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넷째주 일요일 (10/22)
조남선 교수님을 모시고 강원도와 경기도 일부를 답사하고자 합니다.
세(勢)로써 용(龍)을 보고
형(形)으로 혈(穴)을 본다.
세(勢)란 신(神)이 나타난 것이요
형(形)이란 정(精)이 나타난 것이다.
세(勢)가 아니면 용(龍)의 신(神)을 볼 수 없다.
형(形)이 아니면 혈(穴)의 정(精)을 살필 수 없다.
고로 조종(祖宗)은 용발지세(聳拔之勢)가 필요하고
낙맥(落脈)은 강하지세(降下之勢)가 필하고
출신(出身)은 병장지세(屛障之勢)가 필요하고
과협(過頰)은 둔질지세(?跌之勢)가 필요하고
행도(行道)는 기복곡절지세(起伏曲折之勢)가 필요하고
전신(轉身)은 후탱전추지세(後撑前趨之勢)가 필요하다.
또 용(踊), 약(躍), 분(奔), 등(騰)은 말이 달리는 것과 같은 기세이고
급(級), 평(平), 포(鋪)는 물결의 파(波)와 같은 기세이다.
이러한 기세가 있으면 진용(眞龍)이요, 이러한 세가 없으면 가룡(假龍)이 되고
비록 산맥이 있어도 황량한 죽은 나무들 무리에 불과하고
비록 혈(穴)의 형태가 있어도 필시 가혈(假穴)이다. 이것이 정한 이치다.
세(勢)를 살피는 법(法)은 먼저 높은 곳에 올라보라.
그 다음에 용(龍)을 따라와서 재차 좌우를 살펴라.
대면(對面)하고 있으면 용신이 드러난곳(眞神顯露之處)은 달려와서 멈추어 모인 곳이다.
자연 가히 득하고 깨달을 수 있다.
형(形)을 살피는 법(法)을 보자.
마땅히 원(圓), 편(偏), 곡(曲), 직(直), 방(方), 요(凹)의 육체(六體)를 판단하고
그 와(窩), 겸(鉗), 유(乳), 돌(突)의 4격(四格)을 연구하고
재차 승금(乘金), 상수(相水), 혈토(穴土), 인목(印木)의 법(法)으로 증거한다.
즉 혈정(穴情)은 자연 숨기 어렵다.
윗 글과 같이 세(勢)와 형(形)을 살펴서
용의 위이와 기복을 살피고 결인속기처의 송영사를 확인하고,
와, 겸, 유, 돌의 어느곳에 속하는지
또 혈증은 있는지를 공부할 좋은 기회가 되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조선의 마지막 황후인 명성황후의 생가를 방문해서 양택의 발복도 공부하실 수
있겠습니다.
회원여러분의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합니다.
일시 : 2006년 10월 22일 일요일 08:30
장소 : 협회 사무실 (대한지적공사건물)
지하철 탄방역에서 내려서 2번출구로 오시면 됩니다.
회비 : 삼만원 (여성회원 이만원)
준비물 : 간편한 복장. 나경패철. 필기구.
대전정통풍수지리연구회 제6차 답사자료 (2006.10.22)
1. 원천석묘(강원도 원주시 행구동)
무학대사가 묘 터를 잡아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요즘도 풍수가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평범하지 않은 자리이다. 벌허리 명당(蜂腰穴)으로, 벌처럼 자손이 많이 생기는 터다. 묏자리는 마치 말안장을 얹고 올라앉은 것처럼(騎龍穴) 오목하게 들어갔고, 양옆으로 경사가 심한 땅이다. 길게 뻗어나간 묏자리 끝에 허름한 무덤 하나가 눈에 띈다. 땅의 기운을 받기 위해 몰래 써놓은 무덤처럼 보이지만 원천석의 부인 묘라 한다.
운곡은 정몽주나 이색처럼 정치적으로 화려한 이력을 남긴 것도, 길재처럼 사림의 종주로 추앙받을 만큼 똑똑한 제자를 남기지도 못했다.
무덤 앞의 ‘고려국자진사원천석지묘(高麗國子進士元天錫之墓)’라는 묘비명에서 보듯 그의 벼슬은 ‘진사’에 머물렀다. 그럼에도 원천석이 치악산만큼이나 우뚝한 존재가 된 것은 그의 지조와 그의 시(詩)에서 파생된 힘 때문이다. 그는 한시 1144수를 남겼는데, 퇴계는 “이 시가 곧 역사다”라고 평했다.
2. 이기(李墍) 묘소
1522(중종 17년)∼1600(선조33년).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가의(可依), 호는 송와(松窩). 지란(之蘭)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시서에 능하였고, 생원시에 이어 1555년(명종 10)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1565년 장령, 1567년 수찬을 역임한 뒤 전한이 되어 편수관으로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뒤 1571년(선조 4) 직제학이 되었으며, 이듬해 좌승지에 올랐으나 노모가 원주에서 병으로 눕자 이를 봉양하기 위하여 사직을 청하였다.
그러자 노모를 봉양하도록 1573년에는 강원도관찰사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중앙으로 돌아와 우승지가 되었다. 1578년 다시 양주목사로 내려갔는데, 이때 선정을 베풀었다는 사실이 경기감사에 의하여 조정에 보고 되었다.
1583년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부제학을 역임한 뒤 장흥부사를 거쳐 1591년 대사간이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의 여섯 째 아들인 순화군 보(順和君)를 보필하면서 강원도에 내려가 의병을 모집하였다.
1595년 다시 부제학이 되고, 이듬해 대사간·대사헌·동지중추부사를 차례로 역임한 뒤 이조판서에 올랐다.
1597년 다시 지중추부사·대사헌·지돈녕부사·예조판서 등을 차례로 역임한 뒤 1599년 다시 대사헌이 되고, 이어 예조판서·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지돈녕부사를 끝으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죽은 뒤 1603년에 2품 이상 재신을 청백리로 뽑는 데 녹선되었고, 그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가 대사헌으로 있을 때 종로 네거리를 지나는데 말이 너무 말라 가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그러나 그는 개의하지 않고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나아갔는데, 그 뒤에 사람들이 말이 피곤하여 땅에 주저앉는 것을 보면 ‘대사헌의 말’이라고 일컬었다 한다. 그는 이와 같이 청빈하여 한사(寒士)나 다름없이 벼슬생활을 하였다. 시호는 장정(莊貞)이다.
3. 선조(宣祖) 繼妃 인목대비 生父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 묘소(와혈)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으로, 본관은 연안(延安), 자(字)는 공언(恭彦)이다. 1585년(선조 1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594년 의금부도사(義禁莩事)·공조좌랑(工曹佐郞)을 거쳐 1596년 연천현감(漣川縣監)을 지냈다. 1597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한 뒤에는 1601년 정언(正言)·헌납(獻納)·지평(持平)을 역임하였다가 이조좌랑(吏曹佐郞)이 되었다. 1602년 둘째 딸이 선조(宣祖)의 계비(繼妃)로 뽑힘으로써 돈녕도정(敦寧都正)이 되었고, 왕비(王妃)로 책정되자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으로 봉(封)해졌다. 임진왜란 때는 선조를 호종(扈從)하고 의주(義州)로 가다가 중도에서 병으로 남았다가 의병을 모집하여 평양성 탈환에 기여하였다. 1613년 이이첨(李爾瞻) 등에 의해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소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추대하려 했다는 공격을 받아 서소문 밖 자택에서 사약을 받았으며, 1616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면서 다시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아들 셋도 화(禍)를 입었고 부인과 어린 손자 천석(天錫)과 군석(君錫)만이 화(禍)를 모면하여 부인은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었으며, 천석과 군석은 숨어살았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뒤에 관작(官爵)이 복구되고 왕명으로 사당이 세워졌다.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의민(懿愍)이다. 묘소는 1624년(인조 2) 양주(楊州)에서 지금의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능촌으로 이장되었고, 김제남을 제향하는 의민공사우(懿愍公祠宇)와 신도비(神道碑)가 남아있다. 신도비 비문(碑文)은 신흠(申欽)이 글을 짓고, 심열(沈悅)이 글씨를 썼으며, 전액(篆額)은 김상용(金尙容)이 썼다.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능촌마을에 있다.
4. 여주 신륵사
경기도 여주군(驪州郡) 북내면(北內面) 천송리(川松里) 봉미산(鳳尾山) 기슭에 있는 절. 신라 진평왕 때 원효(元曉)가 창건했다고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신륵이라고 이름짓게 된 것은 신기한 미륵(彌勒) 또는 나옹왕사(瀨翁王師)가 신기한 굴레로 용마(龍馬)를 막았다는 전설에 의한 것이라고 전한다. 고려 때부터 벽절이라고도 하였다. 1376년(우왕 2) 조당(祖堂)·승당(僧堂) 등 많은 건물이 신축되거나 중수되었고, 나옹의 진영(眞影)을 모시는 선각진당(禪覺眞堂)도 건립되었다. 82년에는 대장각(大藏閣) 안에 이색과 나옹의 제자들이 발원해 만든 대장경을 봉안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배불정책으로 크게 위축되었으나 1469년(예종 1) 영릉(英陵;세종의 능)이 여주로 이장된 뒤부터 왕실에서 신륵사를 영릉의 원찰(願刹)로 삼을 것을 결정하였다. 72년(성종 3) 대규모 중창불사가 이루어졌고 이듬해 보은사(報恩寺)로 개칭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폐허가 되었으나 1671년(현종 12) 계헌(戒軒)이 중건하였고, 1702년(숙종 28) 위학(偉學)과 천심(天心) 등이 중수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금당(金堂)인 극락보전(極樂寶殿)을 중심으로 하여 조사당(祖師堂)·명부전·종각 등이 있다. 이 밖에도 보물 제225호로 지정된 대리석재의 다층석탑, 보물 제230호의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 등이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 2 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5. 명성황후(明成皇后)생가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250-1에 있다.
조선 고종황제의 비 명성황후가 태어나 황후로 책봉되던 16세까지 살던 집으로 숙종 13년(1687년)에 건립되었다.
명성황후는 여흥부원군 민치록의 딸로 철종 2년(1851년)에 나서 16세때 고종의 비로 책봉된 후 고종 32년(1895년) 을미사변으로 일인(日人)에 의해 시해될 때까지 개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다. 건립 당시에는 행랑채, 사랑채가 있었으나 없어졌고, 현재 남아 있는 안채는 1975년과 1976년에 중수한 것이다.
이곳에는 1904년 건립된 명성황후탄강구리비(明成皇后誕降舊里碑) 가 있는데 명성황후탄강구리란 글씨는 고종의 친필이라고 전한다. 또 이 비가 서 있는 자리는 바로 명성황후가 글공부하던 방의 자리라고 한다.
6.인현왕후 아버지 민유중(閔維重, 1630-1687)묘소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산26에 있다.
숙종의 장인으로 본관은 여흥(驪興), 시호는 문정(文貞), 자는 지숙(持叔), 호는 둔촌(屯村)이다.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의 생부요 명성황후의 6대조가 된다.
우암 송시열과 동춘 송준길의 문인으로 효종때 문과에 급제 승문원(承文院)을 거쳐 예문관(藝文館)에 보직되었다. 숙종 7년 (1681) 딸이 숙종의 계비(인현왕후)가 되자 영돈령부사가 되어 여양부원군에 봉해졌다. 영의정에 추증(追贈)되었다. 붕당기에 노론의 중추인물이었다.