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현실주의 작품들은 격렬함보다는 고요한 침묵과 신비 속에 잠겨 있었던 것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은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경이로움을 추구했고, 한계 지워진 비루한 현실이 극복되어 구원되기를 바란 '신 없는 사도'이기도 했다. 초현실주의는 전쟁과 건설 양면에서 모던 프로젝트가 열렬히 추구되던 금세기 초반에, 그 원천과 기법들, 정치적인 면에서 모더니즘에 대항하였다. 비록 초현실주의자들의 기법이 모더니즘의 풍부한 원천이 되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필자가 의미하는 종교성이란 현실의 제도적이고 역사적인 종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추상적인 종교성을 의미한다. |
|
이브 탕기, [외계], 1929년. |
이것은 무한을 지향하는 비합리적인 것을 총괄하는 것이며, 현실의 일상성을 파괴하고, 보다 근원적인 힘과 하나가 되려는 원초적인 '우주종교'를 의미한다.
그것은 상징적 폭력을 통해 일상의 틈을 벌려 성스러움, 즉 경이를 방출하는 일종의 현대판 신비주의 면모를 가지며, 근대세계의 한가운데서 역동적인 길항 작용을 하였다.
예술사 내적으로도 신비주의적 삶과 근대예술의 전통은 유사한 양상을 띄었다. 바타이유는 신성한 모든 것은 예술적이며, 예술적인 모든 것은 신성한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그에 의하면 종교란 예술적인 재질이 내는 하나의 효과에 불과하다. '예술에 속하는 않는 것은 종교에서도 아무 것도 아니며, 예술가를 인류에, 인류를 우주에 연결시키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바타이유).
꿈에 대한 프로이트의 이론을 분석하고 난 뒤, 앙드레 브르통은 깨어있는 상태의 상대적인 빈약함을 꿈의 풍요로움과 대치시켰다.
그는 '꿈과 현실이라는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상반되는 두 가지 상태가 향후에는 초현실이라는 일종의 절대적 현실 안에서 화합되리라'고 믿고 있었다.
브르통에게 현실이란 '생명과 죽음, 현실과 환상, 과거와 미래, 전달가능과 전달불능, 높이와 깊이가 모순으로 보이기를 그치는 마음의 어떤 지점'이다. 바타이유는 거기에다 선과 악, 그리고 고통과 기쁨을 덧붙였다. 바타이유에게 격렬한 예술, 그리고 신비주의적 체험의 격렬함은 같은 지점을 가리킨다.
칼 융도 '의식과 무의식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하여 하나의 전체를 이룬다'고 언급한 바 있다.
초현실주의는 인격을 분리시키는 강신술(降神術)과는 달리 오직 인격을 결합시키려고 한다. 그것은 현실과 의식을 동시에 확장하는 것을 말한다.
무한히 확장된 현실, 즉 절대에의 갈증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을 사로잡았던 강박관념이다. 그들은 무한과 하나가 되기 위하여 의식의 중심을 없애버리려고 하였으며, 영감만을 믿고, 전일(全一)에 도달하려 하고, 옛날의 신학처럼 신의 사도가 되려고 하였다.
초현실주의는 자아와 우주의 힘들 사이의 합일을 추구하는 운동이며, 그 합일의 가능성을 신비주의에서 발견한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신비술과 연금술까지 관심의 폭을 넓혔다. 심령학과 영매주의는 자동기술이란 창작방법을 낳았고, 신비주의는 초현실주의의 일원론적 세계관에 한 몫을 했다.
초현실주의 시인 로베르 데스노스는 '나는 신을 믿지 않지만, 절대적 존재를 느낀다'고 말했으며, 앙또냉 아르또 역시 절대에 대한 동경과 일치하는 예술을 추구했다. 아르또에게 예술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물질화 된 것과 가능성 사이의 관계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예술가의 경우 자기가 해탈에 성공한다해도 표현하고 싶은 어떤 것을 표현하지 못할 때 그의 신비는 침묵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초현실주의는 '예술이 표현 불가능한 것을 표현하는 언어'임을 강조하였다. 이점에서 초현실주의는 낭만주의적 계보를 가진다. 양자에게 예술은 오성을 통해서 형이상학적 확실성에 도달하려는 진정한 경험이며, '예술은 절대적 현실'(노발리스)이었다.
즉 그들에게 예술이란 인식할 수 없는 것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앙드레 브르통에 의해 다듬어진 초현실주의는 비종교적인 형이상학이며, 동시에 영적 성격을 지니지 않은 신비주의였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이것으로 한계 지워진 현실세계에 대항하려 하였다.
물론 초현실주의는 무신론적 입장을 취했다. 단지 그들은 과학과 실증주의가 파악할 수 없는 것을 밝혀보고자 했다. 그들은 신비주의에서 말하는 '성스러운 것', '신적인 것'을 '미지의 것', '가능한 것'으로 바꾸어 버렸다.
초현실은 초월적이고 초자연적이기보다는 현실 내적인 것으로서, 현실을 초월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현실을 보다 깊고 뚜렷하게 자각할 수 있는 비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초현실주의의 본질은 경이로움의 추구이다. 경이는 현실에 대한 거부이자, 그 거부 덕택에 무너진 현실의 경계선 너머의 새로운 세계와의 관계맺음이다.
초현실적 경이에 대해서는 이미 아뽈리네르의 선언문 [새 정신](1917)에서 예시된 바 있다. 그는 '새로운 정신은 경이의 정신과 경탄하는 마음에 중요성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경향과 다르다. 그것은 일상적인 평범한 사실에서 출발할 수 있다. 즉 시인에게는 떨어져 있는 한 장의 손수건조차도 우주 전체를 들어올릴 수 있는 지렛대가 될 수 있다'고 말하였다.
|
뒤를 이어 앙드레 브르통은 경이로움의 초월적 능력인 운동과 자유의 기능을 강조하였다. 그에게 초현실적인 경이란 '정신의 가장 위대한 자유이자, 우리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은총인 상상력의 힘에 의해 열리는 세계'였다. 초현실주의는 랭보의 견자le voyant 시학에서 힘입은 바 크다. 랭보는 초자연의 세계를 폭로할 수 있는 일종의 마술적 힘으로서의 예술을 추구했다. 그는 영혼의 떨림을 위해서 모든 감각을 전면적으로 착란 시키는 오랜 고행을 감수하였다. 경이로움이란 일상적인 것들 배후에 무엇인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깨우치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것이 충일한 다른 세계로 가고 싶은 인간의 의지이다. |
피에르 로이, [어느 자연주의자의 서재], 1928년. |
현실을 초월하고자 하는 의지는 초현실주의로 하여금 유사(類似)종교적인 면모를 띄게 하였다. 앙드레 브르통은 '나의 존재를 이세상의 가소로운 조건에 맞추지 않으리라'고 하면서, 이러한 '회의주의 정신은 구질서의 파괴에 이바지할 뿐만 아니라, 인류의 부활을 준비할 사명을 짊어지게 된다'고 하였다. 초현실주의는 다다처럼 단지 '세계의 해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새로운 확장, '세계의 재창조'와 결부된다.
그들은 신비를 탐구함으로서 인간과 우주에 대한 인식을 변혁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초현실주의자들이 살아가는 부조리하고 비루한 이 세상은 무한을 지향하는 이들에게 터무니없이 우스꽝스러웠던 것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종교와 신앙을 포기한 채 축이 빠져나간 그 시대의 도덕적 위기를 해결하고자 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이 무신론적이었던 것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가 종식되어야 할뿐 아니라, 신에 의한 인간의 착취 또한 종식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계관을 바꿈으로서 세계자체에 변혁을 초래한다는 구세주적인 충동을 지니고 있었기에 즉시 정치적인 복음주의에 빠지기도 했다.
초현실주의 시인 피에르 르베르디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반대하고, 삶을 위한 예술, 전체성과 보편성을 위한 예술'을 내세운다. 초현실주의자에게 예술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생의 신비, 비밀, 놀라움을 창조하기 위한 수단이자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야기하는 것이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단순한 장인이나 심미주의자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신들린 사람'이나 '도박꾼'이 되고자 했다. 이와 같이 초현실주의는 단순한 예술사조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존재의 거룩한 상태나 우주의 신비를 찾기 위한 형이상학적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초현실주의자들이 예술의 한 유파이기를 거부했기에, 그들의 선구자는 원시시대까지도 소급될 수도 있겠지만 근대로 한정시킨다면, 그것은 랭보의 반항으로부터 터져 나오기 시작한 신비주의였다.
19세기말부터 예술가의 활동을 신비적인 초자연 세계로 파고 들어가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생겨났다. 랭보는 인간의 조건에 반항한 초현실주의의 선구자로서 앙드레 브르통은 랭보에 대해 '그는 수천 세대의 인류가 피할 수 없었던 의식적 혼란을 아주 생생하게 표현했다'고 하였다.
랭보는 단일한 실재 속에 자신을 녹아들게 하고, 우주 에너지의 직접적인 표현인 태양에서 나오는 색채들과 광명 속으로 흩어지고 싶어했다. 그가 추구한 견자(見者)는 자신의 노력의 극점에 도달해서 자기가 얻는 세계합일의 의식 속에 행복을 달성하는 자이다.
랭보는 '나는 또 하나의 타자이다....나는 잠재적인 신이다!' 라고 외쳤다. 그가 찬연한 환각 속에서 보았던 우주를 시어로 표현한 작품들이 바로 [계시Illminations]이다. '계시'는 바로 딴 세상에 대한 그의 객관적인 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랭보는 현실을 표현하는 일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여 육체의 눈에 보이지 않는 새로운 세상에 이르는 길, 미지의 실재들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현실을 넘어 절대를 관조하는 일은 예술적인 계시와 동일한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랭보는 인간사회의 범속 보다는 차라리 절대적 무(無)를 더 좋아하였다. 무의 추구에서 시작해서 예술가는 절대의 진정한 본질을 이해하게 된다고 하였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 다시 올라가기 위해서는 보이는 감각적 사물을 떠나야 했다. 랭보는 '사물은 순수 관념의 단순한 외관일 뿐이다'라고 하면서, '진흙탕에 박힌 담의 발치에 누워 환상을 보려고 조각난 눈을 감는다'고 읊었다.
해탈을 향한 이러한 노력은 모든 시대의 신비주의자들이 추구했고 동양사람들은 그것을 극한까지 실천했다. 랭보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위에서 '예술가들은 다른 사람이 쓰러진 바로 그 지평선에서 다시 시작할 것이다'고 하였다.
랭보가 '시인의 왕'이라고 극찬한 보들레르는 이원론적 세계인식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도, 상응을 통해 두 세계를 화해시키려는 경향을 보여줌으로서 초현실주의 정신의 밑거름이 되었다.
2) 초현실주의의 원천과 기법들
초현실주의의 원천은 꿈과 무의식, 원시주의와 정신병, 섹슈얼리티와 오리엔탈리즘 등을 들 수 있다. 베르그송의 비유에 의하면 우리의 관념은 물위에 떠있는 낙엽과도 같은 것이다. 초현실주의 선언문 중에는 '인간들에게 그들의 사고의 나약성과 또 그들이 얼마나 불안정하고 허황된 대지 위에 그들의 흔들거리는 집을 구축했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는 대목이 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방대한 욕망의 바다인 무의식의 세계가 살아 움직이고 있는 우주에는 원초적 카오스가 내재해 있다고 믿었다.
종교학자 엘리아데에 의하면 심층으로 침잠 하는 것은 20세기 초반 시대정신의 일부분을 형성했다. 예컨대 프로이트는 심층 무의식에 대한 탐색기술을 발전시켰고, 융은 그보다 더 깊이 내려가 이른바 '집단 무의식'까지 관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믿었다.
특히 프로이트는 인간의 행위, 사고, 생활을 정말로 움직이게 하는 미지의 영역을 탐구했다.
융도 우리의 근대정신이 우리의 합리적인 의식이라는 고층건물 아래에 아직도 인류의 살아있는 전과거가 있음을 망각하고 있다고 하면서 이 하층부분이 없다면 우리의 정신은 사상누각이라고 하였다. 융이 정의한 '집단무의식', '원시적인 이미지들', 혹은 '원형'의 저장고는 인간이면 누구나 내재적인 본성으로 가지고 있다고 한다. 융에게 원형이란 신화의 구성요소임과 동시에 무의식의 자연발생적, 개인적 소산으로서 전지구상에서 볼 수 있는 집합적 성격을 가진 형식이나 형상을 말한다. 이미 지난 세기에 훌륭한 심리학자이기도 했던 니이체는 '잠과 꿈 가운데 우리는 인류가 일찍이 거쳐온 과제를 다시 한번 경험하며, 꿈을 통하여 우리는 인류문화의 초기 상태로 되돌아간다'고 말한 바 있다. |
|
르네 마그리트, [이미지의 배반], 1928-29년 |
초현실주의의 두 번째 원천은 원시주의와 정신병이다. 1947년 파리에서 조직된 초현실주의 전시회는 원시적 마법에 영감을 받은 일련의 실험을 선보였다.
어린이와 동물, 그리고 미개인과 정신병자는 초현실주의자에게 유사점을 가진 것으로 보여진다. 앙드레 브르통은 '초현실주의에 빠진 사람은 열광적으로 자신의 유년시절의 가장 멋진 부분을 다시 만나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
그 이전에도 프로이트는 정신병의 심리적 원인으로서 유아기적 체험을 강조했다. 정신병은 '유아기적 영혼의 선사 시대적 실현욕망'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또한 각 개인은 전문명사를 상징적으로 부활시킨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세계관의 발달단계를 개인의 리비도 발달단계와 비교했다.
시간적으로 또 내용적으로 애니미즘적 단계는 나르시시즘에 해당되고, 종교적 단계는 부모에 대한 애착을 특징으로 하는 대상선택의 단계에 해당하며, 마지막으로 과학적 단계는 쾌감원칙을 포기하고 현실에 적응하면서 외계에서 그 대상을 찾는 성숙한 상태와 해당한다.
프로이트의 후반기 저서 [토템과 금기]의 부제는 '야만인들과 노이로제 환자들의 정신생활에 나타나는 몇몇 일치점들'이다. 노이로제 환자들은 대체로 심리적, 그리고 역사적인 유아기 현상의 단편을 보여준다.
노이로제 증상을 결정짓는 것은 체험의 현실이 아니라, 사유의 현실이기에 그들은 별난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집중적으로 사고된 것, 열정적으로 상상된 것만이 영향력이 있지, 이러한 것들이 외부의 현실과 일치하는가 아닌가는 부차적인 것이다.
또한 노이로제는 사적이고 성적 출처를 가진다. 그리하여 초현실주의자들은 심리-병리학적인 예술을 탐구한다. 여기에는 영매에 의한 그림이나 정신질환자들의 그림이 포함되는데, 이런 그림들에서 보여지는 격렬함은 현실을 변형시키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이 그대로 표출되어 있다.
초현실주의 연구소의 책임자였던 앙토냉 아르토는 '우리는 초현실주의의 적극적인 추종자보다는 신경질환에 시달리는 동료들을 더욱 필요로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미 다다이스트인 트리스탄 짜라는 '예술은 스튜디오에서 태어난 히스테리'--물론 그는 예술을 경멸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한 것이지만--라고 했으며, 초현실주의자들은 히스테리를 병리학의 분야에서 탈출시켜 뛰어난 표현수단으로 보았다.
앙드레 브르통은 '아름다움은 발작적인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전혀 아름다운 것이 아닐 것이다'라고 하였다. 실제로 초현실주의 회화에서는 종종 보행 불능증이나 광장 공포증같은 정신장애 등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초현실주의의 세 번째 원천은 성적인 것과 동양적인 것인데, 양자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성적 충동이 사회적 충동보다 강한 것은 노이로제의 특성이다. 성은 자연발생적인 것, 본능적인 것, 그리고 직관적인 것을 환기시켰고, 또한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기에 특히 중요했다.
앙드레 브트통에게 '사랑의 행위는 그림이나 시와 똑같이 사랑에 몸을 바치는 사람 편에서 혼수상태로 들어가기를'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동양과 그 가치에 대한 찬미는 [초현실주의 혁명]지 3호를 거의 차지했다 .
동양은 현자의 조국일 뿐 아니라, 동시에 야만의 힘을 간직하기에 중요했다. 초현실주의의 선구자 랭보는 기독교가 만들어낸 서구문명에 대한 극심한 혐오를 품고, '이 모든 것은 원초적인 조국인 동양의 사상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인가'라고 하면서, '나 자신에 대한 개인주의적 개념은 서구세계에서 2천년 이래로 겪어온 예술적 실패의 바닥에 깔려있다'고 보았다.
랭보에게 요가의 실천은 자신을 육체에서 떨어져 나오게 하며, 개인적 의식을 버리게 하였다. 그것은 그를 '신에 이르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동양의 지혜는 그것을 피상적으로 받아들인 서구인들을 다만 동물적인 수면으로 역행시킬 수 있다는 점, 승화는커녕 동물적인 단순성과 지적인 무(無)로 이끌려 갈 수 있다는 점도 지적되었다.
초현실주의와 종교성의 접점은 특히 예술가의 수동성를 강조한 부분에서 두드러진다.
랭보와 로트레아몽의 후계자 초현실주의 시인들은 창조의 비결을 완전 무결한 무관심의 단계인 꿈에서 찾는다. 초현실주의자들에게 완벽은 바로 태만이었다.
그러므로 의지적인 노력은 추방되어야 했다. 앙드레 브르통은 '우리는 우리의 작품 속에서 수많은 메아리를 담는 말없는 그릇, 보잘것없는 녹음장치가 된다'고 하면서 스스로 여과시키는 노력을 하기보다는 자신을 하잘 것 없는 기록도구로 간주했다.
예컨대 자동 기술법은 말하는 능력이 아니라, 어두운 무의식의 속삭임을 수동적으로 듣는 능력이다. 그런데 심층의 전언은 인류의 공동재산이므로 로트레아몽이 예견했던 것, 즉 '시는 단 한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다'라는 주장이 호소력 있는 것이다. 이들은 예술이 익명성을 띤 집합적인 작품이기를 바랬다.
그럼으로서 초현실주의 예술가는 자신을 한민족의 기억이 보존되어 있는 그릇으로 생각하였다. 초현실주의는 낭만파의 자아중심주의적 사상 및 영웅적인 개성을 내세우지 않고, 경험을 흡수하는 자신을 강조하였는데, 그들의 원천인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통찰력들이 근대적 자아의 자율성을 이미 탈신비화 시켰기 때문이었다.
3) 감각의 혼란
초현실주의자들에게 예술은 정성 들여 꾸며 만들기보다는 영매를 통해 우연의 경이를 방출하는데 있다. 예술가는 단순히 대자연에 사로잡힌 자이거나 자연의 정복자가 아니라, 자연 그 자체로 간주되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서구문화에는 오직 한 영역만이 애니미즘처럼 사유전능의 영역이 유지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술의 영역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술의 마술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예술가를 마술가와 비교하곤 하였던 것이다. '샤먼으로서의 예술가'는 요셉 보이스의 발명품이기 이전에 먼 옛날엔 사실이었고, 20세기에 들어와서는 경이에 사로잡힌 초현실주의자의 면모이기도 했다.
종교학자 엘리아데에 의하면 장차 샤먼이 될 사람은 환자들의 병, 즉 해로운 폭력에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 그는 병을 이겨내기 위해 보통사람들보다 더 오랫동안 완전하게 그 병에 빠져들어야 한다.
그는 종종 정신분열이 될 정도의 총체적인 위기를 맞는데, 이 같은 심리적 혼돈은 '우주창생 이전의 혼돈'에 해당된다.
물론 영매에 사로잡혀 단순히 자신이 수동적 매개자가 되려는 충동엔 위험이 있다. 그래서 루이 아라공은 '사고가 텅 비면 너무 쉽사리 환상에 휩싸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의 조작능력을 잃고 오히려 그것들의 영지가 되어버린다'고 경고하였다.
|
초현실주의자들의 가장 대표적인 기법은 자동 기술법이다. 자동 기술법이란 1920년에 앙드레 브르통이 필립 수뽀와 함께 [자장]이란 작품에서 시도한 방식으로 이성의 통제를 받지 않고 작가가 자신을 외부세계와 완전히 분리시킨 상태에서 생겨나는 모든 형태의 사고를 가능한 빨리 기술하는 방법이다. 자동기술은 완전히 무관심한 정신 상태에서 구술되는 것이기에 일종의 주문같은 효과를 나타낸다. 초현실주의의 몽환적인 경험들과 유희들은 심령술의 규칙을 따름으로서 이성에 의해 행사되는 모든 통제를 벗어나고자 했다. 그들은 이성적인 지식인이 아니라, 백치를 추구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의 사물화 된 단어들은 자동기술에 의해 제작된 그림과 함께 외적 현실이 심리적 현실로 대체되고 쾌락원칙이 화폭을 지배했다. |
앙드레 마쏭, [무녀], 1943년; 자동 기술법이 적용된 그림. |
초현실주의자들은 랭보처럼 정신의 혼란을 신성한 것으로 보기에 이르렀다. 랭보는 '시인은 오랜 시간을 통하여 방대하고 철저하게 계산된 모든 감각의 착란을 통해 자신을 견자로 만든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앙드레 브르통이 지적했듯이, 자동기술은 모든 사람에게 이해될 수 있어야 하며, 최면이란 도구를 벗어 던져야만 했다. 초현실주의는 현실을 확장시키고 그 확장된 현실을 예술에 담기 위하여,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다의적인 상징을 사용하였다.
브르통은 생이란 해독되기를 기다리는 암호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보들레르의 '상징의 숲'이라는 표현을 좋아했다.
질베르 뒤랑에 의하면 상징이란 단어는 희랍어 'symballein'에서 유래하는데, 그것은 구체적이고 육체적인 부분과 영적 질서의 실재, 이 두 부분을 연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상징을 통하여 자신의 특수한 상황을 벗어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것에로 자신을 열어 젖힐 수 있다. 이를 통해 인간은 세계를 형이상학적으로 파악한다.
초현실주의는 넓은 의미의 상징주의에 속하는 예술이기에 상징의 특성을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질베르 뒤랑에 의하면 상징의 세계에서 모든 사물은 상응성과 동질성을 지닌 폐쇄적 체계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둘째, 상징은 개념적인 어휘가 아직 형성되어 있지 않았을 때의 사고로서, 언어나 문자의 경우에는 시간적 계기에 따라 연속적으로 표현되는 반면에, 상징은 한꺼번에 동시적으로 여러 세부적 사실을 표현한다.
이로서 상징은 일상언어나 과학적 언어들이 나타내주지 못하는 실재의 무수한 틈을 메워준다. 셋째, 상징은 물리적 경험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실재의 구조를 드러낸다.
마지막으로 상징은 직접적인 현실의 세계에 직면하여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부여받는다. 초현실주의 미술의 주요기법인 데페이즈망과 오브제가 효과적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풍부한 상징적 장치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이때 인류의 가장 오랜 상징인 신화와 종교가 빠질 수 없다. 병치란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본래 병치란 예술적인 이미지의 기저를 이루는 것으로서, 존슨은 형이상학적 착상을 '가장 이질적인 사상들이 폭력에 의하여 함께 묶여진 것'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루이 아라공은 대상에 난데없는 가상의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단순한 놀이가 아닌 철학적 태도라고 본다.
그는 '철학적 인식은 자료들 사이에 새로운 관계, 비 현실을 수립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동일성의 원칙을 고발하고, 이미지의 예측할 수 없는 충격에 의해 인간정신을 원초적 혼돈으로 돌려보낸다.
피에르 르베르디는 '이미지는 상호간 거리가 먼 두 개의 현실을 접근시키고자 하는데서 생긴다.
접근된 두 개의 현실의 관계가 보다 멀고 적절한 것일수록 이미지는 더욱 강렬해지며 더 한층 감동적인 힘과 시적 현실성을 띄게될 것'이라고 하였다.
앙드레 브르통은 '두 용어의 우연적인 접근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영상의 빛이 솟아오른다'고 하였다.
꼴라주는 원래의 사물이 보도록 예정된 장소와 판이하게 다른 곳에서 그것을 보게 만든다.
그래서 루이 아라공은 꼴라주야말로 일상의 진부함과 완고한 사상을 공격할 수 있는 무기라고 생각했다.
그는 [파리의 농부]에서 '초현실주의라는 이름을 지닌 악덕은 정신을 멍멍하게 만드는 이미지를 무절제하게 정열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물론 영상에 대한 이질적이고도 무질서한 느낌은 유용성에 바탕을 둔 우리의 습관적인 분류방식에 기인한다.
꼴라주의 가장 효과적인 예들은 희미하게나마 이성적인 관련을 지닌 것이 대부분이었다. 오브제는 꼴라주보다 더욱 전형적인 초현실주의적 창작물이다.
옛날에도 오브제 애호가는 있었으나 그것은 골동품이나 유물에 국한된 것이었다.
초현실주의적 오브제는 의식의 간섭 없이 형성되는 '꿈만을 감지한 물체들'로서 이는 실용주의를 뒤엎고, 사실에만 신경을 쓰는 관찰자를 불안하게 만들고, 현실감각을 교란시키며 신비로운 것에 대한 일별을 허용해주는 것이다.
초현실주의의 수법인 '객관적 우연'은 세계가 한순간 인간의 갈망에 응답하는 현상이며, 그리하여 세계와 인간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지는 지점이다. 욕망은 꿈속에서의 질문에 대한 답을 낮 동안의 현실생활 속에서 찾는다. 욕망은 '객관적인 우연'을 통해서 외적인 인과율과 내적인 궁극성을 만나게 한다. |
|
T.Taidemuseo, [dada cupboard], 1962 |
즉 그곳에서는 '재봉틀과 우산이 수술대 위에서 만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곤 한다. 초현실주의와 일상적 삶을 연관지어 볼 때 가장 위대한 작품은 아마도 우체부 페르디낭 쉬발의 궁전일 것이다.
똑같은 거리를 영원히 돌아 다녀야 하는 운명에 넌더리가 났던 그는 '탈출의 돌'이라는 이름을 붙인 돌로 동화 속 궁전 같은 건축물을 지었다. 그것은 30년 동안 반복된 수고의 결실이었다. 생활고에 시달렸던 많은 작가들을 낮(현실)에 질식당하는 정신을 밤마다 무한한 낭만의 세계로 끌고 가 불가사의한 아름다움에 잠기게 하였다.
예컨대 르네 마그리트는 낮에는 생계를 위해 벽지에 '표준적인' 장미를 그렸지만, 밤에 그린 캔버스 위의 장미는 불가사의하게 피어올랐던 것이다.
4) 초현실주의 작가들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초현실주의 화가는 광대 기질이 있었던 살바도르 달리였다. 달리는 1930년에 편집광적 비판방법paranoia critic을 주장하였다. 초현실주의의 목표중의 하나로, 정신착란에 뒤지지 않는 정신병 중의 하나인 편집광paranoia은 현실과 상상의 종합을 보여준다.
달리에 의하면 편집광이란 마음속에 붙박혀 떠나지 않는 관념을 마치 현실적인 것처럼 타인에게도 적용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편집광은 내부세계로 피신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외부세계의 모든 현상들을 망상적인 그의 생각으로 체계화시킨다.
편집광에게 있어서 세계는 자기가 주연을 맡고 있는 연극이라고 볼 수 있다. 달리는 사실적으로 치밀하게 그린 일상적 사물에다가 아주 의외의 이미지를 이중적으로 투사하여 환상적이고 잠재 의식적인 세계를 창조하였다.
달리가 사실주의 수법을 사용한 것은 비합리적인 세계가 외부세계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명확함과 일관성, 지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이는 또한 혼돈을 조직화하고, 이를 통해 현실세계를 완전히 불신하게 만드는 수법이기도 하였다.
아르프는 우연을 창작에 도입한다. 그는 자기가 그린 그림을 찢은 그림을 주워 모아 그것들을 바닥에 주워든 우연한 순서에 따라 다시 조합한다. 아르프가 꿈꾼 또 하나의 스타일은 유연한 형체로서 포크인 동시에 손, 가슴인 동시에 꽃봉오리의 형상을 이룬다. 그것은 시각적 연금술이라고 할만하다.
호앙 미로의 풍경 속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물들도 무언가 다른 물체로 변형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앙드레 브르통에 의하면 미로는 결합 불가능한 것을 결합시키고 단절 불가능한 것을 단절시켰다.
앙드레 마쏭은 자동기술법을 이용한 그림을 그렸고, 막스 에른스트는 프로타주와 꼴라주를 사용했다. 프로타주에 의해 드러난 형태가 작업자의 무의식과 공명할 때 그것은 마치 객관적인 우연처럼 주관적, 객관적 요소의 융합을 이루고 초현실적 신비를 떠오르게 할 수 있었다.
초현실적 경이는 꼴라주에 의한 우연한 결합에 의해 가능하였다.
에른스트에게 꼴라주는 부르조아적인 리얼리티의 빈틈을 통하여 완전한 상상력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게 하였다. 또한 피카비아는 꼴라주를 통해 그가 '경련 하는 색채의 울부짖음'이라고 부르던 것을 찾아내려고 하였다.
|
초현실주의 미술의 기능중의 하나가 인간의 원시적 공포감과 경외심을 일깨우는 것이었다면 피카소는 그 선구자였다. 초현실주의는 원시종족들에 대한 관심을 통해서 미술을 생활에 유용한 주술이라는 본연의 기능과 다시 관련시키고자 하였다. 가장 심오했던 초현실주의 화가는 르네 마그리트였다. 그는 어눌한 회화 기법을 수단으로 '시각의 변증법'을 창조했다. 마그리트는 특히 문을 이용해서 두 차원의 세계를 결합한다. 이때 문은 현실의 두 공간의 통로가 아니라, 현실과 미지의 세계, 혹은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 사이의 통로가 되어 두 차원의 놀이를 가능하게 해준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두 차원 또는 존재 사이의 이행은 종교의 가장 기본적인 체험중의 하나이다. 또한 마그리트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 말과 사물 사이의 간극을 통해 일상생활의 낯익은 사물들을 생소한 것으로 만든다. 마그리트는 사물의 신비로운 변형을 통해 시각적 변증법을 창조했다. |
막스 에른스트, [의인상], 1929년. |
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상상적인 이미지로 가득 차 있는 내 그림에서 나오는 시는 알 수 없는 것, 알려지지 않은 것을 알려진 것으로 회복시켜'주며, 자신의 그림을 하나의 물체로서 기억의 방아쇠를 당겨주는 역할을 한다고 하였다. 그렇기에 그 비밀을 인도해 주었던 사물의 리얼리티를 떠나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였다. 이것이 그의 작품에 생생한 긴장감을 부여하는 이유일 것이다.
마그리트처럼 드 기리코도 수수께끼에 가득 찬 침묵의 화가였다. 기리코의 그림의 침묵과 고요함 속에는 앞으로 도래할 사건이 야기 시킬 경이와 호기심이 내포되어 있다. 그는 자신의 수수께끼같은 그림에서 공간은 전경과 원경사이를 애매하게 교란시킨다.
무대 세트 같은 연극적 공간은 서로 어울릴 수 없는 물체들이 밝은 빛 아래 조우함으로서, 텅 빈 공간과 함께 고요하면서도 극적인 요소를 함축한다.
그의 신비로운 화면을 종교적 상징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우선 드 기리코의 텅 빈 광장들은 고대의 아고라agora이기도 하며, 그곳은 종교적 희생물이 죽었다고 간주되는 성스러운 장소이다.
이 상징적인 장소로부터 공간이 조직화되고 역사적인 시간성이 창설되어 인간의 첫 사회생활이 나타난다. 드 기리코는 또한 소재들에 기념비적인 스케일을 부여함으로서 성스럽게 만든다.
미묘한 분위기는 공간을 비움으로서도 이루어진다. 이것은 종말론적인 파국의 이미지, 또는 낭만적 폐허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혼란스럽기는 하지만 무한을 상징하는 그의 원근법은 영원하고도 궁극적인 실재를 떠오르게 한다.
드 기리코의 그림에 잘 나타나는 끝없이 똑같은 열주들의 반복 역시 무한의 경험, 성스러움을 표현한다.
무한을 동경했던 루이 아라공도 '지상의 가로수가 있는 길들을 끝까지 걸어가면서, 나를 안내하고 있는 구체적인 형태들 아래에 있는 무한의 모습을 찾아내는 작업을 시작했다' 드 기리코의 작품의 광선의 출처는 명확하지가 않다.
그러나 빛에 대한 관심은 예로부터 정신의 원천이며, 신적 조명, 계시의 순간이었다.
드 기리코의 회화에서 사물과 인간은 빛 속에 조용히 얼어붙어 있다. 그곳은 희박한 공기의 세계로서 날씨조차 변하지 않는 세계이다.
이것은 브르통의 싯귀 '거대한 은빛 휴지(休止)를 보게 될 것이다'를 떠오르게 한다.
예술을 종교적 차원으로까지 고양시킨 모더니스트 보들레르는 '영원한 현재'라는 숭고한 시공간적 경험을 예술적 체험으로 보편화 시켰다. '완벽하게 고요한 어떤 위대한 움직임에 의해 야기되는 엄숙하고 희귀한 감각이, 나를 공포마저 섞인 환희로 채워주었던 일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요컨대 나를 둘러 싼 찬란한 아름다움 덕분으로 나 자신과 우주가 완벽하게 조화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시간도 분도 초도 사라진 무한의 시간, 모든 시간 개념이 사라진 도취의 순간이 내가 영혼의 예술적 상태에서 경험한 예외적 행복의 순간이었다....우리의 존재 중에는 시간과 공간이 더욱 깊어지고 존재 감이 무한하게 확대되는 순간들이 있다.
이 같은 예외적인 순간들이 곧 시적인 순간이다.' (보들레르의 산문시 [파리의 우울] 중에서) 인간의 숙명인 시간과 공간의 제한으로부터 벗어나 무한성과 영원성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은 보들레르의 작품세계를 관통한다.
또한 드 기리코에게 부동적이고 고요하게 존재하는 제도기, 비스켓, 바나나 같은 오브제들은 주물 숭배적인 태도를 반영하는데, 그는 이런 일상적 사물들을 '생전 처음 대면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려고 하였다.
특히 현대인간의 물화와 불안을 드러내는 불가사의한 마네킹들은 들뢰즈가 말한 '욕망 하는 기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짧은 기간동안 드 기리코는 '형이상학적 회화운동'을 통해 사물들 단순하고 위엄 있게 묘사함으로서 사물의 수수께끼 같은 감상을 드러냈다. 이는 발터 벤야민--그는 영화를 염두에 두고 한말이지만--이 언급한 '사물의 무의식'을 드러내는 것이다.
5) 반(反)근대적 혁명
초현실주의는 근대세계의 한가운데서 그들 문명이 창조한 것들의 이면의 진실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들의 반모더니즘은 단지 '예술을 위한 예술', 또는 형식주의만을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모리스 나도는 '이 문명의 종말, 그 자체가 초현실적인 것이다'라고 외친 바 있다. 그들은 거의 종교적인 열정을 가지고 모더니티에 대항했는데, 이는 초현실주의 정치학에도 잘 나타난다.
애초에 초현실주의자들로 하여금 혁명에 복무하도록 한 이유와 후에 혁명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동일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이 모순적인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잡지 [초현실주의 혁명]은 1930년에 [혁명을 위한 초현실주의]로 제목이 바뀌었다. 그들은 이를 통해 무정부주의적 개인주의의 위험을 극복하려 하였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의식의 혁명이 사회혁명 없이는 불가능함을 깨닫는다. 물론 그 역도 사실이다. '삶을 바꾸어야 한다'는 랭보의 명제는 '세계를 개혁해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명제와 결합되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더 이상 현실을 피하지 않고, 그들의 열망에 따라 변화시키려고 하였다. 이들은 마치 과격한 파괴 이후의 세계의 창조 같은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제시하고자 하였다.
물질에 대한 정신의 우위라는 신비적 관념론에서 출발한 초현실주의는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모든 것의 혁명을 지향하는 유물론에 도달하였다.
로버트 휴즈는 초현실주의자들이 예술에 의해 사회의 구조가 변할 수 있었다고 믿은 예술사 최후의 사람들이었다고 씁쓸하게 회고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의 예술과 현실을 초월한 형이상학적인 비전들은 마찬가지로 이상주의적이었던 유물론과 잠시 만나게 했던 것이다.
말 그대로 근본적인 것은 급진적이기 마련이다. 종교적 형이상학은 현상을 영원한 것과 관련시키는 초월성을 지닌다. 종교는 존재의 완전성을 추구하기에 모든 것을 파편화, 사물화 시키는 현대사회에 대항하게 한다.
또한 종교적 황홀 상태에는 파괴적인 사회적 효과가 수반되는 일이 있는데, 특히 전통적 권위와 사회체제가 붕괴되는 시기에 있어서 새로운 이상적 질서를 세우고자 하는 충동은 종교적 근원을 가지고 있음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즉 원초적 혼돈 이후에 우주창생의 질서가 도래한다는 기대는 범종교적인 것이다. 앙드레 브르통은 정신적 측면에서는 신비주의적 탐구의 길과 행동적 측면에서는 공산주의의 전투적 성향을 조화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초현실주의는 곧 마법과 혁명으로 양분되었다.
초현실주의는 불가지론적 입장을 취하면서 상징주의와 가까워지고 이성적 분석에 뿌리를 둔 공산주의와 차이를 보인다. 브르통은 '명료성이란 계시의 가장 큰 적'이라고 비난한 바 있다. 초현실주의는 공산당의 우상타파주의에 호응했으나 그들의 결정론은 거부한 것이다.
한편 초현실주의자들의 '탈선'--공산주의로, 또는 공산주의로부터--은 근대성에 대한 그들의 관점을 예시한다.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자신들의 경향을 반근대적인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들은 유용성만을 목적으로 진보된 지식이 서구문명을 자멸의 방향으로 몰고 갔음을 깨닫고 현대인간에게 적합한 마술적 세계를 제공하려고 하였다.
초현실주의자들은 근대의 실용주의와 구체적 물질적 활동을 경멸하였으며, 의식적 존재Cogito로서의 근대적 인간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보았다. 초현실주의자들은 근대과학 자체가 세계를 비정신화 함으로서 가능했기에, 과학적 인식에 대해서도 회의하였다.
이에 대해 루이 아라공은 '과학은 너무 느리다. 기도는 질주하고 광명은 포효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아라공은 과학이 추리적이지만 기적의 소재를 주지 못하기에 현대사회에서 초현실주의의 존재 의의가 있다고 보았다.
초현실주의자들은 모더니스트들처럼 인간해방을 원하고 있었지만, 기술이나 근대성 따위에 정초하지 않았고 오히려 '타락한 승려'처럼 보였다.
결국 초현실주의는 그 자체가 근대의 과학주의의 산물인 정신분석과 혁명을 초월하여, 해방된 세계로 진군할 그들의 횃불은 오직 예술뿐이라고 믿는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우상타파의 몸짓은 다시 우상화되었고, 금기를 위반하려는 충동은 퇴폐적 탐미주의로 이끌려 가고 말았다.
이선영
이화여자 대학교 생물학과,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
19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으로 등단하여 미술평론가로 활동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