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0월 11일 밤 10시경. 이웃집에 볼 일이 있어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우측 다리가 옮겨놓을 수 없을 정도로 마비가 되어 마루밑으로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친구에게 업혀서 집으로 온 저는 4,5개월 동안 정신을 잃고 누워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리하여 가족들은 좋다는 약이며 용하다는 한의사의 침을 동원해보았으나 효과가 없었습니다. 계속되는 치료에도 진전이 없자 가족들과 저는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다 영영 불구가 되는 것이 아닌가 잔뜩 겁을 먹었습니다. 누군가 충청도 계룡산 근처에 이름난 한의원이 있다고 했습니다. 한 가닥 기대를 품고 그곳으로 달려가 6,7개월 동안 침을 맞으며 약을 썼습니다. 그러나 효험이 없었습니다. 갈수록 고통이 심해졌습니다. 게다가 가장이 가장으로서의 임무를 다하지 못했던 저의 가정은 생계수단이 끊기고 병 치료에 막대한 돈을 들이면서 형편이 갑자기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안타깝고 절박했지만 저는 마침내 병을 고치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집으로 올라올 계획으로 대전역으로 나갔습니다.
역에 나와 생각을 하니 대구 아래 경산역 근처에 처제가 살고 있는 생각이 들어 여기까지 온 김에 마지막으로 처제네 집에나 들러볼까 해서 열차를 타고 경산으로 향했습니다.
처제 집에서 하루 저녁을 지내고 그 다음날 아침을 먹으려 하는 참에 처제가 저를 불렀습니다.
“형부, 우리 집에 일주일만 있다 가세요. 그러면 옛날처럼 완전히 회복시켜 보내드릴께요.”
제 사정이 딱했던지 처제는 위안 삼아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대는 안했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돈 안들이고 고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날부터 교회에서 7,8명의 여인네들이 와서 방안에 둘러앉아 무안가를 외우며 제 아픈 곳을 안수한답시고 찰싹찰싹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를 보냈을 때였습니다. 그네들 말이 ‘이분은 주님께서 받지 않아서 안되겠습니다’ 하면서 고개를 저었습니다. 기대를 갖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낙담이 컸습니다. 저도 하는 수 없이 내일 집으로 가서 제가 마음먹은 대로 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픈 곳은 한두 군데가 아니었습니다. 중풍으로 수족을 못쓰지, 디스크로 허리 못쓰지, 혈압으로 중풍 일어날 때 안면마비가 되어 우측 눈까지 보질 못하였습니다. 또 십이지장 궤양을 많이 앓아서 무엇이든지 먹기만 하면 속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매일 죽으로 연명하고 있었는데,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아픈 데가 다섯 군데나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교인들도 포기하고 돌아가고 처제 또한 실망의 빛을 감추지 못할 때 저는 처제네 집을 나와 열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왜 대전역에서 내렸는지 모르겠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내가 살아봤자 모두에게 짐만 된다는 생각이 머리를 온통 감쌌습니다. 대전 시내 이곳저곳을 지팡이에 의지한 채 돌아다니며 약국을 찾았습니다. 약국에서마다 수면제를 조금씩 구입했습니다. 한 입에 털어넣고 죽을 생각이었습니다. 그것도 잠을 통 못이뤄서 그런다며 강도 높은 수면제로만 조금씩 구했습니다.
이렇게 대전 시내를 다 돌다시피 하고 청주를 향해 갔습니다. 여기서도 약국을 다 돌아다닌 후 또 진천 시내도 돌고나니 수면제가 약 30알이 조금 넘었습니다. 이걸 한 입에 다 털어넣으면 고통도 끝나고 모든 사람들도 짐에서 벗어나겠지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들어서니 제 아내는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저를 반겼습니다. 저는 준비해온 약을 아내 모르게 서랍 밑에다 숨겨두고 날짜를 정해놓았습니다. 그 날짜는 음력 10월 11일이었습니다. 병이 든지 꼭 2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날까지 회복할 기미가 없을 시에는 준비해온 약을 사용하리라 마음먹었습니다.
병든 저보다 저를 위해 고생하는 아내 얼굴을 쳐다보면 가슴이 더 미어졌습니다. 살림살이하느라 고통받으면서 없는 형편에 어떻게 해서든 제 치료비와 약값을 대기 위해 시집올 때 그 달덩이 같던 얼굴이 이젠 반쪽이 되어 있었습니다. 측은하고 불쌍해 고개를 들고 아내와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습니다.
저와 결혼한 이후 신혼의 행복했던 단 꿈이 채 가시기도 전 남편의 병치레에 헌신한 아내가 그날따라 왜 그리 측은해 보이던지요. 그런 아내를 위해 제가 해준 일이 뭐가 있습니까. 오히려 빚만 늘게 했습니다. 더이상 제가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은 아내에게 몹쓸 짓만 하는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전 죽어야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혔습니다.
처음에 몇달은 제가 전혀 꼼짝을 못하니까 아내가 곁에서 저를 간호했습니다. 그러면서 세월은 물 흐르듯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호시탐탐 제가 가야 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하루는 아내가 제 옆에 오더니 저에게 단단히 다짐을 받을 것이 있다면서 잘 들으라고 하였습니다.
아내는 특히 당시 제 작은 바램이었던 막내아들 졸업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으려면 자기 말을 명심해서 들어야 한다고 몇번이나 당부하며 말했습니다. 평소 아내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부담을 가지고 있던 저는 돈 들어가는 일은 아무리 좋은 일도 못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내가 말했습니다.
“내 말은 돈이 아니라 당신 마음입니다. 부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절에 들어가서 기도정진을 열심히 했으면 합니다. 그러면 부처님의 영험을 반드시 얻어서 회복할 것입니다.”
저는 혼자 곰곰히 생각해보았습니다. 평생 죄만 지으면서 살아온 접니다. 솔직히 영험은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죽기로 마음먹은 이상 죽기 전에 평생 지은 죄를 참회하는 것도 인간의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죽기로 작정한 D데이는 한달 정도 남아 있었습니다.
저는 아내의 말에 흔쾌히 공감을 표시했습니다. 아내는 이내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아내는 무엇 때문에 그리 반갑고 고마워했던지 금방 반기며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준비를 해줄테니 내일 당장 충북 단양에 있는 구인사로 떠나도록 하세요.”
그리곤 구인사 가는 약도를 그려주며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구인사는 기도비도 싸고 뭐든지 지은 죄를 참회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기도하면 한 가지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약도를 품에 지닌 채 봇짐을 어깨에 짊어지고 그 이튿날 구인사를 향하여 출발하였습니다. 이 길이 절망의 문턱에서 희망과 행복으로 나아가는 극적인 선택이었다는 사실은 뒤에 피부로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날은 1989년 음력 10월 5일이었습니다. 영춘강을 건너 구인사 주차장에서 내려 올라가는데 건강 상태가 안좋았으므로 중간중간 조금씩 쉬다가 겨우겨우 사천왕문에 당도하였습니다. 사천왕문 2층에서 인사하고 간신히 올라가니 접수실이 눈 앞에 보였습니다.
한달 접수를 해달라 하니 접수실 비구니스님께서 4박 5일을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비구니스님은 두번째부터 와서 열심히 기도하면 연장을 시켜주겠다고 했습니다. 할 수 없이 4박 5일 기도표를 달고 3층 기도실을 찾게 되었습니다. 3층 기도실에 가서 아픈 허리를 벽에 기대고 한복판에 있는 텔레비전 옆 벽 밑에 자리를 정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비록 아픈 몸이었지만 법당, 관음전, 삼보당을 차례로 찾아다니면서 인사참배를 다 마치고 식당에 가서 저녁 공양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흰 죽이 나왔습니다. 속이 아파서 밥을 어찌 먹을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마침 흰 죽이 나와 기쁜 마음으로 한 그릇을 비웠습니다.
그날 밤 처음으로 기도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기도도 잘 안되고 짜증만 났습니다. 나는 그럴 적마다 부처님께 이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부처님, 저는 갑술생 목영태이옵니다. 지난 날에 알게 모르게 지은 죄를 널리 용서하시고 깨끗하게 소생시켜주시옵소서.’
진심으로 참회하며 부처님의 가피를 구했습니다. 그렇지만 기도에 들어가 몇분간은 잘 되는가 싶다가도 또다시 잡념과 짜증만이 났습니다. 진전이 없는 것 같아 답답했습니다. 차라리 환경을 바꿔 관음전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거기에서도 법당에서와 같이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기도에 몰두할 수 없었습니다. 무언가 풀릴 것 같은데도 제 자리였던 것입니다. 몸은 더욱 아파왔습니다. 남 몰래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이렇게 어느덧 시간이 흘러 기도시간이 다 지나고 목탁소리가 들렸습니다. 취침시간을 알리는 목탁이었습니다. 눈을 조금 붙인 후 일어나 아침공양을 마치고 잠시 쉬고 있는데, 구인사에 처음 온 신도들은 접수실로 모이라는 방송이 들려왔습니다.
접수실로 갔습니다. 거기에서 난생 처음 스님의 법문을 들었습니다. 스님의 법문은 구구절절이 나의 가슴과 머리에 와 박혔습니다. 전 불자로 마지막 삶을 불태워야 한다고 다짐했습니다. 천태종도가 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이날이 1989년 음력 10월 6일 되는 날이었습니다.
이튿날도 기도를 하다가 말다가 하면서 하루를 보내는데, 저녁 공양을 마치고 나니 처음 오신 신도분들께서는 삼보당으로 모이라는 방송이 있었습니다. 삼보당에 가보니 큰스님께 친견을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큰스님 친견에 앞서 안내하는 스님들께서 많은 소원 중 한 가지만을 말씀드리라고 해서 도대체 무슨 소원을 말씀드릴까 고민하였습니다.
그런 끝에 사람이 몸이 아프면 아무것도 못한다는 생각에서 큰스님 전에서 ‘저는 십이지장 궤양을 여러 해에 걸쳐 앓았기 때문에 속이 아파서 밥을 못먹습니다’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큰스님께서는 ‘구기자와 생강을 복용하도록 하라’고 대명을 내리셨습니다.
큰스님을 친견하고 난 이후에도 여전히 밤에 기도를 하려면 이래저래 기도가 안돼서 법당을 자주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법당에 다녀오다가도 몇번이나 넘어져 굴러떨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가슴에 명찰을 만들어 기도표 밑에 달고 다녔습니다. 그 이유는 만약 중풍이 재발하여 제가 쓰러지게 된다면 그 명찰을 보고 집으로 연락을 좀 해달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저는 병이 완쾌된 지금도 그 명찰을 간직하고 다닙니다.
그렇게 처음 기도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큰스님의 대명대로 약을 복용하면서 4박 5일씩 3차에 걸쳐 구인사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기도와 번뇌망상으로 시간을 보내고 새벽에 잠이 들었는데 꿈을 꿨습니다.
제가 기도를 하고 있는데 어떤 노스님이 3층 기도실 문을 열고 제 이름 석자를 부르며 나오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따라 나가보니 큰 화장실 앞으로 저를 끌고 가시더니 말씀하셨습니다.
“저 화장실 첫번째 칸에 들어가 변을 많이 보고 나오너라.”
때마침 저 역시 변이 보고 싶었을 때였습니다. 속이 다 후련할 만큼 변을 다 보고 나오니 그때까지 밖에 서 노스님이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전 말했습니다.
“스님, 다 보고 나왔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밥을 잘 먹을 것이다.”
밥을 잘 먹는다는데 기뻤지만 욕심을 더 내보았습니다.
“대단히 고맙습니다만, 마비로 잘 못쓰는 팔 다리는 어떻게 합니까?”
스님은 이렇게 대답해주셨습니다.
“그곳에 백번 올라가면 나을 것이다.”
그러시고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셨습니다.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갑자기 화장실에 급히 가고 싶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급히 화장실에 가서 일을 보려 하는데, 이왕이면 그래도 꿈에서 들어갔던 첫번째 화장실에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꿈에서와 마찬가지로 일을 보고 나와서 곰곰히 생각했습니다. 우선 밥을 잘 먹을 수 있다는 말에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날부터는 죽 대신 밥을 조금씩 먹기 시작했습니다. 실로 나로선 경이로운 일이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밥을 먹었는데도 속이 편했습니다. 신기하다 못해 기적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으론 꿈에서 본 노스님께 한없는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점은 도대체 어디를 백번 이상 올라가야 팔 다리가 안아픈지 정말 모를 일이었습니다. 아직은 처음이라 그곳을 잘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실로 답답하고 막막했습니다. 소백산 꼭대기를 말씀하시는 건지 궁금한 마음으로 고민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때가 음력 11월이니 몹시 추운 때여서 옷을 두툼하게 입고 나갔습니다. 3층 기도실 앞 구름다리에서 젊은 처사들 3,4명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걸어오는데 얼핏 들으니 ‘적멸보궁에 올라갔다 오면 땀이 많이 나와’ 대충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지난번 꿈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혹시나 하고 물어보았습니다.
“적멸보궁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그 중 한 사람이 나서서 일러주었습니다.
“식당 뒤쪽으로 쭉 올라가면 길이 있는데, 올라가면 큰 산소가 모셔져 있습니다. 삼보당에 계시던 대조사님 산소인데 그곳이 적멸보궁입니다.”
그 다음날부터 준비를 단단히 하고 시간을 정해놓고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제 딴에는 부지런히 지팡이를 짚고 올라가도 1시간 40분이나 걸렸습니다. 전 매일같이 30초씩 줄이면서 올라간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그대로 실행에 옮겼습니다. 하루는 집에서 구인사로, 또 하루는 구인사에서 집으로 생강과 구기자 다린 약을 병에 넣어 짊어지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매일 기도표를 한번씩 연장하며 고행과 정진을 해나갔습니다. 저의 생활은 이런 식으로 되풀이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대조사님 탄신 며칠 전이었는데, 접수실 근처를 지나다가 얼핏 눈에 띄는 광경이 있었습니다. 새로 오는 신도인 모양인데 벽에 모셔져 있는 사진을 보고 두 손을 합장하여 공손히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궁금한 마음으로 주위에 있던 보살에게 물어보았더니 그 보살 대답이 ‘그 스님이 상월원각 대조사님입니다’라고 일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얼른 가서 참배를 드리고 보니 지난번 꿈에 나타나서 속병을 낫게 해주셨던 바로 그 스님이 분명했습니다. 저는 다시 일어나서 마음 속 깊이 우러나는 감사의 표시와 예를 올렸습니다.
저녁 공양을 마치고 기도실에 가보니 흡연에 관한 비디오 테이프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담당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부처님은 담배 냄새를 제일 싫어하신다’고 했습니다. 전 충격을 받았습니다. 정말 큰일 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때만 해도 담배를 벗삼아 하루 두 갑씩 피우는 애연가였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나서 비록 완전히 끊지는 못했지만 담배를 하루 한 갑으로 줄이게 되었습니다.
며칠이 지나고 대조사님 탄신일이었습니다. 낮에는 적멸보궁에 올라가는 신도들이 워낙 많아서 저같은 불구자는 여러 사람에게 걸리적거리기만 할 것 같아 해질 무렵에 올라갔습니다. 보궁에 참배를 마치고 구봉팔문 전망대까지 넘어가 큰 소나무 밑에서 잠시 쉬었습니다. 담배생각이 나 금연인 줄 알지만 주위에 아무도 없고 해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습니다. 두어 모금 빨고 있는데 갑자기 바위 뒤에서 ‘무엇하는 짓이냐’ 하는 고함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열서너 살쯤 돼 보이는 남자아이가 반말로 호통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갑작스런 소년의 출현과 반말 충고에 당황한 나는 벌벌 떨면서 담배를 얼른 땅에다 버리고 지팡이로 끈 다음 재빨리 소년 쪽으로 눈을 보냈습니다. 아무리 잘못을 저질렀어도 손자뻘 밖에 안되는 아이가 너무 괘씸하여 도리어 이번엔 내가 혼내줄 참으로 쳐다봤으나 소년은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내려가는 길을 보아도 아무 흔적이 없었습니다.
이러는 사이 해가 지고 밤이 다가오는 듯했습니다. 내려오는 길에 첫번째 휴지통에 담배와 라이터를 버리고 정신없이 기도실까지 왔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상했습니다. 소년의 갑작스런 출현과 눈깜짝할 사이의 사라짐은 나에게 어떤 교시를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이왕 안피우려 했으니 영원히 담배를 끊자며 이같은 저의 다짐을 부처님 앞에 가서 밝혔습니다. 삼배를 드린 후 저는 부처님께 약속했습니다.
‘부처님, 저는 목영태이옵니다. 이 시간 이후부터 영원히 담배를 안피우겠습니다. 부처님 전에 맹세합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저의 악업과 죄를 다 벗겨주시고 건강하게 해주실 것을 약속하여 주시옵소서.’
전 이후로 담배를 완전히 끊었습니다. 간혹 친구들이 하나 건네주면 손이 나가다가도 깜짝 놀라며 부처님과의 약속이 생각이 나 손을 거두어들입니다. 하루 두 갑을 피우던 골초가 완전히 금연가로 돌아섰으니 친구들이 의아해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1990년 3월 1일 보궁에 다녀온 횟수가 70회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그날은 기분도 매우 상쾌하고 전신이 가벼운 느낌이 들면서 무겁던 다리가 가벼워졌습니다. 그날부터는 지팡이를 내던지고 맨몸으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매일같이 보궁에 다녀와서 삼보당, 법당, 관음전에 차례대로 인사드리고 식당에 가서 공양하고 자리에 와서 쉬었습니다. 이것이 제 하루 일과였습니다.
이젠 집에 갈 생각도 없어지고 계속 구인사에 있고 싶은 심정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복용해야 할 약을 가지러 가야 했기 때문에 며칠 동안은 집에 다녀와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기도 중에 관음주송을 외우면서 언뜻 잠이 들게 되었습니다. 비구니스님 세 분이 제게로 오더니 제 허리에 약을 바르고 허리밴드를 매어주는데 한 분은 꼭 붙들고 두 분은 꼭 조이며 매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통증이 없어져서 좋아하며 깨어보니 입으로는 관음주송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화장실에 다녀올까 하고 일어나는데 허리에서 우두둑 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런 이후로 허리의 통증을 전혀 느끼지 않았습니다. 전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기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제일 먼저 저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집사람에게 공중전화를 걸었습니다. 아내에게 그간 있었던 자초지종을 다 얘기했습니다. 아내는 저 이상으로 뛸듯이 기뻐하며 그 꿈 속의 비구니스님들은 필시 관세음보살님이니 지금 당장 세면장에 가서 세수 깨끗이 하고 관음전에 가서 복전함에 조금이라도 돈을 넣고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아내의 말대로 했습니다. 그리곤 제 자리로 돌아와서 보궁에 올라간 횟수를 세어보니 이미 백번이 넘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절망적이었던 저의 병도 말끔히 나았다는 사실도 그때 깨닫게 되었습니다. 진실로 그 지긋지긋한 병고에서 해방이 된 것이었습니다.
그뒤 1990년 하안거 한달간 수도 때였습니다. 저는 처음으로 안거에 동참했습니다. 3층 기도실보다 더 질서있게 기도를 하는 종도들의 자세에 신뢰가 갔고 더욱 진지해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3층에 있을 때보다 30분을 더 늘려 기도했습니다.
어느날 안거 도중에 또 다시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논이 보이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 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논은 바다같이 커 보였습니다. 논에서는 일꾼들 4,5십명이 일을 하고 있고 거기에서 저는 모줄을 당기며 놓아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저쪽을 보니 아내가 밥 광주리를 이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찰라에 깨어보니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도 중에 전화로 아내에게 사연을 이야기하니 아내는 먼저 ‘기도 열심히 하세요’ 하며 ‘모를 심었으니까 잡초도 뽑고 김도 매어주고 해야 나중에 쌀이 되어야 먹을 것 아닙니까’ 하고 설명까지 곁들였습니다. 그후로는 더더욱 열심히 기도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겨울에 동안거 기도까지 마치고 나니 이제는 보궁에 다녀온 횟수가 이백번이나 되었습니다. 안거수도를 할 때 가끔씩 꿈에서는 처음에 모를 심고 다음에는 호미로 매어주며 다음에는 낫으로 베어 소로 실어들였습니다. 다음에는 정미소에 실어다 도정해서 쌀 가마니를 우리집 대청에 포개어 쌓아놓았습니다. 이리하여 보궁에 올라간 횟수가 3백번, 4백번, 5백번, 6백번, 마침내 1994년 하안거를 마칠 때까지 6백22번을 다녀왔습니다.
1993년 하안거 때는 여섯번째 소원으로 불법에 대해서 알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열반하신 2대 종정스님 전에 친견할 때에 말씀올리니 불교대학을 가도록 권하시었습니다. 그리하여 1993년 동안거 때 구인사 사무실 앞에 붙여진 금강불교대학 입학원서 제출안내의 광고문을 보고 접수하여 오늘의 저에 이르고 있습니다.
본인은 하도 심한 고초와 통증에 지쳐서 세상을 하직하려고 약도 준비하고 날짜도 잡아놓았던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마침 이 글을 쓰면서 그 고통스럽고 애절했던 옛일이 주마등처럼 떠올라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겠습니다. 아마도 이 눈물은 그때의 시련과 그 시련을 딛고 일어서게끔 가호를 내려주신 부처님과 조사스님의 고마움이 합쳐진 것일 터입니다. 저는 이제 건강한 남자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부처님께서 새 생명을 주지 않았다면 어찌 저같이 미천한 사람이 오늘날 고귀한 교수님들의 강의를 듣고 훌륭하신 스님들을 가까이서 친견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얼마 전엔 금강불교대 법우들과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하도 기분이 좋아서 학교 앞에 내려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여보, 고맙소’ 하고 인사하니 아내는 웃으면서 ‘무엇이 그리 고맙다고 하세요’ 반문했습니다. 저는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신 덕에 나 같은 사람이 고귀한 사람들과 같이 소풍을 다녀왔소.”
주위사람들이 파안대소했습니다.
어느날 봄이었습니다. 학교에 가려는데 아내가 학교 교실에 모셔져 있는 부처님 전에 꽃공양을 올리라고 돈을 주었습니다. 저는 학교 근처 화원에 들려 정성껏 꽃을 골라 부처님 전에 올리면서 아내의 정성에 새삼스럽게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죽어서도 이 은혜를 잊지 않고 보답하리라 생각했습니다. 또한 구인사에 큰 은혜를 입었으니 이를 갚기 위해 열심히 기도정진하며 여생을 살아갈 것을 다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