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대마도에 설치된 충숙공할아버지 공적비 건립과정
가. 통신사이예공적비 건립 경과보고
충숙공이예선양회 공적비위원장 이부열
1. 공적비 건립의 발의
저는 충숙공이예선양회 공적비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아 지금까지 공적비 건립을 위한 준비를 해 왔습니다. 이제 공적비가 이렇게 웅장한 모습으로 건립되어 제막식에 임하게 되니 참으로 깊은 감회를 느끼게 됩니다. 충숙공 이예 선생은 대한민국 문화관광부에 의해 2005년 2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었습니다. 문화인물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공적비를 건립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이로부터 9개월에 걸친 준비의 긴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간략하게 그 동안의 경과를 보고 드리겠습니다.
2. 협의 및 계약의 과정
한국 측에서 6회에 걸쳐 일본을 방문하고 일본 측에서 1회 한국을 방문하는 과정에서 협의 및 계약이 이루어졌습니다. 한국 측에서는 주로 정영호 선생, 이수봉 선생, 이수원 선생, 이명훈 선생, 그리고 제가 주로 참여했으며, 일본 측에서는 나가도메 선생, 후지가미 선생, 다찌바나 선생께서 주로 참여하셨습니다.
3. 공적비문 음각 및 건립의 과정
2005년 11월 10일에 가마다 석재점에서 비문의 음각이 시작되었으며, 11월 18일에는 원통사 화단 전면에 공적비가 설치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1월 21일 오늘 역사적인 제막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나. 대마도 원통사 충숙공 공적비
(쓰시마=연합뉴스) 장영은 기자 = 일본 쓰시마(對馬)에는 우리나라 선조의 유적과 한국과 관련된 장소가 적지 않아 쓰시마를 찾는 한국인 관광객에게 일본과 한국의 역사를 되새겨 보는 좋은 계기가 되고 있다.
우선 역사서를 통해 잘 알려진 신라 충신 박제상의 순국비가 쓰시마 북부 상미 미나토에 위치하고 있다.
박제상은 신라 눌지왕 때 인질로 일본에 잡혀간 왕제 미사흔을 구해 신라로 돌아가게 한 뒤 자신은 일본에서 순국했고, 남편 박제상을 기다리던 부인이 망부석이 된 이야기로 유명하다.
쓰시마내 박제상 순국비가 있는데 이는 1988년 8월 한국의 황수영, 정영호씨가 일본 측 인사 등과 힘을 합해 세운 것으로 쓰시마내 선조의 유적으로 많은 한국 관광객이 최근 찾고 있다는 것.
또 충숙공 이예 선생의 공적비가 지난해 이예 선생 후손들에 의해 쓰시마의 미네쪼에 있는 원통사라는 절에 세워져 있다. 울산의 학성이씨인 이예 선생은 1373년 태어나 일생을 외교사절로 쓰시마 등지를 다녔다.
이예 선생은 당시 쓰시마에 억류된 조선인을 수차례 송환하고 조선통신사로서도 쓰시마에 방문했고 세종 때 이종무 장군이 쓰시마를 정벌할 때도 쓰시마를 잘 아는 선생이 앞장서는 등 일본 외교사절로 왕성한 활동을 했다.
또 쓰시마 이즈하라항 내 위치한 수선사라는 절은 백제 시대 우리나라 비구니가 지은 사찰이 있는데 이곳에 학자이자 항일의병장으로 유명한 면암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가 있다.
면암 선생이 항일 의병운동을 하다 일본군에게 잡혀 쓰시마로 끌려가 일본이 주는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단식하면서 순국, 이곳 수선사에서 장례를 치렀고 부산으로 이송되기 전 이 사찰에 머물렀다고 전해지고 있다.
경내 일본인들의 무덤 옆에 위치한 면암 선생의 순국비는 1986년 8월3일 한일 양국의 유지들이 힘을 모아 세웠다고 한다.
한국 전망대라는 곳은 쓰시마 내에서 부산이 보이는 곳으로 한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고 이곳에서는 한국에서 가져온 휴대폰으로 한국에서 쓰는 것처럼 똑같이 한국과 통화할 수도 있다.
옛날 일제 강점기 때 쓰시마에 잡혀 온 한국인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설이나 추석 명절이 되면 이곳에 올라와 한국 땅을 바라보며 망향의 서러움을 달래기도 했다고 한다.
전망대 옆에는 108명의 조선사절단인 조선역관 일행이 쓰시마에 입항하기 전 갑자기 불어닥친 폭풍에 휘말려 모두 죽었는데 이들의 영령을 위로하는 추모비가 한일 공동으로 1991년 세워졌다.
이국 전망대라는 곳도 있는데 이국인 한국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여서 이국 전망대라고 한다.
쓰시마 이즈하라 시내에는 서산사라는 사찰도 있는데 이곳은 우리나라 통신사들이 쓰시마에 들릴 때 항상 머물던 곳이라고 유명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일본을 탐색하기 위해 떠났던 황윤길과 김성일도 여기서 머물렀고, 1580년 임진왜란을 막기 위해 쓰시마 영주와 함께 국서를 위조했던 일본의 유명한 승 겐소도 이 사찰에 머물렀고 그의 목상이 있기도 하다.
이 밖에 1912년 한일 합방이라는 굴욕의 세월 속에 고종이 환갑 때 낳은 덕혜옹주와 관련된 덕혜옹주 결혼기념비도 이즈하라 시내에 있다.
덕혜옹주는 일본에 의해 14살 때 강제로 일본으로 가게 되고 19살에 쓰시마 도주의 아들과 강압 결혼한 뒤 결혼생활이 오래지 않아 정신병을 얻어 해방 후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정신을 찾지 못하고 결국 창덕궁 낙선재에서 여생을 보내다 불과 25년 전에 죽었는데 결혼 당시 쓰시마에 살았던 조선인이 축하하는 기념비를 세웠던 것이다.
가. 통신사이예공적비 건립 경과보고
충숙공이예선양회 공적비위원장 이부열
1. 공적비 건립의 발의
저는 충숙공이예선양회 공적비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아 지금까지 공적비 건립을 위한 준비를 해 왔습니다. 이제 공적비가 이렇게 웅장한 모습으로 건립되어 제막식에 임하게 되니 참으로 깊은 감회를 느끼게 됩니다. 충숙공 이예 선생은 대한민국 문화관광부에 의해 2005년 2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었습니다. 문화인물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공적비를 건립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이로부터 9개월에 걸친 준비의 긴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간략하게 그 동안의 경과를 보고 드리겠습니다.
2. 협의 및 계약의 과정
한국 측에서 6회에 걸쳐 일본을 방문하고 일본 측에서 1회 한국을 방문하는 과정에서 협의 및 계약이 이루어졌습니다. 한국 측에서는 주로 정영호 선생, 이수봉 선생, 이수원 선생, 이명훈 선생, 그리고 제가 주로 참여했으며, 일본 측에서는 나가도메 선생, 후지가미 선생, 다찌바나 선생께서 주로 참여하셨습니다.
3. 공적비문 음각 및 건립의 과정
2005년 11월 10일에 가마다 석재점에서 비문의 음각이 시작되었으며, 11월 18일에는 원통사 화단 전면에 공적비가 설치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1월 21일 오늘 역사적인 제막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나. 대마도 원통사 충숙공 공적비
(쓰시마=연합뉴스) 장영은 기자 = 일본 쓰시마(對馬)에는 우리나라 선조의 유적과 한국과 관련된 장소가 적지 않아 쓰시마를 찾는 한국인 관광객에게 일본과 한국의 역사를 되새겨 보는 좋은 계기가 되고 있다.
우선 역사서를 통해 잘 알려진 신라 충신 박제상의 순국비가 쓰시마 북부 상미 미나토에 위치하고 있다.
박제상은 신라 눌지왕 때 인질로 일본에 잡혀간 왕제 미사흔을 구해 신라로 돌아가게 한 뒤 자신은 일본에서 순국했고, 남편 박제상을 기다리던 부인이 망부석이 된 이야기로 유명하다.
쓰시마내 박제상 순국비가 있는데 이는 1988년 8월 한국의 황수영, 정영호씨가 일본 측 인사 등과 힘을 합해 세운 것으로 쓰시마내 선조의 유적으로 많은 한국 관광객이 최근 찾고 있다는 것.
또 충숙공 이예 선생의 공적비가 지난해 이예 선생 후손들에 의해 쓰시마의 미네쪼에 있는 원통사라는 절에 세워져 있다. 울산의 학성이씨인 이예 선생은 1373년 태어나 일생을 외교사절로 쓰시마 등지를 다녔다.
이예 선생은 당시 쓰시마에 억류된 조선인을 수차례 송환하고 조선통신사로서도 쓰시마에 방문했고 세종 때 이종무 장군이 쓰시마를 정벌할 때도 쓰시마를 잘 아는 선생이 앞장서는 등 일본 외교사절로 왕성한 활동을 했다.
또 쓰시마 이즈하라항 내 위치한 수선사라는 절은 백제 시대 우리나라 비구니가 지은 사찰이 있는데 이곳에 학자이자 항일의병장으로 유명한 면암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가 있다.
면암 선생이 항일 의병운동을 하다 일본군에게 잡혀 쓰시마로 끌려가 일본이 주는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단식하면서 순국, 이곳 수선사에서 장례를 치렀고 부산으로 이송되기 전 이 사찰에 머물렀다고 전해지고 있다.
경내 일본인들의 무덤 옆에 위치한 면암 선생의 순국비는 1986년 8월3일 한일 양국의 유지들이 힘을 모아 세웠다고 한다.
한국 전망대라는 곳은 쓰시마 내에서 부산이 보이는 곳으로 한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고 이곳에서는 한국에서 가져온 휴대폰으로 한국에서 쓰는 것처럼 똑같이 한국과 통화할 수도 있다.
옛날 일제 강점기 때 쓰시마에 잡혀 온 한국인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설이나 추석 명절이 되면 이곳에 올라와 한국 땅을 바라보며 망향의 서러움을 달래기도 했다고 한다.
전망대 옆에는 108명의 조선사절단인 조선역관 일행이 쓰시마에 입항하기 전 갑자기 불어닥친 폭풍에 휘말려 모두 죽었는데 이들의 영령을 위로하는 추모비가 한일 공동으로 1991년 세워졌다.
이국 전망대라는 곳도 있는데 이국인 한국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여서 이국 전망대라고 한다.
쓰시마 이즈하라 시내에는 서산사라는 사찰도 있는데 이곳은 우리나라 통신사들이 쓰시마에 들릴 때 항상 머물던 곳이라고 유명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일본을 탐색하기 위해 떠났던 황윤길과 김성일도 여기서 머물렀고, 1580년 임진왜란을 막기 위해 쓰시마 영주와 함께 국서를 위조했던 일본의 유명한 승 겐소도 이 사찰에 머물렀고 그의 목상이 있기도 하다.
이 밖에 1912년 한일 합방이라는 굴욕의 세월 속에 고종이 환갑 때 낳은 덕혜옹주와 관련된 덕혜옹주 결혼기념비도 이즈하라 시내에 있다.
덕혜옹주는 일본에 의해 14살 때 강제로 일본으로 가게 되고 19살에 쓰시마 도주의 아들과 강압 결혼한 뒤 결혼생활이 오래지 않아 정신병을 얻어 해방 후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정신을 찾지 못하고 결국 창덕궁 낙선재에서 여생을 보내다 불과 25년 전에 죽었는데 결혼 당시 쓰시마에 살았던 조선인이 축하하는 기념비를 세웠던 것이다.
다. 충숙공 공적비 소개
울산 출신으로 조선 전기 대일외교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던 충숙공 이예(李藝.1373-1445) 선생의 업적을 기록한 공적비가 일본 쓰시마(對馬)도에 세워졌다.
충숙공 이예 선양회(회장 이두철)는 지난 21일 쓰시마 원통사에서 선양회 관계자와 학성 이씨 문중 후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이예 선생 공적비 제막식을 가졌다고 23일 밝혔다.
선양회는 지난해 12월 이예 선생이 문화관광부의 '2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된 뒤 공적비를 건립키로 하고 수차례 쓰시마를 방문해 건립부지와 공적비의 규모 등을 일본 측과 협의했다.
원통사는 쓰시마 미네쪼(峰町)에 위치한 사찰로 1408년 이예 선생의 대일외교 주요 협력자였던 당시 쓰시마도주가 지었으며, 이후 대일외교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원통사 정문 화단 10여평 부지에 세워진 공적비는 주비 1개와 부비 2개가 붙어 있는 형태로, 3개 비석의 가로는 5m, 주비는 높이 3m50㎝, 부비는 높이 3m 규모다.
충숙공 이예 선양회 측은 "600년 전 울산 출신으로 대일외교를 이끌었던 이예 선생 공적비가 일본 현지에 세워졌다"며 "현지 주민들의 자발적인 동의로 가능했던 이번 공적비 건립이 한일 민간외교의 새로운 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