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앞으로 이분 아드님들은 금시발복하여 머지않아 고관대작이 속출할 것이니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이곳에 재실을 짓지 말고 근처에 있는 개울에는 다리를 놓지 말라."
우의정 이인손(李仁孫 1395~1463)이 죽어 장례를 치를 때 지관이 이르는 말이었다.
지관이 잡아준 그 명당에 이인손을 모셨다.
그 지관의 말대로 명당발복이 된 탓인지 그 후로도 정승, 판서, 고관대작들이 줄줄이 나온다.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이인손은 슬하에는 이른바 오극자손(五克子孫)을 두었다.
극배(克培), 극감(克堪), 극증(克增), 극돈(克墩), 극균(克均)의 다섯 아들이다.
이인손의 큰아들 이극배가 영의정 둘째 극감이 형조판서 셋째 극증이 좌참찬 넷째 극돈은 좌찬성
다섯째 극균은 좌의정이 되어 세칭 오군(五君)집으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그 후손들이 그렇게 고관대작이 되다보니 아버님의 묘소에 갈때마다 신발을 벗고 물을건너야 했다.
성묘시 비라도 올라치면 비 피할곳이 없는지라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였다.
지관의 간곡한 부탁을 잊고 형제들이 의논하여 앞 냇가에 다리를 놓았고 제실(祭室)도 큼지막하게 지었다.

세월이 흘렀다. 세종의 영릉(대모산 자락 헌릉 옆)에 물이 고여 천장해야 했다.
선발된 지관들이 세종대왕 새 능자리를 찾기위해 한양에서 백리안에 있는 땅을 모조리 찾아보았다.
마땅한 자리가 없었다. 임금의 능은 원칙적으로 도성에서 1백리를 넘지 않아야 했다.
이는 임금이 성묘하러 행차하였다가 하루만에 다녀올수 있는 거리가 1백리이었다.
마침 여주 이천 쪽으로 새로운 능자리를 찾으러 나온 안효례 지관 일행은 며칠을 돌아다녔다.
현재 영릉 부근을 지나던중 갑자기 억수같은 소낙비를 만났다.
그곳은 집한채 없는 온통 논과 밭뿐인 인적이 드문 호젖한 산골길이었다.
일행은 황급한 나머지 비를 피할 곳을 두리번 거리며 찾던중
마침 저멀리 다리 건너에 제실(祭室)이 눈에 들어왔다.
옳커니 우선 소낙비를 피할 요량으로 다리를 건너 뛰어가 제실에서 비를 피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인가?
소낙비가 그쳐 밖으로 나와 보니 제실(祭室)위에 있는 묘가 빗속에서도 서기가 비추는 것이었다.
눈을 부릅뜨고 가까이 가서 보니 보면 볼수록 천하의 대명당이었다.
예종은 여러 날을 고심끝에 인간적인 호소를 하기로 하고,
당시 평안도 관찰사로 있든 이극배(이인손의 맏아들)를 조정으로 불려들였다.
원래 왕은 용상(龍床)에서 말하는것이 상례이거늘 옆에 돛자리를 깔아 이 극배를 앉히고 친히 용상에서 내려와,
"경은 얼마나 복이 많아서 선친의 산소를 대명당에 모시었소?"
짐은 삼천리 강토를 가졌건만 조부 세종대왕릉을 편히 쉴곳을 마련 못했으니 경들이 부럽기만 할따름이오."
수차례 애원하다싶이 하니 바로 명당터를 양보해달라는 뜻이 아닌가?
왕이 어명을 직접내리면 편할탠데 양보하란 말한마디 없이 이극배의 아픈곳을 찔러왔다.
신하된 도리로 왕을 불편케하는게 불충이 아닌가?
아우들을 불러 상의한끝에 선친의 묘터를 내놓기에 이르렀다.
왕릉은 도성 100리 안에 있어야 한다는 원칙에서 벗어나 100리 보다
훨씬 멀었지만 물길로 가면 하루거리라는 논리로 합리화하였으며,
예종의 기쁨은 말할수 없었고 좋은 날을 택해 山役(산역)을 시작했다.
광주 이씨 가문에는 사패지지(賜牌之地)증을 하사하고 삼천리 강토 어디던 좋으니 묘를 쓰라 일렀다.
"이 자리에서 연을 날려 하늘 높이 떠오르거든 연줄을 끊고 연이 떨어진 자리에다 이장하라!"
이장을 위해서 이인손의묘를 파자 유골 밑에 나온 비기(秘記)이다.
그 비기대로 실행하자 연은 약 십리쯤 날아가다 떨어졌다고 한다.
이렇게 연이 날아가서 떨어진 자리에 묘를 쓴 이인손의 묘는 여주읍 연하산 부근에 있다.
이 동네 이름을 연주리(延注里 지금의 여주군 능서면 신지리)라 부르게 되었다.
연주리는 연줄이 떨어진 동네라는 뜻이다.
영릉 자리를 빼앗긴 광주 이씨 이인손의 후손들은 새로운 묘 자리가 발복하기 까지 수많은 화를 당했다고 한다.
이인손의 막내아들 이극균은 좌의정에 오른 뒤 연산군의 폭정을 바로잡기 위해 애쓰다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는 나중에는 부관참시까지 당하였다. 이극균의 아들인 남양 부사 이세준과 이극감의 아들 이세좌는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가지고 갔다는 죄명으로 처형당했다. 이세좌의 아들 수원, 수형, 수의, 수정 등 4형제는 참수 당했고 세좌의 동생 이세걸도
사약을 받고 죽는다.
이른바 갑자사화(甲子士禍)로 광주이씨 이인손의 후손들은 30여명이 화를 당했다고 한다.
광주 이씨 집안은 쑥대밭이 되다시피 했지만 얼마 후 다시 번창하여 명종때 영의정을 지낸 이준경(李浚慶)을 비롯하여
선조 때 오성(鰲城)과 한음(漢陰)으로 유명한 이덕형(李德馨) 역시 광주이씨이며 영의정을 지냈으며
예조참판 이극기, 이조참판 이중경 병조판서 이윤우, 판서 이원정, 대사성 이정립 등이 후날 가문을 빛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