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별개의 인물입니다.
장녹수는 조선 10대 임금인 연산군의 후궁입니다.
일설에 의하면 원래 예종의 2남인 제안대군의 사노였다가, 기생이 되어 연산군의 눈에 띄어 후궁으로 책봉되었다고 합니다.
연산 8년에 종3품 숙용에 책봉되었으며,
이듬해인 1503년 정3품 숙용에 봉해졌습니다.
아마도 이때즘 소생인 영수 옹주를 낳았던 듯 합니다.
실록에 '서른이 넘은 나이에도 열다섯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라는 기록이 있어, 동안이었음을 알수 있으나, 미모가 뛰어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노래와 춤에 있어 따를자가 없을 만큼 뛰어났다고 하며, 연산군도 이때문에 장숙용을 크게 총애하였다고 합니다.
연산군의 총애를 믿고 그 사가에서 한양의 상권을 쥐락펴락하며 많은 이권에 개입했기 때문에, 당시 사회적으로 많은 물의를 일으켰고, 장숙용의 처우문제와 관계하여 연산군이 많은 실정을 하였기 때문에 연산군의 후궁중 가장 많은 지탄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숙용장씨에 대한 연산군의 총애가 어느정도였는지는 숙용의 치맛자락을 밟았다는 이유로 운평나인을 참형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씁니다.
중종 반정이 일어나기전 연산군이 연회에서 자신에게 불행이 닥칠것을 미리 예견한 듯 눈물을 흘리자, 다른 모든 궁인들은 그런 왕을 비웃으며 웃었지만,
연산군이 가장 총애하였던 숙용장씨(장녹수)와 숙용 전씨(전전비)만이 함께 눈물을 흘렸는데,
당시 연산이 '다른 궁인은 걱정이 되지 않으나, 두 숙용은 화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연산군의 말처럼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난 뒤 숙용전씨, 숙원김씨 등과 함께 폐서인 된후 군문에서 참형당했습니다.
소생인 영수옹주는 유모가 몰래 빼내어, 키웠으나, 중종대에 서얼인 권한과 결혼한 일로, 그 남편인 권한이 중종에게 추국을 당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걸로 봐서 연산이 폐위될때 살해되었다는 야사와는 달리 적어도 이십대 중반까지는 생존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희빈장씨 (장옥정)은 숙종의 후궁입니다.
중인출신의 역관 장현의 질녀로, 어려서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 조씨의 궁인으로 들어가
숙종 12년 숙종의 숙원이 되었다가, 얼마후 소의로 승진하였고,
숙종 14년 10월 숙종의 장남(후의 경종)을 낳고 3개월 후에 희빈으로 책봉되었습니다.
1689년 희빈 장씨의 아들 원자 정호문제로 일어난 기사환국으로 중궁 인현왕후가 쫒겨나자, 조선 역사상 최초의 중인 출신의 왕비가 되었으나
1694년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강등,
1701년 인현왕후가 죽자, 취선당에 사당을 차려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숙빈최씨의 무고로 사사당했습니다.
조선조에 유일하게 양반사대부출신이 아닌 왕비였으며,
왕비에서 폐출당한 뒤에도 궁에서 쫒겨나가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만,
조선 역사상 가장 불운했던 사람중의 한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