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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식은 끝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작이다 1 /
성경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거듭남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 들어가는 말
성경을 읽다 보면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하나의 큰 싸움이 끝났으면 이제 모든 것이 끝나야 할 것 같은데,
성경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애굽에서 나와야 했고, 광야를 지나야 했고,
마침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다.
그러면 이제 모든 것이 완성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가나안에 들어간 다음에는 사사기가 나오고,
사사기의 혼란이 지나가면 왕정이 시작되고,
사울과 다윗을 거쳐 솔로몬의 평화로운 시대가 온다.
그런데 솔로몬 이후에는 다시 나라가 갈라지고,
결국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무너지고 포로로 끌려간다.
도대체 왜 그런가.
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들어갔는데도 다시 싸워야 하는가.
왜 다윗이 그토록 싸워서 나라를 세웠는데
솔로몬의 평화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가.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는 왜 창세기 1장에서 창조가 완성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였는데 창세기 2장부터
다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가.
이 질문을 깊이 생각하다 보면
우리가 거듭남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우리는 흔히 거듭남을 하나의 직선으로 생각한다.
악한 상태에서 선한 상태로 가고, 무지에서 진리로 가고,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들어가면 마침내 끝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에게 더 깊은 질서를 보여준다.
싸움이 있고, 안식이 있다.
그러나 그 안식은 모든 것이 끝났다는 뜻이 아니다.
그 안식은 새로운 생명이 시작될 수 있는 자리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한 문장은 이것이다.
안식은 끝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작이다.
이것을 이해하면 창세기 1장과 2장이 서로 어떻게 이어지는지,
광야와 가나안이 왜 반복되는지,
사사기의 이야기가 왜 가나안 입성 뒤에 나오는지,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과 모세의 이야기가
왜 그렇게 긴 역사를 이루는지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게 된다.
- 그런데 왜 창세기 2장이 다시 시작되는가?
창세기 1장, ‘여섯 날의 노동과 일곱째 날의 안식’이라는
주제는 이전 글에서 이미 다루었기에 생략하고
여기서는 이런 의문으로부터 시작해본다.
창세기 1장에서 일곱째 날 안식까지 갔다면
이제 끝나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성경은 끝나지 않고 창세기 2장이 시작된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히 창세기 1장의 내용을
다시 반복해서 설명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AC 103에서 창세기 2장의 내적 의미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천적인 사람이 그 주제다.’ 라고 한다. AC 103
이 짧은 문장이 굉장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창세기 2장을 읽을 때
우리가 창세기 1장과 똑같은 상태를 다시 읽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에서는 거듭남의 형성과정이 중심이 된다.
창세기 2장에서는 그 거듭남을 통해 형성된 사람,
특히 천적인 사람의 지성과 지혜가 중심에 놓인다.
스베덴보리는 AE 555에서 이 점을 아주 명확하게 설명한다.
창세기 첫 두 장의 주제가
교회의 사람에게 일어나는 새로운 창조, 거듭남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첫째 장에서는 그들의 거듭남이 다루어지고,
둘째 장에서는 그들의 지성과 지혜가 다루어진다고 설명한다.
또한 창세기 2장 23절과 24절의 남자와 여자의 결합을
진리와 선의 결합, 곧 천적인 결혼으로 설명한다.
창세기 2장 23절과 24절의 말씀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그리고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남자를 단순히 남성이라는 의미로 보지 않는다.
남자는 이해하는 능력에 속한 진리를 의미하고,
여자는 의지에 속한 선을 의미한다.
그리고 남자가 아내와 결합하여 한 몸이 된다는 것은
진리가 선에 속하게 되어 둘이 하나의 선을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우리가 앞에서 말한 일곱째 날의 안식과 연결된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의 일곱째 날과 창세기 2장은
서로 단절된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볼 수 있다.
창세기 1장의 안식은
창세기 2장의 새로운 생명이 시작될 수 있는 바탕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붙들고 있는 문장이다.
안식은 끝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작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에서 일곱째 날에 도착했다고 해서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곳에서 새로운 질문이 시작된다.
이제 이 안식 안에서 어떤 사람이 되어 가는가?
진리와 선은 실제로 하나가 되었는가?
내적인 생명이 외적인 삶 속으로 흘러들어가고 있는가?
내가 알고 있는 진리가 실제 삶의 선이 되고 있는가?
내가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나 자신의 것으로 가로채고
있지는 않은가?
이 질문들이 창세기 2장 이후의 긴 이야기를 열어간다.
그래서 창세기 2장은 창세기 1장의 실패를 보충하기 위해
다시 시작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창세기 1장에서 형성된 생명이
새로운 차원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거듭남의 두 차원’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는 근거다.
그리고 이 구분을 우리의 신앙생활에 적용해 보면
아주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도 어느 날 이전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평안을 경험할 수 있다.
어떤 악을 이겨냈다고 느낄 수도 있다.
어떤 진리가 마음 깊이 들어올 수도 있다.
기도가 편안해지고, 말씀을 읽는 것이 기쁨이 되고,
예전에는 그렇게 힘들던 일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도 있다.
그때 우리는 생각한다.
‘이제 됐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일 수 있다.
- 안식은 끝이면서 다시 시작이다.
우리는 보통 안식을 마지막이라고 생각한다.
열심히 일했고 싸웠고 고생했고 마침내 평안해졌다.
그러면 이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안식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안식은 싸움이 없다는 뜻이지만,
생명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싸움이 끝났기 때문에 이제 더 깊은 생명이 활동할 수 있다.
씨앗이 땅에 묻혀 있는 동안에는
땅 위에서 볼 수 있는 생명이 아직 없다.
그러나 싹이 나온다고 해서 그 식물이 완성된 것은 아니다.
스베덴보리는 AC 8326에서 거듭남을 나무의 성장에 비유한다.
그는 ‘regeneration going on continuously’,
곧 ‘계속 진행되는 거듭남’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말을 덧붙인다.
‘a person's regeneration has a beginning but never ceases.’
‘사람의 거듭남에는 시작이 있지만 결코 끝나지 않는다.’
또한 사람은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뿐 아니라
다음 생에서도 영원히 더욱 완전해진다고 설명한다.
이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한다.
거듭남에는 시작이 있다.
그러나 끝이 없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싸운 끝에 평화를 경험했다고 해서
이제 더 이상 변화될 것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평화 안에서
그동안 볼 수 없었던 것이 보이기 시작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에서 계속 발견하는 신비다.
- 가나안에 들어갔는데 끝이 아니고 다시 사사기가 시작되다.
이제 이 원리를 출애굽 이야기와 연결해 보자.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다.
애굽은 자연적인 인간의 지식과 욕망이 지배하는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설명된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나와야 했다.
그런데 애굽을 떠났다고 모든 것이 끝났는가?
아니다. 광야가 기다리고 있었다.
광야에서는 싸움이 있었다.
먹을 것이 없었고 물이 없었다.
앞으로 가야 할지 돌아가야 할지 흔들렸다.
그리고 자기 안에 있는 불평과 두려움과 의심이 드러났다.
왜 하나님은 이런 과정을 허락하시는가?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다.
그러나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이 생긴다.
가나안에 들어갔으면 이제 정말 끝인가?
성경을 읽어보면 그렇지 않다.
사사기가 시작된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적인 관점으로 보면 당황하게 된다.
‘아니, 이제 약속의 땅에 들어왔는데 왜 또 문제가 생기는가?’
그러나 거듭남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자연스럽다.
가나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모든 악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을 한 번의 사건으로 보지 않는다.
AC 8326에서 이미 확인했듯이 거듭남은 시작되지만 끝나지 않는다.
또 AC 9325에서는 선과 진리의 형태들이
‘그 적절한 질서에 따라 계속적인 진전 속에서’ 발전한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가나안에 들어갔다는 것은 거듭남이 끝났다는 의미라기보다,
‘새로운 상태 안에서 더욱 깊은 거듭남이 진행될 수 있는
영역으로 들어갔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 광야와 가나안은 단순히
‘나쁜 상태와 좋은 상태’라는 두 장소의 구분만이 아니다.
광야에서는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는 일이 전면에 나타난다.
가나안에 들어가면
이제 그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문제가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직 제거되지 않은 것들이 다시 드러난다.
그것이 사사기의 반복되는 이야기를 이해하는
하나의 중요한 열쇠가 된다.
이렇게 광야에서의 싸움과 가나안에 들어간 이후의 삶을
사사기의 이야기와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사사기의 모든 사건을
각각 한 사람의 거듭남 과정에 그대로 대응시켜
설명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창세기의 창조,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과 가나안 정착,
그리고 사사기에 나타나는 반복적인 실패와 회복을 함께 살펴보면서,
그 안에 담긴 영적 의미를 연결해 이해하려는 것이다.
NCBS의 사사기 관련 해설에서도
거듭남은 한 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상태로 계속 나아가는 과정이며 그 과정에서
이전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더 깊은 내면의 문제들이
나타날 수 있다는 방향으로 설명한다.
그러므로 가나안에 들어간 이후에도
사사기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거듭남의 본질을 생각하면 자연스럽다.
한 번의 안식이
새로운 싸움의 출발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아브라함 다음에 이삭이 있고, 이삭 다음에 야곱이 있는 이유
이제 더 깊이 들어가 보자.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자주 놓치는 것이 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끝나면 이삭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이삭의 이야기가 끝나면 야곱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것은 단순히 한 가족의 역사가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내적 의미에서는 훨씬 깊은 질서가 있다.
AC 1950에서 스베덴보리는
아브람, 이삭, 야곱에 대해 매우 중요한 설명을 한다.
‘Abram’ represents the Lord's Internal Man ...
‘Isaac’ the Lord's Interior Man, or His Divine Rational;
and ‘Jacob’ the Lord's Exterior Man, or His Divine Natural.
즉, 아브람은 주님의 속사람,
이삭은 주님의 내면의 사람, 곧 신적 합리성,
야곱은 주님의 겉 사람, 곧 신적 자연성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AC 1950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보게 된다.
거듭남은 단지 ‘내 마음이 선해졌다’라는 정도의 변화가 아니다.
내면의 원리에서 시작된 것이 합리적 이해를 거쳐
실제적인 삶의 영역까지 내려와야 한다.
속사람의 진리가 합리적인 사람 안에서 이해되어야 하고,
다시 겉 사람의 삶 속에서 실제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아브라함 다음에 이삭이 있고, 이삭 다음에 야곱이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우리는 이것을
단순한 세 단계짜리 도표로 만들면 안 된다.
왜냐하면 실제 인간의 거듭남은
그렇게 깔끔하게 한 번에 끝나는 과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적인 것이 새로운 수준에서 다시 합리적인 것을 만들고,
합리적인 것이 자연적인 삶을 다시 변화시키고,
자연적인 삶에서 드러난 문제 때문에 다시 더 깊은 내면이 열릴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인물들은
단순히 한 번 지나가고 사라지는 단계가 아니다.
그들이 나타내는 내적 원리가 서로 다른 상태에서 다시 작용할 수 있다.
바로 여기에서 요셉 이야기가 중요해진다.
- 요셉이 야곱 다음에 등장하는 이유
요셉은 야곱의 아들이다.
문자적인 성경 이야기에서는 야곱의 가족 이야기의 연속이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는 단순한 가족 계보 이상의 의미가 있다.
스베덴보리는 AC 6040에서 요셉을
‘the internal celestial’, 곧 ‘내적인 천적인 것’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매우 놀라운 설명을 한다.
모든 지각은 내적인 것을 통하여 외적인 것,
곧 자연적인 것으로 흘러들어간다는 것이다. AC 6040
이 말은 우리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창세기 1장과 2장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열쇠가 된다.
창세기 1장에서 형성된 영적인 사람은
단순히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생명이 더욱 내면화되면서 천적인 사람의 질서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 내적인 생명이
다시 자연적인 인간 안으로 흘러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요셉은 형제들에게서 떨어져 애굽으로 내려간다.
그런데 역설적이다.
천국에 가까운 내적 원리를 나타내는 요셉이
왜 애굽으로 내려가는가?
바로 이것이 내적 의미의 놀라운 점이다.
내적인 것은 외적인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내적인 선과 진리는
인간의 실제적인 삶과 분리되어 있을 수 없다.
스베덴보리는 AC 6040에서
자연적인 사람은 스스로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앞선 내적인 것으로부터 지각을 받는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모든 것이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에게서 나온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요셉의 애굽행은 단순한 추락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그것은 내적인 것이
외적인 삶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으로도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애굽은 처음에는 생명을 보존하는 장소가 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장소가 된다.
여기에서 또 하나의 거듭남의 신비가 나타난다.
한때 나를 살려주었던 것이 나중에는 나를 지배할 수도 있다.
처음에는 자연적인 지식과 삶의 질서가
내적인 생명을 보존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스스로 주인이 되면 오히려 내적인 생명을 억압한다.
그래서 다시 출애굽이 필요해진다.
- 요셉 다음에 모세가 등장하는 이유
요셉은 애굽에 들어갔으나
요셉 이후의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노예가 된다.
그리고 모세가 등장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왜 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는가?’
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
앞에서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모세가 등장한다.
그것은 거듭남이 단순히 한 번 내면으로 들어가는 과정이 아니라,
내적인 생명이 자연적인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다시 외적인 영역을 건드리는 과정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요셉이 애굽에서 생명을 보존했다면
모세는 애굽에서 이끌어낸다.
이 둘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한 상태에서는 자연적인 것이 내적인 생명을 보존하는 도구가 되고,
다른 상태에서는 그 자연적인 것이
오히려 속박의 장소가 되기에 거기서 나와야 한다.
이것은 우리 삶에서도 매우 실제적으로 경험될 수 있다.
처음에는 어떤 지식이 나를 살려준다.
처음에는 어떤 습관이 나를 지켜준다.
처음에는 어떤 규칙이 나를 악에서 떨어져 있게 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그 규칙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다.
그러면 다시 더 깊은 생명이 필요해진다.
그래서 사람은 다시 출애굽해야 한다.
- 그래서 광야가 다시 나온다.
이제 우리가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왜 애굽에서 나왔는데 광야가 필요한가?
왜 가나안에 들어갔는데 다시 싸움이 있는가?
왜 요셉 다음에 모세가 필요한가?
왜 창세기 1장의 일곱째 날 이후에도 성경이 계속되는가?
그 답은 하나의 원리로 모인다.
거듭남은 한 번의 탈출이 아니라
생명이 계속 깊어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한 번의 싸움이 끝났다고 해서 모든 싸움이 끝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앞선 싸움이 무의미했다는 것도 아니다.
앞선 싸움은 반드시 다음 상태의 토대가 된다.
앞선 안식도 반드시 다음 상태의 토대가 된다.
그러므로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은
이전의 광야로 돌아간 사람이 아니다.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문제를 만나는 것이다.
(여기서는 앞의 광야와 뒤의 광야를 구분해서 이해해야 한다.
글의 흐름을 보면, 앞의 광야는
출애굽 후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거치는 광야로
애굽에서 벗어난 이스라엘 백성이 진리를 배우고
악과 거짓에 맞서며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다.
반면 뒤의 광야는 가나안에 들어간 뒤 거기서 맞는 새로운 싸움을
설명하기 위해 다시 언급한 광야이다.
다시 말해 뒤의 광야를 가나안 이후의 싸움과 연결한다면,
그것은 실제 지리적 장소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앞선 광야의 싸움과 비슷한 영적 원리가
새로운 상황에서 나타난다는 비유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은
이전의 광야로 돌아간 사람이 아니다.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문제를 만나는 것이다.’
이 문장은 가나안에 들어간 이후에도 새로운 문제,
즉 가나안 땅에서 사사들의 싸움이 계속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려는 핵심은
가나안에서 겪는 싸움이 출애굽 직후 광야에서 겪었던 싸움과
똑같은 상태로 되돌아간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사기의 반복도 이런 관점에서 볼 수 있다.
한 번 구원을 경험했다고 해서 사람이 자동적으로
영원한 선 안에 고정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상태는 다시 시험을 받을 수 있고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것이 다시 나타날 수 있다.
스베덴보리는 AC 8403에서
거듭남과 시험의 관계를 매우 강하게 말한다.
시험이 없으면 아무도 거듭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험은 거듭남의 반대편에 있는 장애물만이 아니다.
시험은 거듭남의 과정 안에서 사용되는 수단이다.
그러므로 광야는 단순히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지나가는 불편한 통로가 아니다.
광야에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알게 되고,
자기 힘만으로는 생명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배우며,
진리를 붙들고 악과 거짓에 맞서는 법을 깨우침 받기 때문이다.
- 안식 뒤에 다시 새로운 일이 시작되는 이유
왜 그런가.
평안해졌기 때문에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싸움 중에는 눈앞의 악과 거짓을 제거하는 데 집중한다.
그런데 싸움이 지나가고 마음에 평화가 오면,
더 깊은 내면을 볼 수 있게 된다.
전에는 자기 안에 그런 것이 있는 줄도 몰랐던 욕망이 보인다.
전에는 선이라고 생각했던 행동 속에
자기 사랑이 섞여 있었음을 보게 된다.
전에는 믿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자기 확신이었음을 알게 된다.
전에는 주님께 맡긴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결과를 자기 뜻대로 만들고 싶어 했음을 깨닫는다.
그러면 다시 새로운 싸움이 시작된다.
그러나 이 싸움은 처음의 싸움과 똑같지 않다.
사람은 이미 이전의 안식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전보다 더 깊은 곳에서 싸우게 된다.
그리고 다시 안식이 온다. 그 안식은 이전보다 더 깊다.
그러면 다시 새로운 것이 보인다.
또 싸운다. 또 안식한다.
이것이 거듭남의 계속성이다.
AC 8326이 말하는 ‘regeneration going on continuously’가
바로 이 방향을 열어준다.
거듭남에는 시작이 있지만 끝이 없으며,
사람은 계속해서 더욱 완전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반복되는 싸움을
무조건 실패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물론 같은 악을 계속 붙들고 있는 것은 거듭남이 아니다.
그러나 이전에 이겼다고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깊은 곳에서 새로운 악이 드러나는 것은
오히려 더 깊은 거듭남의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을 구별해야 한다.
같은 악을 붙들고 제자리에서 맴도는 것과,
더 깊은 곳에서 새로운 악을 발견하는 것은 같은 반복이 아니다.
겉으로 보면 둘 다 ‘또 문제가 생겼다’처럼 보인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전혀 다를 수 있다.
하나는 후퇴이고,
다른 하나는 더 깊은 빛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일 수 있다.
- 그래서 성경의 이야기가 계속된다.
이제 우리는 성경의 긴 이야기를 조금 다르게 볼 수 있다.
아브라함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삭이 나온다.
이삭에서 끝나지 않는다.
야곱이 나온다.
야곱에서 끝나지 않는다.
요셉이 나온다.
요셉에서 끝나지 않는다.
모세가 나온다. 모세에서 끝나지 않는다.
애굽에서 나오고 광야를 지나야 하며
가나안에 들어가지만 거기서 다시 사사기가 시작된다.
사사기가 끝나지 않는다.
왕정이 시작된다.
다윗이 싸운다. 그리고 솔로몬에게 평화가 온다.
그런데 솔로몬에서도 끝나지 않는다.
나라가 갈라진다. 다시 무너진다.
왜 이렇게 긴가.
왜 하나님은 한 번에 완성시키지 않으시는가.
그 이유를 우리는 이제 조금 이해할 수 있다.
거듭남은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생명의 계속적인 형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점에서 창세기 1장과 2장은
성경 전체를 읽는 하나의 열쇠가 된다.
창세기 1장은 창조의 완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창세기 2장은 그 완성 뒤에
새로운 생명의 질서가 시작되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어떤 일이 ‘완성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모든 것이 끝났다는 뜻은 아니다.
한 상태가 완성되었다는 뜻일 수 있다.
그리고 그 완성은 다음 상태의 토대가 된다.
끝이 다음 시작이 된다.
안식이 다음 노동의 토대가 된다.
한 번의 승리가 다음 싸움을 가능하게 한다.
한 번의 평화가 더 깊은 평화를 향한 출발점이 된다.
이것이 우리가 앞으로 다루게 될
다윗과 솔로몬의 이야기에서 아주 선명하게 나타난다.
다윗은 싸웠고 솔로몬은 평화를 누렸다.
그러나 솔로몬의 평화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평화가 아니었다.
그 평화 안에서 성전이 건축되었다.
즉, 전쟁이 끝났기 때문에 일이 끝난 것이 아니라
일의 성격이 바뀐 것이다.
싸움의 시대에서 건축의 시대로 넘어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거듭남의 아주 중요한 원리를 보여준다.
전쟁이 끝났다고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싸움이 끝나면 건축이 시작될 수 있다.
악을 제거하는 일이 중심이었던 때에서
선을 형성하는 일이 중심인 때로 넘어갈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솔로몬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러나 솔로몬의 이야기는 또 다른 놀라운 사실을 보여준다.
평화가 왔다고 해서 그 평화가 자동적으로 영원한
완성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 질문을 가지고 다음 이야기를 읽어야 한다.
왜 솔로몬 이후 나라가 갈라졌는가.
왜 안식 뒤에 다시 무너짐이 나타났는가.
그리고 그것은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더욱 깊은 문제에 들어가게 된다.
안식은 끝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작이다.
그런데 새로운 시작에서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그 안식이 더 깊은 생명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다시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삼는 상태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
그래서 안식은 자동적인 완성이 아니다.
안식은 주님께서 주신 새로운 상태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살아내는 시간이다.
그리고 그 새로운 생명이 다시 사람 안에 깊이 뿌리내리면,
이전보다 더 깊은 안식이 온다.
이렇게 보면 거듭남은 하나의 직선이 아니고
또 같은 자리를 맴도는 원도 아니다.
앞선 상태를 토대로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나선적인 생명의 과정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제 의문들에 답하는 다음 장면이 기다리고 있다.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들어갔는데 왜 다시 사사기가 시작되는가.
가나안에서 얻은 안식은 왜 다시 싸움으로 이어지는가.
그리고 다윗은 왜 그렇게 피 흘리는 싸움을 해야 했으며,
그 싸움 뒤에 솔로몬에게는 왜 평화가 주어졌는가.
더 나아가 솔로몬의 성전은 왜 완성되었는데도
그 뒤에 다시 나라가 갈라지는가.
이 질문들을 하나씩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단순히 ‘성경의 역사’라고 생각했던 이야기가
사실은 우리 자신의 내면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는 거듭남의
거대한 드라마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창세기 1장의 일곱째 날을 다시 보게 된다.
안식은 끝이었다. 분명히 끝이었다.
여섯 날의 노동은 끝났고, 싸움도 끝났다.
그러나 바로 그 끝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안식은 끝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작이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떤 싸움이 끝났을 때,
‘이제 다 이루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 싸움을 지나게 하셔서
새로운 생명의 자리를 열어 주셨구나.’라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안식의 의미를 조금씩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안식에서 다시 주님과 함께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
그것이 거듭남이다.
거듭남은 한 번의 출애굽으로 끝나지 않는다.
한 번의 광야로 끝나지 않는다.
한 번의 가나안 입성으로 끝나지 않는다.
한 번의 승리로 끝나지 않는다.
한 번의 안식으로 끝나지 않는다.
생명이 있는 한,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이루시는
새로운 창조도 계속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오늘이
어제보다 조금 더 평안하다면 그것은 귀한 일이다.
그러나 그 평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 평안 속에서 주님은 또 다른 문을 열 수 있다.
그리고 그 문을 통과하면 우리가 아직 알지 못했던
또 하나의 내면이 드러날 것이다.
그곳에서 다시 진리가 필요하고, 다시 선이 필요하고,
다시 주님을 의지해야 하고, 다시 우리의 의지를 사용해야 하고,
다시 악을 거부해야 하고,
다시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으로 살아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또 다른 안식이 온다.
그러나 그 안식 역시 끝이면서 동시에 또 다른 시작이다.
안식은 끝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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