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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도드람산 산행후기
2005. 5. 5.(목)은 어린이날이요 휴일이다. 날씨는 예상외로 맑다. 고향을 오고 갈때 중부고속도로 이천휴게소를 지날 때 쯤이면 작지만 4개의 암봉이 아기자기하게 보이는 산이 하나있는데 이름하여 '도드람산'이다. 내 어렸을 때 마을 어른들 중 '도드래미댁'이란 택호를 쓰시는 할머니 한 분이 계셨기에 더욱 가까이 느껴지는 그런 산이다. 그래서 나는 ‘개미실산우회’ 친구들과 함께 이 산을 깜짝 산행하고자 하였으나 친구들이 이런저런 사정으로 함께 산행을 할 수 없어 가족 산행으로 대처하기로 하였다. 08:30분 시흥동 재춘아저씨(처가로는 둘째 동서가 됨) 댁으로 가 09:10분 내외분을 모시고 청계산을 넘어 성남에서 3번 국도를 이용하여 이천으로 향한다. 연초록으로 단장하고 있는 관악산이며 청계산이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다. 가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의 여왕 5월의 풍경이다. 광주, 이천, 여주지역은 2005년 제3회 세계도자비엔날레가 4월23일부터 6월19일까지 58일간 열리고 있고 어린이날과 겹쳐 교통량이 엄청나다. 차량의 흐름이 영 거북이 걸음이지만 이런저런 세상사를 이야기하다보니 곤지암-신둔면 소재지를 지나 이천에 당도하였다. 우리는 이천에서 다시 42번 국도를 타고 용인방면으로 향한다. 호법을 지나자 중부고속도로가 앞을 지나가고 도드람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마장면 표교리 쯤에 도착하여 아무래도 물어서 가는 것이 상책일 듯 싶어 주유소 식당에 들려 도드람산 가는 길을 물으니 친절하게 길안내를 해 준다. 앞에 보이는 신호등이 있는 교차로에서 우회전하여 들어가면 SK텔레콤 연수원이 나오는데 그곳에 주자장이 있고 도드람산 산행의 시발점이라고 한다. 도드람산을 가는데는 3번국도 신둔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가는 길과 영동고속도로 덕평IC로 나와 가는 방법이 있다.
<이천 도드람산> 도드람산은 경기도 이천시 마장면 장암리에 위치한 해발 349m로 산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나 기암괴석의 봉우리들로 이어지는 산세가 절경을 이루고 있는 우리고장 제일의 명산이다. 이 산은 또 바위를 타고 걷는 등산로가 일품이어서 주말이면 많은 등산객들이 찾아드는 이름난 명승지이기도 하다. 도드람산의 유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옛날 이 산 근처마을에 병든 홀어머니를 극진히 섬기는 효자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 어머니가 이름모를 병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되었다. 효자는 정성을 다해 간호하며 유명하다는 의원을 청해 오기도 하고 좋다는 약도 이것저것 구해다 드렸으나 어머니의 병환은 점점 위독해만 갔다. 하루는 스님이 이 집에 시주를 청하러 왔다가 슬픔에 잠긴 효자를 보고 그 까닭을 물었다. 효자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스님은 도드람산에서만 자라는 석이버섯을 따다가 어머니에게 드리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효자가 스님이 일러준 대로 석이버섯을 따다가 어머니에게 드렸더니 과연 눈에 띄게 차도가 있었다. 그 날도 효자는 석이버섯을 따기 위해 이곳에 이르러 한 가닥의 밧줄에 몸을 묶고 절벽을 내려가 바위틈을 더듬으며 버섯을 뜯고 있는데 난데없이 산돼지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산돼지는 원래 울 줄을 모르는 짐승이기에 이상하게 생각한 효자가 절벽을 올라가 보니 산돼지는 간 곳이 없고 효자의 몸을 매달았던 밧줄이 바위 모서리와의 마찰로 거의 끊어져가고 있었다. 효자의 극진한 효심을 가상하게 여긴 도드람산의 신령님이 산돼지를 보내 효자의 목숨을 구하게 한 것이다. 그부터 '돋(돼지)울음산'으로 불리우던 것이 세월이 지나면서 도드람산으로 변했다고 하며, 한자로는 ‘저명산(猪鳴山)’이라 부르고 있다.
<SK텔레콤 연수원> 주차장에서 바라다 본 SK텔레콤 연수원이다.
<도드람산 입구> 도드람산 산행은 주차장에서 바로 시작이 되는데 지척에 서부활극 OK목장에서나 나옴직한 분위기의 도드람산 입구가 있고 안내도가 서있다. 우리는 미리 알고 정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제2봉-제3봉-정상-효자문-돼지굴-전망대-약수터-중부고속도로변-SK텔레콤연수원-주차장으로 오늘의 산행을 마무리 하게 된다. 도드람산 입구에서 좌측으로는 효자 멧돼지상이 있고 체육시설이 있다. 이곳에서 5분정도 오르면 약수터가 나오는데 약수터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 물 한 모금 시원하게 마시고 우측 영보사 코스를 피하고 좌측 산행길로 접어든다. 산행길 주변에는 망개덩굴이며 철쭉과 영산홍이 커다란 군락은 아니지만 조금씩 앙증맞게 우리를 맞이하고 있다. 이렇게 30m-40m쯤 올라가면 이정표가 있는데 느낌으로도 제2등산로는 경사로고 제3등산로는 쉬운 길 같아 보인다. 나는 우리 일행의 나이와 건강상태를 감안하여 제3등산로를 택하였다. 아마도 암릉의 맛을 제대로 보려면 제2등산로를 택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오르는 길목에 널려있는 쑥을 비롯한 봄나물을 캐며 느긋이 오르는 것 또한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도드람산 안내도>
<효자 멧돼지상> 효자 멧돼지상 앞에서 나는 우리 고향 성뜰 두하네 집 앞에 있는 정국량 효자비각에 대한 생각을 해본다. 정국량 어른은 두하 친구의 선조이신것으로 알고 있다. 정국량은 본관이 초계. 자는 공거이다. 국량, 국주, 국초, 국노, 국빈의 5 형제가 있었으며 모두 효성이 있어서 5 효자라고 불렀다. 국량의 효 행적을 보면 임진왜란 때 부친이 오랜 질병 끝에 돌아 가셨는데 장례를 치루지 못한 상황에 왜병이 이 곳 마을을 습격해 들어왔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다 피난을 갔으나 아버지 때문에 피난을 가지 못한 그는 홀로 이 마을에 남아 있었다. 왜병들이 마을에 들어 와 보니 사람의 그림자도 찾아 볼 수 없었으나 유독 정국량이란 사람만 아버지 시신을 떠나 지 못하고 있는걸 보았다. 이 광경을 본 왜장 현몽은 그의 효성에 감동하여 물침기(아무도 침범하지 말라는 표시의 깃발)을 주었다. 이로 인하여 임진왜란을 무사히 넘길 수가 있었다.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전문으로 단간 팔작지 붕목조기와집으로 정문안에는 현판이 아니라 비석으로 되어 있다. <효자비> 앞면 : 宣廟朝朝旌閭 孝子贈參判鄭國梁(선묘조정려 효자 증참판정국량) 뒷면 : 墓甲方八十步 閭次方三百二十步 癸亥 五世孫歸謹書(묘갑방팔십보 려차방삼백이십보 계해오세손귀근서)
<망개> 망개는 청미래덩굴이 바른 이름이다. 경상도에서는 망개나무, 전라도 지방에서는 명감나무로 잘못 알고 있다. 진짜 "망개나무"는 덩굴식물이 아니라 10미터 이상 자라는 교목이다. 광택이 있는 둥근 잎은 동그란데 끝부분이 뾰족하고 밑으로 날카롭고 단단한 가시가 있어 숲을 걷는 이의 옷을 찢어놓기도 한다. 뿌리는 한약명으로 토복령이라 부르는데 구황식품으로 이용하기도 하고 매독이나 이뇨, 지사 등에 약으로 처방하기도 한다. 경상남도 의령 지방에서 유명한 "망개떡"은 이 청미래 덩굴의 잎에 쌀가루를 싸서 찐 떡을 말하는데 풋풋한 청미래덩굴의 맛이 일품이다. 황록색 꽃이 지고나면 녹색의 열매가 열렸다가 가을에 붉게 익는데 그 빛깔이 아름다워 꽃꽂이에 즐겨 활용된다.
<철쭉> 요즘은 봄하고 가을은 없는 듯하다. 아침 저녁으로 썰렁하다 느꼈는데 어느새 예사롭지 않게 무더운 날씨다. 산능선을 오르니 등허리를 타고 땀이 등을타고 쪼르르 흐른다. 도드람산은 산림의 분포가 이원화되어있는 듯하다. 능선 위를 지나 조금더 오르기까지는 참나무며 굴참나무 숲으로 하늘과 햇빛을 가리우는데 모르긴해도 가을철 단풍과 함께 도토리줍기 산행을 하려면 도드람산이 제격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제2봉 가까이에는 간간이 참나무가 있을 뿐 소나무 일색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우리 조선 소나무보단 왜놈(?) 니끼다 소나무가 너무 많다는 점이다.
<도드람산 제2봉> 도드람산을 오르다보니 엥? 제1봉은 어디가고 제2봉이 먼저 나타나네. 그래서 제2등산로(제1봉), 제3등산로(제2봉)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어찌되었거나 제2봉에 오르니 중부고속도로며, 아직은 모를 내지 아니한 논과 들녁과 산하가 한 눈에 들어 온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마음으로 외쳐본다. 여기도 내고향! 내고향 땅이다.
<제2봉에서 제3봉 쪽 암봉> 무엇보다도 북쪽 제3봉 쪽으로 지금도 이름을 알 수 없는 암봉이 웅장한 자태를 뽐내며 내 앞에 우뚝 서있다. 감탄사. 와 멋있다! 그런데 등산객 누구에게 물어봐도 이 암봉의 이름을 모른다. 돌이켜 보건대 도드람산에서 가장 멋있는 암봉일 것 같은데도 말이다.
<팥배나무> 제2봉 옆에는 벚나무같은데 벚나무도 아닌 새하얗게 꽃이 핀 나무가 아주 여러그루가 있다. 산과 나무, 야생화 등에 대하여는 걸어다니는 '대동야승' 흥우 친구에 의하면 이 나무 이름이 바로 '팥배나무'라고 한다. 요즈음 야생화며 나무이름을 배우는 재미가 아주 쏠쏠하다.
<암봉 뒤편>
<도드람산 제3봉>
<도드람산 정상 : 효자봉> 이천시는 2005년 1월 관내 각 산의 봉우리 명칭과 더불어 표지석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설봉산은 '희망봉(希望峯)과 성화봉(聖火峯)', 도드람산은 '효자봉(孝子峯)', 노성산은 '장수봉(長樹峯)', 백족산은 '청미봉(淸渼峯)', 마국산은 '오운봉(五雲峯)', 효양산은 '효양봉(孝養峯)' 등이다. 효자봉 표석 이면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도드람산의 정상은 해발 349m로 기암괴석이 절묘한 절경을 이루고 있는 돌산이다. 산을 좋아하는 수도권의 많은 등산객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돼지와 효자에 대한 전설이 구전되어 오고있는 역사적인 산이다.'-2005. 1. 1.- 이곳에서 우리는 가져온 음식을 나누었다. 이곳 좌측은 목책이 쳐져있으며 목책 넘어는 천길 낭떨어지다.
<멧돼지굴 가는 길1>
<멧돼지굴 가는 길2> 이곳은 정말 아찔한 암릉길이다. 우측으로 새로난 철계단길 이전에는 일일이 바위에 박은 스텐레스 사다리를 딛고 돼지굴이며 전망대를 산행하였을 것을 생각하면 오금이 살짝 절여온다.
<효자문> 철계단길을 내려와 효자문을 내려가면 좌측으로 전망대와 돼지굴을 가는 코스이고 우측으로 하산길이다. 밧줄을 잡고 내려가기에 그리 험하지 않은 길이다.
<멧돼지굴 가는 길3> 철제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좌측 바위에 돼지굴로 가는 스텐레스 사다리가 박혀 있고 우측이 도드람산 주위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다.
<전망대> 전망대 바위를 넘어가면 두어평은 됨직한 평평한 공간이 있고 이곳에서는 우리나라 중부지역을 관통하고 있는 중부고속도로 주변을 조망할 수 있다.
<중부고속도로> --- 고 향 땅 --- 고향 땅이 여기서 얼마나 되나 푸른 하늘 끝닿은 저기가 거긴가 아카시아 흰 꽃이 바람에 날리니 고향에도 지금쯤 뻐꾹새 울겠네 고개 넘어 또 고개 아득한 고향 저녁마다 놀 지는 저기가 거긴가 날 저무는 논길로 휘파람 불면서 아이들도 지금쯤 소 몰고 오겠네
<애기똥풀> 애기똥풀은 줄기를 꺾으면 황색유액이 나와서 젖풀, 씨아똥, 백굴채(白屈菜)라고도 한다. 꽃을 포한한 모든 줄기와 잎을 약으로 쓴다. 줄기를 잘라 나오는 분비물을 부스럼이나 습진 같은 피부질환 치료에 쓰이고 사마귀에 신선한 즙액을 붙여서 치료한다. 또한 옻독을 풀며, 위궤양. 간장약. 진통. 위암, 진해 등 약재로 쓰이지만 유독성 식물이다. 애기똥풀은 천연염색재료로 은은한 노란색을 만드는데 좋은 재료로 사용되곤 한다.
<석이약수> 옛날 도드람산 주변마을에 병든 홀어머니를 극진히 섬기는 효자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 어머니가 이름모를 병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되자 효자는 정성을 다해 어머니를 간호하며 유명하다는 의원을 청해 오기도 하고 좋다는 약도 구해다 드렸으나 어머니의 병환은 점점 위독해져만 갔다. 어느 날 스님이 이 집에 시주를 청하러 왔다가 슬픔에 잠긴 효자를 보고 그 까닭을 물으니 효자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스님은 도드람산에서 자라는 석이버섯을 따다가 어머니에게 드리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효자가 스님이 일러준 대로 석이버섯을 따다가 어머니에게 드렸더니 눈에 띄게 차도가 있었다. 이러한 전설이 있어 석이 약수라 정하였다.
<하산길 숲길> 하산길 연초록 숲속에는 잘 보이지 아니하나 제법 큰 바위가 하나 있는데 안내문에 이르기를 '도드람산 아래마을에 주민들이 팥죽을 쑤고 도드람산을 돌며 이 바위에 오면 팥죽이 다되었다하여 팥죽바위라 하였음' 라고 안내되어 있다.
사골국이라고도 하는 소머리국밥이 오늘날 곤지암의 명물이 된 것은 최아무개라는 분의 약 25년간에 이르는 각고의 노력 끝에 이루어진 결실이라고 한다. 30여년전 최아무개는 곤지암으로 이사를 와서 목수인 남편과 함께 오막살이에 세들어 살면서 동네사람들을 대상으로 '골목집'이라는 간이음식점을 운영하며 생활하였다고 한다. 남편이 목수인 까닭에 남편과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다보니 외상이 많아서 자꾸 빚만 늘어났다. 더구나 알코올 중독이던 남편이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 어떤 아주머니로부터 사골국을 끓여서 남편에게 먹이면 좋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래서 최아무개는 어머니에게서 어깨너머로 배운 솜씨를 발휘하여 병환중인 남편에게 사골국을 다려주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한 사골국은 시간이 지나면서 요리기술이 발전하면서 맛이 점차 좋아지게 되었다. 사골국은 소머리국밥을 만들기 전의 요리상태이다. 그리고 30여년전 '골목집'을 운영할 당시에는 사골국으로 불려졌고, 20여년전 상호를 '곤지암소머리국밥집'으로 변경하면서 소머리국밥으로 통용되었으며, 18년전에는 '본가곤지암소머리국밥집'을 최아무개의 사위 명의로 설립하였다. 따라서 '골목집', '곤지암소머리국밥', '본가곤지암소머리국밥'은 모두 최아무개가 직접 만든 상호라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