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안
글쓴이 집수리오형제
날씨라는 것이 변덕을 부리기로 작정한다면 아무리 뛰어난 신력을 지닌 신관이라도 예측하기가 어려울거다. 어제는 그렇게 덥더니만, 유난히 거슬리는 소리 때문에 눈을 비비며 창 밖을 바라보니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다. 아직 피곤해서 더 자고 싶은데, 이럴 때는 귀가 너무 밝은게 조금 흠이란 말이지. 톡톡 울려퍼지는 물방울 소리를 듣다보면 청아한 느낌보다는 은근히 신경질을 돋구는 일 밖에 되지 않으니까.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엄마 손에 질질 이끌려서 나갔던 생각이 문득 떠오른다. 엘프들은 대자연이 창조해낸 아름다운 현상들 중에서 생태계의 순치를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이 비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엘프들에게는 봄비가 오는 날 잠시동안 두 팔을 펴고 빗물을 맞는 전통이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런 전통 따위 시덥잖게 여기고 있다. 내 몸 위로 떨어지는 낯설고 축축한 액체가 어째서 기분 좋다고 반기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 없으니까. 아 뭐, 따뜻한 날이 좋긴 하지만 꽃들이 무럭무럭 잘자라려면 이렇게 비도 오긴 해야겠지. 언뜻 보기에도 빗줄기가 통통하고 실한게 아무래도 장대비인 모양이다. 침실 벽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유리창, 밖에서는 안쪽이 보이지 않는 구조라서 안심할 수 있어도 이렇게 쳐다보다 보면 왠지 침범당하는 기분이 든다. 예쁜 제이 모습 보고 싶어서 이렇게 유리 위에 달라붙는건지도 모르겠다. 훗, 예쁜건 알아가지고. 눈을 돌려 제이를 보니 아니나 다를까. 어제는 다행히 제이가 너무 피곤해해서 정말 손만 잡고 잤는데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다.
잘 때 몸 위에 무엇을 걸치는 것은 혈액순환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건강을 위해서 벗고 자야한다는게 그녀의 지론이다. 물론 매일같이 음흉하게 웃으면서 나에게도 그것을 강요하지만 그 의도를 진작에 알아차리고 있기에 미소로 거절하지.
"사랑스러워."
괜히, 그 것도 자의가 아닌 어떠한 외부적 자극에 의해 잠이 깨면 주변의 존재를 괴롭히고 싶어지는건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바라보기만 해도 나를 매혹시키는 구릿빛 피부 위에 탄력있는 볼살은 손가락으로 찔러보고픈 욕구를 무럭무럭 키워낸다. 침대에 엎드려서 베개를 으스러져라 껴안고 있는 그녀의 볼을 콕콕 찌르며 나는 웃었다. 얇게 패였다가 빠르게 탄력을 되찾는 제이의 볼은 은근히 중독성이 있다. 그래도 일어나지 않자 난 매끄러운 곡선을 타고 그녀의 목을 살살 간지럽혀보았다.
".....!"
순간 머리에서 번뜩이는 생각이 있었다. 나는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 한시라도 빨리 제이에게서 도망쳐야 한다. 자칫하면 비좁은 새장 속에서 목을 옭아매는 사슬의 고통 때문에 날개를 퍼덕거리는 가여운 파랑새와 다를 바 없어지기 때문이다. 바보같이, 감상에 젖어서 그렇게 중요한 사실까지 잊어버리다니! 조심조심 침대에서 빠져나와 방문을 향해 숨죽여 걸어가는 내 모습은 영락없는 도둑고양이의 형상이다. 그리고 제이의 중력마법에 걸려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는 것도 응징 당하는 도둑고양이 형상이다.
"...어디 가?"
목소리는 졸음이 뚝뚝 묻어나오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 것은 내게 공포로 각인되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서 짧은 순간이나마 눈 앞에 하얀 섬광이 일어나는 환영마저 보였다. 대답을 하긴 해야겠는데 목이 메어 도저히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목을 턱 부여잡고 침을 꼴깍삼키니 입이 벌어진다.
"무, 물 떠주려고..."
"안 마르니까 조용히 이리와서 앉아."
몸도 일으키지 않고 조금전 내가 앉았던 자리를 손으로 툭툭 두드리며 날 부르는 제이. 난 속으로 피눈물을 되삼키며 나의 아둔함을 저주했다. 다리에 힘이 쫘악 풀려버리는 바람에 나는 비적비적 걸어와 조심히 주저 앉았다. 그러자 제이는 천사 같이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나는 서슴없이 노출되는 제이의 가슴을 보곤 움찔했다. 가슴이 아렸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가슴 속에 뭉클한 감정이 샘솟고 내 신체 모든 곳곳으로 뻗어나가 형언할 수 없는 쾌감을 안겨준다. 심지어 졸린 눈을 비비며 하품하는 제이의 모습조차 나를 반하게 만들어 버린다.
"헤에, 비가 오고 있네?"
"아 맞다! 나 어제 나무 심으러 가는거 깜빡했잖아. 어쩐지 하루종일 찜찜하더니만. 빨리 묘목 가지고 나가야겠다. 아하하하."
내가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뜻으로 이마를 탁치고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제이는 내 팔을 잡았다. 여전히 입이 찢어져라 하품하는 그녀지만 굉장한 악력으로 내 팔을 짓누르고 있었다. 등 뒤에 서늘한 기운이 알싸하게 맴돌더니 이제는 몸이 완전히 굳어버려 말을 듣지 않는다.
“앉아.”
“넵.”
내가 힘이 있나 뭐가 있나. 나는 고분고분 말을 듣기로 작정하고 다시 침대에 주저 앉았다. 잠에 흠뻑 젖어든 제이의 눈동자는 여전히 희미했다. 하지만 그 루비빛 눈동자에서는 서서히 달아오르는 무언가가 일렁이고 있다.
“비 오는 날에는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다. 그치이?”
"아니, 나는 묘목을..."
내 허리에 감겨오는 제이의 강인한 팔. 평소에는 한없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팔이지만, 지금은 마치 냉랭한 느낌의 뱀의 피부 같다. 나는 제이의 품 안에서 경련하고 있는 한낱 청개구리와 다름 없다. 제이는 아무 말도 없이 날 바라보고 있지만 게슴츠레한 눈동자는 대답을 강요하고 있었다. 머릿속에 위험신호가 끊임없이 울려도 난 무력하다.
"비 오는 날에는 의욕이 전혀 나지 않아. 그냥 시드만 옆에 있으면 돼."
제이는 농염한 미소를 짓더니 곧 입술로 날 덮쳐와 뒤로 눕혔다. 결국 이렇게 무너지는건가. 제이에게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이상한 버릇이 있는데 비오는 날을 싫어해서 그 날은 특히 게을러진다는 것이다. 평소에도 게으른 제이지만 비가 왔다하면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아서 나는 온종일 시중 노릇을 해야한다. 그리고 그것을 핑계삼아 하루종일 나에게 딱 달라붙어 떨어질 줄을 모른다. 그런데 그 사실을 몸소 체험한 적도 적지 않건만 매번 잊어버리는 내 학습능력이 원망스럽다.
"왜 그런 표정을 지어? 나를 이렇게 만든게 누군데에."
주저없이 말하곤 내 잠옷 단추를 하나 둘 풀어내린다. 살짝 드러난 내 가슴을 혀로 핥더니 점점 입술로 올라 와 내 입을 완전히 덮어버렸다. 단호한 그녀 앞에 체념은 스르르 사라져버렸다. 짜릿짜릿한 그녀의 숨결은 내 정신마저 희석시키고 결국엔 잠자는 야성까지 일으켜세웠다. 그녀를 이렇게 만든게 누구냐는 질문, 그건 나니까.
"시드가 불 질렀잖아."
제이의 눈빛은 무언지 모를 감정에 젖어들어 음란하게 보였다. 내 입은 그녀의 입술을 뒤덮고 그녀는 신음소리를 흘리며 날 껴안았다. 그리고 나는 제이가 원하는대로, 내 욕망이 이끄는대로 아낌없이 사랑을 나눠주었다.
아침 내내 무리한 탓에 침대에 뻗어버린 내가 뭐가 그리 좋은지 끈적하게 달라붙은 그녀. 늘어져서 생기없는 길다란 내 귀를 자꾸만 깨물고 핥아대니 간지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
"난 이게 왜 이렇게 맛있는지 모르겠어."
마냥 천진하게 웃는 제이 앞에서 나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할까. 손가락으로 코를 톡톡 건드리면 얼굴을 귀엽게 찡그리며 고양이처럼 야옹거리는 제이를 두고 나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할까. 내 귀 하나로 이토록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그녀를 나는 어떻게 대해야할까. 나는 내 귀를 핥고 있는 제이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고 천천히 내 쪽으로 당겼다. 내가 좋아하는 포니테일 머리, 어리둥절함이 서린 표정, 맑게 빛나는 루비색 눈동자....
가슴 가득히 벅차오르는 어떤 감정은 설명하기가 어려울 만큼 야릇하고 간지러웠다. 내 혀가 제이의 입술 사이로 스며들자 혀와 혀는 마치 한 몸이었던 것처럼 뒤섞이면서 묘한 쾌감을 흩뿌렸다. 정신이 몽롱해질 수록 입맞춤은 달콤해지고 모든 것을 따뜻하게 만들어버린다. 떨어지고 싶지 않아서, 이 구속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지 않은 감정이 복받쳐 올라와 제이를 세게 끌어안았다. 이렇게 껴안다보면 언젠가 나와 그녀가 한 몸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생각까지 들었다. 아쉬운 마음에 혀로 제이의 입안을 한 번씩 핥고나서도 몇 번이나 입술을 맞췄다. 창피할 정도로 음탕한 감정이 순수한 눈빛 속에 숨어 있지만 이미 우리는 서로에게 깊숙히 물들어 있었다. 환희, 슬픔, 고마움, 아쉬움, 아련함, 따스함, 애틋함과 같은 감정이 잔뜩 범벅이 되어 사랑이란 이름으로 나를 부드럽게 휘감았다. 순진무구한 눈망울을 빛내며 나를 응시하는 제이 앞에서 결국 나는 속절없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나는 본디 행복해서는 안 되는 존재."
비스듬히 몸을 일으켜 내 아랫배에 올라탄 그녀를 껴안자 짭짤한 눈물이 입안으로 천천히 흘러들어왔다. 흐릿한 눈동자 너머로 제이의 예쁜 미소가 보인다. 그래 바로 저 미소가 슬픔으로 젖은 내 육신에 행복을 불어넣어주었지.
"하지만, 하지만 당신 덕분에 결국 행복해져버렸어. 난 정말 당신한테 고마워. 다 이해해주고 받아주는 당신 너무 사랑해."
흘러내리는 눈물이 점점 차가워지면서 내 목을 적셨다. 제이가 얼굴을 비비자 그녀의 입술에도 내 눈물이 방울져서 떨어졌다. 또다시 밀려오는 야릇한 기분은 몽환적인 느낌을 안겨주어 내가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제이가 배시시 웃자 사랑스럽다는 말로는 모자를 정도로 형언하기 어려운 충격이 머리를 강타했다. 그녀는 내 손을 꼭 잡더니 자신의 새끼 손가락과 내 새끼 손가락을 걸었다.
"다시는 화 같은거 내지 말고, 자신을 아껴주고, 바보 같이 울지 말고, 나보고 자꾸 웃어주고..... 나 계속 사랑해줘."
제이의 오른손이 눈물로 젖어든 내 볼을 쓰다듬는다.
"이것만 약속해줄래?"
나는 슬프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정말 많이 노력할 것이다. 앞으로 그래왔던 것처럼 지금 같은 생활만 영위한다면 난 더이상 제이를 슬프게 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난 그 때까지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그 약속이 얼마나 힘들고 슬픈 약속이었는지, 차라리 미안하다며 자리에서 벗어나는게 오히려 서로를 위한 길이었다고 끊임없이 생각했다.
창 밖에 빗방울은 여전히 거셌다.
"비가 참 많이 오는구나 오늘은."
창 밖을 바라보는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휘감고 나는 제이의 귀에 은밀한 숨소리를 흘려넣었다. 이미 내 손은 그녀의 육체를 부드럽게 쓸어내리고 있었다.
"이렇게 핥으면 녹아버릴 것 같아."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은 충격적일 정도로 야하게 변해서 내 몸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제이의 육감적인 가슴을 어루만지는 내 손등 위로 눈물이 하릴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적극적으로 제이를 끌어안고 천천히 천천히 핥아내려갔다. 간드러지는 신음소리가 새어나오고 파르르 떨리는 숨소리가 몸 곳곳으로 다가와 부서졌다. 서로의 모든 것은 뜨겁게 타올랐고 그 것은 잿더미 대신 짙은 쾌감만 남긴채 희미해졌다.
89년 생들도 속속 복귀하고 있고..
아는 얼굴들이 많아져서 렛고가 더 좋아지네요 ㅋㅋ
모두 행복하게 지내세요 ㅋ
펌킨님도 빨리 다 나으시구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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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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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유후! <<아는 사람 1
ㅎㅎ글이 서두르는 느낌이 없어서 마음에 들음~_~ 나 같은 경우는 갑자기 서두르는 느낌이 들어서 슬픈데....ㅠ_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