 있어야 하는데, 나는 현소재지에 주소가 없고 아는 사람도 없어서 어떻게 해야 주소증명을 받는지를 몰랐다. 그래서 신분증을 만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현재 호구본만 있다. 이것도 200위안을 써가면서 파출소사람에게 부탁해서 만든 것이다. 실업상태이고, 돈벌이가 없어서, 나는 다음달에 임차료를 낼 수가 없다. 그러면 집주인에게 쫓겨날 것이다. 나는 굶어죽거나 얼어죽을 것이다. 죽기 전에, 나는 내 일생을 종합해보니, 결국 뿌리는 가난하다는데 있었다.
막 상해로 왔을 때, 나는 다른 세명의 마찬가지로 농촌에서 온 여자들과 함께 방을 빌렸다. 짧은 몇년동안, 우리 네명의 여자는 네가지 인생을 살았다. 하나는 홍콩사람의 얼나이(二奶,첩 둘째부인)이 되었다. 고급주택에서 명품브랜드를 걸치고 좋은 식사를 한다. 1달에 1만위안의 용돈을 받는다. 다른 하나는 나이트클럽에서 사람들이 침을 뱉는 아가씨지만, 최소한 먹을 곳, 잘 곳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세번째는 마찬가지로 농촌에서 와서 일하는 농민공에게 시집갔다. 처음에는 지낼만했다. 두 사람이 함께 노력하여 빌린 방이지만 행복했다. 그녀의 가장 큰 꿈은 바로 돈을 번 다음에 고향으로 돌아가서 집을 사고 가정을 꾸리는 것이다. 그녀가 1달에 2천위안을 벌고, 남편이 3천위안을 번다. 상해에서 집을 산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그러나, 현재 그녀의 남편은 큰 병에 걸렸다. 많은 돈을 쓰고, 회사에서도 쫓겨났다. 현재는 집에서 병치료하고 있다. 농촌에서 와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아무런 보장도 없다. 그녀 혼자서 1달에 2천위안을 벌어서 임대료에 물, 전기료를 내고, 생활도 하고, 남편의 병수발도 해야 한다. 낮에는 회사에 출근해서 일하고, 저녁에는 옷빨고 밥하고 포장마차까지 한다. 생활이 힘들게 되니 예전의 용모를 찾아볼 수가 없다. 삼십여세가 되었지만 아이를 낳을 생각도 못한다. 아이를 낳아도 기를 능력이 안되기 때문이다.
이런데도, 그녀의 남편 고향에서는 전화로 돈보내달라고 아우성이다. 왜냐하면 온 가족이 여럽사리 아들을 대학졸업시켰는데, 돈도 못보내고 어느 집 여자만 좋은 일시켜주느냐는 것이다. 이건 그녀의 시어머니가 한 말 그대로이다.
그래서 그 언니는 나에게 말해주었다.
시집가려면 좋은데로 가라. 최소한 집도 있고 살면서 언제나 길거리로 쫓겨날 수 있다는 두려움에 떨지는 않을 수 있는데로 시집가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예 결혼하지 말라. 시집가지 않으면 혼자 가난한 것이지만, 시집가면 두 사람이 함께 힘들다. 아마도 네가 다른 사람의 가난까지 책임져야 할지도 모른다. 설마 얼나이가 되더라도 절대로 너와 똑같이 가난한 사람에게 시집가지는 말라. 그래서, 얼나이를 하지 않은 것은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만일 누군가가 나에게 기회를 주고 나를 찾는다면, 나는 할 것이다. 내가 요구하는 게 많지는 않다. 잘 곳과 입을 옷과 먹을 음식만 있으면 된다. 이렇게 하는 것이 기녀가 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첫댓글 가슴아프네요.. 정말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생존투쟁인듯..
저도 그런 느낌인데, 그냥 동병상련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