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 9:8-17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글에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것에 집착하여야 합니다. 자연의 모든 것들은 어려운 것을 극복해야 자신의 고유함을 지닐 수 있습니다. 고독한 것은 어렵기 때문에 좋은 것입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어렵기 때문에 좋은 것입니다. 아마도 내가 알기에 그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고 다른 모든 행위는 그 준비 과정에 불과합니다. 젊은이들은 모든 일에 초보자이기 때문에 아직 제대로 사랑할 줄을 모릅니다. 그러나 배워야 합니다. 모든 존재를 바쳐 외롭고 수줍고 두근대는 가슴으로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사랑은 초기 단계에서는 다른 사람과의 합일, 조화가 아닙니다. 사랑은 우선 홀로 성숙해지고 나서 자기 스스로를 위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하나의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저도 인생에 있어서 가장 힘든 것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쉽지 않습니다. 사랑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배우는 것입니다. 무엇을 통하여 사랑을 배울 수 있을까요? 그것은 사랑다운 사랑을 한 존재를 통하여 가능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보여주신 사랑의 한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 하나님과 모든 육체를 가진 땅의 모든 생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영원한 언약이란 영원한 약속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그리고 세상과 영원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이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입니다.
노아 시대 때에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할 정도로 악이 만연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홍수로 이 세상을 심판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생명들은 다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악을 보시고 진노하셔서 물로 심판하셨습니다. 심판은 하나님의 진노의 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심판은 하나님의 사랑의 한 표현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벌을 주지 않습니다. 남의 자녀가 죄를 짓는다고 제가 화가 나거나 그에게 벌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의 자녀가 잘못을 하면 저는 아이를 혼냅니다. 혼내는 것, 잘못에 대하여 벌을 주는 것은 상대방에 대하여 관심이 있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관심이 없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상대방이 무엇을 하든지 간에 저는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신 것도 이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심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심판은 구원으로 이어집니다. 즉 죄에서 돌이켜 새로운 삶을 살라고 하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비록 노아 시대에는 노아와 방주에 있는 생명들에게만 새로운 기회를 주었지만,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안에서 모든 자에게 새로운 기회, second chance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second chance를 주신 것은 오늘 우리가 읽었던 본문의 말씀, 즉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생물들과 맺은 영원한 언약에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생물들에게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비록 그들이 죄를 짓는다 할지라도 다시는 이 세상을 물로 다 제거해버리는 일을 행치 않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단지 노아에게만 한 약속이 아니었습니다. 노아와 그 이후에 이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대대로 주어진 ‘영원한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 약속이 우리들에게까지 미치는 완전한 것이라는 것은, 본문 가운데 언약이라는 단어인 ‘베리트’가 7회 사용되는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7은 완전수입니다. 하나님께서 7일 동안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던 것처럼, 7이란 완전하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것입니다. 본문은 언약이라는 단어를 7회 사용함으로, 하나님께서 노아와 노아의 후손들과 맺은 언약이 완전하며,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확실히 하셨습니다.
이 영원한 약속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됩니다. 히브리서 9장 1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예수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히브리서 13장 2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영원히 심판하지 않겠다는 영원한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들에게 주어진 영원한 약속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관계없이, 하나님께서는 예수 안에서 부르심을 입은 자,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절대로 심판이 임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받을 죄에 대한 심판을 대신 받으심으로, 이제 예수님을 믿으면 절대로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해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들에게 보여준 하나님의 마음이요, 사랑입니다.
‘마더 테레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랑이 참되기 위해서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사랑은 상처를 받아야 하며 자기 자신을 비워 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십자가상에서 대가를 치렀습니다.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결국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우리가 받아야 모든 상처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러한 상처를 통하여 우리를 향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심판을 넘어선 구원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영국의 위대한 여왕인 빅토리아에게는 9남매의 자녀가 있었는데, 엘리스는 그 중 둘째딸이었습니다. 엘리스 공주에게는 무척이나 사랑하는 네 살배기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스의 아들이 매우 무서운 전염병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아들은 엘리스 공주로부터 격리 당하였고, 공주는 아들에게 가까이 갈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에 대한 염려로 공주는 매우 안타까웠고, 정말이지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공주가 아들을 보러 가면 곧 무서운 전염병에 걸릴 것이고, 공주의 생명까지 위험해질 수가 있기 때문에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하루는 엘리스 공주가 먼 구석에 숨어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아들이 간호사에게 힘없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왜 우리 엄마는 이제 나에게 키스를 해주지 않지요?”
그 말은 엘리스 공주의 마음을 찢어놓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엘리스 공주의 뺨에는 눈물이 흘렀고 곧 아들을 향해 달려가 있는 힘을 다하여 아들을 끌어안고는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습니다. 결국 수주 후에 엘리스 공주 역시 아들과 함께 죽고 말았습니다. 엘리스 공주는 자녀에 대한 사랑으로 그 아들과 함께 죽었지만,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하시고 자신만 죽으신 분이 계십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랑을 받은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돌아가실 정도로, 사랑을 받는 자입니다. 그러한 사랑을 받는 자에게는 더 이상 심판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이러한 축복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통하여 받은 이 사랑이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힘입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힘입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만나는 어려움 속에서도 한두 번 넘어질 수는 있지만 완전히 포기하지 않고 일어설 수 있게 만드는 힘입니다.
어떤 한 세계적인 부자의 아들이 탄 경비행기가 사막에 추락했습니다. 그 비행기는 사막을 지나다 강한 모래바람을 만나 그만 사고가 난 것이었습니다. 아들의 추락사고로 충격을 받은 아버지는 눈앞이 캄캄했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수색대를 조직해 사막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들의 생존 여부조차 알 수가 없었습니다. 며칠 동안의 끈질긴 수색 끝에 마침내 비행기의 추락지점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비행기의 잔해와 조종사의 시체만 있을 뿐, 아들의 시신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실망하지 않고 아들을 계속 찾아 나섰습니다. 아들이 살아 있다고 믿은 아버지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제발, 제 아들을 지켜주옵소서.”
기도를 마친 뒤, 아버지는 수백만 장의 전단지를 사막에 뿌리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뭐라고 써야 할지 마땅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사막에서의 생존법? 아니야!’
한참을 고심하던 아버지는 결국 전단지에 적은 글은 단 한 마디였습니다. “아들아, 사랑한다!”
아버지의 그 외마디 절규는 사막 곳곳에 뿌려졌습니다. 마침내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탈진해 가던 아들이 그 전단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아버지가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니 반드시 나를 찾아내실 것이다!” 전단지를 통해 아버지의 사랑을 확인한 아들은 이를 악물고 버텼습니다. 사막 한가운데에서 아들을 찾는 수색작업은 고되고 험난했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살아 있다고 확신하고 수색작업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며칠 뒤, 수색대는 사막 한가운데서 아버지가 보낸 전단지를 손에 꼬옥 쥐고 거친 숨을 헐떡이며 쓰러져 있는 아들을 발견했습니다. 아버지의 깊은 사랑이 아들을 구한 것이었습니다. 그 사랑이 사막의 열기와 배고픔을 이겨낼 수 있는 희망과 살아야만 하는 이유를 일깨워주었던 것이었습니다.
무지개를 볼 때마다, 사시사철의 변화를 경험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하신 영원한 약속, 다시는 이 세상에 물로 심판이 없을 것이라는 약속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영원한 약속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주신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 예수님, 그 예수님을 통하여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 절대 포기하지 않으시고 나의 손을 잡고 계신 그 아버지의 사랑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들아, 딸아, 내가 너를 사랑한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오늘 하루도, 이번 한 주도, 아니 우리의 평생의 삶을, 비록 그 삶에 사막의 열기와 배고픔과 같은 것이 있을지라도 넉넉히 이기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