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여러 존경하옵는 어르신, 동료 그리고 후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재경화수회 이사로 있는 창훈(걸자 돌림)입니다. 이번에 고향의 학성동인회에서 주관하는 대마도 탐방을 재경화수회 명훈 교수와 함께 다녀왔습니다. 고향의 여러 어른과 친지들이 함께 가신다고 하길래 자청하여 참례하였습니다. 이하에 그 기행문을 올리오니 부족하더라도 넓은 마음으로 혜량하시기 바랍니다. 첫날, 부산을 출발한 배는 한 시간 사십 분 여를 물살을 헤쳐 히타카쯔(비전승)항구에 사람을 부려 놓는다. 오는 길에 제법 높은 파도가 뱃머리를 쳤다. 파도는 대해로부터 소해로 치는 모양인데 태평양으로부터 대한해협으로 쳐오는 파도를 역류하자니 조그만 배가 제법 흔들렸다. 항구의 친절한 직원들이 나와 입국신고서의 빈칸을 이모저모 메워주었다. 가이드를 맡은 아가씨는 일본의 어느 곳을 가도 볼 수 없는 히타카쯔 출입국 관리소만의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감격하고 있었다. |
배에서 처음 내리니 화산섬 특유의 급경사를 이룬 푸른 산이 여행객을 맞는다. 산은 밀림을 연상하듯 짙은 녹색의 울창한 숲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요철이 많은 리아스식해안이 발달해 있어 아름다웠다. 입국 수속의 절차가 끝난 뒤 맨 처음 간 곳이 와니우라(악포)의 한국전망대,여기서의 악포의 악은 악어를 의미하는데, 항구 앞을 악어의 톱니 이빨처럼 암초가 가로지르고 있어서 그런 이름을 얻었다고 짐작된다. 항구가 조망되는 전망대에 오르니 조선역관사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1703년 음력 2월 5일 부산을 출발한 배가 악포로 접안하려다 갑자기 불어닥친 돌풍에 배가 침몰하여 108명의 역관들이 조난을 당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부산까지의 직선거리가 49.5㎞에 불과하다고 하니 부산에서 울산가기 만 한 거리이다. 그런데 차를 타고 가다보면 모든 차들의 핸들이 오른쪽에 있고 차의 진행방향도 좌측통행이다. 항상 왼쪽 길로 달려오는 차만을 보다가 오른쪽으로 불쑥 나타나곤 하는 차 때문에 깜짝 깜짝 놀라기를 여러 번 하였다. 내 몸에 학습되어 각인된 습관의 무서움에 진저리가 났다. 당시 일본은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가장 선진국이었던 대영제국의 사회제도를 받아들여 사회제도의 규범으로 삼았다고 한다. 도로주행에 관한 좌측통행의 관행도 당시 자리잡았으리라. 당시 에도막부가 무너지면서 대정 명치시대가 도래하게되는데, 그때 출간된 후꾸자와 유기찌의 '서양사정'이란 책이 상당한 반향을 일으켜 일본을 개화시키는데 크게 일조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동간에 유심히 보았던 것은 '시간차임시신호기'라고 하는 것인데, 도로의 한쪽구간의 통행을 제한하는 공사구간에 사람이 수신호로 하는 것이 아니라, 1분내지 40초간의 일방통행을 이 간단한 기계로 하고 있었다.산록을 달리면서 보았던 여러 나무들, 삼나무, 측백나무, 자귀나무, 산딸나무, 비파나무, 산뽕나무 등이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특히 대부분의 산에 조림된 나무가 삼나무인데, 너무 빨리 자라는 속성수로서 골치를 앓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특히 5월이면 날리기 시작하는 화분가루 때문에 많은 시민들이 화분증을 앓는다고 한다. 그런데 300∼400년 뒤에는 아름드리 거수가 되는데, 이를 벌목한 후 소금물에 재워 목재로 이용하면 아주 유용하여 후손들을 위하여 투자하는 마음으로 나무를 키운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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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채로운 사실은 일본의 본토는 화산섬인 관계로 뱀이 없는데, 이곳 대마도 역시 화산섬이나 뱀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주민들은 산 속으로 들어가기를 꺼려 등산로가 개설된 곳이 몇 군데 안 된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일본인은 고사리를 먹지 않아 비빔밥에는 고사리가 없다고 하는데 아직 비빔밥을 먹어 보지는 못하였다. 다음 향한 곳이 와타즈미신사, 일본의 건국신화가 살아 있는 곳으로, 황실의 계보가 천신의 부계와 해신의 모계로 된 혈통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그 국가상의 발원지가 본토가 아닌 이곳 대마도의 니이지역의 해변 와타즈미라는 사실은 자뭇 흥미로운 일이다. 그런데 이 와타즈미 신사의 입구에 세운 도리이가 바다 쪽으로 주욱 도열하여 서 있는데, 그 방향이 경주를 향하고 있다고 하여 가져간 나침반으로 재어보니 정확히 일치하였다. 일본은 가히 神社의 천지라고 할만큼 신사가 많다. 온 국민이 섬기는 신사뿐만 아니라, 개인이나 가족, 단체가 섬기고 있는 신사가 거리의 곳곳과 산의 정결한 곳에 모셔져 있다. 아마도 지진과 태풍 등 자연재해가 많다보니, 초월적인 존재에게 자신의 명운을 맡길 수밖에 없는 입지조건의 해양성이 그렇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신사 주변이 음산하고 한적하다보니 개운한 기분은 아니었다. 이것 역시 그 문화에 동화되지 않은 나그네가 느끼는 선입견이 아닌가 짐작된다. 또 다른 면으로 생각해보면 사면이 바다를 둘러 쌓인 해양민족 특유의 진취성이 오늘날의 일본을 만든 것이 아닌가 싶다.
 | 그 다음 향한 곳이 반세키세도(만관교), 소련의 발틱 함대가 희망봉을 돌아 연료공급도 받지 못하고 이곳 대마도와 본토사이로 항로를 잡았을 때, 만관교에 숨어 있던 어뢰정이 뒤에서 공격하고 앞에서는 부산과 대마도 북서쪽에서 발진한 일본함대가 앞에서 협공을 가하였다. 그때까지 부동의 세계 최강의 위용을 자랑하던 발틱함대는 괴멸되고 일본은 욱일승천의 기세로 군국주의를 향해 치닫게 되었다. 이 다리인근 해역에서의 패배를 遠因으로 하여 러시아는 러시아혁명을 거쳐 전제 왕정의 종말을 맞게 되었고, 일본은 대동아 공영권의 기치아래 확전의 길로 치달아, 종국에는 인류역사상 유례없는 원자탄을 두 방씩이나 맞는 비극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래서 역사는 우연과 필연의 씨줄과 날줄로 교직되어 완성된 옷과 같다고 하겠다.
그리고 반세키세도 조금 못 미쳐 소선월(코후나코시) 이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옛날 대마해협에서 대한해협으로 나가고자하는 배들이 협소한 협만까지 배를 타고 와서 다시 배를 뭍으로 끌어올려 육상으로 아소만까지 운반하여 배를 띄운 곳이다. 그리고 반세키세도를 조금 더 지나치면 대선월(오오후나코시) 이라고 하는 곳이 나오는데, 이곳 역시 배를 육지로 운반하여 옮기던 곳이다. 지금 소선월은 옛 자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나, 대선월은 운하를 파서 육교로 연결되어 있다. 말하자면 옛날에는 대마도가 한 개로 연결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만관교와 대선월에 있는 다리로 인하여 세 개의 섬으로 나뉘어져 있는 셈이다. 물론 행정구역상 대마도에 속하는 크고 작은 도서는 백 아홉 개로 형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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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번 여행의 목적인 우리 선조 이예 공의 행적이 살아있는 아소만의 화전포로 향하였다. 이곳 화전포(와다노우라)는 진주양식업을 대대로 하고 있는 자그마한 협만인데 이곳의 어느 곳에서 이예 공께서 삼개월정도 노역에 종사하셨다고 한다. 산록의 구비에 노역에 종사하였음직한 장소가 있었는데 돌아나오는 발길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즈하라(엄원)에 도착했을 때가 저녁 무렵이었다. 이곳 이즈하라는 대마도시청이 있는 대마도 내에서 가장 번화한 곳인데도 우리 나라의 어느 읍사무소 소재지 정도의 번화도를 가졌다. 현재 상주하고 있는 인구가 16,000명 정도라고 하며 대마도 전체의 인구는 약 43,000명 정도라고 한다. 그날 묵은 숙소가 작지만 정갈한 쯔타야 호텔 이었다. 둘째 날 처음 간 곳이 상견판(카미자카) 전망대였다. 이곳은 아소만의 절경이 한눈에 바라다 보이는 곳이며,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대동아전쟁 때 일본군이 파놓은 여러 군사시설들이 즐비하다. 60여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지금 사용해도 좋을 만큼 튼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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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간 곳이 소무전병(코모도하마) 신사였다. 이곳의 입구에는 원구내습지라는 커다란 간판이 있는데, 이곳으로 아시아의 대부분을 정복한 몽고군이 내습하였다. 1274년(고려 원종 15년)과 1281년(고려 충렬왕 7년)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기습을 우려하여 군선에서 기거를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태풍이 불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퇘하였다고하니 불규칙한 기후의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그때부터 카미가제(신풍) 란 말이 생겨나고 일본은 신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특별한 나라라는 인식이 대중에게 보편화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대마도를 여행하며 느낀 점은 길은 좁고 협소하며 산세는 너무도 험하여 현지 주민이 아니면 길의 방향을 알 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와도 같았다. 그 다음 간 곳이 오야끼야마 공원내 두두기(츠츠자키), 우리 나라의 태종대처럼 불쑥 돌출한 곳으로, 현해탄의 검은 바다가 참으로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이곳에서는 한국의 핸드폰이 제대로 터져 사람들은 각자의 인연 있는 곳으로 전화한다고 다들 바빴다. 그 다음 간 곳이 미인총 이었다. 두두(쓰쓰)에서 나이산을 넘는 옛길의 언덕 중턱에 미녀총이 이라고 불리는 석총이 있다고 책에는 기록되어 있는데, 석총은 없고 평지에 비석하나가 수풀 속에 외로이 서 있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두 모녀가 이곳에 살고 있었는데, 딸의 미모가 출중하였다. 이 소문이 일본의 황실에까지 전해져 우네메(천황의 시중을 드는 궁녀)로 발탁이 되었다. 그런데 눈먼 어머니와의 이별을 슬퍼한 딸이 혀를 깨물고 자살하였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대륙으로부터의 도래인이 아니었겠는가하고 짐작은 하는데 기록이 없어 미루어 생각할 뿐이다. 그 딸이 죽으면서 이곳에 다시는 자기 같은 미인은 태어나지 말 것을 하늘에 빌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이곳 쓰쓰지방에는 그 여자처럼 잘생긴 미인은 다시는 태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다음으로 간 곳이 아유모도시 자연공원, 아유라는 말은 은어라는 말이고, 모도시는 역류한다는 뜻으로 은어가 역류하는 곳이다. 그런데 물길이 흐르는 시내가 거대한 반석으로 이루어져 울산의 작천정처럼 물에 깍인 바위가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공원내의 다소 높은 곳으로 오르는데 길 양옆으로 수국을 색색으로 가꾸어 놓았다. 지금이 수국을 감상하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란 생각이 들었다. 수국을 진정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면 참 좋은 구경거리가 되지 싶었다. 오늘의 일정은 이 정도로 끝내고 숙소로 돌아왔다.
저녁밥을 먹고 일행과 술 한잔씩을 나눈 뒤 귀국해서 이야기 거리도 만들 겸 인근의 술집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대부분 만원이어서 한적해 보이는 가라오케집으로 들어갔다. 가만히 보니 나이가 지긋한 아주머니 한 분과 딸 같은 여자 하나와 어린아이가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어머니와 딸과 손자였다. 딸이 마담 격이었고 어머니는 보조업무를 맡고 있었다. 술은 맥주를 시켰는데 잔이 조금만 비어도 계속 채워주는 식이었다. 딸은 나이가 38세라고 하는데 처녀처럼 보였고 얼굴에 화장을 하지 않아도 아름답게 보였다. 술장사도 전문적인 직업으로 생각하는 철저한 의식이 느껴졌다. 몇 곡 되지 않는 고국의 노래를 부르는 가운데 이국의 밤은 깊어 가고 마담의 어머니의 노래 솜씨가 보통을 넘었다. 숙소로 돌아와 한 방의 명훈 친구에게 '자그마한 카페 마담의 화장기 없는 얼굴, 왔다갔다하는 아이, 어머니의 친절한 응대하며 참 느낌이 좋지'라고 하였더니, '일본에 올 때 마다 이런 신선한 기분 때문에 항상 많은 것을 생각하게 돼' 라는 응답이 돌아왔다. 어느 곳 어디에서나 열심히 살아가며 나름의 가진 소명대로 세상의 한 부분을 성실히 채우는 인간의 보편적인 모습이 가슴으로 다가왔다.
마지막 날, 찾아 간 곳이 지유젠지(수선사) 라고 하는 백제출신 스님이 세운 절이었다. 절의 위치는 바로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에서 불과 오분 거리에 있었다. 그런데 절의 한쪽에 대한인최익현선생순국비라는 비석이 서있다. 나라를 지켜내지 못한 선비의 불충을 굶주림과 꼿꼿한 기개로 보은한 선생의 높은 뜻이 인걸은 갔어도 이곳 궁벽한 이즈하라의 퇴락한 절에 정정하게 서있다.
그 다음 간 곳이 세이산지(서산사)라는 곳이었다. 이곳 서산사는 조선통신사가 묵었던 곳으로 신유한의 기개가 전설처럼 전해져 오는 곳이다. 그리고 맞은 편으로 신유한의 '해유록'에 나와 있는 이즈하라 항구 입구의 立龜(다데가미)바위가 의연히 서 있는데, 지금은 낙석을 우려하여 철갑을 입혀 놓았다. 그리고 유명한 겐소의 입상이 서있는데, 늙어 죽은 겐소의 상을 젊은 날의 아름다운 미남으로 표현해 놓았다. 이 겐소라는 스님은 한일간의 외교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다. 일본 전국을 통일한 풍신수길이 대마도 도주인 종의조를 불러 '조선국왕을 내 앞으로 불러 오라'고 엄명을 내린다. 이에 종의조가 가문의 존립과 풍신수길의 엄명사이에서 노심초사하다가 병으로 죽고, 그의 아들 종의지가 대마도주가 되어 겐소와 의논하여 가짜 일본 국서를 위조하게 된다. 그 내용은 일본이 통일되었으니 통신사를 파견하여 축하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겐소를 일본국왕사로 꾸미고 종의지를 부사로 위장하여 조선으로 왔다. 이의 결과로 조선으로부터 조선통신사가 왔는데 정사에 황윤길, 부사에 김성일이었다.
그리고 서산사의 한쪽 귀퉁이에 김성일의 시비가 서있다. 왠 시비가 이곳 대마도에 서 있다니 참으로 의아한 일이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한편으로 수긍이 가기도 한다. 김성일은 선조에게 풍신수길은 인상이 원숭이를 닮은 소인배라 도저히 조선을 침략을 위인이 아니라고 고변한 바로 그 사람이다. 그 판단이 김성일의 양심에서 나온 소신이었다면 아무도 그것을 나무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당파싸움의 와중에서 나온 상대방을 비방하기 위한 거짓이었다면 비난받아 마땅할 것으로 사료된다. 이 시비는 아마도 그를 기리는 대한민국의 의성 김씨의 문중에서 세운 것으로 추측되는데, 행적비로 하려니 잘못된 판단으로 나라에 국난을 초래한 역사가 무섭고 하여 옹색하게도 시비를 세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무튼 고국으로부터 칭송 받지 못하는 김성일의 행적이 참으로 아쉽다. 그냥 망각 속에 띄워버렸으면 좋았을 것을 후손들의 성의가 고맙기도 하고 딱하기도 하다. 그리고 이 수선사를 지금은 유스호스텔로 이용하고 있는데, 지금은 대대적으로 수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른 곳이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반쇼우인(만송원) 이다. 이 만송원은 종씨 대마도주 19대인 종의지가 1615년 1월 3일에 파란만장했던 48세의 일생을 마치자, 그의 아들인 20대 종의성이 금석성 뒷산에 아버지의 묘를 쓰고는 그의 명복을 빌고자 산밑에 쇼우온지(송음사)라는 절을 지었던 것이 시초였다. 그 뒤 아버지의 법명을 따서 반쇼우인으로 개명하고, 1647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오게 되었다. 그런데 이 묘지는 대단한 것으로, 일본에서 가나자와의 마에다집안의 묘지와 하기의 모리집안의 묘지와 더불어 일본 3대 묘지로 불리고 국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절의 문은 모모야마 양식으로 창건 당시 그대로이며, 현재의 본당과 고리는 1879년에 세워졌다. 정문의 양쪽에 서있는 인왕존은 수호신으로 모셔졌던 것으로 대마도내의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고 전해진다. 그리고 이 만송원에는 도꾸가와 이에야쓰의 영정과 역대 쇼군들의 위패가 함께 모셔져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1616년 75세의 나이로 에도 막부를 열었던 이에야쓰가 죽고, 1645년에 우여곡절 끝에 도쇼오구우(동조궁)라는 신격으로 모셔지게 되면서, 권현당, 어영당에 안치되어 왔던 이 영정과 위패들이 명치유신으로 에도 막부가 무너지자, 때를 같이하여 동조궁 사당이 폐사가 되고 말았는데, 이 때 이곳 만송원에서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조선과의 선린외교정책으로 막부시절 내내 통상의 길을 열어 줘, 대마도를 오랫동안 태평 속의 번영을 누리게 해 준 에도 막부에 대한 보은의 심정으로 종씨들 스스로 이 영정과 위패를 모셔왔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런데 여기에는 슬픈 이야기가 또 하나 있다. 19대 종의지는 당시 소서행장(고니시 유끼나가)의 사위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한참 뒤 도꾸가와 이에야스와 도요또미 히데요시를 신봉하는 이시다 미쓰나리간의 세끼가하라 전투가 벌어지는데, 의리의 남자였던 소서행장은 당연히 미쓰나리 측에 가담하게 된다. 종의지 역시 장인어른의 편에 가담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가문의 존속을 염려한 종의지는 부장을 대신 싸우게 하고는 자신은 적당히 물러서게 된다. 전쟁의 결과 도꾸가와 이에야스 측이 승리하게 되면서 소서행장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종의지는 자기의 아내 '고니시 마리아'를 버리고 이혼하면서 전쟁에서의 미쓰나라 측에의 가담이 장인과의 의리 때문에 그렇게 되었음을 호소하게 된다. 이에 도꾸가와 이에야쓰는 온정을 베풀고 나아가 쇄국정책으로 일관하였던 에도 시대에도 조선과 대마도주간의 무역만은 특별한 예외조치로 인정하게 된다. 이런 역사를 아는 종씨의 후손들이 에도 막부가 망하고 갈곳 없는 쇼군들의 위패와 이에야쓰의 영정을 이곳 만송원으로 모시게 된 것으로 사료된다.
그런데 이곳에는 유명한 제기가 한 벌 있는데, 보는 순간 '악'소리가 나는 아름답고 장엄한 모습의 제기였다. 이 제기는 향료와 화분과 거북이 등에 올라탄 학 모양의 촛대의 삼구족의 제기로 받침도 참으로 화려하다. 만약에 우리 나라에 이것이 있었으면 문화재로 충분히 지정 되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 제기는 조선의 국왕이 선린외교로 왜구의 준동을 막고 조선과의 국교를 맺는데 헌신한 19대 대마도주 종의지의 죽음을 애도하여 하사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이 언제 어떤 연유로 이곳에 왔는지는 구체적인 기록이 불명확하다. 제기의 특별한 형상과, 일본을 상징하는 거북과 조선을 상징하는 해태의 교묘한 배치 등이 숨겨진 의미가 심장한 것으로 사료된다. 원래는 세 틀이 있었는데 대동아전쟁 때 두 틀은 공출을 당해 현재 이 한 틀만 남았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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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길을 돌려 천천히 만송원의 묘역으로 올랐다. 장엄하고 긴 석등이 도열한 계단을 오른다. 내가 대마도에서 본 것 중 가장 가슴에 남는 것으로 감동을 자아내기에 충분하였다. 일본의 장례문화는 화장을 하여 골분을 항아리에 넣어 돌탑 속에 보관하는 문화로서 우리와는 다르다. 돌계단을 올라가면 역대 도주와 그 가족들의 묘석이 줄지어져 있는데, 상단, 중단, 하단으로 나누어지며, 하단에는 종씨 일족 및 종씨 가에서 출가한 사람, 중단에는 측실과 아동, 상단에는 역대 도주들과 정부인의 묘석이 있다. 특히 대마도의 영고성쇠는 그들의 무덤 크기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데, 가장 큰 무덤은 전쟁이 끝나고 평화로운 시기에 살다간 20대 종의성(소오 요시나리)와 21대 도주 종의진(소오 요시자네)이며, 임진왜란 때 선봉장으로 나서야 했던 소오 요시토시(종의지) 의 무덤이 가장 작다. 역대 도주들은 큰일이 있을 때마다 종의지의 무덤 앞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고 하는데, 조선과의 평화를 최우선시하라는 그의 유언 때문이었다고 한다. 크고 작은 여러 석조물들이 즐비하게 나열되어 있는데, 문득 깨달은 생각은 모든 구조물을 일률적으로 해 놓았다면 얼마나 멋이 없을까하는 것이었다. 저마다 다른 모양으로 제각각의 맵씨를 자랑하고 있는데 작은 것은 작은 것대로 큰 것은 큰 것대로의 특색이 있다. 아무튼 어둡고 칙칙하고 습기 찬 그런 곳이지만 죽은 자를 위한 산 자의 배려가 훈훈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종씨 집안이 대마도를 지배하며 머물렀던 곳인 금석성으로 향하였다. 건물은 모두 망실되고 돌로 된 성벽만 남았다. 크기가 상당한데 한 쪽 켠에 '이왕가종백작가어결혼봉축기념비'라는 비석이 눈에 띈다. 이것은 고종으로 그토록 사랑하였다던 덕혜옹주와 대마도주의 결혼을 기념하는 비석이다. 1931년 5월 결혼하였고, 그 해 11월에 단 한번 대마도를 방문하였다고 한다. 두 부부는 딸 정혜를 낳고 1955년 이혼하였으며 덕혜옹주는 1961년 귀국하여 1989년 낙선제에서 별세하였다. 비석의 내용이 이왕가라고 표현하여 조선을 비하한 것이 눈에 썩 거슬린다. | 이상으로 모든 여행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부산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이곳으로 올 때 보다 파도도 잔잔하고 물결도 한결 푸르렀다. 일행 중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수런대며 술을 매개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문득 '저 술이야 말로 사람과 사람을 연계시켜주는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며, 대마도야말로 조선과 일본을 매개한 술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도시대 쇄국정책을 강하게 추진하였던 막부에서 유일하게 조선과의 교역만은 대마도주로 하여금 할 수 있도록 조치한 것만 보아도 대마도는 본토와 조선과의 매개역할을 톡톡히 한 것으로 보아진다. 우리 조상들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당하고 나서도 삼백여 년이 지난 뒤 일본에 또 당해야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 온갖 신 문물을 전해주었던 아버지와도 같은 나라가 왜 당해야 했을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임진왜란이 끝나고 난 뒤 이씨조선은 망했어야 했다. 대신 새로운 헤게모니를 대체할 세력이 나와 새 나라를 세워 청신하고 획기적인 기풍으로 강성하고 담대한 나라를 세웠어야 했는데, 그만한 힘을 추진할 세력이 없었다. 일본이나 유럽의 여러 나라를 보면 중세라고 하여 봉건체제하의 영주들이 독자적인 사법권과 행정권을 행사하며 독자적인 영역의 지배권을 행사하였는데, 조선은 관료제에 의한 중앙집권적 성격이 강하다보니 이를 대체할 만한 세력이 없었다. 말하자면 대안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조선에 과연 중세가 있었는가하는 것이 쟁점이 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도 구체제가 그대로 유지되다보니 뿌리깊은 파벌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구태의연한 정치형태가 답습될 수밖에 없었다고 사료된다.
그리고 가야,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발해의 많은 유민들이 흘러 들어가 형성하였을 일본, 아마도 그 주류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일 것이다. 이는 일본 황실의 뿌리가 도래인 임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을 보아도 자명하다. 그러나 떠나온 곳과 과감히 단절하고 오늘의 일본을 형성한 그들의 피와 땀의 결실은 아무리 칭찬해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종교의 자유와 새로운 신천지를 찾아 신대륙에 정착하였던 유럽의 이주민들이 이룬 오늘의 미국을 보면서 떠남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오기도 한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들 모두는 고향을 떠나온 실향민들이다. 인류의 모태의 땅 아프리카로부터 뿔뿔히 흩어져 끝도없는 여행을 경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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