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2)
5. 이사야 8-9장
* 계속해서 이사야 8장을 살펴보자.
(사 8:1) 여호와께서 이르르시되 너는 큰 서판을 취하여 그 위에 통용 문자로 마헬살랄하스바스라 쓰라 (사 8:3) 내가 내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 하라 (사 8:4) 이는 이 아이가 내 아빠 내 엄마라 할 줄 알기 전에 다메섹의 재물과 사마리아의 노략물이 앗수르 왕 앞에 옮긴바 될 것임이니라
* 결국은 이 아기가 무엇을 보게 되느냐 하면, '왜 우리가 앗수르에게 침략을 당하게 되는가?' 라는 순수한 의미에서 선악과 관계없는 그 목격자로서 자라나게 된다는 것이다.
(사 8:16)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율법을 나의 제자 중에 봉함하라
* 너희들은 율법을 들을 자격도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듣기 싫어하기에 율법은 보따리를 싸서 이사를 가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율법이 어디로 가는가? 9장에 보니, 오히려 율법은 이스라엘에서 옮겨져서 흑암에 거하는 백성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이방인들에게 말이다.
(사 8:19) 혹이 너희에게 고하기를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
* 이사야가 율법에 기준해서, 신접한 자와 마술사를 죽은 자로 본다는 것이다. 이 율법에 기준을 해서 보니, 이스라엘이 스스로 살고자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살려주는 그러한 식으로 살아야 약속의 땅에서 유지할 수가 있는데, 그런데 이스라엘이 스스로 살려하니까 앗수르가 공격하기 이전에 율법 자체가 그들을 공격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앗수르는 단순한 몽둥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 그러나 이스라엘은 몽둥이 자체를 두려워하지만, 그러나 몽둥이를 든 약속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다른 하나님을 섬기고 다는 것이다. 즉,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달을 보아야지 그 손가락을 쳐다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 指月錄 * 여기서 이사야 9장을 보자.
(사 9:1)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사 9: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 이사야의 이러한 예언이 마태복음 4장에서 그대로 이루어지는데, 그래서 예수님의 사역의 출발이 말씀대로 갈릴리 나사렛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이다.
* 그런데 이것도 모르고 신학자들은 자기들끼리 나사렛 예수를 연구한답시고,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원어(?)를 연구해도 '개역성경'의 수준을 뛰어넘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직접 원어를 배워서 한번 성경을 해석해 보라. 그야말로 자갈치 시장이고, 아전인수격이라는 것이다. 성경전체를 보지 못하고 자기들의 입장만을 고수하니, 결코 성경이 안 뚫린다는 것이다. - 용각산 ?? * 그러면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사 9:3)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사 9:4) 이는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사 9:5)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 피묻은 복장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 누가 전쟁에서 이기는가? 한 아기가 전쟁에서 승리를 하여, 3절에 나온바와 같이, 탈취물(전리품)을 이방에게 나누어주는, 하나님의 전쟁으로 탈취물을 나눠준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약속의 땅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친히 전쟁하시는 땅,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가 있다는 것이다. 율법을 기준으로 계속 전쟁하고, 적은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이 전쟁하는 장소가 된다는 것이다. - 여호와는 용사이시니 !!
◈ 약속의 땅이란, 하나님이 친히 전쟁하시는 땅이다 !!
(사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사 9: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시리라
* 7절에 보면, '또 다윗의 위' 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렇다면 아하스 왕의 세대교체를 언급하는 것이 아닌가? 아기가 다윗의 위에 앉는다고 하니 말이다. 이렇게 나오니, 이사야가 왕의 반역자로 몰려서 톱으로 죽는다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 이사야가 이렇게 타협이 없이 메시지를 전하기에 고난이 오는데, 그러나 계시는 저쪽에서 안 받아줘도 여전히 계시인 것이다. 거부되는 것도 계시라는 것이다. 이사야가 실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목회자가 타협을 한다면 차라리 집에서 마누라하고 고돌이나 치는 것이 낫지 아니한가?
(사 9:12) 앞에는 아람 사람이요 뒤에는 블레셋 사람이라 그들이 그 입을 벌려 이스라엘을 삼키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 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
* 이것은 불교도들을 동원해서 교회를 왕창 부수는 작업인데, 그래도 하나님은 분이 안 차는 것이다. 앗수르는 하나님의 몽둥이로, 하나님을 엉터리로 생각하는 교회, 그런 나라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 우리가 이사야처럼 '내가 가겠나이다' 라고 했다면, 이런 메시지를 그대로 전해야 하는 것이다. 양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직 진리에 대해서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대로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성깔과는 전혀 상관없이 말이다. '제가 가겠나이다' 라고 말했으면, 지금이 이사야 때인 것을 전해야만 하는 것이다.
* 빛과 소금 6월 호를 보면, '목사의 부업에 대한 논쟁'이 나온다. 물론 나는 반대를 했는데,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이다. 자기가 가겠다고 했으면 당연히 가야하지 않겠는가? 왜 엉뚱한 짓을 하느냐는 것이다. 그것도 목사라는 이름을 달고서 말이다. 정녕 하고 싶으면 목사를 포기하든지 말이다. 지금이 종말의 때인데, 무슨 짓들을 하고 있는지 한심스러운 것이다.
* 이근호를 보고, 왜 불교신자를 공격하지 않고 교회만 공격하느냐고 하는데, 그러나 그것은 긍휼을 보여주기 위해서, 다시 한번 긍휼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공격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긍휼을 거부하는 성철스님에게는 '참 훌륭합니다' 라고 돌아서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고생을 하면서 엉뚱한 자에게 끙끙거리면서 시간을 허비하는가? 사랑하는 자에게 긍휼을 줄 때는 죄인임을 알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당사자가 비록 아파해도 말이다.
(사 9:15) 머리는 곧 장로와 존귀한 자요 꼬리는 곧 거짓말을 가르치는 선지자라 (사 9:16)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그들로 미혹케 하니 인도를 받는 자가 멸망을 당하는 도다
*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토정비결인데, 장로가 있는 교회에서 이 구절로 설교한다고 생각해 보라. 그 심정이 어떠하겠는가? 장로들이 백성을 멸망의 길로 인도한다고 말이다. 예레미야서를 잠시 보자.
(렘 5:30)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렘 5:31)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 * 백성들은 무엇인가 자기들을 덮쳐주는 것을, 이것을 '영혼의 강간(?)' 이라 하는데, 자기에게 거짓말이라도 해주는 것을 그렇게 좋아한다는 것이다. 장로들은 자기보다 똑똑한 목회자를 절대로 원하지를 않고, 자기보다 단수가 낮은 목회자를 씹는 맛을 좋아하는 것이다. 저렇게 못난 인간도 우리가 이렇게 잘 봐주고 있다는 것이다. 윤리적 만족감을 누린다는 것이다. 물론 목사는 참한 노리개 감이고 말이다.
*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전도서에 보면, 너무 똑똑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적당히 어리석어야만 남들한테 씹힐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먹고 살수가 있다는 것이다. 장로들이 자기 교회 목사가 엉터리 같은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넘어가는 것은, 바로 씹는 그 재미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결코 똑똑하고 올바른 목사를 오라고 하는 교회는 없다는 것이다.
* 어떤 목사가 한국교회와 장로를 비판하면 좋다고 박수를 쳐도, 그러나 그런 사람은 자기 교회에는 청빙을 안 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도 당하니까 말이다. 이근호도 바른 복음을 전하는 훌륭한(?) 목사라고 소문은 났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끝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목사는 언제나 바른 복음을 전한다 !!
6. 이사야 10장
◈ 자기 백성은 말씀 안에 있어야 자기 백성이다 !!
* 이사야 10장을 보면, 몽둥이가 몽둥이를 든 분을 움직이려고 하는 웃기는 일이 벌어지는데, 율법이 주어졌다고 해서 자기 백성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계시를 어떤 식으로 변하도록 하는가? 앗수르를 한번 보자. 자기 백성은 말씀 안에 있어야 자기 백성이라는 것이다.
(사 10:5) 화 있을진저 앗수르 사람이여 그는 나의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나의 분한이라 (사 10:6) 내가 그를 보내어 한 나라를 치게 하며 내가 그에게 명하여 나의 노한 백성을 쳐서 탈취하며 노략하게 하며 또 그들을 가로상의 진흙같이 짓밟게 하려 하거늘
* 앗수르는 몽둥이에 불과한데, 그런데 이 앗수르가 자기들이 무슨 정의의 사자나 되는 것처럼, 또 그 마음이 교만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우리들의 밥이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 그것은 다음을 통해서 알 수가 있는데, 요한 계시록의 해석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① 첫째로, 이스라엘을 친다. ② 둘째는, 이스라엘 쳤다고 교만한 이방나라를 치는 것이다. 양쪽을 다 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나쁜 것은 사실이지만 이스라엘을 쳤다고 그들은 나쁜 놈이 아닌가? ③ 셋째는, 새로운 창조이다. 새로운 씨의 건짐이고, 남은 자의 건짐이다. 하지만 남은 자는 이쪽 저쪽에게 모두다 고난을 받는 것이다.
* 그러니까 선지서를 모르면 요한계시록 해석이 전혀 안 된다는 것이다. 안 되는데, 왜 그렇게 요한 계시록 해석이 그렇게 많은가? 많은 사람들이 Q.T식으로 해석을 하지만, 그러나 이것이 바로 유대인 식이라는 것이다. 물론 엉터리이고 말이다.
(사 10:12) 이러므로 주 내가 나의 일을 시온산과 예루살렘에 다 행한 후에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리라
* 하나님은 양쪽 다 치는데, 이스라엘을 칠 때 이방나라도 함께 공격함으로 말미암아서, 소위 자칭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선택된 백성이다' 라는 의미를 다 깨버린다는 것이다. '우리는 거룩한 제사장 혈통이다' 라는 기존의 개념을 모두다 왕창 깨어 버리는 것이다.
◈ 선택이란, 예수님 소원대로,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들만이 선택된 자이다 !!
*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선택이란 것을 주어도, 악한 프리즘 때문에 이 선택이 왜곡되고, 자기 중심으로 해석해서 '나, 선택되었어요' 라고, 이렇게 나오니 선택이 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리와 창기들이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신 것이다. - 명저 [하나님의 선택] 참고
* 선택이란, 예수님 소원대로,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들만이 선택된 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선택되었습니다' 라고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예수님은 '그런 선택은 없어, 내가 새로 선택하는 거야, 새로 다시!'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이사야와 예수님이 이렇게 서로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둘 다 죽을 수밖에 없지 않는가!
* 어떤 큰 교회가 가서 이런 설교를 한번 해 보라. 당장 나가라고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것은 교회가 아니라고 해야 하지를 않겠는가? 자기를 쫓아낸다고 해서 교회가 아닌 것이 아니고, 도무지 말씀에 관심이 없으니까 말이다.
* 그래서 예레미야는 그 당시의 기존의 성전을 두고서 '이것은 성전이 아니다' 라고 했는데, 지금은 우리가 예레미야를 존경하지만, 그러나 그 당시에는 항상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예레미야는 얼마나 자기 자신이 한심스러웠겠는가? 그래도 위에서 시키니 어떻게 하겠는가?
* 이근호도 이런 소리를 참 많이 듣는데, '당신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너 혼자 해서 한국교회가 되는가?' 라는 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누구를 치자고 말하는 것이 아닌데, 주님이 치신다는 것을 그냥 전하는데, 나의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전하는 것에 불과한데 말이다.
* 이사야의 경우에도 사실은 누구를 치는 것이 아니고, 자기는 그냥 입을 열어서 '나의 하나님은 이런 분입니다' 라는 것을 말하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사 10:15)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 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일반이로다
* 이 말씀은 내용은 앗수르에게도 하지만, 그러나 이 계시는 이스라엘에게도 전달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너도 마땅히 몽둥이로서 앗수르를 쳐야 될 민족이었는데, 왜 교만했는가?' 라는 것이다. 신약을 정립할 때는 이렇게 구약을 보면서 성경에 있는 대로 정립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 10:20)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 자기를 친 자를 의뢰치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니 (사 10:21)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사 10:22)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훼멸이 작정되었음이라 ◈ 남은 자 - 스알야숩으로, 아하스 왕 앞에 등장시킨 이사야의 아들인데, 그렇다면 이것은 정권교체라는 것이다. 수평적 정권교체가 아니라 한 쪽은 완전히 망한다는 것이다. 오직 남은 자만 돌아온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요한 계시록이다. 남은 자, 오직 주님에 의해서 남은 자만 돌아오리라는 것이다.
* 이렇게 성경에 있는 '남은 자' 이야기를 교수들이 강의해줘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신학생들은 이 남은 자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교수가 이야기를 해주지 않아도 학생들은 나름대로 남은 자를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책이 어디 책장만 채우는 전시용인가?
◈ 남은 자는, 이스라엘을 치고 이방나라를 치는 양발차기 선수이다 !!
* 성경을 보면, 오직 주님에 의해서 새로 선택된 남은 자, 이 얼마나 중요한 개념인가? 그러나 오늘 교회는 제자훈련, 총동원 주일로 때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채찍의 하나님임을 잊지 말자!
(사 10:24)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시온에 거한 나의 백성들아 앗수르 사람이 애굽을 본받아 막대기로 너를 때리며 몽둥이를 들어 너를 칠지라도 그를 두려워 말라 (사 10:25) 내가 불구에 네게는 분을 그치고 노를 옮겨 그들을 멸하리라 하시도다 (사 10:26) 만군의 여호와께서 채찍을 들어 그를 치시되 오렙 반석에서 미디안 사람을 쳐 죽이신 것 같이 하실 것이며 막대기를 드시되 바다를 향하여 애굽에 드신 것 같이 하실 것이라 ◈ 이사야의 하나님은, 채찍의 하나님, 너와 나를 구별하는 임마누엘의 하나님, 양쪽 다 치시는 하나님 !!
7. 이사야 11-12장
* 이사야 11장은, 양발차기 주인공의 이야기인데, 그분이 누구인가?
(사 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 여기서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인데, 이새의 줄기라는 표현을 쓴 것은, 기존의 사울 왕 계열은 전혀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때 사울 왕 당시에 전혀 엉뚱한 이새의 줄기에서 다윗이 태어났듯이 말이다.
* 다시 말해서, 사울 왕을 작살내었던 그 차원에서 지금 아하스 왕을 사울 왕으로 취급하듯이 해서, 과거의 사울 왕을 박살내었듯이, 그렇게 하겠다는 표현이라는 것이다. 즉, 사울 왕에게 새로운 왕인 다윗이 무진장 핍박을 받았듯이, 지금의 새 왕이 또한 핍박을 받게 되어 있다는 말이다.
* 이렇게 이사야서에서 배울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닌데,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채찍을 가지고 먼저 앗수르와 애굽을 안 때리는가? 우리는 이것을 우선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왜 한국교회를 자꾸 치느냐고 하지만, 그러나 선지서가 있기에,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의 관점에서 이 세상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즉, 선지서가 괜히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정말 목사라고 한다면 그 선지자의 심정에서 채찍의 하나님을 소개해야지 않겠는가? '제가 가겠나이다' 라고 했다면, 그대로 전해야지 않느냐는 것이다. 새로운 교회에 가서 선보는 설교라도 그대로 쳐야지 않는가? 때리시는 하나님을 전해야지 않느냐는 것이다.
*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을 하는 데, 이것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태어난다는 말이다. 여호와의 신, 드디어 성령이 등장을 하는데, 이것은 에스겔과 같은 입장인 것이다. - (tape 17번 끝)
(사 11:2)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사 11: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사 11:4)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사 11:5)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 * 정말로 전쟁하는 솜씨하나는 끝내주는 하나님이시고, 주의 종들이 참으로 위로를 받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큰 곳에서 목회를 한다고 우대하지 않고, 작은 곳에 있다고 해서 무시하지 않는 하나님, 오직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몸의 띠를 삼으시는 하나님, 정말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가? - 좋으신 하나님 !!
* 믿음만 있다면 강원도 두메의 할머니가 훨씬 더 낫고, 칼빈보다 루터보다 못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은 다 아시는데, 그런데 왜 숨어 있는 고귀한 주님의 종을 그렇게 무시하는가? 무시를 안 했다고, 라고?
* 문제는 돈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를 않기에, 생명은 다같이 고귀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생명이 있는 사람은 똑같이 고귀하게 보는 것이다. 자기의 피가, 거기에 자기 사랑이 거기에 담겨 있기에 말이다.
◈ 해도 잠든 밤하늘에 나는 못난이 !!
* 오직 그 피의 사랑을 받은 사람만이 진짜이고, 그런 사람만이 진짜 하나님을 만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 내가 보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라. 오른 손이 하는 것 왼손이 모르게 하라. 눈과 귀 만드신 분이 다 보신다 !!
(사 11:6) 그 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사 11: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사 11: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하늘나라에 동물이 있느니, 없느니' 라고 하는데, 그러나 어린 송아지와 늙은 송아지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나라가 무슨 동물원인가?
* 이 말은 과거 가나안 땅을 회상하자는 것이다. '왜 약속의 땅을 이 지경으로, 왜 어린양과 이리가 함께 못 놀도록 하였는가?' 라고 책망하는 것이다. 과거의 이스라엘이 땅을 기초로 하고, 기존의 자연 창조물을 기초로 하는 약속의 땅의 이상형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 천국은 동물원이 아니다 !!
* 그래서 천국은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천국에서 오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에는 어린아이가 없다는 것이다.
* 11장 8절의 어린아이가 독사와 함께 논다는 것은, 이 본문은 정말로 모세의 율법대로 했다면, 이와 같은 유토피아가 있었다는 것이다. 즉, 천국이란 과거의 완전한 창조 모습을 유지했을 그때를 가지고 빗대어서 '오늘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라고,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약속의 땅은, 제대로 된 왕 하나 등장하면 된다 !!
* 인간이 엉망이 되고, 왕이 엉망으로 됨으로 말미암아서, 이 땅이 이 지경이 되었다면, 원래 약속의 땅으로 회복하는 길은 정말로 제대로 된 왕 하나 등장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 왕이 바로 이새의 줄기에서 등장하는 새로운 왕이라는 것이다.
(사 11:10)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 순(旬) - 이 이새의 뿌리에서 나온 싹이 스가랴에서는 김준곤이 도용(?)한 '순'으로 표현이 되는데, 스가랴와 이사야에서 순은 고난받는 모습으로서의 순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싹이 무엇을 하는가? 그것이 11-12절에 나온다. 이분이 이스라엘의 쫓긴 자를 모은다는 것이다.
◈ 순(旬) - 이스라엘의 쫓긴 자를 모은다 !!
(사 11:11) 그 날에 주께서 다시 손을 펴사 그 남은 백성을 앗수르와 애굽과 바드로스와 구스와 엘람과 시날과 하맛과 바다 섬들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 (사 11:12) 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하여 기호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의 쫓긴 자를 모으시며 땅 사방에서 유다의 이산한 자를 모으시리니
8. 이사야 13-19장
* 이제 이사야 13장을 살펴보자.
(사 13:1)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바벨론에 대하여 받은 경고라
* 지금까지 7장부터 11장까지는, 이스라엘에 대한 멸망의 경고이고, 이제 13장부터는 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이스라엘을 공격한 이방나라를 공격한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이방 나라를 공격한 근거가 무엇인가? 율법의 완성이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바로 '긍휼' 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 긍휼의 반대는 무엇인가? 교만이다. 교만으로 말미암아 망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만한 바벨론은 계명성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여기서 계명성이란, 하늘에서 독야청청 빛나던 그 찬란한 행세를 하던 바벨론을 묘사하고, 그 별이 드디어 떨어진다는 것이다.
(사 14:12)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사 14:13)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사 14:14)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사 14:15)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
* 계명성이란 별처럼 행세하던 그 바벨론을 의미하는데, 이 계명성인 바벨론을 마귀와 한 통속이라고 하면 동의하지만, 그러나 계명성만을 특별히 지칭해서 마귀라고 말하면 안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전부가 다 마귀가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이다.
* 또 계명성을 마귀의 이름을 '루시퍼' 라고 말들을 하는데, 그러나 여기서는 이런 이름을 가지고서 마귀를 논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비록 예수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어도 그 내용이 마귀인 인물이 한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행13:6). '바예수' 라는 이름이 있지 아니한가?
* 그런데 루시퍼라는 이름에 벌벌 떠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름이라면 좋은 것을 자기들이 다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경직은 이름을 좋은 것을 지으라고 말을 하는데, 그러나 조 다윗 등 마귀는 이름이 아니라, 그 내용으로 분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방나라들이 망하는 이유는 바벨론뿐만 아니라 전부가 다 교만으로 멸망한다는 것이다.
* 15장에 나오는 모압의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리고 16장 6절에서 모압의 죄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바로 교만인 것이다.
(사 16:6) 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심히 교만하도다 그의 거만하며 교만하며 분노함도 들었거니와 그 과장이 헛되도다
* 이방나라들이 망하는 이유가 이렇게 전부가 다 '교만'으로 비롯되었듯이,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왜 망하였는가? 이스라엘도 전부 하나님의 긍휼을 모르기에 망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 이름을 못난 교회, 쪼다 교회로 해야하지를 않겠는가? 물론 이름을 바꾼다고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 세상은 이렇게 바보가 안 되려고 교만하게 살려고, 왕성하게 살려고 한다는 것이다.
* 이것을 가지고 어떤 학자들은 출애굽의 재현이라고 하는데, 강팍함, 목이 곧은 백성이라는 것이다. 물론 동의를 하는데, 지금까지 출애굽 사건은 한번도 중단된 적이 없는 것이다.
*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목이 곧다는 것이다(신32장). 자기 백성이든 남의 백성이든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고 선악과를 따먹어야 하겠다는 심사, 하나님의 지혜를 몽땅 다 알아야겠다는 의지, 이런 것은 하나님께서 다 죽이신다는 것이다. 그냥 주시는 대로 감사하며 살면 아무 힘이 안 드는데 말이다. 욕심(=교만)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에 이른다는 것이다(약1:15). (사 16:12) 모압사람이 그 산당에서 피곤하도록 봉사하며 자기 성소에 나아가서 기도할지라도 무효하리로다
* 여기에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 나오는데, 아무리 피곤하도록 봉사하고 성소에서 기도해도 무효라는 것이다. 로마서 10장의,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열심을 내어도 퇴장이라는 것과 같은 맥락인 것이다. 열심 있는 봉사와 기도가 결국 교만을 유발하였다는 것이다.
* 그런데 한국교회 목사들은 무엇을 강조하는가? 서로간의 경쟁을 유발하여 최고의 목사로서 대우를 받으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이 바로 악마의 화신인데, 속에서 끓어오르는 탐심으로 자꾸 끌어 모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교회자랑, 목사자랑 등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 이사야 17장을 보면, 다메섹이 나오는데, 그 죄는 역시 교만이다. 특히 이스라엘을 핍박하는 것이다.
(사 17:1) 다메섹에 관한 경고라 보라 다메섹이 장차 성읍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무너진 무더기가 될 것이라 (사 17:2) 아로엘의 성읍들이 버림을 당하리니 양 무리를 치는 곳이 되어 양이 눕되 놀라게 할 자가 없을 것이며 (사 17:3) 에브라임의 요새와 다메섹 나라와 아람의 남은 백성이 멸절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영광 같이 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이사야 19장을 보자. 애굽이 나오는데, 이 나라는 우상숭배이고 신접한 자라는 것이다.
(사 19:24)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과 앗수르로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사 19:25)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을 주어 가라사대 나의 백성 애굽이여 나의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 지어다 하실 것임이니라
* 그런데 이 애굽이 나중에 돌아오는데, 이스라엘과 애굽과 앗수르를 몽땅(?) 나의 백성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제는 어느 나라에서든지 바로 그 곳에서, 이새의 줄기에서 돋은 싹에 의해서, 새로운 창조를 하시겠다는 표현인 것이다. 9. 이사야 20-28장
* 이사야 20장에는, 이사야의 그 유명한 팬티바람(?) 계시가 나온다. 3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돌아다니는 것이다. 이것은 애굽과 구스에 대한 예표와 기적으로, 벗은 몸으로 하는 것은, '너희들이 이렇게 포로로 잡혀간다' 라는 패배자의 모습을 앞당겨서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하여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사 20:1) 앗수르 왕 사르곤이 군대장관을 아스돗으로 보내매 그가 와서 아스돗을 쳐서 취하던 해 (사 20:2) 곧 그 때에 여호와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일러 가라사대 갈지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하시매 그가 그대로 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니라 (사 20: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종 이사야가 삼년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여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예표와 기적이 되게 되었느니라.
* 이사야 21장을 보자. 이 경고는 나중 요한 계시록에 다 나오는데, 소위 잘먹고, 잘살고, 무역을 많이 해서 이윤을 많이 남기는 나라들에 대한 경고라는 것이다.
(사 21:1) 해변 광야에 관한 경고라 적병이 광야에서 두려운 땅에서 남방 회리바람 같이 몰려 왔도다
* 이사야 22장은, 이상 골짜기에 대한 말씀이다.
(사 22:1) 이상 골짜기에 관한 경고라 네가 지붕에 올라감은 어찜인고 (사 22:2) 훤화하며 떠들던 성, 즐거워하던 고을이여 너의 죽임을 당한자가 칼에 죽은 것도 아니요 전쟁에 사망한 것도 아니며 (사 22:3) 너의 관원들은 다 함께 도망하였다가 활을 버리고 결박을 당하였고 너의 멀리 도망한 자도 발견되어 다 함께 결박을 당하였도다
* 자, 여기서 한가지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과거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에서 이방인들 추방하였다는 것이다. 사실은 군대장관이 그렇게 하였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사야에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용사가 되셔서 이스라엘이 못하였던 부분을 하신다는 것이다. 전 세계를 부수고, 허물고, 뽑을 자를 새롭게 뽑고, 이렇게 해서 반드시 약속대로만 해 나가신다는 것이다.
(사 22:12) 그 날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명하사 통곡하며 애호하며 머리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 하셨거늘 (사 22:13)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잡고 양을 죽여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도다
* 내일 죽을 것이니 지금이라도 회개하자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먹고 마시자고 하는데, 인간의 바로 타고난 모습이라는 것이다. 죽어도 자기 고집을 버리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 비유는, 바로 이렇게 미래를 아는 못난 돼지가 내일을 준비도 하지 않는 잘난 인간보다도 훨씬 더 낫다는 것을 보여주는 비유라는 것이다.
* 23장을 보면 두로가 나오는데, 이 나라는 상당히 잘 살았던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 정하셨기에 깨어진다는 것이다.
(사 23:1) 두로에 관한 경고라 다시스의 선척들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을찌어다 두로가 황무하여 집이 없고 들어 갈 곳도 없음이요 이 소식이 깃딤 땅에서부터 그들에게 전파되었음이니라 (사 23:8) 면류관을 씌우던 자요 그 상고들은 방백이요 그 무역자들은 세상에 존귀한 자이던 두로에 대하여 누가 이 일을 정하였느뇨 * 24장은 하나님이 자기 언약대로 시행하심인데, 이런 내용이 요한 계시록에도 나오는데, 마지막 재림 때에 다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25장도 계속해서 연결되는 것이다.
(사 24:5) 땅이 또한 그 거민 아래서 더럽게 되었으니 이는 그들이 율법을 범하며 율례를 어기며 영원한 언약을 파하였음이라 (사 24:23) 그 때에 달이 무색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그 장로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니라
◈ 이사야서의 특징 - 절망과 희망이 서로 교차하면서 진행된다 !!
* 이렇게 이사야서를 죽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아니고', '아니고' 라고 하면서도, 치는 바로 그 현장에 새로운 희망과 회복을 군데군데 던져놓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사야에 계속해서 이어진다는 것이다.
* 계속해서 26장을 보자.
(사 26:1) 그 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으로 성과 곽을 삼으시리로다
* 26장 19절에 보면 부활에 대해서 나온다. 그러면 왜 부활되는가? 그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만 유지되면 항상 부활은 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자동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믿으면 반드시 부활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신약에서는, 예수 안에 있으면 부활이고, 예수의 긍휼을 차버리면 지옥 갈 줄 알라는 것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사 26:19)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놓으리로다
* 27장에는 리워야단이 나오는데, 이때부터 뱀과 우상을 연관시킨다. 바다의 용을 죽이는데, 출애굽 상태를 연상케 하는 것이다. 이 뱀이 용이 내세우는 것이 이방 신을 앞장세우고 나타나는데, 이때부터 우상이라는 이야기가 계속해서 나온다는 것이다. 우상과 뱀과 관련을 시켜서 말이다.
(사 27:1)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 28장에 보면 에브라임을 언급하는데, 북 이스라엘에 관한 내용인 것이다. 즉, 유다가 타락한 것은 북 이스라엘의 영향을 받아서 같이 망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사 28:1) 취한 자 에브라임의 교만한 면류관이여 화 있을진저 술에 빠진 자의 성 곧 영화로운 관같이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세운 성이여 쇠잔해가는 꽃 같으니 화 있을진저 (사 28:7) 이 유다 사람들도 포도주로 인하여 옆걸음 치며 독주로 인하여 비틀거리며 제사장과 선지자도 독주로 인하여 옆걸음 치며 포도주에 빠지며 독주로 인하여 비틀거리며 이상을 그릇 풀며 재판할 때에 실수하나니
* 그렇다면 오늘날 목회자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 가짜로, 거짓으로 평안하다고 공갈치면 결코 안 된다는 것이다.
(사 28:14) 이러므로 예루살렘에 있는 이 백성을 치리하는 너희 경만한 자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지어다 (사 28:15) 너희 말이 우리는 사망과 언약하였고 음부와 맹약하였은즉 넘치는 재앙이 유행할지라도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리니 우리는 거짓으로 우리 피난처를 삼았고 허위 아래 우리를 숨겼음이라 하는 도다 (사28:18) 너희의 사망으로 더불어 세운 언약이 폐하며 음부로 더불어 맺은 맹약이 서지 못하여 넘치는 재앙이 유행할 때에 너희가 그것에게 밟힘을 당할 것이라 10. 이사야 29-36장
* 29장은 '아리엘(유다, 예루살렘)야, 네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라고 하는 이야기이다.
(사 29:1) 슬프다 아리엘이여 아리엘이여 다윗의 진 친 성읍이여 연부년 절기가 돌아오려니와 (사 29:2) 내가 필경 너 아리엘을 괴롭게 하리니 네가 슬퍼하고 애곡하며 내게 아리엘과 같이 되리라 (사 29:13)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 이 내용이 어디에 다시 나오는고 하니, 마태복음 15장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마15: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마15: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 이사야의 예언은 그때나 지금이나 계속이 되는데, 잘못된 하나님을 전파할 때는 언제나 계속된다는 것이다. 축복, 축복, 찬송하자, 복 주실 것이다 등, 이 따위 소리하는 놈은 전부 가짜라는 것이다.
(사 29:18) 그 날에 귀머거리가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서 소경의 눈이 볼 것이며 (사 29:19) 겸손한 자가 여호와를 인하여 기쁨이 더하겠고 사람 중 빈핍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 율법이란 항상 겸손히 자기 죄를 아는 것이고, 이렇게 긍휼과 채찍질하시는 심판의 하나님을 아는 것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 이제 이사야 30장을 보자.
(사 30:8) 이제 가서 백성 앞에서 서판에 기록하며 책에 써서 후세에 영영히 있게 하라 (사 30:9)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하는 자식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이라 (사 30:10) 그들이 선견자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정직한 것을 보이지 말라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 이사야서를 설교할 때, 우리는 이런 설교를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성경을 제대로 본 사람 같으면 절대로 사람을 좋게 할 수가 없고, 위로와 치유의 목회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선지자를 안다면 결코 사람을 좋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설교를 할 수가 없는데, 그것은 관심이 성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 가 있다는 것이다. 좋게 말해서 하루에 한 장씩 보는 성경이 지금 다른 곳에 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관심이 없는데, 전혀 목회에 도움이 안 되기에 말이다. 심방을 가서 써먹을 성경구절만을 달달 외우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부드러운 말, 아첨하는 말을 요구하는 것이다.
* 그러나 정말 사람을 좋게 하지 않는 말씀만을 제대로 전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경험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진짜 좋은 것 다 받았을 경우이기에, 다 잃어도 좋다고 하는 사람만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직한 것을 보이지 말라고 요구하는 장로들에게 뭐라고 해야 하겠는가?
* 이사야 31장에서 강조점은 무엇인가?
(사 31:1)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뢰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앙모치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거니와 (사 31:2)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그 말을 변치 아니하시고 일어나사 악행하는 자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를 치시리니 (사 31:3)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 손을 드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
* 말을 의뢰하고 병거를 의지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한국교회 목사들의 주특기가 아닌가? 하나님보다, 옥한흠, 홍정길을 더 좋아한다는 것이다.
* 그래서 백성들은 망하는 길을 자초하는데, 자꾸 사람을 의존한다는 것이다. 노회나 총회에서 정치적으로 힘있는 사람을 의지하고, 결코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고, 엉뚱한 놈을 찾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애굽이라든지, 육체, 병거, 마병 등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 32장 15절을 보니, 하나님은 성신을 주신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것으로 족한 줄 알아야 하고 말이다. 그렇지 않는가? 성신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다는 말인가?
(사 32:15) 필경은 위에서부터 성신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삼림으로 여기게 되리라
* 이사야 34장을 보자. 열국에 대한 진노이다.
(사 34:2) 대저 여호와께서 만국을 향하여 진노하시며 그들의 만군을 향하여 분내사 그들을 진멸하시며 살육케 하셨은즉 (사 34:16)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
* 이사야 36장은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준다.
(사 36:6) 보라 네가 애굽을 의뢰하도다 그것은 상한 갈대지팡이와 일반이라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손에 찔려들어가리니 애굽 왕 바로는그 의뢰하는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 (사 36:7) 혹시 네가 내게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의뢰하노라 하리라 마는 그는 그의 산당과 제단을 히스기야가 제하여 버리고 유다와 예루살렘에 명하기를 너희는 이 제단 앞에서만 경배하라 하던 그 신이 아니냐 하셨느니라
* 하나님은 아하스 왕의 역사를 끄집어 내놓고 작살내시더니, 이제 36장에서는 히스기야 왕의 역사를 끄집어 내놓고, 어떻게 심판 가운데 남은 자를 건져내는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히스기야가 어떠한 경우에만 살아났는가? 여호와께만 도움을 구했을 경우에만 살았다는 것이다.
* 그런데 히스기야가 까불고 자랑을 하다가 몽땅 다 빼앗기고 마는데, 지금 여기서 주님이 지켜보고 계신데 어디 가서 자꾸 도움을 구하려고 하는가 말이다. 주님께 기도하면 되는데 말이다.
◈ 우리의 기도 - 주여, 제 목숨 바치려고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 그래, 네 목숨 바쳐라 !!
* 이사야서가 보여주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심판하는 가운데서도 항상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남은 자는 여전히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사야의 심판과 긍휼이 신약에서는 예수님을 통해 그대로 이루어진다. 예수님은 무서운 분 틀림없는데, 그러나 주 예수께 정말로 피 없이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그런 사람만이 예수의 종이 되는 것이다.
◈ 목사나 집사로 살지 말고, 오직 예수의 증인으로 살게 하옵소서 !!
11. 이사야 37-48장
♣ 앞부분의 총 정리 ♣
* 이사야 선지자와 같이 역사에 있어서 두 극단을 체험한 자도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남쪽 유다나 북쪽 이스라엘의 가장 국력이 신장한 시대를 통과하였는데, 그가 예언활동을 했던 무렵은 두 국가의 영웅들이 죽은지가 얼마 되지도 않았던 시기였던 것이다(남:웃시야 왕이 죽었고, 북:여로보암 2세가 죽었던 이후였다). 국내적으로는 통치권에 공백이 있었고, 대외적으로 돌아가는 그 분위기는 앗수르의 디글랏빌레셀이 출현하여 바벨론과 시리아를 정복할 채비를 하고 있었던 시기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변에 정치적 힘의 균형에 변화가 생길 조짐이 엿보이던 때였다는 것이다.
* 이것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태평성대를 누리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양상에 접어들게 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가장 안일했던 시기에서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시기로 변한 것이다. 이런 시대적 상황을 해명해 주어야 할 필요성이 절실히 요청되던 시기였다.
* 여기서 우리는, '① 과연 왕의 존재 의미가 무엇이며, ② 특별히 하나님께서 유다지파를 선택하여 영원히 왕의 지파로 고정시키신 약속이 이러한 정국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는 점을 살펴보고자 한다는 것이다.
*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보내는 선지자를 통해서 자신의 본심을 분명하게 알릴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사 6:1-3). 그래서 현재 이스라엘이 알고 있는 하나님관과 언약에 대한 인식을 수정해야 할 필요를 알려주어야 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과 왕과 다윗 언약을 새롭게 하는 길만이 이스라엘이 처한 위기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 백성들에게 극도의 사치를 안겨 주었고, 소위 능력이 있다고 인정이 되었던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계시하는데, 그것은 곧 거룩이란 말로 표현이 된다는 것이다. 그 거룩과 영광과 위엄은 이사야로 하여금 성전이 가지고 있는 최후의 경지를 말해주고 있고 도달점을 나타내 준 것이 되었다. 이사야는 그 성전의 모습에 압도되었고, 그리고 그 보좌 앞에서 자기 자신을 살피게 되었다는 것이다.
* 거기서 발견한 것은 자기 자신의 부정이었는데, 이런 추함에 대한 하나님의 조치는 너무나 당연한 불같은 화요, 영원한 멸망뿐임을 실감나게 느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선지자의 경험은, 불법과 불의가 충만한 세상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공평한 심판이 어떤 차원에서 수행되는가의 기준이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 율법이니 다윗 언약이니 하는 그 모든 것이, 인간 입장에서의 해석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이라는 입장에서 재해석되어야 본래의 의도를 밝힐 수가 있는데, 그 취지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위해 언약을 남겼으며, 그 언약 본래의 의도를 이루기 위해 인간에게 기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하신 그 분을 위한 언약임을 알려 주고 있는 것이다.
◈ 언약이란, 인간과의 만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한 인간과의 만남을 위함이다 !!
* 결국 언약이란, 인간과의 만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한 인간과의 만남을 위함이라는 것이다. 특히 이사야가 이 진리를 전할 때, 그것을 수용하는 자들은 이사야가 경험과 같이 거룩하기 때문에 남은 자가 아니라, 불로서 정화될 자로서 남은 자들인 것이다. 물론 이것은 현 시점이 아니고 미래에 이루어 질 일이고 말이다.
* 여하튼 언약의 제공은, 하나님의 선택이 결코 인간이 이미 소유하고 있는 조건들을 거절하며, 오직 하나님의 자의적인 선택이 아니면 하나님이 주시겠다는, 그 언약의 복도 위와 전혀 상관없음을 인지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 그 한 예로, 이사야 7장에서 이스라엘과 아람 연합군이 유다를 치고자 하는 일 가운데서 밝혀지게 되는데, 그런데 이들이 치고자 하는 것은 유다 왕 아하스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유다의 왕 아하스가 아니라 이사야의 아들 스알야숩이라는 것이다.
(사7:3)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 스알야숩이란 뜻은 남은 자가 돌아 올 것이라는 의미인데, 그러면 어떤 경로를 통해서 남은 자가 돌아온다는 말인가? 그것은 기존의 왕들이 알고 있는 다윗 언약관을 징벌하고 부정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 7장 11절에서, 이사야가 아하스를 찾아가서 하는 말을 보자.
(사 7:11)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서든지 높은 데서든지 구하라
* 이때 아하스 왕이 하는 말을 또한 보자.
(사 7:12) 아하스가 가로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 결국 여기에서 이사야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윗과 언약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아하스 왕이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과 무관함으로, 아무리 징조를 구해도 징조가 나타날 리가 없는 것이다. 즉, 현 유다나라 왕 체계와 혈통은 아하스가 어떻게 생각을 하든지 다윗의 가문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기준은 이사야가 웃시야가 죽던 해에 성전에서 보았던, 그 거룩한 하나님 입장에서 볼 때 그러하다는 것이다.
◈ 이사야가 보여주는 것 - 다윗 언약은 스알야숩으로 전수되어 보존되고 유효하다는 점이다 !!
* 그렇다면 하나님이 다윗과 맺은 그 언약은 인간 왕의 부족으로 인해서 취소된다는 말인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다윗 언약은 스알야숩으로 전수되어 보존되고 유효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사야서라는 것이다.
* 7:13-17 절에 보면 다음과 같다.
(사 7:13) 이사야가 가로되 다윗의 집이여 청컨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게 하고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서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로우시게 하려느냐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사 7:15)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에 미쳐 뻐터와 꿀을 먹을 것이라 (사 7:16)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너의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폐한바 되리라 (사 7:17) 여호와께서 에브라임이 유다를 떠날 때부터 당하여 보지 못한 날을 너와 네 백성과 네 아비 집에 임하게 하시리니 곧 앗수르 왕의 오는 날이니라
* 이사야가 보았던 그 하나님의 거룩함을 다룬 징조는 무엇인가? 즉, 너의 하나님과 나의 하나님을 나누는 역할을 하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서 그 아기가 하나님의 거룩을 보이는 이 사건을 통해서 다윗 언약을 성취시킨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약속은, 이름 없는 비천한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는 천대받는 아기를 통해 성취하신다 !!
*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은 왕족이라는 거창한 가문을 따라서 언약, 즉 다윗 언약을 완성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름 없는 비천한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는 천대받는 아기를 통해 성취하신다는 것이다. 즉, 미래에 있게 될 다윗 언약은 인간들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은 전적으로 다 배제하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달성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항상 기억해야 될 것은, 홍해의 갈라짐이 인간의 의사가 반영된 것이 아니라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의 능력에만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
* 이런 면에서 볼 때, 앗수르의 침범은 임마누엘의 성격을 보이게 하는 수단이 되며(10:24),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택된 남은 자들이 어떤 식으로 돌아오는지를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10:20-22).
(사 10:20)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 자기를 친 자를 의뢰치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니 (사 10:21)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사 10:22)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훼멸이 작정되었음이라
* 기존의 이스라엘이라고 자처한 자들이 그 임마누엘 때문에 당황하게 되고 파멸되며(8:15), 오히려 말씀 권밖에 있기에 흑암과 고통의 이방지역이 복음지역으로 달라지고 빛이 비쳐 나온다는 것이다(9:1-4). 다윗 반열은 그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9:7).
(사 9:1)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사 9: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시리라
* 그래서 현 이스라엘과 유다를 애굽으로 간주하고, 그 가운데 남은 자들이 새로이 이스라엘이 되어 다윗의 나라를 구축하게 된다는 것이다(9:13-21, 11:1, 11:16).
(사 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사 11:16) 그의 남아 있는 백성을 위하여 앗수르에서부터 돌아오는 대로가 있게 하시되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게 하시리라
* 따라서 임마누엘 기능은, 현 이스라엘로부터 참된 이스라엘을 분리해 내는 기능이며, 현 이스라엘을 심판하고 정죄함으로 그 작업을 이행하여, 출애굽 때에 애굽을 심판한 것과 같이하게 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명확히 규정하기 위해서 백성이 아닌 자를 백성으로 삼으심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란 바로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이 여호와께 대한 죄책으로 간주하는 자에게는 누구에게나 다 해당이 되는 시기가 온다는 것이다.
(사 19:24)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과 앗수르로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 다시 말해서, 다윗 언약이란, 임마누엘로 말미암아서 다시 전 세계를 통치하는 시대가 오면, 그때는 전 세계는 여호와의 천지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사 11:9)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 이때에 창조도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이다(이사야65:17, 45:7-13, 45:18, 48:12).
(사 45:18) 여호와는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땅도 조성하시고 견고케 하시되 헛되이 창조치 아니하시고 사람으로 거하게 지으신 자시니라 그 말씀에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사 48:12) 야곱아 나의 부른 이스라엘아 나를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마지막이라 (사 65: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 할 것이라
* 이 새로운 창조는 새로운 여호와의 종을 중심으로 일어나는데, 그얼다면 새 창조에 대한 언약적인 근거는 무엇인가? 과연 먼저 있었던 언약 가운데 창조가 두 번 일어난다는 대목이 있었던가? 그런데 이사야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새 창조를 강하게 주장하는 것인가? 옛 질서를 하나님께서 스스로 파괴하시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 이유는 64:6-9에 나와 있는 대로, 죄를 정화한다는 차원에서 의의 창조에 따른 후속 조치라는 것이다(45:8).
(사 65:6) 보라 이것이 내 앞에 기록되었으니 내가 잠잠치 아니하고 반드시 보응하되 그들의 품에 보응할지라 (사 65:7) 너희의 죄악과 너희 열조의 죄악을 함께 하리니 그들이 산 위에서 분향하며 작은 산 위에서 나를 능욕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먼저 그 행위를 헤아리고 그 품에 보응하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사 65:8)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포도송이에는 즙이 있으므로 혹이 말하기를 그것을 상하지 말라 거기 복이 있느니라 하나니 나도 내 종들을 위하여 그 같이 행하여 다 멸하지 아니하고 (사 65:9) 내가 야곱 중에서 씨를 내며 유다 중에서 나의 산들을 기업으로 얻을 자를 내리니 나의 택한 자가 이를 기업으로 얻을 것이요 나의 종들이 거기 거할 것이라 (사 45:8) 너 하늘이여 위에서부터 의로움을 비 같이 듣게 할지어다 궁창이여 의를 부어 내릴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내고 의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
*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이사야의 계시의 흐름은 유다를 움직여서 이방인들에 대한 여호와의 통치의 정당성까지 확보하는데 이르는 것이다. 그 통치는 유다와 마찬가지로 심판으로 작용되는데, 그 심판 행위 뒤에는 새로운 세상의 창조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새 창조질서에 따른 언약적인 근거는 의의 창출인데, 즉, 새 언약이 완성을 보게 된 데에 대한 마땅히 주어진 결과라는 것이다.
* 이 흐름을 좀더 살펴보게 되면 먼저, 1)유다의 실책에 대해 나온다.
① 자기를 양육하신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1:3), ② 헛된 제사를 드린 것(1:13-14), ③ 우상 숭배하는 것(2:20),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것(5:23) 등으로 나타난다.
* 이렇게 유다의 실책에 대해서 지적하고 난 뒤에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나온다.
2) 자신의 영광을 웃시야 죽던 해에 이사야를 통해 자신의 영광을 공개하시고(이사야 6장), 3) 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7장 이후 심판을 가하시고 그 가운데 남은 자를 골라내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의 흐름인 것이다.
* 그 남은 자를 가려내는 징조로서 임마누엘이 나타날 것이다(7:14). 또 임마누엘은 참된 남은 자를 버림받은 땅에서 찾게 될 것이다(9:1-7). 또한 그들의 주가 될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이스라엘은 징벌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9:12).
* 비 율법적인 이스라엘에 대한 징벌은 앗수르를 통해 이루어지는데(10:5-7). 그리고 그 징벌에 가담한 앗수르도 같은 기준에 의해 징벌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10:12-15). 이 점은 모든 나라가 여호와께서 책임을 져야 될 입장에 있음을 말해 준다는 것이다. 그런 공의로 인한 징벌의 와중에서 비로소 남은 자의 모습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사 10:20)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 자기를 친 자를 의뢰치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니 (사 10:21)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사 10:22)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훼멸이 작정되었음이라 (사 10:23) 이미 작정되었은즉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
◈ 제 2의 출애굽 - 진정한 왕의 군림은 바로 남은 자와 관련을 지으며 역사 속에 나타나신다 !!
* 그 남은 자가 기대하는 약속은, 다윗 언약의 회생에 대한 것이다(11:1-15). 진정한 왕의 군림은 바로 남은 자와 관련을 지으며 역사 속에 나타나시는데, 이것이 바로 제2의 출애굽이라는 것이다 !!
(사 11:16) 그의 남아 있는 백성을 위하여 앗수르에서부터 돌아오는 대로가 있게 하시되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게 하시리라
* 이사야에서의 다윗 언약은 창조언약(?)의 성취를 포함하고 있는데, 진정한 안식을 이 언약이 이루어 준다는 것이다. 진정한 안식을 이 언약이 이루어 주는 것이다(12:1-6). 그리고 이러한 미래를 위해서 앞서 이루어질 행위는 언약적인 기준에 의한 단호한 심판이라는 것이다.
* 바벨론, 블레셋, 모압, 구스, 애굽, 에돔, 아라비아, 두로 등, 이런 이방 나라들에 대한, 창조가 가지고 있는 공의적 차원에서의 심판은, 결국은 다윗 언약의 완성이, 곧 창조언약의 완성과 같이 이루어짐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묵시적인 모습으로 심판이 진행되는 것은(24:3,21,23/25:11/26:5,14/27:1), 역사 이전부터 계획된 하나님의 의중이 비로소 역사 안으로 노출됨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서의 구원도 시온을 중심으로 하여 다윗 언약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사 28:16)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 이것은 지금의 예루살렘은 무너져야만 하는데(29:1,5), 그러나 아브라함 언약은 이스라엘을 회복케 한다는 것이다.
(사 29:22)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구속하신 여호와께서 야곱 족속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야곱이 이제부터는 부끄러워 아니하겠고 그 얼굴이 이제부터는 실색하지 아니할 것이며
* 그러나 이러한 미래상을 알지 못하는 현 유다는 애굽을 의지하는 범죄를 저지르는데(30:3, 31:1-3), 그들은 애굽 대신에 진정한 왕과 성신과 여호와의 나타남을 고대해야 하는 것이다(32:1, 33:17, 32:15, 33:21-22).
(사 30:3) 그러므로 바로의 세력이 너희의 수치가 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함이 너희의 수욕이 될 것이라 (사 33:22)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오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자시오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니라
* 바로 이러한 기다림에 마음을 둔 남은 자를 중심으로 새로운 최후의 심판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사 34:8) 이것은 여호와의 보수할 날이요 시온의 송사를 위하여 신원하실 해라
* 천지가 사라져도 그 사라진 자리에는 새로운 천지가 주어진다는 것이다(35:1-10).
(사 35:4) 겁내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굳세게 하라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수하시며 보복하여 주실 것이라 그가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사 35:10)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
* 이 예언이 있은 후 히스기야 왕 14년에 앗수르가 유다를 공격하는데, 여기서 이사야는 이스라엘에 있어 왕의 의미를 재확인한다는 것이다. 왕, 즉, 여호와의 종과 이스라엘의 구원의 관계는 히스기야의 기도처럼 이스라엘을 위한 중보의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 38:9) 유다 왕 히스기야가 병들었다가 그 병이 나을 때에 기록한 글이 이러하니라 (사 38:14) 나는 제비 같이 학 같이 지저귀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나의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압제를 받사오니 나의 중보가 되옵소서
* 여기서 제대로 중보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중보자, 즉, 왕을 고대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언의 내용이 역사 속에서 어떤 절실성으로 만남이 이루어지는가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왕이 회개를 할 때는 적이 물러갔으나, 그러나 히스기야가 자기의 가진 것들에 기대를 걸때는 유다를 바벨론으로 포로를 잡혀가게 했다는 것이다.
(사 39:4) 이사야가 가로되 그들이 왕의 궁전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그들이 내 궁전에 있는 것을 다 보았나이다 내 보물은 보이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나이다 (사 39:5)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왕은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사 39:6)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 여기서 이스라엘은 출애굽 이전 상태로 돌아가 버린 셈인데, 그들에게는 새로운 약속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약속은 창조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약속이라는 것이다(40:12-26). 그러나 그 하나님이 바로 이스라엘을 조성하고 선택하여 불러낸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사 40:12) 누가 손바닥으로 바다 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재었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명칭으로 산들을, 간칭으로 작은 산들을 달아보았으랴 (사 40:26)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사 40:27)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사 40: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사 40:29)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사 40: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사 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 여호와는 새로운 출애굽에 앞서 새로운 선택과 새로운 이스라엘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 41:9)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 바벨론의 고레스 왕이 메시야 역할까지 !!
* 여호와께서는 이제 역사를 다루어 왔던 그 선택적인 특별한 언약 방식을 전세계에 적용하게 되는 것이다. 즉, 새로운 이스라엘은 이제 창조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구속에 관여한 그 방식을 빌어서 탄생되는데, 이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기 위해서 애굽과 구스와 스바를 속량물로 이용을 하고, 더 나아가서 바벨론의 고레스 왕이 메시야 역할까지 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 43: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사 45:1)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왕의 허리를 풀며 성 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고레스에게 이르기를
◈ 이스라엘 속에 자신의 형상 대신에 여호와의 형상을 담도록 !!
*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조성하시되, 그 이스라엘 속에 자신의 형상 대신에 여호와의 형상을 담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사 44:24)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조성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홀로 하늘을 폈으며 땅을 베풀었고
* 이스라엘을 잡아간 바벨론이 오히려 도망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 43:14) 너희의 구속자요 이스라엘의 거룩한자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위하여 내가 바벨론에 보내어 모든 갈대아 사람으로 자기들의 연락하던 배를 타고 도망하여 내려가게 하리라
* 하나님은 이제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의(義)로 다스려 나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사 45:8) 너 하늘이여 위에서부터 의로움을 비 같이 듣게 할지어다 궁창이여 의를 부어 내릴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내고 의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 (사 45:9)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자로 더불어 다툴진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를 대하여 너는 무엇을 만드느뇨 할 수 있겠으며 너의 만든 것이 너를 가리켜 그는 손이 없다 할 수 있겠느뇨 (사4 5:13) 내가 의로 그를 일으킨지라 그의 모든 길을 곧게 하리니 그가 나의 성읍을 건축할 것이며 나의 사로잡힌 자들을 값이나 갚음 없이 놓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느니라
* 이 의(義)로 말미암아서 이스라엘은 계속 이스라엘로 지탱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창조의 능력을 지녔기 때문인데(45:8), 또한 그 의로 구원을 이룬다는 것이다.
(사 45:22)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
* 이러한 의의 등장은, 역사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남은 자의 가치를 깨닫게 한다는 것이다(46:3-7).
(사 46:1) 벨은 엎드러졌고 느보는 구부러졌도다 그들의 우상들은 짐승과 가축에게 실리웠으니 너희가 떠메고 다니던 그것은 피곤한 짐승의 무거운 짐이 되었도다 (사 46:3) 야곱 집이여 이스라엘 집의 남은 모든 자여 나를 들을지어다 배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품기운 너희여 (사 46:4)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
* 이러한 차원에서 바벨론에서의 구출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47:1-15).
(사 47:1) 처녀 딸 바벨론이여 내려 티끌에 앉으라 딸 갈대아여 보좌가 없어졌으니 땅에 앉으라 네가 다시는 곱고 아리땁다 칭함을 받지 못할 것임이니라 (사 47:15) 너의 근로하던 것들이 네게 이같이 되리니 너 어려서부터 너와 함께 무역하던 자들이 각기 소향대로 유리하고 너를 구원할 자 없으리라
* 뿐만 아니라, 현재 이스라엘도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베푸시기 때문에 말이다(48:8-13). 그 새로운 일이란 다름이 아닌 여호와의 종이 하실 일로서(49:5-7), 그 종이 새로운 언약으로 등장된다는 것이다(49:8-13).
* 아가페 사랑은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의 결과이고, 헤세드 사랑은 선택 그 자체라는 것이다. 이유 없는 사랑인 것이다. 발을 씻기는 것은 성화의 과정이 아니라, 요한복음 13장에서 발을 씻기는 사랑은 끝까지 사랑한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즉, 선택을 강조함인 것이다.
*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은, 사랑이란 인간 자체의 사랑을 말하는 게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은사로, 은혜로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것이다.
* 따라서 그 사랑은 믿음의 최고 열매로 오기 때문에 믿음, 소망, 사랑은 늘 영원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중에서 제일은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제발 인간들의 친절과 봉사와 미소 같은 것을 그런 사랑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하는 것이다.
* 이사야 9장 이후의 세계는 아기로부터 정복을 당하는 세계이고, 그리고 이사야 8장 8절이 펼쳐지는 세계라는 것이다.
(사 8:8)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창일하고 목에까지 미치리라 임마누엘이여 그의 펴는 날개가 네 땅에 편만하리라 하셨느니라
* 성경신학의 주제는, 하나님 형상으로 전 세계를 덮어버리는 세계이고, 그것을 심판으로 덮어버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덮어버리는 세계이고, 인간의 나라를 파괴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나라로 덮어버리는 세계라는 것이다.
◈ 성경신학의 주제 - 하나님의 형상으로 전 세계를 덮어 버리는 세계 !!
* 인간이 하늘나라 갈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간음한 여자가 잡혀왔는데, 그런데 왜 그 여자는 가지를 않는가? 심판 주에게 심판을 받아야 하기에 안 간다는 것이다. 내가 죄인이기에 마땅히 심판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 요한복음 8장 32절에서, 진리가 자유케 한다는 것은, 나는 당연하게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화나 율법개념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나에게 대해 더 이상 기대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오직 긍휼만 바라보는 상태라는 것이다.
◈ 이사야는 바로 임마누엘적 사고방식이다 !!
* 이사야는 바로 임마누엘적 사고방식인데, 뭔가 이제 새로운 일의 시작됨이라는 것이다. 이사야가 본 그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한 사람은 작살나고 말이다. 6장, 7장, 8장, 9장에서 이미 이사야서가 다 뚫린다는 것이다.
* 이사야 11장은 이새의 줄기(=다윗 언약)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 11:6) 그 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사 11: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사 11: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 이 부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새로운 세계를 회복하는데 에덴동산이 다시 오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통일교의 회귀사상이 아니고, 앞의 세계를 창조 때의 은혜의 세계를 가지고서 이렇게 표현했다는 것이다. 앞으로 올 세계를 창조 때의 언어로서 표현했다는 것이다.
* 젖 먹는 아이 ! - 이것을 두고서, '천국에 어린아이가 있어요? 노인도 있어요? 휴거 된 때의 나이로 사는 것인가요? 엄마, 아빠, 어린이, 노인, 삼촌이 있나요?' 라고 질문하는 자들이 있는데, 이런 것에 대해서 신학자들은 이야기할 가치가 없다고 언급을 안 한다. 천국은 고참이라든지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이다. 자아라는 것도 예수님의 형상에서 새롭게 창조되고 말이다. 어린아이도 없고, 장가가는 것도 없고, 천사같이 된다는 것이다.
* 이것을 이근호는 개인적으로 그냥 상징으로 보고 싶은데,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가지고서, 이 표현은 현재의 이스라엘의 상태를 공격한다는 것이다. '왜, 창조 때의 모습이 지금 너희들 속에는 없는가? 즉, 출애굽의 은혜가 없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왜, 아이와 같은 순전함이 없는가?' 라고 말이다.
* 도대체 이사야는 무엇 때문에 새 창조를 강하게 주장하는 것인가? 이 심판의 행위 뒤에는 새로운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나라는 다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 그리고 유다의 실책에 대해서 나오는데, 웃시야 왕이 죽고 난 뒤에 하나님은 이사야에게만 자신의 영광을 전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전하는 이사야는, '너희는 원래 멸망 받아야 될 대상이다' 라는 것을 확인을 해줘야 하는데, 이것이 남은 자를 가려내는 징조라는 것이다.
* 버림받은 자의 땅에서 새로운 남은 자의 등장은, 모든 나라는 다 망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징벌의 와중에서 초점은 다윗 언약의 회생에 있다는 것이다.
◈ 다윗언약, 다윗언약, 다윗언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